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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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이 가까워 오면 부모님 선산을 찾아 나서는 일이 퇴임 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왔다. 모레가 설날이니 몸을 깨끗하게 씻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대중탕을 찾았는데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들도 나처럼 몸도 마음도 깨끗하게 하고 경건한 자세로 새해를 맞으려는 자세일 것이다. 다음 날 전남 담양으로 내려가려고 새벽부터 서둘렀다. 날씨도 따뜻하여 운전하기도 괜찮을 것 같았다.
집에서 출발하여 6시간이 지나 고향 마을 초입에 있는 유둔재에 도착하였다. 이 유둔재는 1960년 중반부터 산골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버스로 이동시켜 주는 굽이굽이 고갯길로 만들어져서 여름 장마나 눈이 내린 겨울이면 두절되었던 길이었다. 지금은 유둔재 터널로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중학교에 다닐 때 이 유둔재는 토요일 오후나 월요일 이른 아침이면 즐거움과 아쉬움을 남겨 준 고개였다. 광주로 진학한 나는 하숙생이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가족을 만나려고 버스로 정곡리까지 와서 이 고개를 도보로 넘어야 했고, 월요일이면 가족과 헤어져 등교하려고 이 고개를 넘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그런데 이 고개는 6·25 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곳이라는 소문을 많이 들었던 고개라서 넘나들기에 무서운 곳이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는 낮이라 고개를 넘는 데 무서움을 덜 느꼈지만 월요일 새벽이면 이 고개를 넘어가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버스 정류장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어머니는 나에게 청운의 꿈을 품고 하루하루를 시작할 수 있는 동기 부여를 해 주신 것 같다.
이 유둔재를 넘어 마을로 가는 길에는 평양다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 다리는 조선 시대 평양감사가 지나가다가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쉬어 갔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다. 지금은 시멘트 다리로 되어 있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 다녔던 이 다리는 이러했다. 포근해진 날씨에 우리들은 봄을 알리는 냇가 버들강아지를 찾아 나섰다. 평양 돌다리로 흐르는 남천 냇물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항상 햇살이 냇물에 번지면서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냇물에 노니는 송사리와 피라미를 잡기도 하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돌다리를 건넜던 정겨운 돌다리였다.
유둔재 마을로 들어서니 언제나 그렇듯이 대나무 숲과 커다란 당산나무가 나를 맞아 준다. 사철 푸른 대나무 숲은 나에게 활기찬 생활을 심어 주었고, 당산나무는 나의 지친 마음과 여러 생각과 고민을 잠시 내려놓게 하는 듯 무언으로 맞아 주었다. 특히 당산나무 수령은 400여 년으로 부부처럼 두 그루가 나란히 있었으나 한국전쟁 무렵에 화재로 시름시름하다가 고사하고 지금은 한 그루만 보호수로 지정받아 무성하게 가지를 뻗으며 자라고 있어 마을과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지켜 주는 수호자로 남아 있다.
유둔재 마을 뒤편에는 구멍바위가 있고, 오래된 오리나무 옆에는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정자와 넓고 평평한 큰돌〔盤石〕이 있어 예부터 먼 길을 가는 나그네들과 장사꾼들이 즐겨 쉬어 가던 곳으로 ‘오리터’ 또는 ‘가남정’이라 하였는데 지금은 새롭게 정자를 지어 놓았다. 마을 들머리의 한사리 논에는 언제부터 세웠는지를 알 수 없는 수구막이 역할의 선돌〔立石〕두 개가 세워져 있고, 몇 해 전에는 시멘트 기둥 위에 오리를 깎아 올린 솟대도 세워져 있다. 선돌의 크기는 높이가 150cm와 160cm의 크기를 가지고 있으며 솟대의 높이는 500cm로 가죽나무를 사용하여 마을 사람들의 솜씨로 오리를 깎아 올렸다. 1960년까지만 하여도 마을 앞 평양다리 어귀에는 울창한 귀목나무(느티나무)와 단풍나무 군락지인 수구막이(혈암마을의 바위가 보이지 않아야 한다) 역할의 숲이 있었으나 지금은 ‘무릉도원’이라는 음식집 주변으로 몇 그루 남아 있고 귀농주택을 짓고 사는 귀농인이 있다.
요즈음 들어 번거로울 정도로 발생하는 교통사고와 마을로 들어오는 모든 재앙을 막아내기 위하여 마을 회관 옆에 솟대를 복원하여 세운 이후부터는 신기하게도 마을에는 이렇다 할 큰 사고나 사건이 없이 평온하여졌다. 언제나 유둔재 마을은 후미진 곳에 가려져 있지만 조상 대대로 이어 온 논과 밭 그리고 내〔川〕와 산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이 건강하게 남아 있다. 이 마을 어귀에 이르면 쌍렬각이 있는데 김영식의 아내 밀양 박씨 효자비와 김남옥의 아내 열녀비를 그들의 후손들이 잘 관리하고 있어 마을 앞을 지나는 길손들에게 효심을 일깨워 주고 있다. 나도 선산을 찾아 예를 갖추었다.
유둔재 마을 골목에서 마중 나온 형수님을 뵈었다. 형수님은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던 초가집으로 시집을 왔다. 시어머니 슬하에서 가사를 배웠다. 겨울이면 친구들이 볕이 잘 드는 우리 집 담벼락에 모여들곤 했다. 이러한 때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우리들에게 주셨던 시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형수님은 길 가는 사람에게도 후한 인심을 늘 베풀어 주었다. 형수님은 내 손을 잡으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하루하루 늙어 가는 형수님, 그 손에서 느끼는 따뜻함과 그 모습을 지켜보시는 형님의 눈에서 정을 느꼈다. 갑자기 어머님의 모습이 형수님과 형님의 얼굴과 겹쳐졌다.
고향 유둔재 마을은 그리움을 가득 안겨 주는 곳이다. 그리움은 힘이 된다고 하였다. 그리움 없이 어찌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돌아보면 그리움 아닌 게 없다.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 마음속에 떠오른 곳이 유둔재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