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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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단군의 후손이다. 6천 년 전 단군 할아버지가 태백산 단목 아래에 신시(神市)를 열고 천부경(天符經)을 본령으로 하는 국조 단군 칙어 8개 조항을 내리고 홍익인간 이화세계 제세이화 인간 세계의 나라를 세웠다.
조선 중기 정감록과 남사고 풍수지리학 예언가들 비결에 조선 땅에는 10군데의 피난처가 있다. 그곳은 무서운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는 땅이다. 십승지지의 1승지는 풍기 금계동, 2승지는 봉화 도심 마을, 3승지는 충북 보은, 4승지는 운봉 두류산, 5승지는 예천 금당실, 6승지는 공주의 구유와 마곡, 7승지는 영월 정동 상류, 8승지는 무주 구천동, 9승지는 부안 변산, 10승지는 성주의 안성동이며 북한 땅에는 백두산 외에는 한 군데도 없다.
1945년 세계 2차 대전 종전으로 우리나라는 광복이 되었으나 분단 국가로 곧 3차 대전이 일어나는데 그때 우리나라 3천 리 강토에는 백조일손(百祖一孫), 백 할아버지 손자 하나가 살아남는다. 사람의 그림자는 십 리 가다 하나, 백 리 가다가 하나를 본다. 세균전, 화학전, 핵 전쟁으로 지구 환경 오염에서 오는 병은 백약이 무효이며 다만 금계동 ‘용천수(龍泉水)’를 먹으면 살아남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정감록과 남사고 비결파들은 후손을 보존하기 위해 평안북도 박천, 전라도, 충청도, 제주도 등 전국에서 피난처 제1승지인 소백산 금계동으로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나주 김(金)씨, 여산 송(宋)씨, 남양 양(梁)씨 양원빈, 수안 계(桂)씨 계삼정 등이 주종을 이룬다. 일제 식민지 때 나주 김씨들은 기독교를 믿고 자녀들을 일본 학교에 보냈으나 여산 송씨, 남양 양씨, 수안 계씨는 자식들을 일본 학교에 보내면 왜놈이 된다고 안 보내고 집에서 한문을 가르쳤고, 인삼 농사와 사과 농사를 지으며 산속에서 은거해 살았다. 10여 년 전만 해도 망건에 상투를 튼 한복 입은 노인들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눈에 띄지 않는다. 단군의 피를 물려받고 사는 이곳 금계동 마을 사람들은 하늘의 새 한쪽 눈, 한쪽 날개밖에 없는 비익조(比翼鳥)는 못 난다. 우익(右翼), 좌익(左翼) 두 날개가 있어야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다고 믿고, 양심을 잃은 사람은 전란이 오면 금계동 용천수 물을 먹어도 살아날 수 없다고 했다. 금계동 마을에서 자라난 근세 비결파 후손들 중에서 국가 저명 인물들은 김계원 육군 참모총장, 청와대 비서실장, 송지영 소설가·언론인, 박용만 경무대(청와대) 비서실장·4선 국회의원, 송지향 향토사학자, 황영시 육군 대장, 박세환 육군 대장·국회의원·재향군인회장, 박정환 육군 참모총장 등을 들 수 있다.
1. 잠자리 잡으러 가는 사람 김계원 장군
내가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전 육군 참모총장)을 처음 만난 것은 그분의 둘째 동생 김계삼(육군 중위 출신) 집 2층 집무실에서였다. 정감록 비결파로 소백산 속 금계동에서 태어난 호 월봉(月峯)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나주 김씨 우발공파 43세손이다. 그는 일본 징병으로 끌려가 군관학교를 나와 남양군도에서 2차 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전되자 귀국해 국군이 창설될 때 군악대대를 창립해 지휘하고 포병대를 창설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수립하자 6·25 한국전쟁이 곧 터졌고, 낙동강 전투 사투 중 휴전이 되고,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집권한 민주당은 신·구파로 갈려 국정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이때 박정희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별 친분이 없는 터에 중앙정보부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이 보자는 부름을 받고 청와대를 가니, 박 대통령이 ‘임자를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 내일부터 근무하라’ 해서 비서실장을 싫도록 하다가 중앙정보부장으로 전임됐다. 중앙정보부장은 성격상 도저히 맞지 않아 3개월 만에 박 대통령을 찾아가 자리를 옮겨 달라고 하자, 박 대통령이 눈을 떠보며 주중대사(대만)로 보냈다. 귀양살이 4년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국회의원에 출마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1978년 12월에 실시되는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영주 봉화 영양군)에 집권당인 공화당 공천을 받아 출마한다는 것이다. 나는 M신문사 기자로 김 장군의 동생 김계삼의 소개를 받아 인사를 드렸고, 그냥 인사만 드린 것이 아닌 앞으로 출마와 선거 공약 등에 대한 기사 취재를 하러 간 것이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1961년 영주 대수해로 남원천 수로 이전 수해 복구 공사 준공식 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송요찬 내각 수반, 주한 유엔군사령관 등과 함께 주목나무 기념식수를 하는 모습을 멀리서는 봤지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다. 그때 심은 기념식수는 박 대통령 서거 후 관리 부실로 죽었다. 그런데 2013년 제18대 박근혜 대통령 출마로 영주 유세를 오는 날, 아버지가 심은 기념식수를 보자고 하면 큰일 났다. 급히 전나무를 대신 심었다. 전에 심었던 터는 삼판서 고택 창건으로 산기슭 석벽에 심은 나무는 또 죽어 가고 있다.
김계원 비서실장을 만난 나는 깜짝 놀랐다.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는가. 나는 이런 장군을 처음 봤다. 사람을 존중한다.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다. 온유한 온기와 겸손 속에 권위와 교만은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거수일투족의 겸양과 공손한 태도는 악수할 때는 잠자리 잡으러 가는 손이다. 땅이 꺼질까 조용히 디딘다. 이런 분이 어떻게 일본 군관학교를 나왔고 6·25 전쟁 때는 어떻게 적과 싸웠고, 육군 참모총장 별 네 개를 달고 어깨가 무거워서 어떻게 살았는가. 박정희 대통령과는 영 다른 인품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박 대통령이 그를 8년을 청와대 비서실장과 말 한마디에 공중 나는 새도 떨어진다는 중앙정보부장을 시켰던 모양이란 생각이 들었다. 교회를 진실로 믿으면 사람이 하느님을 닮아 가는 것인가. 남을 증오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다. 동생 친구인 나한테 2층에서 아래층 문밖까지 따라 나와 작별 인사를 공손히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박 대통령의 부름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운동을 중단하고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재임됐다.
그해 여름이었다. 촌놈이 모처럼 박정희 정권의 경제 성장의 표상인 서울 성동구에 지은 5성급 워커힐호텔(워커 장군 이름) 770객실, 6개 국어 동시 통역 1천 명 수용 회의실 구경을 갔다. 서울 어느 고관의 시골 어머니가 화장실 변기에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했다는 호텔 로비에서였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눈에 띄었다. 흰 모시 바지저고리에 산수화 손 부채를 든 것이 눈에 확 띄었다. 내가 공손히 인사를 드리자 잠자리 잡는 손으로 다정하게 내 손을 잡아주었다. 그분 앞에서는 스스로 공순해지는 것이었다. ‘고향 후배를 만났는데 차라도 한잔 하고 헤어져야지’ 하며 주위를 살폈다. 선글라스를 쓰고 가방을 든 젊은 비서에게 물었다.
“호텔 커피점이 어디쯤에 있는가?”
“벌써 회의 시간이 5분이나 늦었는데요.”
“좀 늦으면 안 될까. 모처럼 고향의 후배를 만났는데 그냥 헤어질 수 없어.”
그날 나는 먼저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도망치듯 돌아섰던 것이다.
김계원 장군은 다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간 것이 비극의 운명이었다. 그 후 궁정동 안가에서 있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안동농림학교 출신으로 박 대통령이 그를 신임하고 중앙정보부장 자리에 앉힌 사람이기에 차지철 경호실장을 해하려는 것으로 알고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는 비극, 나는 그 역사의 비극 궁정동 사건에 대하여 궁금한 미스터리가 너무 많아서 무엇인가 있을 것인데 좀 더 알고 싶어서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남기고 이승을 떠난 『하느님의 은혜』 자서전을 다시 읽어봐도 그 당시 궁정동에 대한 기록은 까맣게 없었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동생 김계삼 씨와는 깊은 정을 나누는 친구다. 잊을 수 없는 사연들이 너무 많다. 어느 날 오후 김계삼 친구가 신문사로 전화가 왔다. 동대구역 앞 S호텔로 나오란다. 내가 갔을 때 영주 이경자 오빠 2군사령부 이민홍 준장이 사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키가 훤칠한 사람의 뒤를 따랐다. 육군 준장이 가방을 들고 모시는 사람이라면 어떤 존재일까. 나는 잠시 자리를 피했다. 1시간쯤 후 김계삼 친구의 전화가 다시 왔다. 손님이 갔으니 오란다. 내가 호텔방에 들어서자 김계삼 친구는 수화기를 들고 또 어디에 전화를 걸었다.
“소백산 촌놈이 왔습니다.”
전화를 걸고는 가잔다. 어디로 가느냐니까 S호텔 지하 마사지실 이발소란다. 어두컴컴한 이발소 안 시설은 호텔과 같았다.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곳이다. 이런 곳이 있다는 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우리가 ‘연꽃’이라는 특호실로 들어가니 기다리고 있던 꽃 같은 아가씨 둘이 우리 옷을 벗기고 자기들도 옷을 벗고 몸에 무슨 향수기름을 바르고 안마를 하기 시작했다. 발 겨드랑이 어깨 허벅지를 살살 문지르니 뼈마디가 녹아나는 것 같았다. 종내는 남근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잠이 들었는지 정신이 나갔는지 의식이 없는 혼몽한 상태에서 아가씨가 깨웠다. 호텔 옥상 별실로 가란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경상북도 도지사가 우리를 반긴다. 술상이 차려진 옆에는 꽃 같은 아가씨 셋이 앉아 있었다. 도지사와 수인사를 나눈 우리는 양주 세례를 퍼부었다. 나는 하늘 높은 줄은 알아도 청와대 비서실장 동생이 그렇게 높은 줄 몰랐다. 산불이 나면 그 군의 군수를 파면할 수 있는 높은 직위에 있는 도지사가 쩔쩔맨다. 그런 줄도 모르는 나는 평소에 주유소를 운영하는 친구를 기름쟁이라 불렀다.
그해 가을이었다. 김계삼 친구가 자기 차에 타란다. 안동을 지나 의성으로 가기에 나는 그가 좋아하는 보신탕집을 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의성을 지났다. ‘어디를 가느냐’니까 경주 불국사 주지스님과 인어공주를 만나러 간단다. 생뚱한 말이다. 기독교 집사인 그가 불국사를 찾는다는 것도 생뚱하지만, 인어공주는 또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은하철도 만화영화에서 본 인어공주를 상상하면서 우리가 도착한 곳은 경주 최부잣집 아들(경상북도 체육회장)이 경영하는 요정 ‘아방궁’이었다. 경북도지사(그때는 경북도와 대구시가 분리되지 않았음)와 불국사 주지스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요리상을 보자 눈이 뒤집어졌다. 꿈이 아닌 현실이다. 요리상에 누워 안주를 배 위에 싣고 있는 실체는 아가씨인지 인어공주인지 분간이 안 간다. ‘장자의 나비의 꿈’ 같은 몽환에 빠졌다.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지 꿈속에서 나비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훨훨 날아간다. 누워 있는 아가씨의 젖무덤 사이에는 마른안주가, 배꼽과 음부 사이에는 진안주가 놓여 있었다. 젖무덤 사이에 놓여 있는 마른안주는 고래 젖꼭지마름이라 하고, 배꼽과 음부 사이에 놓여 있는 진안주는 상어 간과 울릉도 강치 물개 해구신(海狗腎)이라 했다. 술안주를 집는 적이 없다. 술잔을 마신 후 안주는 인어공주의 배 위에 놓인 안주를 입을 대고 먹고, 젖꼭지나 음부를 빨아야 했다.
그런 술을 마시며 취해 혼몽한 상태에 있을 때였다. 뒤쪽 벽 커튼이 걷혀지면서 알몸의 아가씨들이 벽에 등을 대고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유두주와 계곡주를 먹을 차례란다. 유두주는 술잔을 젖꼭지에 대고 부어 받아서 마시고 안주로 젖꼭지를 빨아야 하고, 계곡주는 음부에 술잔을 대고 술을 부어 음모로 흘러내린 술을 받아서 마시고 음부를 안주로 빨아야 했다. 불국사 주지스님은 자기 차례가 되면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했다. 그런 밤은 깊어 가고 유두주와 계곡주에 취한 우리는 기독교 신자가 유월절에 예수의 피를 받은 잔을 마시듯 한 세월의 술잔을 마시고 또 빨며 환상의 밤을 보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세월과 함께 지금은 다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세월도 가고 사람도 갔다. 풍기항공고등학교는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아버지 김 장로가 세운 학교로 셋째 아들 김계삼 친구가 이사장으로 있었다. 김계삼이 하늘나라로 간 지도 이미 오래고 경상북도 도지사와 불국사 주지스님도 10년 연장이니 살아 있을 리 만무하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김계삼 친구와 나와 오토바이 대리점을 하는 또 한 친구가 서울 길에 청와대 비서실장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오토바이 대리점을 하는 친구가 비서실장 책상 위에 있는 명함 몇 장을 슬쩍 했다. 우리는 까맣게 몰랐다. 그러려고 그 친구가 비서실장 집을 한 번 가보자고 그렇게 조른 이유도 그런 저의가 있었는지는 우리는 까맣게 몰랐다. 그 친구는 훔친 비서실장 명함 뒷면에다 다음과 같이 쓰고 위조 도장을 새겨서 찍었다.
“차인에게 오토바이 5백 대를 주십시오.”
이 명함을 받아든 전무는 손을 벌벌 떨면서 사장실로 들어갔다. 대성산업 사장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빼내면 부족한 전국 공급망에 큰 차질이 온다. 사장이 고심 끝에 5개월 분납으로 사정을 해보라고 했다. 사장실을 나온 전무가 죽는 시늉으로 사정을 했다.
“지점장님!”
“예,”
“회사 사정이 한꺼번에 못 드리고 한 달에 1백 대씩 5개월 분납은 안 될까요.”
“그렇게 보고드리겠습니다.”
“사정을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힘은 그렇게 위대했다. 그때는 일본 오토바이 혼다 수입은 단절되고 대성산업의 국내산으로 공급하는 생산량은 태부족이었다. 서울 친구가 오토바이를 사려고 대리점에 선금을 맡긴 순서대로 공급을 받는데 1년이 지나도 오토바이를 못 구입했다는 소리를 듣고 내가 그 친구에게 오토바이를 부탁하여 한 대를 서울 대리점으로 보냈다. 그 당시 품귀된 오토바이는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 친구는 그 오토바이 5백 대를 공급받아 벼락부자가 됐다. 3층 빌딩을 샀다. 오토바이 대리점 친구는 오토바이 5백 대를 그냥 팔면 비싼 세금이 부과되기 때문에 세금마저 몽땅 먹으려는 욕심 많은 친구는 농협 조합장과 결탁해 농업 면세용으로 만들어 부당 이익을 획득했던 것이다. 지금은 농협 조합장 1년 연봉이 1억 원이 넘지만, 그때 농협 창립 시절에는 대개가 무보수 조합장으로 봉사를 했다. 조합장이 몇 푼 받아먹고 오토바이 500대를 조합용으로 만들어 면세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그 친구를 시기하는 친구가 귀띔했다. 이 사실이 보도되면 오토바이 대리점 친구는 두말할 것도 없고 농협 조합장까지 구속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사를 쓰는 것이 내 직분이다. 오토바이 대리점 친구를 만나 기사를 쓰겠다고 했다. 나를 무서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 친구는 혼잣말을 중얼댔다.
“너 인생이 불쌍하게 됐다.”
“불쌍하다니,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말이냐?”
“다른 방법이 없잖아.”
친일파 후손으로 뱃속에서부터 부르주아인 그는 돈 1원을 먹고 징역을 갈래 안 먹고 안 갈래 하면 1원을 먹고 징역을 갈 친구다. 그 수전노 친구는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사람이다. 만약 네가 그 기사를 쓰면 그는 나를 죽일 것이다. 그는 벌떡 일어서 나가버렸다. 혼자 차를 마시고 다방을 나오려 할 때였다. 돈을 한 뭉치 싸들고 와서 내 앞에 꿇어앉았다. 나는 본체만체 와버렸다. 그날 밤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농협 조합장이 우리 부부가 사는 단칸방에 술이 만취가 되어 누워 잠들었는데 머리맡에는 음식물 한 바가지를 토해 놓고 오줌을 싸서 방바닥이 흥건했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어렵게 당선된 조합장이다. 기사를 쓰면 조합장 친구에게 죄인이란 생각이 가슴을 쳤다. 기사를 안 쓰겠다는 각서를 쓰고 그 친구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2년 후였다. 내가 부친상을 당했을 때였다. 그때 서민들의 부조금은 3천 원, 조금 생활이 났거나 정이 다른 사람들은 5천 원을 부조할 때였다. 그동안 결별하고 지내던 오토바이 친구가 문상을 와서 부조금 3천 원을 하고, 농협 조합장은 2만 원을 했다.
그날은 영주역 앞 중국인이 경영하는 중국요릿집 송죽루(松竹樓)에서 최현우 영주전문대학장이 내는 코스요리를 먹으러 2층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같이 가던 강신학 문화원장이 내 옷을 잡아당겼다.
“저 사람이 김계원 장군이 아닌가.”
허름한 점퍼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홀로 앉아 자장면을 먹고 있는 사람은 며칠 전 일등병으로 강등돼 출소한 김 장군이었다. 휘장이 달린 육군 참모총장 정복을 입었을 때의 그 당당한 모습은 간 곳이 없다. 서울행 완행열차를 탈 모양이다. 그 후 김계원 장군은 세월을 잊고 살았다.
오토바이 사건의 비밀은 나 혼자 가슴에 담아두고 평생을 살았다.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동생 김계삼 친구에게도 말을 할 수 없다. 그 친구가 알면 그냥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오토바이 대리점 친구와 농협 조합장 친구와 김계삼 친구도 다 하늘나라로 가고 없다. 군사력 세계 5위, 세계 10위권의 경제성장의 이 나라에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2. 칠전팔기의 국회의원 박용만
50여 년 전 일이다. 영주서 서울 가는 중앙선 밤기차를 탔다. 변혁기의 조국은 무엇이고 역사는 무엇이며 인생은 무엇인가가 가득한 머리로 청량리역에 내렸다. 지금 KTX는 2시간이면 닿지만 그때는 꼭 7시간 반을 가야 했다. 나는 M신문사의 기자로 취재 지시를 받고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가택 연금 중에 있는 신민당 박용만 국회의원(영주 봉화 영양군)을 찾아가는 길이다. 앉을 자리가 없는 콩나물시루 같은 담배 연기가 가득한 기차 안에서 밤잠을 못 자고 7시간 반을 서서 가야 했다. 박용만 전 의원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초대 이승만 대통령 때 28세로 경무대(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재능이 총명한 칠전팔기의 국회의원에 당선이 됐다. 남들은 말이 좋아 칠전팔기의 국회의원이라 했지만 제3대 국회의원에서 제9대까지 일곱 번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8번째 제10대에 당선된 국회의원이었다.
그때 국회의원 선거는 설 추석 명절이나 선거 며칠 전 밤에 고무신 한 켤레씩을 몰래 돌려야 하고, 장날이면 시장 공간에 공약을 신문지에 써서 붙이고 가마솥을 걸어 놓고 소고기국밥에 막걸리 한 잔씩을 유권자인 장꾼들에게 대접하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당선된 국회의원인데 당선 6개월 만에 신군부에 의해 국회가 해산되고 가택 연금이 된 상태였다.
그때 선거는 올빼미표, 쌍가락지표, 4인조표 등 3·15 부정선거가 터질 때였다. 박용만 후보는 낙선 후 기자회견 때 ‘영주군 부석면 남대리 1, 2투표구와 봉화, 영양군 여러 투표소에서 박용만 표가 한 표도 안 나온 곳이 많다며 늙은 노인들이 잘못 찍어도 한 표는 있을 텐데 한 표도 없는 부정선거다’고 호소했다.
박용만 전 국회의원 집은 동대문 이문동에 있었다. 부인이 아담한 소아과 의원 원장이다. 부인이 병원을 해서 돈을 벌어 뒷받침을 하니 칠전팔기의 국회의원이 된 것이었다. 칠전팔기 동안 나와 정분이 쌓인 박용만 전 국회의원은 무척 반가워했다. 재승다박(才勝多博)한 그는 천성이 총명이 덕을 앞서는 입이 빠른 사람이었다. 말이 막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김계원이가 무슨 죄가 있는가. 지 어미가 돌날 도리도리를 안 가르친 죄밖에 없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우리나라 풍습은 어린이 돌날 돌상을 차린다. 붉은 돌띠를 매고 돌상에 실타래와 돈, 돌떡과 문방사우를 차려 놓고 어린이가 무엇을 먼저 잡는가를 지켜본다. 붓을 먼저 잡으면 문필가가 된다는 등 장래를 예측하며 잼잼, 짝짜꿍, 곤지곤지, 도리도리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말뜻은 궁정동 술자리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눈짓을 했을 때 박 대통령이 아닌 차지철 경호실장을 쏘겠다는 것으로 알고 김 비서실장이 도리도리를 안 하고 고개를 끄덕끄덕한 비유를 말한 것이다.
박용만 전 국회의원과 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 고향은 정감록 비결파들이 사는 소백산 밑 풍기 금계동이다.
“그런 등신 머리가 어디 있는가. 이왕지사 그래 된 바에는 이제 대한민국은 자기 손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게 무슨 육군 참모총장 출신인가.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는 그런 큰 변고가 일어났으면 국가 사태의 중대성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운명한 대통령은 병원에 모셔두고 청와대로 들어가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하고 경호원들에게 집총을 시켜 국무회의실 문을 잠그고 대통령의 서거를 선표하고 비서실장이 국무총리와 함께 국가비상대책위원장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정을 수습하겠다 하고, 국방장관이나 특전, 경비사령관을 지켜보며 의의가 있는 국무위원은 손을 드시오 하고 지시한 경호원들이 공포탄을 몇 발 탕탕 쏘면 그만이 아닌가. 전두환이 있는 보안사 국군 방카로는 미쳤다고 가는가.”
내가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목소리를 높여 박용만 식의 속사포를 또 쏜다.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칼자루를 스스로 전두환에게 빼앗긴 것이 아니라 갖다 바치고, 감옥에서 하느님 목숨만 살려 주이소, 좋은 일과 궂은 일, 삶과 죽음이 모든 것이 주님 뜻에 있사옵니다, 하느님도 그런 등신의 가슴 아픈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말일세.”
박용만 의원의 가슴에 쌓인 말은 끝이 없었다.
“그저께는 김대중 당대표 집에 김길동 의원과 함께 가지 않았는가. 이희호 여사가 차반을 들고 나왔기에 내가 사모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하니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녀가 나가버렸을 때 동행한 친구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어. 그리고 김대중이와 작별하고 그 집 문 앞을 나왔을 때 친구가 말했어.”
“자네는 입이 너무 빨라 탈이야.”
“무슨 소리야?”
“요즘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이하고 살지 않는가.”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이하고 살다니, 남편 부완혁이는 어떻게 하고….”
“동거하다가 헤어지고 지금은 대중이하고 살아.”
“그럼 대중이가 친구 부인을 빼앗았단 말인가?”
“김대중이가 빼앗은 게 아니라 이희호가 좋아서 왔겠지.”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 부완혁은 ‘인간이 하나의 동물보다 나은 게 없다’고 하는 사람이다. ‘나는 철저한 속물이다’와 신토불이 무교회주의자 함석헌과 같은 이 땅의 철학자였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사상계』 장준하가 박정희의 비판적인 기사 사건으로 발행인 자리를 쫓겨나자 부완혁이 맡아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김지하 「오적」 시를 실었다가, 김지하, 부완혁, 김승균, 김용선(편집장)은 구속되고 『사상계』는 폐간됐다.
박 대통령이 군사쿠데타 후 나라를 다 끌어안았으나 명동성당 김수환 추기경과 평화주의 무교회주의자 『씨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은 안지 못했다. 『씨의 소리』를 발행 못하고 안목을 넓히라고 세계 일주를 시켰는데 1년 만에 귀국할 때 떼가 꼬질꼬질한 한복 한 벌과 『사상계』 한 권을 달랑 들고 김포공항에 내린 사람이다.
박용만 의원은 동행한 친구에게 또 물었다.
“김대중이 부인 최 여사는 어떻게 하고…?”
“별거해 사는지, 모르지 뭐.”
“더럽게 사는 인간들이군!”
“우리는 더러운 인간이 아닌가 뭐. 우리가 더 더럽게 사는 속물의 인간이 아닌가. 그놈의 공천 하나 받으려고 대중이 앞에 가서 이렇게 굽실거리며 온갖 아부를 다하고 있지 않는가.”
그 후 김대중의 본부인 최 여사는 원래 어디가 아팠는지 아니면 속이 상해 죽었는지 곧 죽고 말았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자 이희호 여사는 이 땅의 모든 영화를 누리며 노벨평화상 시상식장 등 남북을 오르내리며 국모로 숭앙을 받았다.
박용만 의원은 그 후 집권 당시 서울에서 공천을 받아 4선의 국회의원의 영화를 누리다가 자업자득으로 비참한 종말의 생을 마감하고 이승을 떠났다.
3. 대자유(大自由) 문인 송지영
우인(雨人) 송지영(1916-1989)은 비가 쏟아지는 서울 거리를 우산을 안 쓰고 비를 맞으며 땅이 좁다 하고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그는 대자유인이었다. 공·맹자 동양사상에서 성인의 경지에 오른 군자를 대자유인이라 했다. 그는 죽을 때까지 돈은 몰랐다. 평생 돈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니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않았다. 오가다가 술이 고프면 그냥 아무 집에나 들어가 먹고 그 홀에서 마신 사람들의 술값도 자기가 다 내겠다고 사인을 하고 돌아오면 그 이튿날 부인이 가서 갚아주어야 했다.
온화, 겸손하고 지식이 광범위하고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선비 속의 예인이었다. 다정다감하고 풍류를 즐기고 세상을 사랑했다. 조용하고 말이 없고 인화한 사람, 양심을 지키며 사는 지식인인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다. 부모님이 학교를 안 보내주니 소백산 속에서 혼자 사서삼경 제자백가를 독파하고 선비들은 대개 오만한데 송지영에게서는 그런 것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붓글씨는 왕휘지의 일필지휘였다. 언론인이고 문인이며 한문학에 통달한 천의무봉의 문필가. 천진난만한 웃음은, 어린이같이 무욕, 무심한 다정다감한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에 하이쿠나!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야, 먼데서 벗이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가 인생의 전부였다. 달을 건지러 물에 뛰어드는 이백(李白)과 같이 구름에 달 가듯이 사는 나그네 송지영은 여자들은 모두 천사라고 했다. 천계(天界)의 신선이 잠시 지상에 내려와 인간과 살다가 가는 천사라고 했다. 부인에게도 늘 천사로 대했다.
파란만장한 그 많은 곡절을 넘어서/ 이제 먼 길 혼자 가는 듯한/ 고희 언저리 당신의 일월/ 풍운에 닦여 백발이 훨훨/ 만고의 선인 같은 모습/ 당신 같은 도인을 본 일이 없습니다. (1986. 3. 13. 조병화의 시)
정감록 비결파들이 사는 풍기 금계동 나주 김씨 가문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후손들을 일본 학교에 보냈고 교회를 짓고 풍기인견직 공장을 짓고 하는데, 여산 송씨 가문은 후손들을 절대로 왜놈 학교에 안 보냈다. 송지영은 소백산 연화봉 계곡에 초막을 얽고 초근목피로 의식을 해결하며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문학작품 모집에 「火田民들이」 입선, 그 후 수필과 기행문을 각종 신문에 발표하며 최승만, 변영로, 이무영 작가의 칭찬을 받았고, 설의식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부터 기자로 채용되어 1939년 만주 신경 특파원, 중국 남경 특파원으로 남양대학을 졸업하고 항일운동을 하다가 일본 장기(長崎)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북한 자본금으로 창간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의 친분 관계로 편집국장을 맡았다가 5·16 쿠데타 정부에서 발각돼 조용수 사장과 함께 사형 언도를 받았다. 조용수 사장은 형이 집행되고, 송지영은 국제펜클럽 본부 앰네스터 국제사면위원회 진정으로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돼 징역 8년 5개월 만에 출소한 우리나라에서 징역을 가장 많이 산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후 1972년 조선일보에 장편 역사소설 「천풍(天風)」을 연재하고, 1979년 한국문화예술위원장이 되고, 1980년 민정당 제10대 비례대표 국회의원, 1984년 한국방송통신공사 이사장을 역임했다. 작품은 『천풍』 5권을 비롯해 『그 산하 그 시절』 『대해도』 『청등야화』 『우수의 세월』, 유고집 『우인 일기』 등을 남겼다.
송지영 한국문화예술위원장 때 전주 대사습놀이와 남원 춘향제, 정읍 정읍사, 영월 단종문화제 전통놀이를 발굴해 민속문화재로 지정했다. 고향 영주에도 무슨 전통문화제 놀이를 하나 발굴해야 한다는 요청을 받았으나 문화예술인들과 행정의 무성의로 국가지정문화제로 지정받을 만한 ‘순흥 초군청놀이’와 ‘덴동어미’ 등 하나도 지정받지 못했음이 가슴 아프다.
이런 에피소드도 있다. 풍기 고향의 박용만 국회의원의 형 박용구 음악평론가를 오랜만에 만났을 때 가슴에 국회의원 배지를 단 송지영이 반가워 악수를 하려고 손을 내밀자, 박용구가 손을 탁 치며 악수를 거절했다. 지조를 꺾은 더러운 손과는 악수를 안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악수는 안 해도 송지영이 술을 한잔하자 하고 청진동 원조 선짓국 집으로 들어갔다. 송지영이 “내가 프랑스 예술계의 초청을 받고 다녀오려고 하니 연좌제로 국회의원 4명의 신원 보증서를 받아오라고 하기에 그것이야 뭐하고 찾아간 친구 국회의원들이 하나같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다 거절했다네. 그래서 그때 프랑스를 못 다녀온 한이 오늘의 나에게 국회의원 배지를 달게 했는지도 모른다”고 박용구를 잡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송지영의 동생 송지중은 중등 영어 교사였다. 그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고 사는 사람이었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 사람을 그립게 했다. 공자의 일관지도(一貫之道)와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장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영어로 번역하며 밤낚시를 즐기는 사람이다. 낚시의 초보인 내 낚시까지 챙겨 놓고 토요일이면 부른다. 금계저수지와 순흥 단산 저수지 등을 찾아 강태공의 곧은 낚시를 드리워 놓고, 새소리를 듣는다. 죽은 사람의 한 많은 영혼이 새가 된다는 새들이다. 종이와 책을 만들어 주는 나무가 꾸는 꿈과 대화를 한다. 고기야 잡히든 말든 잔잔한 호수의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날리며 밤산새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밤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헤아리며 우리는 술잔을 기울였다. 때로는 잡은 고기 붕어, 잉어, 메기, 쏘가리 매운탕을 끓여 안주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준비해 간 술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이며 별을 헤는 밤을 보냈다.
그러던 송지중은 어느 날 갑자기 송지영 조선일보 논설실장 형이 있는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때 직업이 없는 나는 서울을 자주 오갔고, 불러내면 중구 태평로 조선일보가 있는 부근으로 오란다. 뭘 하느냐니까 자유직업이란다. 학원 영어 강사를 해도 교사 봉급 두 배가 넘는 서울이란다. 다방에서 만나 차 한잔을 하고는 대폿집으로 간다. 나는 그때 송지영 조선일보 논설실장을 자주 만났다. 머리 두상이 다른 사람의 두 배나 큰 송지영 실장이 들려주는 얘기는 신통방통했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남녀 공동 목욕탕의 풍경, 일본의 며느리가 기모노를 입고 시아버지 앞에 앉을 때 꼭 속살 허벅지를 보여주는 예의와 형이 죽으면 형수가 시동생을 남편으로 가계를 이으며 사는 일본, 자기 집 개가 죽으면 묘원에 무덤을 쓰고 슬피 울지만 부모가 죽으면 장례식장에 의뢰해 장례를 치르고 자식은 가보지도 않는 짐승 같은 미국이란 나라, 요즘은 자동차 비행기가 발달하여 서로 만날 수 있지만, 그때는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까지는 몇 십만 리나 되는 먼 길을 몇 달을 가야 하니 한 번 헤어지면 부모 자식 간에 서로 죽을 때까지 못 만나고 죽는다는 얘기였다.
하루는 내가 소설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을 아는 송지영 논설실장이 조선일보에 연재 중인 역사소설 「천풍」에 대한 인기가 어떠하냐고 물었다. 나는 한마디로 ‘별로’라고 내 마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젊은이들에게는 인기가 없다고 내 생각을 덧붙였다. 송지영 논설실장의 얼굴이 벌게졌다가 하얗게 변하는 것이었다. 대자유인 군자 대인도 자기 생각과 맞지 않는 말을 때는 자제력을 잃고 저렇게 마음이 흔들리는 것인가. 아이구나! 잘못했구나 후회했다. 한번 뱉은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다. 나는 그 말 한마디 잘못한 것을 평생을 두고 후회하며 속죄 드리는 마음으로 살았다. 후일 생각하니 남의 작품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평을 한다는 것은 그 작가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다는 것을. 그때 인기가 만발한다는 칭찬하는 말을 하였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 며칠 후 조선일보사 지방 주재 기자 모집이 신문에 났다. 찾아갔다. 나는 소설을 쓰며 살고 싶으나 글을 써서는 가족을 먹여 살릴 길이 막연했다. 기자는 글과 연관성이 있는 직업으로 먹고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저를 조선일보 지방 주재 기자 모집에 추천해 주셔요.”
“자네는 안 되네. 지방 주재 기자는 좌충우돌 반건달 비슷해야 하는데 자네는 성품이 너무 온유해. 본사 기자 시험을 한번 치게.”
100대 1의 본사 기자 시험에 나는 응시 자격도 없다. 내가 만일 그때 송지영 논설실장이 「천풍」 소설에 대해 독자들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칭찬을 하였더라면 오늘 송지영 논설실장이 웃으며 추천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논설실장실을 물러나왔던 그날의 생각을 평생 지울 수 없이 살았다.
단군의 피를 받은 정감록 남사고 비결파 후손들이 사는 풍기 금계동 마을 사람들은 자손들이 부모의 뜻을 이어받는다. 밥상머리 교육이 수천 년을 이어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 정치적 변혁기에도 양심을 잃지 않는 인성들이다. 천성으로 마음씨가 고운 사람의 향기를 풍긴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 이 땅에서 민심이 천심으로 살다가 간 이런 인물들을 다시 그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