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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발자국 등대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혜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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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 등대 앞에 선다. 상추자도 집들은 지붕마다 색색의 옷이 입혀졌다.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풍경이다. 나는 그것을 볼 때마다 섬에 가고 싶은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오곤 했다. 담 주변으로 멸치를 숙성시키는 커다란 통은 내 키를 넘는다. 집을 지키는 지킴이일까. 뚜껑 위에는 돌멩이를 밧줄로 칭칭 묶어 놓았다. 등대 앞에서 바라보는 섬의 유혹에 나도 묶인다. 높은 곳에 올라서야만 느낄 수 있는 섬의 매력, 오늘은 두 배다. 자칫하면 산속에 미아로 남을 뻔했었기에.
추자등대는 제주 해협과 부산, 목포 등 내륙을 오가는 여객선과 화물선의 안전한 밤길을 인도한다. 주말인데도 둘레길을 걷는 한 팀과 나뿐이다. 한산하다.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그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가 인사를 나누었다. 성당에서 만난 이웃들이라며 1박 2일 일정으로 오늘 새벽에 내려왔단다. 상추자도 나바론 하늘 둘레길을 마치면 하추자도에 가서 1박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마음이 급한 나에 비해 그들은 쉬엄쉬엄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듯 여유로웠다. 제주항으로 하루에 한 번만 출항하는 배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나바론 절벽의 계단은 무척 가팔랐다. 최대한 상반신을 숙이고 난간을 잡으며 한 계단 두 계단 발을 디뎌 본다. 그러나 마음처럼 가볍게 올라가지지 않았다. 물 한 모금 마시며 목도 축인다. 뒤돌아서 바람 한 점 없는 바다를 바라본다. 푸른 융단처럼 펼쳐진 곳에 뱃길을 내며 어선이 가끔 지나갈 뿐이다. 현재의 위치에 따라 사람들은 이 맛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지는 것일까. 좋은 풍경을 앞에 두고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하는 내가 민망스럽기까지 하다. 좁은 길을 지나 얼마쯤 갔을까. 붉은 띠가 가로막았다. 출입 금지 구역,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나뭇가지 사이로 얼룩덜룩한 건물이 보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분명히 길을 따라왔을 뿐인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니. 어디서부터 길이 잘못되었을까. 내가 못 보고 지나친 샛길이 있었을까. 문득 과거의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불빛 하나가 서서히 보인다.
88 올림픽을 치르고 국민들의 흥도 가라앉지 않은 어수선한 초겨울이었다. 주말이 되자 어머니는 타지에 홀로 있는 딸의 소식이 궁금해 자취집에 전화를 했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다. 이틀 동안 가족들의 애간장을 태운 나. 그 당시 여자를 납치해 섬으로 팔아넘긴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리던 때였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하니 사무실 책상 위에는 ‘고향 전화’라는 짧은 메모가 놓여 있었다. 내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흐느끼는 소리만 점점 멀어져 갔다. 주말 내내 행적을 알 수 없어 집안은 발칵 뒤집혔고 친정언니까지 와 있었단다. 수화기를 건네받은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그날, 뉴스를 보고 노파심에 어머니는 전화를 했었다고 한다.
돌아온 주말, 고향에 내려가는 철길 위로 하얀 눈이 날리기 시작했다. 고향역에 도착했을 때 어느새 눈이 발목까지 빠졌다. 앞동네를 지나 고갯마루에 막 올라섰을 때 저만치에서 후레시 불빛 하나가 짧다가 길다가를 반복하며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이내 내 이름이 불렸다. 어머니는 나를 와락 끌어안으시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었던 딸, 당신의 가슴은 숯덩이가 되었으리라. 두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은 파르르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이 걷기엔 좁은 길, 엄마가 앞서 걸어온 발자국 위로 내 발을 덧밟으며 걸었다. 눈길 위에 남겨진 엄마의 발자국 등대. 어머니의 후레시 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낮게 발자국만 따라간다. 엄마의 불빛을 따라 눈 위의 발자국을 내려다보며 걷는다.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로 했다. 마음처럼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얼마나 갔을까, 정자에서 쉬고 있는 그들이 어렴풋이 보였다. 웃음소리도 들렸다. 안도의 한숨으로 웃음이 나왔다. 내 사정을 이야기하자 그들도 추자등대를 거쳐 내려간다며 동행하자고 한다. 어머니의 발자국 등대를 밟으며 걸었듯이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후미에 섰다. 추자도 등대 앞에 선 그들에게 단체사진을 찍어 주었다. 긴장이 풀린 내 손떨림이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간식을 챙겨 주었다.
부모라는 등대는 자식을 향해서만 비춘다. 어머니는 하늘나라에서도 등대가 되어 당신의 막내딸을 지켜주기 위해 그들을 보내주셨나 보다. 엄마가 보내 준 서울 손님들의 뒤를 따라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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