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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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길리 그의 집에 온 지 5일째다. 며칠을 쉬고 싶어 그의 펜션으로 왔다. 인근에 대종천가 산자락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알록달록한 집들이 정겹다. 그의 집은 대종천이 바다로 이어지는 끝나는 부분에 있다. 여름철이면 붐비던 주변 캠핑장도 텅텅 비어 있고 바닷가도 사람들의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다.
그가 학교를 퇴직하고 집으로 들어오면서 대대로 살아온 헌 집을 헐고 펜션을 지었다. 그의 집은 명목은 펜션이지만 강변 전망대나 마찬가지다. 2층은 고객용 객실이고 1층은 생활 공간이다. 여름 한철을 제외하고는 찾아오는 손님이 별로 없다고 한다. 텃밭 한구석엔 공예품을 만들어 굽는 작은 가마까지 갖추어진 집이다.
내가 1년에 한두 번씩 이 마을에 오기 시작한 것이 벌써 오륙 년이 되었다. 가을에 오기도 하고 겨울에 오기도 한다. 어떤 해는 여름과 겨울에 두 번이나 오기도 한다. 그가 퇴직하고 여기로 들어온 지도 십 년이 훨씬 넘었다. 간혹 바쁜 일정이 있어 내가 철을 조금 넘기면 그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김한도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경주의 한 역사 동우회에서였다. 영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물리 교사를 하다가 경주시내의 학교로 전근하고 나서, 나는 서라벌 유적지에 대한 관심도 있고 해서 향토문화연구회라는 모임에 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김 선생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 여섯 살이나 연배였는데 묘하게도 내가 태어난 외갓집이 있는 구길리 바로 앞마을 봉길리 출신이었다.
이 모임에선 봄과 가을철에 달빛 역사 기행이란 행사를 정기적으로 열었다. 관심 있는 시민들을 모아 음력 5월과 10월 보름밤에 모여 유적지를 탐방하며 역사를 재음미하는 행사였다. 참가자들 중에는 머리가 희끗한 60대 향토사학자도 있었고 문화원 회원, 시인, 교사, 회사원 등 그 구성원이 다양했다. 참가자들은 반월성에 모여서 달이 뜨면 현장으로 걸어가면서 서라벌 곳곳의 문화재를 달빛 속에서 관찰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15년이 넘었다.
달빛 역사 기행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성격 때문에 청춘 남녀들이 쌍쌍으로 참여는 일이 많았다. 남산 자락의 비탈길을 넘으면서 모두가 달을 보며 늑대 소리를 내며 웃던 기억도 있고, 또 한 번은 선도산 비탈길에서 내가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져서 3개월 동안 휴직하는 일도 있었다.
그와 함께했던 기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반월성에서 감은사까지의 옛길을 탐방하기 위해 마련한 추령 넘어 6십 리 달빛 역사 기행이란 행사였다. 달빛 속에 토함산을 넘고 대종천을 따라 걸으며 그곳의 숨은 역사를 음미해 보는 행사였다.
달이 뜰 무렵 반월성에서 출발하여 황룡사지를 둘러보고, 북천을 따라 올라서 토함산 추령을 넘어 대종천을 따라가서 감은사까지 이르는 길이었다. 관해동재 계곡에서 내려오는 장항천의 물과, 기림천 물과 야부내 골짝 물이 모여 안동을 거쳐 내려오는 물이 와읍에서 시무내와 합쳐져서 어일 들판을 지나서 흐르는 물이 대종천이다.
우리가 장항사지 앞에 이르렀을 때 3층 석탑과 부도 인근의 어느 사찰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서른세 번이나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산자락을 울리며 여울지듯 여운이 길었다.
달빛 속에 기암절벽과 강을 굽어 돌던 길은 환상적이어서 우리가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서라벌의 어느 산간 마을이나, 아니면 그보다 더 오래된 어느 시대에 사람이 되어서 그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김한도 선생은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서라벌 역사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어느 산의 사찰이나 석탑 유적지는 말할 것도 없고, 석탈해 왕의 도래지나 바다를 건너와서 신라인이 되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많았고, 토함산 주변의 산과 들을 구석구석까지도 훤하게 알고 있었다. 정사에 밝혀진 것 이외에도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나 전설까지도 훤하게 꿰고 있었다. 나는 그를 통해서 미처 알지 못했던 고대의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들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날 밤 우리는 달이 중천에 뜰 무렵 감은사 석탑 앞에 도착했다. 달빛 아래 석탑은 신비스러웠고 큰 능선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들이 바다와 강에 발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밤 풍경이 환상적이었다. 앞산 왼쪽에 있는 마을이 구길리였다. 그곳을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내가 태어난 외갓집이 있던 마을이기 때문이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대종천은 달빛 속에서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 그 줄기가 들녘 너머로 아스라이 펼쳐져 있었다.
그날 이야기 끝에 그의 생가가 있는 곳이 바로 이웃 마을 봉길리란 것은 알았다. 그가 손으로 가리키던 산자락 아랫마을이었다. 나는 죽마고우를 만난 것 같이 놀랍고 반가웠다. 바로 몇백 미터 간격을 두고 인접한 구길리 작은 마을이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그 마을은 어머니가 태어나신 곳으로 나도 외가에서 태어났다. 외삼촌이 돌아가시고 그곳에 살던 외사촌들이 도시로 나가면서 집이 팔리고 난 뒤에는 그 마을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달랐다. 자신이 태어나서 자란 친정집이 팔려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늘 서운해했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집이 되어 버린 친정집을 보기 위해 가끔씩 이 마을을 둘러보러 오시곤 했다. 일 년에 두 번씩은 울산에서 이곳으로 오곤 했다. 음력 4월 초파일과 동지 때였다. 그때는 한 번도 빠짐없이 불공을 드리려 이곳으로 왔다. 이른 아침에 울산에서 완행버스를 타고 경주로 가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추령을 넘어 기림사와 골굴사에 들러 불공을 드리고 감은사 석탑으로 가서 탑돌이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구길리 옛 친정마을을 둘러보고 왔다.
어머니가 가끔씩 고향 이야기를 할 때는 아득한 추억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 말소리가 애틋했다. 눈가에 이슬이 맺히면서 이야기하던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가장 자주 했던 이야기는 강물 속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대한 것이었다. 나의 뇌리에 외갓집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이곳에만 오면 어머니가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곤 한다.
내가 이곳에 오는 것은 바로 그런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집이 눈앞에 보이는 그의 펜션에서 시간을 보내면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는 것 같기도 하고, 외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 마음이 여유롭고 포근해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대종천가 구길리에선 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처녀 때 그 종소리를 여러 차례 들었다고 했다. 어머니만 들은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다 들었다고 했고, 그 소리에 대해 전해져 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은 모여서 “어젯밤 그 소리를 오랜만에 들었네”라든가, “그래요, 웬일인지 몇 번이나 그 소리가 들리더군요”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덧붙여 “아이고, 종소리가 들렸으니 마을에 좋은 일이 있을 모양이재”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 소리가 여러 번 들렸던 그해에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가 감은사 석탑에 소원을 빌고 기림사 법당에서 밤새 기도를 드릴 때는, 어디선가 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고 했다.
종소리에 대한 이야기는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전해져 왔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까마득한 옛날 어느 산사의 범종을 일본으로 가져가다가 물속에 가라앉아 슬프게 소리를 낸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천 년 전 몽고군이 서라벌에서 약탈해 가던 범종이 물속에 가라앉아서, 아픈 가슴을 토해내듯 비바람에 물결이 치면 딩-딩- 우는 소리를 낸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는 나도 어려서부터 많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마 이곳 사람치고 그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김 선생도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면 그것이 단지 마을에 전해져 오는 설화이거나, 아니면 사람의 기억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왜곡 저장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전해 들은 이야기를 실제로 들은 것으로 잘못 기억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그날 밤 달빛 기행의 야영지는 봉길리 해변이었다. 감은사지에서 1시간은 좋게 머물다가 대종천이 바다에 가닿는 하천변 모래밭에 텐트를 쳤다. 모래밭에 텐트를 치고 피워 놓은 화톳불에 둘러앉아 휴식을 취하다가 나는 종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김 선생님은 혹시 그 종소리를 들어보셨나요?”
나도 몰래 불쑥 말을 꺼내며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실제로 들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들었다는 사람들도 설화를 오래 전해 듣다 보니, 실제로 그 소리를 들은 것으로 왜곡 기억된 것은 아닐까요?”
“그 소리가 설화라고 하기엔 실증이 너무 구체적인 것 같아요.”
“실증이라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는 의아한 표정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 소리를 들었다는 사람의 말은 그 정황이 너무 구체적이고 그 소리를 형용하는 말이 너무나 일치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들었다는 시기가 동시적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의 말은 다수가 동시에 같은 소리를 들었다면 그 자체가 과학적인 증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하긴 그랬다. 어머니가 한 말도 그냥 설화라고 하기엔 그 정황이 너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들렸다. 그 종소리가 들리고 마을에 연거푸 경사가 났다라고 했던 말을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 묘한 일이었다. 그 소리의 실체에 대한 어머니의 믿음은 확고했고 동네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김 선생도 그 소리를 직접 들어보지는 못했으나 그 소리의 실체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 보였다.
“그것이 환청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잠시 그 소리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시 그의 생각을 물었다.
“환청이란 청각 신경의 이상이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한 사람의 경우라면 환청일 수도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환청이 일어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오랜 세월 동안 말입니다.”
“집단 최면의 효과란 것도 있지 않습니까?”
“거의 수백 년, 아니 천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이 집단 최면의 상태에 빠지기란 과학적으로 어려운 일 아닙니까?”
그는 국어 교사답게 말에 조리가 있었다.
“그렇다면 최근에 와서 그 소리가 왜 사라진 것일까요?”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귀를 잃어버린 거라고 봐야겠지요.”
묘한 뉘앙스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뭔가 깊은 뜻이 있는 말 같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종소리에 대한 그의 생각은 어머니의 믿음과 다르지 않아 보였다.
어머니의 말에는 실제 이상의 믿음이 깔려 있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그 은은한 종소리는 단지 귀에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안온하고 황홀한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소리를 따라서 순심이가 가버렸는지도 모른다….”
으레 그랬듯 이야기 끝에는 꼭 순심이 이모에 대한 말을 했다.
“어디에선가 그 종소리가 울려 그 아이의 마음을 불렀을 것이다.”
순심이 이모는 외할아버지가 북천변에 버려져 있는 아이를 주워와서 양딸로 삼았다는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나이가 나보다 네 살밖에 많지 않아서 어릴 적에 외가에 가면 함께 강가에서 놀곤 했던 정이 많은 누나 같은 분이었다.
어느 때인가 밤새 간간이 종소리가 들렸다는 그해 순심이 이모는 처녀의 몸으로 출가해서 법문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 종소리가 순심이 이모의 귀에는 분명 자신을 부르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라고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종소리를 다시 한번 듣고 싶다고 했다. 나도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는 그 소리를 듣고, 만나고 싶어 하는 순심이 이모를 만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집이 팔리기 전에는 어머니는 외할아버지나 할머니 제사가 있는 날에는 조카 내외가 대를 이어 살고 있는 친정집으로 갔다. 한 해도 빠진 적이 없었다. 나는 차로 구길리까지 모셔다 드리며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는 그 종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를 바랐다. 어머니도 그런 마음이었겠지만 한 번도 그 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 들은 소리라면 나이가 드셨다고 그 환청 같은 소리를 못들을 리는 없었다.
반월성 아래 남천변에 새 박물관이 건립되고 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봉덕사 신종을 그리로 옮기던 날, 어머니는 그 신종에 연결된 긴 띠를 잡고 뒤를 따랐다. 그때 그 인근의 여인들은 말할 것 없고, 멀리 대구, 안동, 영덕에서까지 와서 거리를 가득 매운 인파들이 신종을 지켜보며, 염불을 외우고 무사히 옮겨지기를 빌면서 뒤를 따랐다. 어머니는 그날 밤 꿈에서 처녀 시절 들었던 그 종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야야, 참으로 신통도 하재. 그 종소리가 어찌 그리 똑같이 들렸는지 모르겠다.”
어머니는 비록 꿈에서지만 다시 들은 그 종소리가 예전 달밤에 들었던 그 소리와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실제적인 경험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믿고 있었다. 어머니의 감동은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좋은 일이 있을 거다. 부처님의 은덕이 있을 거다.”
종소리가 부처님의 소리와 다르지 않고, 부처님의 현신이라고 믿고 있는 어머니의 마음을 나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해 나는 결혼을 했다. 몇 번이나 선을 보아도 배필을 찾지 못했는데, 어머니가 그런 말을 하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외숙모가 중매한 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로 나는 어머니의 믿음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머니의 믿음을 내가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마음과 믿음이 그대로 배어나는 표정과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나도 세상사에 쫓기다 보니 차츰 어머니에게 가치로웠던 것들이 나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고, 어머니가 했던 말들에 대한 믿음도 희미해졌다.
이렇게 희미해진 관심을 다시 불러준 것이 바로 김한도 선생이었다. 어머니의 믿음이 종교적이라면 김 선생, 그의 믿음은 분석이었다. 돌고 돌던 이야기는 다시 종소리로 돌아왔다.
“이곳으로 들어온 지도 몇 해가 되었는데, 혹시 한 번이라도 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습니까?”
“들은 것 같기도 하고, 못 들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이 지금 내가 그동안 노력해 오고 있는 이유입니다. 노력이라기보다는 정성이라고 해야겠지요. 정성이 없는데 소리가 들리겠습니까. 언젠가 듣게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봉덕사 신종이든 황룡사 대종이든 소리는 같을 수밖에 없겠지요? 신종을 제작할 때 아이를 바쳤다는 인신공양 설화는 어떻게 보십니까?”
“박 선생님, 신종을 만든 분의 세 분이 모두 박씨 성을 가진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혹시 박 선생의 조상이신지도 모릅니다. 그분들도 다 인명을 소중히 여긴 분들이지 않겠습니까.”
그가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의미 있게 들렸다.
“네? 박씨 성이라뇨?”
나는 다소 의아스런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종신에 그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듣고 보니 놀랍네요.”
“종(鐘)이란 말이 쇠금(金) 변에 아이 동(童) 자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어쩌면 설화의 출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글자를 보면 그 설화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고 분석적이었다.
“신종은 세계 어느 나라 종보다 여운이 깁니다. 그 긴 여운은 마치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여운이 긴 것은 저음에서의 맥놀이 현상 때문이지요. 대칭 속의 비대칭 구조에서 일어나게 되는 특이한 현상이지요. 외형상 완벽할 정도의 대칭을 이루고 있지만 음파가 비대칭을 이루는 묘한 특성 말입니다.”
그의 말이 놀랍게 들렸다. 그의 말은 매우 체계적이고 설득력 있게 들렸다.
“종 위에 나 있는 구멍인 음관을 과학적으로 말하면 고주파가 빠져나갈 수 있게 한 장치이지만, 그것은 빠져나간 소리가 천상으로까지 퍼져나가게 하는 통로이며, 종신 아래에 있는 울림통은 울림을 하는 길고 멀리 가게 하는 장치이지만 부처님의 소리가 땅밑에까지 퍼져나가는 염원이 담긴 장치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종소리를 찾는 데 매달린 사람답게 종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그는 종에 대한 것을 알려고 노력한 사람답게 매우 깊은 것을 알고 있었다.
“황룡사 대종이든 감은사 종이든 이 바다에 수장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가 바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렇다면 몇 차례나 수중 탐사를 했는데도 흔적을 찾지 못했을까요?”
나는 이십여 년 전에 국립경주박물관과 문화재청에서 했던 탐사를 떠올리며 물었다.
“아, 그것 말이지요.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잠수부와 수중 스쿠터를 내려보내 탐사하였으나 수심이 깊고 시야가 흐려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때의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한두 차례 공식적인 수중 탐사가 있었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마 해저 지형 때문이라고 보아야겠지요. 동해는 수심이 깊고 해류의 흐름이 빠를 뿐만 아니라 뭍으로부터 많은 토사 유출로 인한 해저 환경의 변화도 많은 곳이니까요.”
“그럴듯한 말이긴 합니다만….”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말을 덧붙였다.
“우리가 서역에서 보았던 그 많은 유물들처럼 말입니다. 전날 보였던 그 유물들이 밤이 지나고 다시 가면 모래바람에 묻혀 찾을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말은 나의 의구심에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서역 탐방은 몇 해 전의 일이다. 향토문화연구회가 결성된 20주년 기념 행사로 서역을 탐방하게 되었을 때 그와 동행했다. 겨울 한파가 지나고 곧 봄이 올 것 같은 2월 말이었다.
우리 탐방단은 타클라마칸 사막의 카슈카르에서 동쪽 호탄을 거쳐 쿠차까지 이동하는 경로를 택했다. 장정이었다. 호탄에서 누란까지, 그리고 다시 그곳에서 사막의 남쪽 타림 분지에 위치한 쿠차까지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어떤 구간은 트레킹을 하며 7박 8일을 모래바람 속을 헤매고 다녔다.
사막은 그 위용이 대단했고 길은 망망했다. 모래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잠들었다 깨어난 누란의 미녀는 살아 있는 여인처럼 생동적이었지만, 모래가 운다는 명사산에선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잠시 모습을 드러냈던 옛 왕국의 불상과 흔적들은 밤이 지나고 다시 가보면 모래바람에 묻혀 흔적을 감추고 없었다. 놀랍고도 신기했다.
종소리도 그런 것이었을까.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다 들었다는 그 종소리도 사막의 그 불상들처럼 그렇게 흔적을 감추어버린 것일까. 여정을 마치고 쿠차를 떠나오는 날 밤 나는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서역 탐방에서 돌아온 몇 개월 뒤 나는 마치 사막 속에 어떤 유적지를 찾아가듯이 다시 불성암을 찾아 나섰다. 순심이 이모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김 선생은 나에게 경주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는 크고 작은 사찰들의 위치를 세세히 알려 주었다.
어머니의 여동생 순심이 이모를 보지 못한 것이 삼십 년이 넘었다. 이모가 불가에 출가하고는 보지 못했는데 그 세월이 그렇게 되었다. 혼기의 나이에 불가에 출가했으니 세월로 치면 삼십오륙 년이 된다. 그녀를 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나도 나이가 들면서 이모에 대한 궁금증이 커져갔다. 이모를 만나고 싶었다.
사람들은 순심이 이모를 데려온 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외할아버지가 밖에서 얻은 딸아이라는 것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나와는 네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아 누나 같은 분이었다. 처녀의 몸으로 가야산 도불사에 출가했다가 이후 어느 산에 들어가서 작은 암자를 세웠다는데, 순심이 이모가 세운 그 암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모는 왜 출가하였을까 하는 것은 나의 오랜 의문이었다. 마음에 어떤 내려놓지 못한 무거움이 있었기에 꽃다운 나이에 출가하여 법문에 귀의하였을까. 비구니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수록 이모를 더 찾아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이모가 어린 시절 들었던 종소리에 이끌리어 출가하였을 것이라고 했는데, 암자의 이름을 불성암(佛聲庵)이라 한 것으로 보면 소리란 말에 어떤 비밀이 들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과연 이모의 출가는 종소리와 연관이 있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불성의 본질을 좇아서 속세를 떠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오방산, 부수산에서 단석산, 운문산, 멀리는 보현산, 청량산에 이르기까지 산속을 헤매며 암자를 찾아다녔지만 불성암이란 암자를 찾지 못했다. 어느 날 나는 바다 가까운 산들에서 찾아볼 생각으로 감포 쪽으로 가다가 전동리 옥수골에 있는 옥수사에 들렀다가 후덕하게 생긴 비구니 한 분을 만났는데, 그분은 불성암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잠시 있던 비구니 한 분이 옥수사에 머물다 다른 사찰로 갔다고 했다. 몇 개의 산줄기를 넘어 포항과 경계를 이루는 무장산 동쪽 기슭의 어디일 거라고 했다.
며칠이 지나고 나는 산을 올랐다. 함께 자랐던 순임이 이모가 산속 어딘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험한 산을 올랐다. 온통 수풀로 덮인 산속의 계곡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던 길이 끊겨 다시 내려와야 했던 것이 몇 번인가 하면, 날이 저물어 길을 헤매다가 약초를 재배하는 산사람의 움막에서 잠을 자기도 하면서 며칠을 헤매고 다녔지만 불성암이란 암자는 찾을 수 없었다.
어느 날 빗줄기 속에 고개를 두 개나 넘어 헤매고 다니다가 비를 피해 들어간 산중 농막에서, 약초를 캐는 한 사람으로부터 “큰 능선을 하나 더 너머 큰골이란 계곡 어디에 암자가 하나 있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찾아간 큰골 입구의 작은 마을은 산나물이나 약초를 재배하는 마을이었다. 집 앞에 앉아 약초를 다듬고 있는 한 할머니에게, 혹시 불성암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머리에 수건을 두른 그 노파는 몇 번이나 나를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불성암은 뭣 하려 찾으시오? 암자는 허물어지고 홀로 살던 비구니마저 떠난 지 벌써 몇 해인데….”
“암자가 허물어졌다니요?”
나는 놀란 표정으로 할머니를 쳐다보았다.
“그 해 여름 태풍이 잦고 홍수가 지고 산사태가 나면서, 계곡의 암자가 폭우에 유실되어 떠내려갔지요. 절은 터만 남았고, 삼일 밤낮을 빈터에 앉아 불공을 드리던 스님은 그곳을 떠났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가리키는 곳은 무장산 정봉에 가까운 위치였다. 나는 노파의 말을 통해서 이모의 법명이 혜조 스님이란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암자가 있던 산기슭 쪽을 가리키던 노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산 아래 강변 마을에도 홍수가 나서 크게 피해를 당했다는 그 해였던 것 같기도 해요. 어느 선사의 흔적을 좇아 숭산으로 간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암자가 서 있었던 곳으로 찾아가 보았다. 산사태로 무너진 축대가 보이고 흙속에 박힌 서까래도 보였다. 좀 더 위로 올라가니 두 개의 큰 계곡이 보이고, 산줄기가 뻗어내린 저 멀리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 이곳에 와서 암자를 지은 것 같았다. 암자가 무너진 빈터에 앉아 밤을 새우며 불공을 드렸을 이모의 모습이 선하게 눈에 떠올랐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을 보고 나는 산을 내려왔다. 이모가 선종의 본산이 있는 중국 숭산으로 갔다면, 마음의 손끝이 가리키는 그곳으로 가겠지만 곧 돌아와서 이곳 가까운 어느 곳에서 종소리의 불성을 체득하려 수도 정진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삼라만상이 부처님의 형상이듯이 순심이 이모에게 종소리는 부처님의 음성이었는지 모른다. 젊은 날 자신의 마음을 후려쳤던 그 종소리를 따라 법문에 귀의했다면 이모는 이곳 가까운 바닷가 어느 산사에서 그 소리를 들으려 수도하고 있을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이곳에 자주 오는 것은 이 근처 어딘가에서 이모의 자취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이모를 만나지 못했다.
그의 펜션에서 일주일이 다 되어 가는 날 저녁 무렵, 그가 나를 불렀다. 그가 몇 개월 동안 만들어 온 작은 토종(土鐘)을 가마에 넣고 불을 지피는 것을 나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취미로 일 년에 한두 번씩 토종을 구워 낸다고 했다. 그가 만든 토종은 일종의 이형 토기로 간장 종지 크기의 종 모양 토우였다. 그는 그것을 토종이라 불렀다.
가마 앞에 간단한 제수를 마련해서 고사까지 지내고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는 타오르는 장작불을 지켜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종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대단했다. 토종을 만드는 것을 시작하게 된 연유와 토종의 의미를 말하다가 이야기는 범종에까지 이어졌다.
그는 오랫동안 옛 신라의 토우와 토종을 재현하는 데 매달린 사람답게 종에 대한 지식이 해박했다.
“제 선친은 저 석탑의 신자였습니다. 자나 깨나 탑과 대왕암을 생각했으니까요.”
그의 부친은 감은사 3층 석탑과 대왕암에 대한 숭배가 대단했다고 했다. 나라를 지켜 주고 마을을 지켜 주는 대왕의 혼령이 살아 있는 석탑이고 바위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토종이 토우의 일종이라 해야겠지만, 그는 손수 만들어 구운 토종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고 했다.
“종을 만들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세상의 잡다한 일들을 다 잊는 듯 고요해지기도 하고요.”
그는 하던 말을 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탑을 지키던 선친의 뜻을 이어받는 길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말입니다.”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토종을 만들어 정성스레 가마에 불을 때는 조심스런 손길에 그의 마음이 배어나는 듯했다.
“봉길리 앞바다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용이 되어야 했던 부왕의 바다라고 해야겠지요. 기다림과 베풂의 바다, 그 은혜에 감사를 배우는 바다가 아니겠습니까. 그 기다림을 위해 탑은 천년을 하루같이 묵묵히 서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바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선친의 마음도 그와 그런 것이었습니다. 선친이 그랬듯이 나에겐 실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대종은 바닷속 어딘가에 있으리라는 믿음 말입니다.”
그의 말은 마치 기다림이 없는 믿음이 어디에 있으며, 믿음이 없는 기다림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그의 펜션에서 마지막 밤이다.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청량한 가을철이라 온산은 울긋불긋 옷을 갈아입고 강 건너 광활한 들은 온통 황금물결이었다. 낮 시간의 나직하던 물 위에 밤이 되니 달이 떴다. 대종천은 물보다 마음에 깊은 강이었다. 이곳에서 마지막 밤이라 생각하니 그 강변의 정경이 더 아름답게 보였다. 내 앞에 바다와 달, 그리고 천년 고찰의 석탑이 하나가 되어 밤은 고요하다. 그 풍경은 가히 선경이다. 만백성을 사랑했던 대왕의 마음처럼, 지순한 우리들 아버지의 얼굴처럼 달은 교교히 떠 있다. 교교한 달빛에 섞여 어디선가 어머니가 그렇게 듣고 싶어 하던 그 종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달이 창 앞에 와 있을 무렵 그는 술 한 병 들고 나의 방으로 왔다. 몇 잔의 술에도 곧 취기가 올랐다. 우린 지난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얼마는 회상에 젖은 이야기를, 그리고 덧없이 흘러간 세월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모처럼 허리끈을 풀어 놓고 술을 마시면서 간간이 창밖으로 달빛에 젖은 바다를 내다보곤 했다.
자정이 넘어서 그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나도 자리에 누웠으나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 교교한 달빛과 들판, 그리고 강물소리가 들리는 그 분위기에 취해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어머니가 말하던 종소리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얼마 전 그로부터 들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들었던 그 이야기가 내 몸속에 전이되어서 어쩌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머니가 말했던 그 종소리는 소리 속에 숨어 있는 소리 같았고, 바람 속에 숨어 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수많은 생각들과 역사적 환상들이 머리에 떠올랐다가 물결소리에 지워졌다.
잔잔한 물결 곁에서 바위와 석탑은 기다림을 가르치며 천년을 하루같이 묵묵히 서 있다. 수많은 일출과 낙조를 지켜보며, 수많은 날들의 풍파를 가슴에 안으며 그렇게 서 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물도, 석탑도 달빛에 젖어 고요했다. 눈앞에 바다와 달, 그리고 언덕 위의 석탑이 하나가 된 밤 풍경이 선경에 가까웠다. 산허리를 감고 돌아 강둑을 따라 올라오는 그 물결소리와 솔바람소리가 달빛에 묻어와서 종소리가 된 듯, 수천 년을 건너온 서라벌의 피리소리가 물소리가 된 듯 강물소리가 은은하였다.
그가 했던 말의 여운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말에 어머니의 음성이 겹쳐서 들리는 것 같았다. 대종은 바다에 있다는 믿음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들었다는 그 종소리는 정말 어머니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부처님의 소리와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그래서 어머니는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던 것일까. 순심이 이모가 산속에 암자를 짓고 염불을 하면서 듣고 싶었던 것도 마음속의 그 종소리였을 것이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새벽이 다 되어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어느 순간에 울리는 그 소리를 들은 것 같다. 비몽사몽간에 어디선가 은은히 그 소리가 딩— 딩-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인근 어느 산사에서 새벽을 깨우는 스물여덟 번의 종소리가 멀리 강줄기를 따라와서 강물소리에 섞여 들려온 것인지, 솔바람소리가 강물에 섞여 나는 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소리는 나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환청인지 실제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들으려는 사람의 귀에만 들리는 믿음에서 오는 소리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 소리는 어머니가 듣고 싶어 했던 그 소리 같았다. 천년의 세월 저편에서 들려오는 것 같이 은은한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