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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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주방에서 잔걸음 치는 날이다. 집안을 치우고 시장을 미리 봐두었어도 아침부터 분주하다. 먼저 타놓은 녹두는 물에 불리고 보온 밥솥에는 엿기름물을 걸러 고슬고슬한 밥에 섞어서 삭인다. 밤도 까서 물에 담그고 제기도 닦아야 하고, 시아버지님 제사상 차릴 일들로 하루가 꽉 차 있다.
2대 독자와 결혼한 나는 제사는 모른다고 손사래 쳐 봐야 어차피 제사를 물려받아야 하는 외며느리였다. 일 년에 기제사 다섯 번에 설날과 추석을 더하여 일곱 번 오늘같이 제수를 마련한다. 시집온 해부터 시어머님께 제사상 차리기를 전수해 사십 년을 넘게 해 온 일이다.
전을 부치다가 언뜻 주변에서 내게 하는 말들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난다. 그녀들은 제사 횟수를 듣기만 해도 어려움이 그려진다고 훈수에 훈수를 얹는다.
‘남편한테 한날 한꺼번에 지내자고 해.’
‘제사를 대행해 주는 곳에 위임시키면 잘 지내 준다더라.’
‘제삿날 산소에 가서 잔 올리기로 대신하기도 한대.’
남의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더니 그녀들은 남의 제사를 통째로 이리 지내라 저리 해도 된다 말들이 많다.
살아계신 부모님도 제대로 모시기 어려운 세상에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을 그리 잘 모시려 드느냐. 시대의 흐름에 편승할 필요도 있다고, 융통성이 있어야 몸이 고생을 덜 한다고 사서 걱정들이다. 나를 위한다고 들은 대로 전하려다 까딱하면 열 오르겠다.
그저 웃어 넘긴다. 제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기회가 없던지 힘들고 번거롭다는 생각만으로 하는 말일 것이라고 간주한다. 나도 세상의 변화에 따라 제사에 관해서도 세대 차나 인식 차가 생겼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다고 해서 내 자리에서 내가 해 온, 그리고 해야 할 도리를 도중에 그만둔다거나 어디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나. 내가 조금 힘들면 자손들 모두 조상님을 향하는 마음이 편할 텐데.
시어머니 말씀대로 녹두전이 어려우면 밀가루로 전을 부치고 도라지가 없다면 무나물로 대신하면 된다. 정말 힘든 상황이고 우환이 있다면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예외 규정도 있지 않은가. 하던 대로 형편대로 정성을 다할 뿐이다.
내가 제사라는 의식을 바라보는 의의나 중요성도 제사를 중요시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저마다 바삐 사느라 가족끼리 밥 한 끼를 같이 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자손들이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기일만이라도 함께 한마음으로 한 분 한 분을 오롯이 추억하며 추모의 정을 나눌 수 있다는 점이 소중한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아이들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한다.
덧붙여 내가 제사를 제대로 모시려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소임을 다한 뒤에 느끼게 되는 충만한 안도감이다. 가족이 겪을 수도 있는 세찬 바람과 거친 물살을 방어할 진지나 방어망을 구축해 놓은 듯 편안해지는, 안심이 되는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점이다.
공경하여 받드는 만큼 조상님들의 영혼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들 후손을 굽어살펴 주실 거라는 믿음이다. 종교인들이 신을 믿고 받드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들이 교회나 절에 나가 어려움을 토로하거나 회개하며 의지하고 위안을 얻는 행위와 같은 심리일 것이다.
조상님이 제사상을 받으러 오신다고 여기며 정성을 다하는 제사라는 행위는 결국 받드는 이들 자신의 편안한 마음을 위한 정성스럽고 참된 의식이 아닐까.
오늘 밤에도 내가 정성스레 준비한 제사상 앞에서 남편과 나, 시누이 부부와 그 자녀들이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 뒤 시아버님께 절을 할 것이다. 그리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얼굴 마주하고 음식을 나눌 것이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라고 관습이나 풍속까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여기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제사를 모시는 우리의 아름다운 풍습이 언제까지 온전하게 이어질지 모를 일이다.
어찌하든 나는 내 손으로 제사상을 차릴 수 있을 때까지 박씨 집안 제사를 소신껏 이어 나갈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