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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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여유로운 하루가 생겨 미술관에 갔다. 이른 시간이라 전시장의 분위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용히 밝혀진 조명 아래 전시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의 모습이 여유로워 보인다.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여섯, 그림 속의 영혼들이 소리 없는 울림으로 내게 다가선다.
일백 개의 무덤에는 일백 가지의 사연이 있겠지만, 일백의 작품 속에는 수백 수천의 이야기가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하듯 전시된 작품들은 각각의 색깔과 개성 있는 이미지를 갖고 내방자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작품들의 다양성과 작가가 보여 주고자 하는 작품 세계를 상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작가마다 들려주는 함축된 은유와 내적 울림에 도취되어 있던 순간, 한 작품 앞에서 발을 멈췄다. 그것은 콜라주 기법의 회화 작품이다. 탱자나무 가시를 이불처럼 덮고 있는 수많은 유방들, 봉긋봉긋한 젖가슴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인 날카로운 가시덤불. 숨을 쉴 때마다 살갗을 파고들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이해할 수 없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 앞에 서 있는 기분이다. 도대체 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모든 예술작품은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가. 굳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의도를 알려고 하지 말고 그냥 느껴지는 대로 보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모호함과 난해함에 온 정신이 빼앗겨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두 손으로 받들어 밀어 올린 젖가슴 위에 덮인 가시들의 항변이 들리는 듯해 작품 속으로 한 발 더 다가섰다. ‘가시덤불 속에 갇힌 여인의 가슴을 애무하며 타오르는 욕망을 주체할 수 없어 몸부림치며 전신을 파묻은 한 남자’ 그의 처절한 사랑이 환영처럼 눈앞에 어른거린다. 이렇게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놀라웠다.
나는 왜 유독 이 작품 앞에서 넋을 놓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삶을 알았더라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으련만, 아쉽게도 그의 이름도 이력도 모르고 그 작품이 풍겨주는 이미지만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작가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여인의 젖가슴에 가시면류관을 씌울 만큼 고통스러운 세월이 있었을까? 아니면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죽도록 사무쳤음인가.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기어이 알려고 하는 나의 속내는 또 무엇일까.
내가 나서 자라던 고향의 과수원에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빙 둘러쳐져 있었다. 봄철엔 하얗게 피어나는 앙증맞은 탱자꽃이 좋았고, 가을이면 황금빛 열매와 그 향기가 좋았다. 성장기의 나는 한가한 시간이나 마음이 복잡할 때면 그곳을 자주 걸었다. 세월이 한참 흘러 어른이 되었어도 과수원은 언제나 내가 갈 수 있는 마음의 의지처였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날도 나는 떨어진 나뭇잎을 밟으며 과수원 둘레를 걷고 있었다. 가지를 쳐서 쌓아둔 탱자나무 더미를 피해 가며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이리저리 마구 뒤덮여 있는 탱자나무 가시 속에서 빨간 쥐새끼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방금 태어났는가 보다.’
어미 쥐의 털인 듯 잔털이 소복이 쌓여 새끼의 알몸을 간신히 가리고 있다. 가시덤불 속의 빨간 새끼 쥐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바보 같은 쥐새끼야, 어쩌자고 가시 속에 네 새끼를 낳았더냐. 일부러 속에 새끼의 보금자리를 만들었는가, 새끼를 낳고 가시로 덮었나?”
바르르 떨고 있는 생쥐들이 조금만 꼼지락거려도 가시에 찔릴 것만 같았다. 적으로부터 새끼를 지키기 위해 가시이불을 덮을 수밖에 없었던 절절한 모성이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 자리에서 한참을 기다렸으나 어미는 오지 않았다. 곧 짧은 겨울 해가 지고 나면 차가운 밤이 올 텐데 ‘끝내 어미가 오지 않으면 발가벗은 새끼는 밤새 얼어 죽지나 않을까’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오면서도 새끼 쥐들의 걱정에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전하여 온다. 마음 한구석에 꾹꾹 눌러 두었던 지난 삶의 한 토막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내 앞에 다가선다. 젖먹이 어린 자식을 멀리 떼어 놓아야 했던 한 시절이 있었다. 남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었던 자식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아내던 시간이었다.
천사 같은 아이의 모습을 생각만 해도 전신이 가시로 찔리는 아픔으로 밀려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젖무덤에 세상 편한 마음으로 자신을 맡기고 있던 작은 아이. 온 힘을 다해 모성을 빨아들이던 발그레한 얼굴이 환영으로 보였고, 슬픔과 그리움이 되어 밤새 열병을 알아야 했었다. 이 추운 겨울에 가시 이불 속에서 떨고 있는 새끼 쥐를 보는 순간, 자식과 떨어져 살았던 그 시절의 아픔이 새롭게 밀려든다.
예술 작품은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으로 보라고 했던가. 화가의 생각과 작품의 의도를 끝내 알지는 못했지만, 나를 오래도록 붙잡아 두었던 그 작품은 내게 많은 사고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탱자나무 가시라는 작지만 만만치 않은 그 소재로 인해 가시덤불 속에 새끼를 숨겨 둔 어미 쥐의 모성을 느꼈고, 그 모습에서 내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작품은 보는 자의 것이라 하지 않던가. 모든 예술 작품은 작가의 내면과 영혼으로 완성되는 것이기에 그의 생각과 의도를 영영 알지 못해도 자신을 탓하지 않기로 했다. 그것만으로도 뜻깊고 보람 있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