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제가요?

한국문인협회 로고 배복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조회수15

좋아요0

오늘 하루는 아무 생각 없이 온전히 쉬어야겠다. 요즘 며칠 동안 제대로 쉰 날이 없었다. 이미 피로가 누적될 대로 되어 버린 상황이다. 이틀짜리 야근을 끝내고 가족 행사로 지방을 다녀오고, 준비하던 시험도 하나 치르고, 다시 새벽 근무 이틀을 하고, 오후 근무 이틀을 하고 하루를 쉬는 날이다. 정말 휴식이 절실히 필요하다.
나의 휴식 방법은 간단하다. 텔레비전을 켜서 자연 풍경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을 멍하게 바라만 보면 된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시원한 화면만 바라보면 그것으로 피로가 풀리고 휴식이 된다. 그런데 오늘은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자꾸 뒤섞인다. 온전히 쉴 수가 없다. 어제의 일이 계속 갈피를 못 잡고 따라다닌다.
요즘 개인 사정과는 아랑곳없이 신입 교육을 맡게 되었다. 신입을 가르치려면 조심하면서도 에너지 소비가 많다. 상급병원의 통합병동은 사정상 환자 케어는 물론이고 병동의 비품 사용법과 잡다한 사무 업무도 가르치는 게 필수다. 설명을 많이 해야 되고 이해가 될 때까지 되묻고 가르치는 일은, 내 업무도 같이 하면서 해야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고 인내심도 필요하다. 어제 신입 교육 중에 들은 후임의 당돌한 말이 자꾸 집중을 깬다. 곰곰이 어제의 일을 되씹어 보기로 했다. 일을 가르치는데 후임은 같은 실수를 계속한다.
“한 번 가르쳐 드리면 알아야지 자꾸 같은 실수를 하면 곤란해요. 간단한 걸 그렇게 실수하시면 어떡해요? 다른 생각에 빠지지 말고 집중해 주세요.”
“그래요. 간단한 것도 잘 안 되는 저는 바보인가 보죠. 선생님 가르치는 것이 너무 깐깐하고 엄격해요, 편하고 쉽게 말해 주세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끈하며 받아치는 후임을 보면서 순간 당황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얼버무리듯 “제가요? 미안해요. 다시 해 보세요” 하는 내가 당황스럽고 한심하다. 바로 대꾸해야 할 날카로운 단어가 떠오르지 않은 것도 짜증나고, 단호하게 다그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해 보인다. 난 왜 이럴까? 다른 사람의 예기치 못할 반격에 늘 머릿속 생각과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 속 시원하고 명쾌한 단어는 머릿속에 그대로 놓아둔 채로. 마치 내가 잘못한 것처럼 사과하면서 어색해지는 그 자리를 모면한다.
나는 오늘 분명히 쉬기 위해 편안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넓고 시원한 대자연을 보고 있는데 화면에 집중할수록 후임의 어이없는 모습이 자꾸 떠오르며 억울하다. 내가 일 가르치는 방식이 깐깐하고 엄격해서 힘들다고 대들던 그녀의 두 눈이 자꾸 오버랩된다. 환자를 케어하는 병동이고, 각종 의료장비며 기구들을 다루려면 함부로 가볍게 다룰 일이 아니다. 잘못 다루면 환자의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라 늘 긴장하고 엄격해야 하는데 이런 교육이 많이 버거웠을 거라 생각하다가도 울컥 짜증이 치밀며 쉼을 방해한다. 조용히 나를 들여다보기가 힘들다.
화면 가득 호주 퀸즐랜드의 에핑 국립공원 너른 숲이 시원하다. 이곳 국립공원을 가로지르는 폭스 크릭이라는 강의 풍부한 물줄기도 한몫하면서 어우러진다. 며칠쯤 여행하고 싶어지는 풍경에 서서히 마음을 옮긴다. 에핑 국립공원의 자랑거리라는 유칼립투스 숲이 잔잔하게 마음을 가라앉힌다. 유칼립투스는 호주 원주민들이 감기, 발열, 기침 및 기타 감염을 치료하기 위해 전통 의약으로 사용했다는 설명이 귀에 들어온다. 특히 이 숲에 사는 조류와 파충류와 캥거루 등이 천국처럼 노니는 모습은 평화롭다. 이 공원에는 멸종위기의 북쪽 털코 웜뱃이 세계에서 유일한 자연 서식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웜뱃이라는 동물에 금세 호기심이 당긴다. 생긴 모양새는 돼지 같기도 하고 너구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작은 하마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모습이다. 오늘 소개해 줄 영상은 웜뱃이라고 한다. 이 녀석의 특별한 재능은 여러 가지다. 땅굴에서 생활하는데 날카로운 발톱이 땅을 파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캥거루처럼 육아낭을 가지고 있는데 육아낭이 뒤쪽에 안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굴 파는 데 지장이 없다. 엉덩이로 치명적인 트월킹을 한다. 트월킹의 목적은 영역 표시지만 참 귀엽고 예쁘다. 멋진 엉덩이는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트월킹보다는 더 치명적인 이유가 있다. 이 녀석의 엉덩이는 단단한 뼈로 되어 있어서 위험한 순간 자기 굴 속 입구에 엉덩이를 내밀고 공격 수단으로 쓴다. 야생 들개와 여우 등이 웜뱃의 천적인데 포식자가 주위에 나타날 경우 시속 40km까지 뛸 수 있다. 지하 굴로 뛰어 들어가 엉덩이 트월킹으로 굴 입구를 무너뜨린다. 웜뱃의 엉덩이는 두꺼운 피부와 작은 꼬리, 튼튼하고 둥근 뼈가 포식자의 발톱과 이빨을 효과적으로 방어한다. 포식자가 동굴과 엉덩이 틈 사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경우 엉덩이로 굴 벽과 천장에 포식자의 머리를 짓찧어 물리친다. 무방비의 적은 그대로 두개골이 부서져서 죽어간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웜뱃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 굴들은 위급할 때 다른 동물과 새들의 피난처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영역 동물이지만 자리 내어줌에 있어서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호주의 대형 산불에 살아남은 개체들이 대부분 웜뱃의 굴에 피난했던 것으로 알려져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녀석의 특징 중 한 가지는 소화기관이 길어서 수분이 전혀 없는 사각형의 변을 보는 유일한 동물이다. 사각형의 변은 굴러다니지 않아서 영역을 표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도구가 된다. 웜뱃의 배설물이 굴 밖으로 굴러나가서 포식자들에게 들킬 위험을 줄인다는 사실을 연구한 연구팀이 이그노벨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참을 빠져 들어서 바라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웜뱃의 멋진 엉덩이 트월킹을 따라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에핑 공원에 앉아 쉬고 있다. 자연의 일원이 되어 대자연과 동물에 취해서 에핑 공원 곳곳을 관광객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행복을 누렸다. 아주 개운한 휴식을 취했다. 멋진 꿈을 꾼 듯하다. 이미 텔레비전 화면은 다른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어 있다. 엉덩이춤을 추는 웜뱃은 멋진 춤이 되었다가, 영역 생존의 방식이기도 했다가 때로는 무시무시한 적을 제압하는 공격 수단이기도 하다는 것을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생소한 동물인 웜뱃의 일상을 지켜보면서 서서히 내가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남과 내 자신에게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받으면서 삶을 사는 것이 생존할 이유가 된다는 확신으로 살았다. 내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사는 것이 삶의 목표처럼 살았다. 나는 남의 비난이나 독설을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거나 능력이 폄훼되는 순간을 가장 못 견뎌 한다. 자존심에 먹칠을 당했다고 여긴다. 아마도 돌이켜 보면 너무 지나친 인정 욕구에 빠져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이 옳은 것은 아니고, 내가 가르치는 방식이 다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오늘부터라도 조금씩이라도 인정해야겠다.
내일 출근하면 따뜻한 차를 만들어 후임과 나누고 후임의 속도와 역량에 맞게 부드럽게 신입 교육을 해야겠다. 오늘 하루 근사하게 잘 쉬었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