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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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왔지, 어떻게 왔을까? 피었구나, 피어 있었구나!’
아파트 마당가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뿌리내린 제비꽃이 보랏빛 꽃봉오리를 내밀었다. 어찌 넓고 넓은 세상을 다 두고 하필이면 이 자리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면서도 저리 예쁜 꽃을 피워내다니.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봄볕 아래 나부죽이 꽃망울을 틔우고 있는 제비꽃이 참으로 고마웠다. “제비꽃을 알아도 봄은 오고, 제비꽃을 몰라도 봄은 간다”라는 안도현 시인의 시구가 입가에 머물며 미소 짓게 한다.
제비꽃이 가끔 불어오는 봄바람에 줄기와 잎을 내맡긴 채 흔들리고 있다. 저 여린 것이 지난겨울의 그 모진 추위를 어떻게 견뎌내고 신기하게도 저렇게 진한 보랏빛 꽃을 피워내고 있는지.
며칠째 허리를 낮추고 눈 맞춤하며, 낮고 작아 더 고운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 봄이 다가와 무릎 앞에 앉아 있다. 연둣빛 초록이 눈부시다. 신비롭다. 새로운 시간은 햇빛처럼 반짝인다.
가슴을 열고 안아보고 싶다. 보는 내 영혼까지 맑게 한다. 세상 모든 만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으로 다가온다.
한때 제비꽃 저 보라에 빠진 적이 있었다. 보라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까다롭고 사교적이지 못해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고 감상적인 구석이 많다고 한다. 꿈과 현실, 화려한 듯하면서도 침울하고, 사랑과 이별 같은 생의 모호함을 간직한 아리송한 색이 보라라고 말한다. 어찌 보라색만의 탓일까만, 다시 이 녀석 앞에 서니 즐거운 몽상에 빠져든다.
햇살이 눈부셔 눈을 감아도 햇살이 밀려들어온다. 수없이 많은 세월을 달려온 이 빛들은 내 눈가에 와서 비로소 사라져간다. 태양으로부터 이 빛은 얼마나 먼 거리를 달려온 것일까. 꽃과 나와의 짧은 만남을 위해 긴 시간을 달려와 준 햇살이 새삼스레 고맙다. 내년 다시 이 자리에서 제비꽃을 만난들 오늘의 그 꽃이 아닐 것이며, 꽃을 보는 나 또한 오늘의 내가 아닐 것이다. 꽃도 나도 얼마나 많은 생을 윤회해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수없는 시간을 돌고 돌아서 온 이 자리. 지금 내 삶의 자리가 너무 소중해 눈물이 난다.
산과 들이며 도심의 어디든 터 잡고 뿌리내릴 흙만 있으면 모질게도 뿌리 박아 꽃을 피우는 게 야생화다. 생김도 빛깔도 이름도 제각각이지만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다. 손때 묻은 꽃집의 꽃에 비해 그저 스스로 피는 꽃이라 귀한 대접을 못 받는 야생화이지만 그 꽃잎마다 넉넉한 봄을 한 아름 품고 있다. 야생화란 희한하다. 관심이 없는 사람에겐 잘 보이지 않는다. 애기똥풀, 쇠별꽃, 개냉이꽃, 꽃다지, 비비추, 제비꽃 등 정겹고 우리 이름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도 없을 성싶다. 청초하고 소박한 야생화, 첫눈엔 심심한 듯하나 볼수록 매력이 느껴진다.
이 녀석들이 내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하는지,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나는 바보스럽게 와 소리를 연발하며 녀석들 곁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세상은 온통 놀라움이다. 놀라울 뿐이다. 꽃은 달라도 아름답다는 진리는 하나다. 상쾌함과 싱그러움이 초록과 함께 온몸에 배어든다.
입김만 닿아도 그냥 후우 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봄. 봄 편지 한 장. 봄 자체가 누군가 보내준 한 장의 편지다.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바람, 향기로운 꽃, 짝을 찾는 낭랑한 새소리로 수놓아진 봄 편지. 그 봄 편지를 누군들 안 받고 누군들 진종일 안 읽어 봤으리오.
세상 모든 풍경이 내 마음의 풍경이다. 똑같은 꽃을 보아도 누군가는 아름답게 바라보고, 누군가는 그냥 그렇게 스쳐 지나간다. 세상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만나고자 한다면 먼저 그 마음이 아름다워야 한다. 미운 마음을 지니고서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없다.
강변 산책길에 풀밭을 지나다 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이름 모를 풀꽃들이 피어 발길을 함부로 내딛지 못하게 한다. 꽃들이 눈가에 선하여 되돌아가 어린애 손톱만큼 작은 꽃잎들을 들여다본다. 어쩌면 이렇게 작은 것들이 그렇게도 예쁜 꽃을 피울 수 있을까. 꽃잎을 보며 땅속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저렇게 고운 색의 꽃잎을 피워내는가 신기하고 궁금하기도 하다. 풀꽃은 피운다는 말보다 터진다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톡 터진 꽃망울이 내 가슴에 와서 툭 터진다.
쭈그리고 앉아 동화책 한 권을 읽다 다시 일어나 걷다 뒤돌아보면 어느새 보랏빛 제비꽃이 봄바람을 데리고 종종종 뒤따라온다. 섬세한 떨림으로 전해오는 생명의 환희, 간지러운 귀엣말 같고, 나긋한 설렘으로 다가오는 사랑 노래 한 구절 같다.
강변을 산책하는 허리 굽은 노인들이 햇빛 속에서 걷는 모습이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 못지않게 아름답다. 봄은 피어나는 것이나 지는 것 모두를 아름답게 한다. 햇살에도 꽃빛이 어리고, 바람에도 꽃내음이 난다. 봄은 어머니처럼 너그럽고 넓어 모든 것을 받아주고 모든 것이 되어 주기도 한다.
풀꽃은 제가 알아서 피고 지는데 보는 내가 왜 슬픈지 모르겠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눈물은 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솟아나와 다른 이의 마음으로 흐른다. 한 방울의 눈물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절절하다. 그래서 눈물은 소리 없는 말이자, 눈으로 말하는 외침이다. 눈물은 슬픔을 누그러뜨리고 마음을 맑게 한다. 눈물 속에는 새로운 시작의 힘이 있다. 그래, 눈물도 때로는 약이 된다고 한다.
입김만 닿아도 그냥 후우 하고 날아갈 것 같은 봄. 봄인데, 봄이라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