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6월 6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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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은 영미는 설렘과 불안이 동시에 찾아왔다. 그가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효숙의 가게를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그가 마신 긴 유리 커피잔을 씻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집에 들어갔어요?”
“……!”
“데이트 좀 합시다. 데이트가 별것 있나요. 만나면 데이트지.”
“수원 가신다면서요.”
“수원은 다음에 가지 뭐.”
“부장님께서 그러시면 되겠어요?”
“음….”
“반가웠어요.”
“저도요.”
“약속하신 선물 잊지 마세요.”
“알았어요.”
-독촉 전화
따르릉, 따르릉….
“여보세요.”
“다솔교육입니다. 소진이네가 두 달치 남았는데 언제 내실 겁니까?”
“A/S는 되는 거예요?”
“글쎄요, 교재를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대금은 내주셔야죠. 연체료 문제도 있고 하니 빨리 내주셔야 하겠어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영미는 아이의 학습 교재를 살펴보다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 지나 잠시 잊었던 전화를 받았다.
“소진이 엄마? 이 달에 내겠다더니 왜 안 냈어요?”
“깜빡했네요.”
“언제 낼 겁니까?”
“A/S 보장도 없고 기분이 좋지 않아요.”
“돈을 안 내겠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음… 이 방법이 어떨까요. 우리가 헬로잉글리쉬를 200만 원에 판매하니까 영어 이야기를 반품으로 받고 나머지 대금을 내면 어떨까요? 헬로잉글리쉬 참 잘 나왔어요. 앞으로 계속 봐야 하니까 필요한 거예요.”
“지금은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이 바쁘네요.”
“유치원은 안 보내도 되는데…. 동네 아이들끼리 잘 어울려 놀면 되지 크게 도움은 안 돼요. 유치원 보내지 마시고 헬로잉글리쉬 해 주면 되겠네.”
“유치원은 꼭 보내야죠. 사회성 발달이 중요하다고 봐요. 같은 또래에게서 배우는 것이 더 많거든요.”
“유치원 교육도 주입식이에요. 우리 애가 눈높이 교육에서 학습지를 하는데요. 잘하겠지 하고 계속 시켰는데 어느 날 문제를 응용시켜서 풀어보라니까 못 풀데요. 그래서 나는 학습지도 안 시켜요. 주입식보다 자유롭게 공부시켜야죠. 틀에 얽매이게 하는 것이 좋은 게 아니더라고요. 창의성이 발달되어야죠.”
“그렇군요.”
“교재비를 한 달 분이라도 내주시면 좋겠는데요.”
“죄송하지만 좀 깎아주세요.”
“물건을 교환할 수는 있어도 깎아주고 하는 일이 못되어요. 이미 계약이 성립되었는데.”
“그럼 좀 기다려주세요.”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해요?”
“되도록 빨리 낼게요.”
“알았어요.”
일상이 지나가고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소진이 엄마? 소진이네 집이 어딘지 몰라서 갔다가 되돌아왔네요. 그 근처에 미림카센터 있죠? 혹시 이석현이라고 쓰여 있는 집 2층 단독 주택 아니에요?”
“……!”
“그쪽에서 맴돌다가 찾지 못하고 전화하니까 안 받데요. 어디 갔었어요? 저녁 7시쯤인데.”
“늦게 다니시네요?”
“우리는 늦게 가야 사람을 만나요.”
“그렇군요.”
“다음에 다시 들를게요.”
“그러세요.”
며칠 뒤 전화벨 소리에 눈을 뜨며 시계를 보았다. 오전 8시를 가리키고 있다.
“소진이 엄마? 자고 있었어요?”
“……!”
“우리 입장을 봐서 좀 빨리 내주셨으면 하는데.”
“알았어요. 제가 전화할게요.”
“언제쯤이에요?”
“아무튼 알았어요.”
“그래요. 그럼.”
새로운 달이 바뀌고 첫째 주 중간 어느 날.
“소진이 엄마죠?”
“네.”
“왜 전화 안 했어요? 전화 기다렸는데.”
“또 전화 올 줄 알았죠.”
“뭐라고요! 오늘 들를게요.”
“그러세요.”
“네.”
그곳에선 여전히 오지 않았다.
-대금 결제
며칠 뒤 주말 아침이었다. 소진이 친구 민지와 민지 동생 상민이가 놀러 와 소동이 벌어질 때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다솔교육입니다.”
“안 들려요.”
“문 좀 열어보세요.”
현관문을 열었다. 낯선 젊은 남자가 서류첩을 들고 서 있다.
“다솔교육에서 나왔어요.”
“지금 정신이 없어서요.”
“어머니, 교재비를 꾸준히 내시다가 안 내시면 어떡합니까?”
“그동안 사정 이야기했는데요.”
“그게 말이 돼요? 남은 두 달 분 주세요.”
“A/S를 해주던가요.”
“어머니 왜 그러세요. 여덟 번을 잘 내다가 두 번 남겨 놓고 딴소리하면 어떡합니까?”
“오셨으니 교재부터 보세요.”
남자 직원과 영미는 거칠게 맞섰다.
“저는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해요. 사무실에 전화 한 통화 할게요.”
“들어오세요.”
유선 전화기를 쓰기 위해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남자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집 안은 여전히 아이들 넷이 뛰어놀며 어지러웠다. 남자는 통화 후 영미를 향하여 말을 건넸다.
“저는 자세한 것은 잘 몰랐고 부장님 명령만 받은 것뿐입니다.”
영미는 사정을 말했다.
“아이들이 함부로 굴리고 자주 봐도 다른 회사 교재는 튼튼한데 여기 교재는 허술하네요. 그 부분에 대해서 듣고 싶어요.”
남자는 말 없이 교재를 만지작거렸다. 영미는 커피를 내오며 남자에게 말했다.
“지금 보다시피 꼬마 손님들이 놀러 와 정신이 없네요.”
“어머니, 물건을 사실 땐 꼼꼼히 알아보고 사셔야죠.”
남자는 영미를 바라보며 교재 제작한 곳 전화번호를 찾았다. 영미는 교재 책자를 찾아서 건넸다. 남자는 몇 번의 통화 후 영미에게 말했다.
“A/S 신청했으니 A/S 받으시고요. 오늘은 이렇게 왔는데 한 달 분은 주세요.”
“오늘은 이것밖에요. 계좌번호 적어 주면 나머지는 입금해 드릴게요.”
10만 원을 받아 든 어둡던 남자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그럼, 그러세요.”
“혹시 깎아 줄 수는 없나요?”
“저희 부장님과 이야기해 보시고요. 저는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메모지 한 장에 영미와 주고받은 내용을 적고 또 다른 한 장에 10만 원을 받았다는 영수증을 작성하고 일어섰다.
남자가 다녀가고 나서 영미는 남아 있는 금액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놀러 온 꼬마 손님을 돌려보내고 수화기를 들었다.
“다솔교육입니다.”
귀에 익은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누구시죠?”
상대방은 모르는 양 낯설어했다.
“아, 저는 기억하는데, 소진 엄마예요.”
“누구지? 어, 누구더라….”
무안함을 느낀 영미는 다시 말했다.
“다솔교육 맞나요?”
“네, 맞아요.”
“자주 전화하신 분이잖아요.”
“아하, 소진 엄마!”
이제 알았다는 듯 상대방은 목소리 분위기를 바꾸었다.
“지금 바쁘세요?”
영미의 물음에 익숙한 남자 목소리가 대뜸 말했다.
“뭐, 오늘 날씨도 화창하고 시간 많아요.”
“그동안 통화를 하면서 말씀드렸잖아요. 교재 상태가 불량하니 사정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 우리 직원이 갔었군요.”
“네. 지금까지 통화하면서 제 입장을 배려해 주실 것으로 믿었는데…. 다짜고짜 돈부터 내놓으라고 해서 기분이 나빴네요.”
“우리 직원이 부장인 줄 알았군요.”
익숙한 전화 목소리는 정 부장이었다.
“남자 직원에게 제가 깎아달라고 그랬어요.”
“그래서요?”
“오신다기에 기다렸거든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커피라도 사드릴 양으로 생각했는데, 뭐, 오늘은 난리판이 되어 버렸죠.”
“우리 직원에게 돈 하나도 안 주고 보냈어요?”
“10만 원 주었어요. 나머지 금액은 월요일날 입금하기로 했고요.”
“그랬군요.”
“요즘, 나라 경제가 어둡고 불안하잖아요. 있는 사람에게는 더 좋은 환경이고, 없는 사람에겐 더 힘이 든 고통스러운 날이고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까요?”
“나라 걱정을 다 하고 애국자는 따로 있다니까. 남들은 소진이 엄마 보고 어떻게 말하나요? 책 팔러 다니면 잘 할 것 같은데.”
“남들이요? 음… 지적이고 편하대요. 후후후.”
“다른 건 모르겠고, ‘편하다’는 말은 나도 공감해요. 나도 지적인 스타 일이에요. 나하고 같아. 한번 보고 싶어요.”
“그래요? 둘이 만나면 큰일 나겠네요. 하하.”
“내가 내일 갈게요.”
“어머나, 오지 마세요.”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갑니까? 하하, 그런데 결론은 뭐죠?”
영미는 들뜬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죄송하지만, 남은 금액 좀 깎아주세요.”
“일단 전화 끊을게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정 부장에게 영미가 감정을 섞어서 외쳤다.
“조금만 깎아주세요.”
애절함 묻은 목소리에 안절부절못하던 정 부장이 짧게 대답했다.
“알았어요.”
“고맙습니다!”
영미는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소리쳤다.
“야호! 드디어 깎았다.”
-설렘
그날 오후 영미는 효숙의 유아용품점 가게에 놀러 갔다.
“효숙아, 얘기 하나 해 줄까?”
“뭔데, 해 봐.”
“내가 영어 교재 산 것 너 알지? 벌써 1년이 돼 간다. 지난 2월부터 통화를 해 오던 정 부장이라는 남자가 있는데 재미있어서.”
“왜, 뭐가 재미있는데? 빨리 얘기해 봐.”
효숙은 빨리 듣고 싶은 호기심이 일었다.
“내가 10개월 지로 계약을 하고 여덟 번 내고 두 번 남았는데 교재가 망가져서 비싸게 샀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래서 돈을 안 내고 좀 끌었는데 정 부장이라는 남자와 통화를 하면서 농담 반 진담 반 3개월이 되었네. 얘, 어쩌면 좋으니? 그 남자가 나를 한번 보고 싶대. 내일쯤 온다고 하더라.”
“어머나,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얌전한 주부 하나 바람나게 생겼네.”
“내가 바람까지 난다고?”
“그래,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안 그럴 것 같은 사람도 남자와 여자 일은 아무도 장담을 못한대잖아. 바람피우는 사람이 ‘나 바람피워야지’ 하고 마음먹고 바람을 피우는 건 줄 아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영미는 의외라는 듯 놀랐다. 가볍게 받아넘기지 않는 효숙에게 답답함을 느꼈다. 자신보다 개방적이고 끼 많은 친구가 맞장구쳐 줄 것 같았는데 충고할 줄 몰랐다.
“나는 바람 안 날 사람 같지 않니?”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라니까.”
영미는 들뜬 기분을 가라앉혔다. 아무 일 아닌 것을 끄집어내었다가 무안당한 느낌에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영미는 생각에 잠겼다.
‘괜히 문제를 만들었던가. 한 푼 깎으려고 얌체짓하다가 더 소중한 것을 잃으면 안 되겠지.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지 말자.’
지체할 것 없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신호음이 울려 퍼진다. 귀에 익은 정 부장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소진이네입니다.”
“또 웬일인가요?”
“내일 오지 마세요. 제가 깎아달라고 해서 문제가 생겼어요.”
“교재를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아무튼 알았어요.”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영미는 혼란스러웠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다솔교육에서 오면 어쩌지 하는 불안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효숙의 가게로 갔다. 다른 날보다 고객이 많아서일까. 괜스레 집을 나와 서성거리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으로 돌아와서 거실을 서성거리다가 수화기를 들었다.
“다솔교육입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정 부장님 바꿔 주실래요?”
“무슨 일로 그러세요?”
“A/S에 관한 것도 있고요.”
“저희 과장님 바꾸어 드릴게요.”
잠시 후 차분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얼마 전에 그곳 직원분께서 영어 이야기 A/S 신청해 놓았어요.”
“아, 그러세요.”
“A/S가 가능한가요?”
“어쩌죠? 그 교재는 얼마 전에 품절된 상태고요. 지금 우리 사무실에도 교환이 불가합니다. 그래서 A/S도 저희로서는 안 되는 상태입니다.”
“처음 살 때는 기대가 컸는데 실망이네요.”
“어머니 입장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희로서는 지금 어떻게 해 드릴 수가 없군요. 저희가 선물 하나 드리면 어떨까요? 혹시 아이들한테 없는 것 한 가지 말씀해 주실래요?”
“선물은 어떤 것이 있죠?”
“그림책 어떠세요?”
“좋아요.”
“그러면 그림책을 드릴게요. 이것이 시중가 20만 원 정도 하거든요.”
“내일 오실 수 있나요?”
“돈 주신다면 가야지요.”
“그곳 정 부장님이 저보고 책 팔러 다니면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 그러세요. 저희 부장님께서 혹시 기분 나쁘게 해 드렸다면 사과드릴게요. 가끔은 일하시려고 하는 분들이 전화로 문의해 오시기도 합니다. 음… 어머니께서 일하시면 잘하실 것 같은데요.”
“내일 어느 분이 오실 건가요?”
“내일 오전에 전화 드리고 소속을 밝히고 찾아뵙겠습니다.”
“그러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 알 수 없는 서운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방금 통화한 과장은 친절하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사람임을 어렴풋이 짐작했다. 정 부장은 어떤 사람일까? 마음 한편에서 알 수 없는 허전함은 무엇일까.
‘내일 누가 올 것인가.’
이튿날 아침. 영미는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집 안을 청소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세수하고 화장을 했다.
레이스 달린 검정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바탕에 장미꽃 문양이 화사하게 그려진 롱스커트를 골랐다. 치마를 즐겨 입지 않았지만 여성스럽게 차려입고 거울을 보았다. 몸매가 잘 드러나도록 차려입은 자기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티셔츠에 바지를 즐겨 입는 그녀가 눈썹에 마스카라까지 발랐다.
분주한 오전이 지나가고 거실을 이리저리 서성거렸다.
‘분명히 전화하겠다고 했는데….’
영미는 수화기를 들었다.
“다솔교육입니다.”
여자 목소리였다.
“오늘 누가 오시나요?”
“무슨 일로 들르기로 했나요?”
“수금 관계예요.”
“저희가 못 가도 입금해 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선물도 주신다고 하셨어요.”
“입금해 주시면 선물은 우편으로 보내드릴게요.”
“그러세요.”
전화를 끊었다. 조금 전 들뜬 마음이 물거품처럼 가라앉았다.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자기 얼굴이 꽃처럼 예쁘게 느껴진 그 순간 따르릉, 따르릉… 벨 소리가 적막을 깨고 공간에 울려 퍼졌다.
“여보세요.”
귀에 익은 익숙한 목소리. 남성스러운 톤도 아닌, 점잖고 예의를 지키는 목소리도 아니었다. 약간은 장사꾼 기질마저 배어 있는 그의 목소리가 왜 그렇게 반갑고 기쁘게 들리는 걸까.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그가 물었다.
“내 머리는 AI예요.”
그녀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오늘 오라면서요. 지금 집 근처 학교 앞이에요.”
“선물은 가져오셨나요?”
영미가 목소리 톤을 곱게 올리자 그가 밝게 화답했다.
“선물 많이 가져왔어요.”
“거기 계셔요. 제가 나갈게요.”
설렘일까? 영미는 스스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살배기 아들 규현이를 데리고 현관문을 나서자 조금 떨어진 골목길 어귀에서 밝게 웃으며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가 있었다.
큰 키에 날씬한 몸매를 하고 이목구비가 깔끔하게 생긴 정 부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영미를 향해 걸어왔다. 영미도 첫눈에 정 부장을 알아보고 그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선물 가져오셨어요?”
다가온 정 부장에게 대뜸 말했다.
“선물 얘기는 못 들었는데? 사무실에 전화 좀 해보고…. 전화 한 통화 씁시다.”
“뭐라고요?”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의 바지 뒷주머니에 휴대전화기가 들어 있음을 발견했다.
“저것으로 하세요.”
영미는 휴대전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여기선 안 터져요.”
정 부장은 얼버무리듯 말했다.
영미는 예상한 듯 현관문을 열었다. 정 부장은 자기 집인 양 성큼 앞서더니 영미보다 먼저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르던 영미는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깎아달라고 사정했는데 안 깎아주실래요?”
집 안으로 들어간 정 부장은 영미의 말에 아랑곳없이 집 안을 둘러보더니 말했다.
“깨끗이 치워 놓고 역시 손님 맞을 줄 안다니까.”
영미는 커피를 준비했다. 잠시 후 통화가 끝난 정 부장은 영미 곁으로 다가왔다. 자신에게 다가온 정 부장에게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직접 오시면 어떻게 해요. 상상이 깨지잖아요.”
“아, 그렇구나!”
영미의 말에 정 부장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실망하면 어떡해요?”
“누가요? 내가?”
“아니요. 저의 모습이….”
정 부장은 거실 한편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펑퍼짐한 아줌마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안 그러네. 몸매도 좋고….”
영미는 자신을 지켜보며 앉아 있을 그가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거기 앉아 계시지 말고 방으로 들어가 계셔요.”
그는 쫓기듯 방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침대 있는 방엔 왜 자꾸 들어가래요?”
방으로 들어간 정 부장은 탁자에 놓인 영미의 결혼식 사진을 바라보았다.
“고향이 어디예요? 남편은요?”
커피를 준비하는 영미에게 무수히 질문 세례를 던졌다.
영미는 커피잔을 고르다가 문득 눈에 띈 긴 유리잔에 냉커피를 준비했다. 어쩐 일인지 얼음이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찻숟가락으로 얼음을 달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냉커피 맛은 어떤 맛일까.’
커피잔을 쟁반에 받쳐 그의 앞에 놓아주었다.
“같이 마십시다.”
“저는 마셨어요.”
커피를 마시며 그는 계속 질문을 했다.
“나이가 몇이에요? 아, 서른 살이죠?”
영미가 되물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나, 서른하나.”
“에이, 거짓말.”
영미는 그를 보며 말했다.
“가까이 사는 친구가 있거든요. 그 친구에게 부장님 얘기를 대충 들려주었더니 친구가 저보고 바람나게 생겼다고 하던데요.”
“그 친구는 어디 살아요?”
“가까이에 있어요.”
“그 친구 집에 한번 가봅시다.”
“그럴까요.”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부장은 자신의 키와 영미의 키를 맞추어 보며 말했다.
“내 키 어때요?”
“괜찮네요.”
순간, 그는 영미의 팔을 들어 자기 팔에 팔짱을 꼈다.
“잘 어울리지?”
정 부장이 환하게 웃으면서 영미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머, 웬일이야!”
영미는 정 부장의 팔을 때리며 팔짱을 뺐다.
-한낮의 꿈
정 부장의 차를 함께 타고 효숙의 가게로 갔다. 청소기의 윙윙거리는 소음이 반겼다.
“효숙아, 내가 며칠 전에 말한 그 사람 말이야. 그 사람이 왔어. 지금 주차하고 이리로 올 거야. 네가 적절히 상대 좀 해줘라 응? 부탁해!”
효숙은 놀라며 정색했다.
“아니, 나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은 안 해.”
무안함에 영미 얼굴이 굳어질 때 정 부장이 가게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그의 뒤를 이어 여자 손님이 들어왔다.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엄마를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특별히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던 세 사람은 방금 들어온 손님에게 집중했다. 정 부장은 여자아이에게 말문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지?”
“김지은.”
“몇 살이지?”
“여섯 살이요.”
“참 똑똑하게 생겼구나. 엄마하고 많이 닮았네요. 나중에 공부 잘하겠어.”
정 부장은 큰 키를 낮추어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 그의 왼쪽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볼펜 한 자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영미는 자신이 앉아 있는 의자 밑으로 떨어진 그의 볼펜을 주워 돌려주었다.
“우리 규현이는 어때요?”
정 부장은 규현이를 자세히 살피듯이 바라보며 말했다.
“아이들은 엄마가 하기 나름이죠. 물론 지은이도 마찬가지고요. 엄마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그렇죠.”
그의 말에 영미가 맞장구를 쳤다. 그는 다시 여자아이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 우리 지은이 영어교재는 해 주셨나요?”
“아니요.”
“다솔교육 교재가 참 좋은데요.”
“나중에 할게요.”
아이 엄마는 무릎 보호대를 고른 후 계산하고 아이를 데리고 가게를 나갔다.
남은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효숙은 먼저 말을 꺼냈다.
“커피 드실래요?”
정 부장에게 물어보면서 영미에게 다시 물었다.
“나보고 커피 대접하라고 모시고 온 것 아니야?”
“나, 커피 안 마셔도 돼요.”
정 부장이 효숙에게 말했다. 효숙은 커피포트에 물을 올렸다. 정 부장 옆에 앉아 있던 영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서너 발자국 옮겨 진열되어 있던 장난감을 규현이에게 집어주었다.
앉아 있는 정 부장은 서 있는 영미를 가끔 올려다보며 효숙에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 책 많이 해 주었어요?”
“저, 바른 교육 프리랜서예요. 가게 오는 손님들한테 책 소개해서 전국 판매왕 2위까지 해 봤어요.”
“그럼 돈 좀 벌었겠네요?”
“벌었죠.”
“우리 것 해볼래요? 수당 35퍼센트 줄 테니까요.”
“이제 안 할래요. 옆에 영미도 괜찮잖아요.”
효숙은 정 부장과 대화에 영미를 끌어들였다.
“이 친구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어요.”
“다른 얘기해.”
영미가 정색하고 말했다.
“그럼 무슨 얘기해.”
효숙은 의아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즘 장사 잘돼요?”
정 부장이 효숙에게 물었다.
“유아용품은 꾸준히 단골이 있으니까 그럭저럭 유지는 돼요. 책은 어때요?”
“우리는 월급을 올려줬어요.”
“그래요?”
효숙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영미에게 말했다.
“우리 준이 아빠는 월급 오십만 원 깎였어.”
정 부장은 서 있는 영미를 가끔 올려다보면서 자신의 옆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으세요.”
영미는 괜찮다고 말하면서 정 부장에게 물었다.
“수원은 왜 가는 거예요? 직접 수금도 하시나요?”
영미 말에 효숙이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물으면 어떻게 해.”
효숙의 말에 영미는 아무 말 없이 규현이를 돌보았다. 규현이가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 자동차 소리가 윙윙거리며 소란스러웠다. 그때 정 부장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그가 가게 밖으로 나갔다.
효숙은 유아용품을 정리했고 영미는 규현이를 따라다녔다. 정 부장은 가게로 다시 들어오며 말했다.
“여기 TV 있어요? 야구 좀 보게.”
“없어요.”
“그럼 좋은 하루 보내시고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정 부장은 효숙에게 밝게 인사를 하고 영미를 바라보았다. 영미는 고개를 숙여 인사에 답했다. 돌아서며 정 부장은 규현이의 장난감 자동차가 밖으로 나갈까 일러 주면서 발길을 돌렸다.
서 있던 영미는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효숙은 맞은편 가게를 바라보며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어머, 웬일이야. 저 사람 저기 앉아 있어.”
영미는 효숙이 말하는 도로 맞은편 실내 장식 가게를 바라보았다. 정 부장이 그곳에서 TV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효숙과 함께 웃었다. 고개만 돌리면 서로 마주 보이는 의자에 앉아서 정 부장과 영미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머 귀엽다, 귀여워. 저기 앉아서 야구 보면서 이쪽으로 한 번씩 쳐다보는 것 좀 봐. 웃긴다. 얘.”
효숙은 배를 잡고 웃었다. 영미도 슬쩍 고개를 돌려 정 부장을 보았다. 한동안 멋쩍게 앉아 있다가 맞은편 가게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떤 바람이었을까. 하늬바람? 높새바람? 아니! 5월 한낮의 ‘꿈바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