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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새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지안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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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말하는 새가 산다. 옐로우사이드코뉴어는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닌 앵무새인데, 우리 집의 옐로우사이드코뉴어 두 마리, 즉 코코와 뿌뿌는 말을 꽤 잘한다. 발음도 정확하다. 아마도 그들을 데려온 딸이 사랑해 주어서 그런 것 같다.
“이쁜아, 사랑해. 아이구, 예뻐!”
매일 새에게서 이런 말을 들으며 사는 이들은 지구상에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두 앵무새의 모이며, 해바라기씨, 과일도 잘 챙겨 주지만 그들은 나를 ‘응가’라고 부른다. 우연인 줄 알았다. 그러나 나를 볼 때마다 언제나 “응가, 안녕!” 하고 외친다. 배변 훈련을 시키느라 자주 한 말을 기억한 것이다. 새에게서 ‘응가’로 불리는 기분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똑같이 생겼어도 둘을 척 보면 구분이 되고, 심지어 성격도 보이고, 다른 집 코뉴어와도 구분이 된다. 신기한 새의 세계다.
뿌뿌와 코코가 대판 싸웠다.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다 뿌뿌가 나가떨어져 탁 소리를 내며 바닥에 부딪쳤다. 뿌뿌는 제대로 서지도 못하고 비틀거렸다. 다리가 마비된 것 같았다. 여행에 데려갔다가 앵무새를 무지개다리 너머 보낸 경험이 있는 딸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군포에 있는 단골 병원에 긴급 연락하여 휴일의 고속도로를 냅다 달렸다. 딸은 “뿌뿌야, 잠들면 안 돼!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으흑흑흑” 뒷자리에서 눈물을 뿌리며 드라마를 찍었다.
크지 않은 동물 병원은 주차장도 없는 대로변에 있다. 옆 빌라에 차를 대고 병원에 들어갔더니 강아지, 고양이, 새, 각각의 반려동물과 그들을 데려온 ‘집사’들로 대기실이 복작였다. 털 많은 강아지, 털 없는 강아지, 새까만 고양이, 백설공주처럼 뽀얀 털로 뒤덮인 페르시안 고양이, 다양한 앵무새들이 차례를 기다렸다.
“너 왜 이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
몸무게를 재려고 하는데 한사코 가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고양이를 달래는 이 옆에 눈을 굴리며 필사적으로 병원에서 나가려는 시바견을 그의 보호자가 꼭 붙잡고 있었다.
살다 살다 참 별일도 다 보겠네, 나는 생각했다. 내 어린 시절엔 고양이나 강아지를 데리고 자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손을 탄다고 마음대로 만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동물은 뜰에 묶어 두고 오가다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고, 필요하면 팔거나 잡아먹었다. 사람들이 먹고 난 음식 찌꺼기를 끓여 먹이느라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고양이와 개가 쥐약을 먹고 죽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앓고 난 후엔 반려동물을 키우려는 생각조차 깨끗이 사라졌다.
이제 동물을 먹이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추운 겨울,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기가 데려온 다양한 종의 동물을 껴안고 있는 사람들. 어린이 창작 동화 속 삽화를 보는 듯 낯설면서도 점차 마음이 따뜻해졌다.
“뿌뿌 보호자 들어오세요.”
딸은 마치 자식을 데리고 온 엄마처럼 새를 안고 잰걸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어린아이를 키우는 워킹우먼인 딸을 둔 것만 같았다. 다행히 충격이 크지 않아 약을 타고, 그제야 늦은 점심을 먹으러 갔다.
새와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은, 새를 생각해선 딱하기도 하지만 보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갈색의 깃털을 가져 나무에 숨어 있으면 찾을 수 없는 새가 아니라, 눈에 번쩍 띄는 총천연색 깃털을 지닌 이 한 줌의 새를 바깥에 데리고 나가면 사방이 위험투성이다. 도시임에도 먹이사슬이 실제로 보인다.
까치는 불길하게 머리 위를 맴돌고 동네 강아지들이 줄줄이 소시지처럼 따라붙는다. 고양이들은 무관심한 척 지그시 우리를 바라본다. 주차장에 세워 둔 차에 타는 짧은 순간 고양이가 어깨의 앵무새를 잡아채 달아나기도 하고, 까치가 움켜쥐고 날아가 버리기도 한다. 아름다운 깃털을 가진 이 작은 새들은 열린 창으로 자유를 찾아 날아가도 바깥세상에서 3일 이상 살아남지 못한다. 어깨에 앉히고 산책이라도 나서면 사람은 물론 뭇 동물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코코는 튼실하고 성격도 좋은 경상도 사나이 같은 녀석이고, 뿌뿌는 예쁘장하고 까칠한 녀석이다. 예민하기도 해서 장염이며 피부병이며 각종 자잘한 병치레를 요란하게 하고, 딸은 그때마다 “나와 50년을 살아야 하는데, 넌 이제 다섯 살이잖아. 나와 코코를 남겨 두고 가지 마!” 하며 비극적인 영화를 찍어댄다. 아마도 이전에 겪은 사별의 두려움과 슬픔이 그의 가슴에 여태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고개를 외로 꼬고 눈가를 떤다고, 30여 년의 특수 동물 진료 경험이 있다는 병원을 검색하여 냅다 달려갔다. 주먹만 한 뿌뿌의 목덜미는 의사 선생님이 붙잡고 양쪽 날개와 다리를 두 명의 간호사가 붙잡고 엑스레이를 찍는데, 예민하고 까칠한 뿌뿌의 쇳소리 비명이 온 병원에 메아리쳤다.
아기들의 자리에 이젠 반려동물이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혼자 살기엔 외로워 개, 고양이, 새, 나무를 키운다. 반려동물, 반려식물, 무려 ‘반려’라는 단어를 붙이고. 그러나 또 이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다른 종의 생명과 종을 초월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 없다.
“중이염이래.”
진료실을 나온 딸이 평온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안심이 되자 밝은 기색으로 밥을 먹고, 고맙다고 구수한 커피를 사주며 물었다.
“엄만 왜 눈을 아치형으로 하고서 사람들을 보고 있었어?”
다른 생명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사람들을 바라보느라고 내 단추구멍만 한 눈이 아치형이 되었나. 아기를 키워 본 사람은 생명의 가치를 안다. 작고 여린 동물을 돌보는 이도 그럴 것이다. 동화 속 삽화 같은 동물 병원의 풍경이 그려졌다. 그렇지만 잊을 만하면 조연으로 동원되는 이 신파 영화는 그만 찍고 싶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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