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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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휘 게 섰거라! 휘, 휘 게 섰거라!’
서울 종로의 피맛골은 조선시대 서민들이 종로를 지나는 고관대작들이 가마나 말을 타고 행차하는 행렬을 피해 다니던 뒷골목길이다. 당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은 종로를 지나다 말을 타고 종로대로를 지나던 높은 사람들을 만나면 행차가 끝날 때까지 엎드려 있어야 했다. 이 때문에 서민들은 고위직 관리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기 싫을 뿐만 아니라 바쁜 일상을 번거롭게 하는 고관대작의 행차가 밉고 성가시어서 하위 관리와 평민들이 피해 다니던 길이란 뜻의 피마(避馬)에서 피맛골의 이름이 유래했단다. 이런 연유로 종로의 대로 양쪽 뒷길로 나 있는 좁은 골목길로 오가는 습속이 생겼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골목길이다. 종로 1가 교보문고, 청진동, 서린동에서 종로 3가 피가디리 극장, 옛 단성사에 이르는 사잇길이 남아 있다. 그래서인지 서민들이 이용하다 보니 피맛골 주위에는 선술집, 국밥집 등 구수한 술집, 서민들의 먹거리 음식점이 번창하였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운 입맛으로 남아 있다.
지하철 종로 3가역에서 내려 피가디리 극장과 송해 거리 쪽으로 가는 피맛골을 지날라치면 옛 생각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1970년 전후 친히 알고 지내던 이일기 시인과 이원수 아동문학가와 함께 그곳에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시며 세상 이야기에 빠져들곤 했다. 이원수 선생은 참 소탈하고 서민적인 인간미를 지녔다고 기억된다. 당시 나는 문학 속으로 들어갈 여유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문인들의 대화에 유영할 수 있었음은 젊은 바쁨 중의 여유로움이자 지난 영광이었다.
더듬어 생각하니 이원수(1911~1981) 선생과의 만남은 참 귀한 자리였는데 그걸 깨닫지 못한 시간들이었으니 참 안타까운 철부지였다고 생각된다. 더 크고 넓게 보지 못한 부족함으로 후회막심하기 짝이 없다.
선생께서는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마산공립상업학교 졸업 후 8·15 해방까지 오늘날의 농협 전신인 금융조합연합회에 근무했다. 70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서울에서 생활했다. 열다섯 살에 쓴 「고향의 봄」이 10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우리들 가슴속에 아련하게 정겨운 운율로 흐르고 있다. 그는 직장 근무 시절 독서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오빠 생각」을 쓴 최순애와 결혼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녘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고향의 봄」, 이원수)
내 나이 들어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흔적을 뒤늦게 찾아나서고 보니 그때 이원수 선생과의 철없던 만남이 너무나 아쉬운 후회로 남는다. 그때 나의 아버지를 잘 알고 계셨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아버지보다 서너 살 많은 선배이긴 하지만 선생은 마산상업학교 동문으로 금융조합연합회 함안 지점에 근무했는데 아버지는 경남 진교 지점과 부산 본사에 근무했다. 더구나 이원수 선생이 반일 문학 그룹 독서회 사건으로 피검, 고초를 당하고 감옥살이도 했는데, 아버지도 반일 도서를 읽었다는 이유로 왜경에 끌려가 심한 고문으로 고통을 받은 일이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런 연유로 1944년 서른 살의 나이도 채우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독서회는 일제강점기 당시 책이나 문학 작품 등을 연구하는 단체 조직이었다. 이때 일본 경찰은 이러한 단체를 반일 단체로 간주하고 그 회원들을 ‘사상 범죄자’로 취급했다. 아버지의 흔적이 별로 없었던 나에게는 얼마나 절호의 기회였던가. 진작 아버지 생각을 깊이 했더라면 지난 독서회 사건 등을 파고 물어봤을 텐데. 알지 못했으니 물어보지도 못했다. 이제 선생도 가시고 세월이 훨씬 흐르고 말았으니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아들의 뒷북 치는 심장이 안타깝기만 하다.
참으로 눈치 없었던 모양이다. 이원수 선생과의 만남도 그러하지만 아파트의 위아래층에 살던 소설가 황순원(1915∼2000) 씨의 경우도 그러하다. 유명한 소설가를 옆에 두고도 이런저런 얘기를 물어보지 못했다. 1980년 전후 서울 여의도의 한 아파트 건물에서 나는 3층에서, 그의 가족은 7층에서 살았다. 그와는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는 정도였는데 어수룩한 시골 아저씨마냥 수수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심리와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으로 작품에 녹여내는 집필 능력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대가였는데 어찌 그를 더 가까이하지 못했을까. 우리 두 아이와 그 댁 손주도 동네 친구로 가깝게 지냈다. 그가 유명한 단편소설 「소나기」 등 많은 작품을 낸 소설가라는 내용은 알았지만 나는 제조업을 하는 회사 창업기여서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연세 시대에 일본에서 유학했던 분이기에 아버지를 알 만도 했을 텐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기에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못했다. 나는 1984년경 서초동 우면산 기슭으로 이사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는 85세로 자택에서 이승을 떠나셨다. 나는 뒤늦게 문학 공부에 입문하여 수필, 시 창작 공부를 거치면서 2016년에 단편소설 「지게」로 소설 신인상을 받았다. 그때 교류가 있었으면 더 영감 어린 소설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지만.
인생을 살아오면서 많은 인연들이 있었지만 좋은 인연들의 기회를 살리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다. 특히 문학 방면으로 볼 때 크게 기억되는 삶의 흐름 속 인연의 골짜기를 건너온 후에 바라보는 아쉬움의 인연들이 많다. 사실 그때는 생활에 바빠서 문학에 투신할 줄 미처 몰랐기 때문이긴 했지만, 그 인연들을 더 승화시킬 수 있었음에도 늘 인연의 기회가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고 아쉬워하니 후회막심하다. 하지만 이제부터라도 보다 더 힘차게 문학의 길 가도에서 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