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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신태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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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동네에서 가까운 산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세 갈래 길이 있다. 그중 두 길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산으로 가는 조붓한 자드락길로 이어지지만, 다른 한 길은 산비탈 아래 드문드문 집과 밭들이 펼쳐지는 산책길이다. 밭둑에 서 있는 비파나무에서 비파가 노랗게 익어 가면 몇 개를 따먹으며 걷기도 한다. 나는 이 세 갈래 길 중 두 길은 익숙하게 여러 번 다녔지만 가운데 길은 여태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산길 초입에 ‘웅산농원’이라는 자그마한 녹슨 철제 간판 때문이었다.
계곡의 물소리와 새들의 노랫소리와 비탈에 선 나무들의 계절 따라 변하는 색이 아름답다. 가을에는 바스락대는 마른 나뭇잎 밟으며 걷는 오솔길은 호젓하게 들꽃 향기 그윽한 숲이다. 좁은 숲길에서 마주 오는 사람과 마주치면 잠시 기다려 주기도 한다. 지난밤 비라도 세차게 내린 날이면 계곡에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요란하다. 그러나 그 옆길은 농원의 간판 때문인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이다. 선뜻 혼자서 그 숲으로 갈 생각을 못 한다. 이렇게 세 갈래 길을 두고 왜 그 길만 가지 않는 것일까. 저 언덕으로 오르면 어떤 꽃과 나무들이 있는지 혹은 고라니 같은 야생의 짐승이 사람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도망치는지 상상만 한다. 가보지 않은 길은 늘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반하지만 아쉬움도 있다.
세상의 길은 수없이 많다. 거대한 지구의 땅덩이에는 무수히 많은 길들이 촘촘히 이어져 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낯선 길을 걷는다는 것은 이 세계와의 벅찬 만남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든, 걸어서 가든 그 길을 오갔던 사람들은 기억과 기록의 흔적을 남긴다. 한 번도 그 길을 간 적 없는 사람들은 그 지역에 대한 독특한 풍경의 감동을 영영 모른 채 살아간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길은 어디에도 있다. 가다가 잘못 들어선 길이 있는가 하면 물살을 가르며 강을 건너야 하는 위험도 따른다. 또는 숲에서 길을 잃어 캄캄한 숲 어디 바위 아래에서 웅크린 채 잠을 청할 수도 있다. 피곤한 몸과 허기로 무서운 짐승들의 울음소리에 잠 못 드는 밤을 보낸 이들은 오래전 도보로 긴 여행을 한 탐험가도 있었다. 그 탐험가들의 진실한 기록의 힘으로 새로운 땅이 발견되기도 한다.
우리 삶에도 수많은 길이 있다. 살면서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한 길이기도 하지만 자기의 뜻과는 무관하게 부모의 바람대로 다른 길로 접어들기도 한다. 그 길로 계속 가거나 중간에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선택하기도 한다. 결국은 어느 길이든 가야 될 운명을 가지고 산다. 훗날에야 내가 걸어갔던 길에 대하여 연민의 감회를 느낄 것이다.
예전에 공직생활 퇴직 두어 달을 앞두고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담담한 심정으로 글을 쓴 적 있다. 인생 후반기의 새로운 삶을 앞두고 앞으로의 내 삶은 어떻게 펼쳐질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길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가야 하는 길이었다. 오랫동안 정들었던 사람들과의 이별과 익숙했던 일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와 설렘도 있었다. 스스로 선택하여 떠나든 나라의 퇴임 결정이 내려지든 가야 할 길은 분명히 있다. 그 길이 끝나자 또 다른 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듯 늘 길은 끝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던 명예로운 길 앞에서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 후반기의 삶도 나름대로 느긋하게, 때로는 바쁘게 걷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길 앞에서 자의든 타의든 고민하며 또 다른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야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그때 그 선택을 정말 잘했다고 미소 짓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하여 여전히 미련과 아쉬움을 느끼며 후회하기도 한다.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면 내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생각하기도 하고, 그 직장을 그만두지 않고 계속 한 길을 갔다면 더 나은 결과를 얻었을까라는 환상도 품게 된다. 이런 수많은 질문은 저마다의 가슴에 깊이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산숲으로 드는 세 갈래 길 중 아직 가보지 않은 길이 있듯, 내게도 문득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나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예전에 마음에 품었던 길을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 인생이란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의 길, 뒤돌아보면 애틋한 그리움이지만 결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다. 다만 오늘 내게 주어진 이 길을 사랑하며 묵묵히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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