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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의미학(美學), 삶을 물들이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주형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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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당시 외국 영화를 볼 기회란 일 년에 한두 번, 학교에서 단체 관람으로 극장에 보내 주는 게 고작이었다. 영화에서 보는 외국 풍경은 고층 빌딩과 물결치듯 흘러가는 자동차의 행렬 등 모든 것이 놀랍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영화에 빠져들면서도 내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던 건 그들의 특이한 생활 문화 두 가지였다.
첫째는 그들의 축제 문화다. 결혼식이나 마을의 경사가 있는 날이면 온 마을 사람이 함께 모여 춤을 추었다. 경쾌한 음악에 맞추어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은 보는 이의 어깨마저 들먹일 정도로 흥겨웠다. 특히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가 아버지와 손을 마주잡고 춤출 때의 장면에 이르면 가슴이 찡할 정도의 감명을 받고는 했다. 간혹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함께 춤추는 귀여운 어린이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의 축제는 행복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가르침이었다.
서로 마주 보며 환한 웃음을 주고받는 두 사람의 표정은 믿음과 사랑을 말해 주는 무언의 웅변이었다. 백 마디의 말, 천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저들처럼 해 보리라고.
분주하던 청장년의 시기를 지나 노년에 접어들 무렵에나 겨우 한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춤을 배워 보겠노라는 뜻을 아내에게 슬며시 건네자, 마른하늘에 천둥번개가 치듯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댄스를 배워 제비가 되몬, 다 늙어빠진 제비가 어데로 날아갈끼요?”
나는 그만 혼비백산, 꿈을 접는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자녀가 모두 성혼해 버린 뒤끝이니 춤을 배운다 한들 원님 행차 뒤의 나팔 격이기도 했다.
내가 두 번째로 부러워했던 것은 저들이 식사하기 전에 올리는 감사 기도였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가족이 함께 자리할 수 있음은 신의 축복이리라. 기독교는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일컫는다. 그 사랑은 겸손을 뿌리로 하고 피어난 꽃이어서, 뿌리가 말라 버리면 꽃 또한 시들고 만다. 두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기도를 올리는 자세는 신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인간으로서 취할 수 있는 최고, 최귀(最貴)의 겸손이다. 또한,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수없이 입에 올리며, 작은 친절에도 반드시 ‘땡큐’라 말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랜 유교 문화의 관습에 젖어 자기 감정을 밖으로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따금 전철에서 젊은이가 양보해 준 자리에 아무 말 없이 쭈뼛거리며 자리에 앉는 노인들을 보고는 한다. 옆에서 보기에도 민망스러운 모습이다. 어쩌면 그들은 고마운 마음이 없다기보다, 인사말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까닭에 그러리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저지르기 쉬운 잘못의 하나도 가까운 친지 사이라고 해서 감사의 인사말을 슬그머니 건너뛰는 무례함이니 참으로 조심할 일이다.
예전에 외국 유학을 다녀온 사람의 경험담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양인들은 길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도 곧잘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 그들의 인사에 머쓱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도 그들처럼 해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웃음기 없던 굳은 얼굴 탓인지 선뜻 웃음이 나오지 않더란다. 하는 수 없어 방문 옆에 거울을 달아 매고 드나들 적마다 거울을 보며 웃고 인사하는 연습을 거듭했다.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겨우 그들처럼 자연스레 따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 오랜 관습을 바꾸려면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나 또한 굳은 얼굴 모습을 바꾸기 위해 시도해 보리라 생각했다. 우선 손바닥 크기의 파란색 종이에 ‘땡큐’라는 글자를 크게 쓰고, 그 밑에 ‘감사하는 마음은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줍니다!(Gratitude makes life richer!)’라고 써서 화장실 안쪽 벽에 붙여 놓았다.
왜 화장실인가? 화장실은 세면과 용변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공간이다. 동시에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아늑한 쉼터여서, 사색과 영감을 제공하며 때로는 놀라운 창조의 산실이 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급변하는 시대 흐름과 혼란스러운 국내외 정세 속에서 삶의 압박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화장실은 불안을 덜어내고 재충전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로 기능한다. 영어로 화장실을 ‘레스트룸(restroom)’이라 부르는 것도 이러한 역할을 염두에 둔 명명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화장실에서 더부룩하던 뱃속의 오물을 깨끗이 쏟아낸다. 이때의 상쾌함은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이니, 흔히 말하는 소확행(小確幸)이다. 더구나 시원한 배설은 건강의 징표여서 크게 감사할 일이다. 용변을 끝내면 ‘감사합니다’를 중얼거리고 싱긋 웃으며 머리를 조아린다.
나는 ‘감사’의 마음이 어느새 일상의 자연스러운 습관이 되었음을 느낀다. 이웃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며, 때로는 작은 배려와 도움의 손길을 주고받기도 한다. 나의 소소한 실천이 쌓여 보다 더 따뜻하고 밝은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기를 은근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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