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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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약동하는 춘 3월에 개구리가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경칩(驚蟄)이 되니 지구상의 한 구성원으로 하루를 사는 하루살이가 생각난다.
어느 글에 “시궁창에서 오전에 부화한 하루살이는 점심 때 사춘기를 지나고 오후에 짝을 만나 저녁에 결혼하여 자정에 새끼를 쳤고 새벽이 오자 천천히 해진 날개를 접으며 춤추며 왔다가 춤추며 가노라”고 외쳤다.
지난 무더운 여름날 모기와 하루살이가 재미있게 놀다가 헤어지면서 이제 “내일 다시 만나자”고 했다. 이때 하루살이는 의아해하면서 “내일? 내일이 뭐야!”라고 물었다.
그렇다. 우리는 하루살이처럼 자신이 아는 범위 밖의 것은 알 수가 없는 유한한 존재지만 무한한 것도 존재함을 인식해야 한다.
오래 전에 106세로 소천하신 모친처럼 적어도 90이나 100년을 살아야 일생이란 말이 실감나는데…. 그러나 하루 24시간을 초로 나누면 86,400초가 되고 작은 세포를 확대하면 엄청 커지듯이 작거나 짧은 것이라고 결코 무시할 수가 없다.
일생에서 생(生)이라는 한자는 소(牛)가 외나무(一)다리를 걷는 것처럼 조심조심하라는 뜻이라고도 한다. 어느 분이 말한 일일일생(一日一生)도 하루를 일생으로 생각해서 신중하게 살라는 의미로 좋은 하루하루가 쌓이면 좋은 일생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매미는 7년을 넘게 땅속에서 굼벵이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여름 한철 7일을 살고 가지만 그것이 일생이고, 바닷가에서 천년을 산 거북이가 느릿느릿 걸어가도 그것이 한평생이라”는 말도 있다.
하루살이와 같은 인간의 1000년이라는 시간은 신의 입장에서는 하루 정도에 비교할 수 있기에 시간의 길고 짧음이 문제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무엇을 얼마나 의미 있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우리의 하루를 10진법에 비유해서 하루에 한(1) 가지 좋은 일을 하고 열(10) 사람을 만나는데 역시 숫자만이 아니고 현실이나 책에서 위인을 만나든 무엇인가 도움을 주는 유익한 사람을 뜻한다. 그리고 백(100) 자의 글씨를 쓰고 천(1000) 자를 읽고 만(10000) 보를 걸으면 건강한 하루가 되고 보람 있는 일생이 된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동안 수많은 실수나 과오를 범하며 살게 되는데 어느 해의 설날에 제자가 스승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대부분 새해가 되면 송구영신으로 묵은 것은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고 습관이다. 그런데 그 스승님 댁의 벽에 걸려 있는 오래된 액자의 그림은 해마다 그대로 있어 스승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스승님, 빛이 바랜 액자의 그림을 왜 새것으로 바꾸지 않으세요?”
그 그림은 곡예사가 높은 산의 양쪽 봉우리에 길게 연결된 밧줄 위를 긴 장대를 짚고 건너는 아슬아슬한 긴장이 감도는 사진이었다.
“그림보다 그 밑에 써 있는 글씨를 보게!”
거기에는 ‘실수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지만 어느 경우에는 실수가 곧 죽음이 되기에 장대를 짚은 그 사람처럼 정신을 집중해서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처럼 우리는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일생이고 사명이 아닐까!
한 글자인 ‘삶’은 풀어보면 ‘사람’이 되고 사람을 합하면 삶이 되기에 삶이 곧 사람이고 사람이 결국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하루를 일생처럼 값있게 살아야 하고, 하루는 나에게 주어진 최초의 날인 동시에 최후의 날이라는 다짐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나에게 남은 일생 중에 최초의 날이라고도 하며 누구에게나 늘 똑같이 찾아오는 삶의 원칙이 바로 오늘이며, 오늘은 영원 속의 하루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수 있다면 나는 그 길을 택하고 싶다”(<사랑을 위하여>, 김종환)라는 노래를 부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