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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겨울 사이의 문장

한국문인협회 로고 유미경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여름호 2025년 6월 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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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해수욕장 주차장에 차를 댄다. 햇살 한 줌이 내려와 기다리고 있다.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10년 전 넘어졌던 그 자리라는 것을 당신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 남자가 서 있던 곳도 다 기억하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겨울바람 속에 담겨 있던 남자의 모습이 흔들리는 그림자 위로 오버랩 되는 것을 당신은 놓치지 않는다.
넘어진 것은 단순히 허둥거렸기 때문이다. 차 안에 앉아 있었던 당신은 남자가 도착한 것을 보았고, 반가운 마음에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작정 손을 흔들며 달려갔다. 남자는 그때까지 당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안타까워진 당신은 더 빨리 달리며 손을 흔들었다. 그 순간 무언가에 걸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손바닥의 껍질이 벗겨졌고, 무릎이 깨져서 피가 흘렀다. 쓰라리고 아팠다.
살면서 당신은 넘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서두르지 않았고 늘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천천히 걷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넘어진 등줄기 위로 매서운 칼바람 한 오리가 달려와 심장을 후려칠 때 생각했다. 아, 참으로 잔인한 연출이구나, 하고. 그리고 보았다. 놀라 사색이 되어 달려오던 남자의 얼굴을. 그것은 견딜 수 없을 만치 당신을 참담하게 만든 너무 끔찍한 장면이었다.
당신은 얼른 일어나 남자가 가까이 오기 전에 휴지로 피를 닦고 비상용 밴드를 붙였다. 종아리에 흐르는 피는 감출 수가 있었고, 껍질이 벗겨져 빨간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손바닥의 상처도 숨길 수 있었다. 수습을 마친 당신은 돌아서서 웃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복한 얼굴로, 애끊는 마음으로 그리워하였던, 당신의 심장이 된 남자를 바라보며 햇살 닮은 미소를 빚어내었다. 남자는 근심을 털어내지 못한 얼굴로 말했다.
“다치지 않았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칼바람 맞은 문풍지처럼 떨리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는 원래 잘 넘어져요.”
당신은 양손을 멀리 위로 올리고 360도 회전을 하며 태연을 가장했다. 발목까지 오는 플레어 치마가 우산처럼 활짝 펼쳐졌다. 남자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환하게 웃었다.
애잔함을 안고 달려오는 시간들을 털어내며 당신은 차에서 내린다. 10년 전에 그려 놓았던 발자국 위에 그리움을 올려놓는다. 당신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게 만들었던 주차 보호대는 새것으로 교체되어 깔끔하다. 그날의 시간들만 선명하게 각인되어 원색의 빛을 뿌리고 있다. 당신은 잠시 멈추어 서서 남자의 차가 머물렀던 곳으로 시선을 던진다. 남자를 향해 뛰었던 그날의 심장 소리가 달려와 곁에 선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소년처럼 해맑게 미소 짓던 남자의 모습이 파스텔화로 되살아난다. 가야금의 여린 음표들이 불규칙하게 뛰는 당신의 맥박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불안한 현(絃)의 신음이 입술선을 타고 흐른다. 머리를 흔들어 당신은 기억을 몰아낸다. 가질 수 없는 시간은 고통만 줄 뿐이다. 무수하게 몰려드는 음파들을 재빨리 털어낸 구두가 바람을 가르기 시작한다.
길가 풍경은 변하지 않았다. 기억 속에 그려져 있는 흔적들을 남김없이 불러 모으고 있다. 당신은 잠시 멈춰 서서 맞은편 상가 건물들을 바라본다. 조금 빛이 바랜 것 외에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등대 커피, 소내장탕, 황태해장국, 육개장 특선 비빔밥, 생조개 칼국수, 신화수산 활어회 타운… 당신의 얼굴에 분홍빛 햇살이 피어난다. 풍경들은 다시 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다정하다. 남자와 해후한 곳이고 이별한 곳이기 때문일까.
걷다 말고 당신은 잠시 몸을 돌려 반대편 건물을 바라본다. 커다란 소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다. 그 너머에는 바다 이야기라는 이름의 낡은 호텔이 보인다. 그때도 간판이 허름했는데 지금은 더 색이 바래져 있다. 칠이 벗겨진 곳곳에 녹물이 흘러내려서 피처럼 보인다. 거기에 붓을 대면 피눈물을 흘리는 여자가 나타날 것 같다. 서늘함을 감지한 당신은 간판 위에 던져두었던 시선을 얼른 거둬버린다. 남자가 그 숙소 앞 맞은편 길가에 차를 대던 모습을 떠올린다. 남자는 차 문을 닫고 말했다.
“저기를 예약했어요. 바다와 가장 가까운 곳이라서.”
조심스럽게 말하는 남자에게 숙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당신은 할 수 없었다. 담벼락 아래에는 군데군데 담배꽁초가 떨어져 있었고, 소주병 두어 개와 구겨진 종이컵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쌓인 짚 덤불 곁에는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낙엽들을 데려와 엉성하게 부려놓고 있었다. 햇볕 한 자락이 겨우 스며들고 있는 구석진 곳에는 가녀린 풀들이 서로를 껴안은 채 파랗게 떨고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올라온 노란 민들레 한 송이가 고개를 반짝 치켜들고 서 있었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 얘는 어쩌자고 이렇게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 있을까요.”
그런 당신의 안타까움에 대답하던 남자의 목소리를 당신은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이른 봄부터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름다운 여인과 찾아올 것이니 꼭 기다리라고 제가 바람에게 전언을 보냈거든요.”
마주 보며 미소 짓던 당신과 남자의 모습이 바다 이야기 간판 위에서 오랫동안 흔들리고 있었다. 민들레가 머물고 있던 자리엔 고양이 가족이 보금자리를 꾸미고 있다. 따뜻한 햇살 속에 누운 어미 고양이 위로 다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들이 젖을 빨고 있다. 곁에는 아빠로 보이는 고양이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비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나무로 된 집과 사료와 물그릇도 있다. 젖을 다 먹은 새끼 고양이들이 품속을 파고들자 엄마 고양이는 차례대로 머리를 핥아준다. 곁에 있던 아빠 고양이도 슬그머니 가서 도운다.
당신은 은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라는 동안 오직 엄마만 바라보았던 은별이는 5년 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당신의 품을 떠났다. 아이 둘을 낳고부터는 통화를 할 때마다 바쁜 모습이 역력해서 오래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런 은별이에게 처참하게 무너지는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당신의 빈자리가 한동안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잊어버리고 잘 살아갈 것이다. 당신이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따라 죽을 것 같았던 당신은 1년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잊어갔다. 가끔씩은 어머니가 그리운 적도 있었지만 돌아서면 또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혼자가 된 딸이 고통스러울까 봐 늘 노심초사하셨다. 밤늦게 퇴근할 때마다 대문 앞에 왜 서 있냐고 화내는 딸에게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셨다. 그런 날은 어머니와 당신은 서로 등을 맞댄 채 숨죽이며 오열했다.
단란한 고양이들의 모습을 뒤로 한 채, 그리운 어머니 모습을 가슴에 묻은 채 당신은 다시 바다로 향한다. 10년 전 남자와 함께 걸었던 시간들이 달려와 나란히 선다. 그날 남자와 당신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길 건너 보이는 식당 앞에 사람들이 두어 명 서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당신은 남자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어 자꾸 빈손으로만 허둥거렸다. 하늘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커다란 날개를 곧게 편 채 날고 있었다. 남자는 조금 앞서서 걸었고 당신은 쭈뼛쭈뼛 남자의 그림자를 따라갔다. 그때 바람 한 오리가 달려와 당신을 밀었다. 당신은 흐르듯 남자 곁으로 미끄러져 갔다. 남자가 손을 내밀었고 당신은 그 손을 잡았다. 남자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불규칙한 음정을 빚어냈다. 남자는 얼른 호주머니 속으로 당신의 손을 데리고 들어갔다. 심장 박동 소리가 급격하게 빨라졌다. 머리 위를 맴돌던 갈매기들이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반짝거렸다. 바다로 이어지는 송림길을 따라가며 당신과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큰 캔버스 안에 한 번도 그려보지 못한 그림을 그렸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두근거리는 심장 빛깔로, 오래오래 화폭을 채워 나갔다.
붓이 멈춘 곳에 바다가 나타났다. 당신은 남자를 따라 계단을 타고 모래 위로 올라섰다. 구두 굽을 끌어안던 은모래의 숨결이 참고 있던 그리움을 열어주었다. 남자와 당신은 긴 세월을 건너온 안타까움을 모래 위에 말없이 새겼다. 파도 자락에 맞춰 출렁이는 심장 소리를 나누며 시간의 폭을 넓혀갔다. 그러다 문득 정지된 침묵 안에 나란히 섰다. 모든 소리와 움직임이 잠시 멈췄다. 깊어졌던 침묵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쯤, 용솟음치는 심장의 울림을 누르며 남자가 태엽을 풀고 멈추었던 시간을 돌렸다.
“뉘라서 저 바다를 밑이 없다 하시는고/ 백천 길 바다라도 닿이는 곳 있으리라/ 임 그린 이 마음이야 그릴수록 깊으이다.”1)
남자의 목에서 피어오른 애잔한 음표들이 살갗으로 스며들어 핏줄을 낱낱이 저며 놓으며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하늘이 땅에 있었다 끝있는 양 알지 마오/ 가보면 멀고 멀어 어디 끝이 있으리오/ 임 그린 저 하늘 같아 그릴수록 머오이다.”2)
남자의 얼굴이 당신의 눈동자 속으로 들어왔다. 지나가던 젊은 연인들이 당신과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눈엔 기쁨과 슬픔과 애절함이 점철된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깊고 먼 그리움을 노래 위에 얹노라니/ 정회는 끝이 없고 곡조는 짜르리다/ 곡조를 짜를지라도 남아 울림 들으소서.”3)
남자가 갑자기 당신을 돌려세웠다. 놀란 당신의 입술 위에 떨리는 입술을 올려놓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얼마나….”
남자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당신의 입술을 다시 막았다. 남자의 혀끝에서 피어나온 짭조롬한 바다 향내가 당신의 입술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놀란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와 가냘픈 몸피를 흔들어대었다. 당황한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다급하게 외쳤다. 남자의 길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면서 반짝이는 이슬방울이 밀려 나왔다. 당신은 남자의 등을 가만히 안았다. 그 순간 당신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한 번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뺨을 타고 목을 적시고, 리플이 달린 블라우스의 목선을 타고 가슴속까지 젖어 들었다. 파도는 숨을 죽였고 먼바다 위에 앉아 있던 윤슬이 달려와 남자와 당신의 얼굴을 은은한 조명으로 감싸주었다.
길고 긴 백사장 위에는 남자와 당신이 피워내고 있는 가쁜 숨결만이 흐르고 있었다. 당신은 입술 위에 놓인 채 떠날 줄 모르는 남자의 입술을 심장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리웠던 향내를 당신의 몸 구석구석 각인시켰다. 하늘 위 햇살의 각도가 둥글게 반지름을 빚어낼 때까지. 수평선 언저리에 머물던 파란 바다가 검푸른 빛을 토해낼 때까지. 타오르던 심장이 녹아내려 깊은 바다의 뿌리에 닿을 때까지.
어느 날 SNS를 둘러보던 당신은 남자가 보낸 문자들을 발견했다.
‘예전에 그대를 좋아했어요.’
그 말이 당신의 심장을 내리쳤다. 가라앉아 있던 감정선을 뒤흔들었다. 당신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틀 후에 남자는 다시 문자를 보냈다.
‘지금도 좋아하고 있어요.’
당신은 또 침묵했다. 만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만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거듭되는 남자의 문자는 당신을 참을 수 없게 했다. 걸어두었던 빗장문을 기어이 열게 만들었다.
‘저도 그대를 좋아했어요.’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보고 싶어요.’
그 말이 얼마나 당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남자는 모르고 있었다.
‘30년 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대에게 빠져들었어요.’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잡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가까이 가면 사라질까 봐, 지귀처럼 온몸이 활활 타버릴까 봐.’
그 마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당신도 남자가 보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설레게 했던 사람, 함께 있으면 행복하고 심장이 뛴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고, 몸과 몸이 닿으면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딱 붙어버린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그런 존재였다, 남자는.
당신이 남자를 처음 만났던 곳은 30년 전 바다에 인접해 있는 작은 마을에서였다. 여름방학을 맞아 동해로 여행을 하던 중 어느 시골 학교 운동장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군데군데 텐트가 쳐져 있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그 지역의 문인들이 모여 해변 시인학교 행사를 하고 있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었던 당신은 그곳에 하루를 머물렀다. 개인전도 세 번씩이나 했던 당신은 그 당시 어느 정도의 인지도가 있는 화가였다. 당신과 친분이 있는 시인들도 있어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취기가 어느 정도 올랐을 때 얼굴이 작고 귀엽게 생긴 남자가 옆에 오더니 술을 따라 주면서 말했다.
“정한솔 선생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김도형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묘한 설렘을 주었다. 술잔을 받는 당신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당신과 함께 술잔을 부딪치면서 말했다.
“저도 선생님과 나이가 같습니다.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당신은 솟아오르는 설렘을 애써 잠재우며 말했다.
“네. 친구 해요, 우리.”
그렇게 시작되었다. 남자와 당신은 목구멍이 찰랑거릴 정도로 술을 마셨다. 학교 뒤에 있는 바닷가로 달려가 모래밭을 뛰어다녔고,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나란히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웃음소리가 별빛 속을 비집고 들어가 새로운 별자리를 만들 동안 당신과 남자는 하나가 되어 밤바다를 삼켰다. 우주를 찢는 파열음을 하늘 위로 날아올렸다. 하늘 위에서 빛나던 가장 예쁜 별 하나가 날아와 당신의 동굴 안에 둥지를 틀던 날이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당신은 교실 바닥에 누워 있었다. 밤새 술과 씨름했던 문인들은 뒤엉켜 잠에 빠져 있었다. 김도형은 당신의 팔을 벤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길다란 속눈썹, 이지적인 콧날, 인중이 또렷한 입술선. 그 모습은 40살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앳된 얼굴이었다. 지난밤 시간들이 달려와 당신의 몸을 전율시켰다. 당신은 살며시 팔을 빼고 그의 얼굴을 사진에 담고 바라보았다. 마치 남김없이 그를 심신에 각인시키겠다는 각오로. 당신은 그때 느꼈다. 이 남자 때문에 많이 아플 수도 있겠구나, 하고.
운동장으로 나왔을 땐 아직 해가 떠오르지 않은 수평선 위로 붉은 기운이 어슴푸레 피어오르고 있었다. 약간의 한기를 느낀 당신은 얇은 잠바의 깃을 세우며 교문을 빠져나왔다. 아침 이슬에 젖은 당신의 그림자가 주춤거리며 뒤따라왔다. 당신은 여행을 하는 내내 생각했다. 가슴속으로 급작스럽게 뛰어 들어온 김도형이라는 남자에 대해. 이제는 남이 된 전 남편에 대해. 앞으로의 당신 인생에 대해. 그 순간의 복잡했던 마음은 지금 잘 생각이 나지 않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신은 김도형이라는 남자에게 순식간에 스며들었다는 것을. 그곳이 설사 늪 속이라고 할지라도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그 까닭은 꼭 알 수가 없지만 아무튼 그때의 마음이 그랬다.
해변 시인학교를 다녀오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당신은 온몸이 나른하고 오슬오슬 한기가 돋아오는 것을 느꼈다. 몸살이 난 것이라 생각하고 영양제라도 맞으려고 병원을 찾았다가 놀라운 말을 들었다.
“임신입니다.”
눈물이 쏟아졌다. 전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10년 만에 종지부를 찍은 이유에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것이 큰 몫을 차지했다. 바다 이야기라는 게임에 빠져 학교를 그만두고 퇴직금까지 모두 날린 채 여자까지 생겨 집을 나갔던 전 남편은 아이가 생겼다며 이혼을 요구했다. 당신은 거절할 수 없었다.
당신은 열 달 뒤에 사랑스러운 딸을 선물 받았다. 아이의 이름은 은별이가 되었다. 결혼은 하지 않더라도 예쁜 딸은 낳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던 당신은 무한 행복했다. 은별이가 자라면서 당신은 김도형의 초상화를 그렸다. 50호짜리 캔버스에 담겨 있는 초상화는 거실 벽 한가운데서 늘 당신과 은별이와 함께했다. 은별이는 그림에 대해 묻지 않았지만 가끔씩 뚫어지게 바라볼 때도 있었다. 당신은 아는 체하지 않았다. 언젠가 은별이가 물어올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김도형은 그동안 유명 시인이 되었고, 인터넷 속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많았다. 그것을 찾아보는 것은 당신의 내밀한 기쁨이었고 그리움을 해소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김도형의 나이가 당신보다 12살이나 어리다는 것을. 처음에는 놀랐고, 나중에는 실소가 터졌다. 더 시간이 지난 뒤에는 조금 슬퍼졌다. 하지만 당신은 곧 그 사실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은별이의 엄마로, 화가로, 그리고 교사로 살아가는 일은 당신을 잠시도 쉴 수 없도록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김도형의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무슨 의무라도 되는 것처럼 그것을 구입하고, SNS 속에 들어 있는 그의 흔적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위안을 받았다. 그것을 알게 된 은별이가 한 번은 초상화를 바라보며 이런 말을 했다.
“엄마, 이 남자는 누구야? 엄마의 두 번째 사랑?”
당신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첫사랑.”
은별이는 그런 당신을 향해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 엄마 엉터리. 그럼 나는 누구 딸이야? 내 성이 정가인 것을 보면 엄마의 전 남편이 아빠가 아닌 것은 확실한데.”
당신은 은별이와 나란히 그림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등 뒤에는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엄마, 나는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기분이 이상해져. 저 사진 속 입술이 내 입술과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거든. 쌍꺼풀진 커다란 눈도, 넓은 이마도 그렇고. 엄마는 쌍꺼풀이 없잖아. 엄마가 왜 이분의 시집이 나올 때마다 살까, 하는 의문도 들고.”
은별이는 그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정말 궁금해. 이분이.”
그날 당신은 은별을 꼭 껴안고 한참을 있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안해, 은별아. 이 그림 속 남자… 맞아, 아빠. 하지만 이분은 은별이의 존재를 몰라. 엄마가 말하지 못했어. 정말 미안해. 하지만 언젠가는 만나게 될 거야.”
짐작했다는 듯 은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도 않았다.
모래밭으로 내려가는 계단 위에 서서 당신은 바다를 바라본다. 넓은 모래밭 위에는 은별이 또래 부부가 양갈래로 앙증스럽게 땋은 머리를 한 서너 살짜리 딸과 함께 모래성을 쌓고 있다. 까르륵 쏟아지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여름날 꽃밭에서 톡, 터지는 봉숭아꽃망울 소리 같다. 갑자기 가슴이 쓰라려 온다. 당신도 은별이에게 저런 행복한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다. 남자와 당신과 은별이가 함께하는 행복하고 평화로운 수채화를 날마다 그려주고 싶었다.
갑자기 아빠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목말을 태우더니 모래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까르륵, 까르륵 숨 넘어갈 듯 행복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해변을 가득 채운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눈물이 난다. 당신은 믿는다. 은별이도 저렇게 예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당신이 그려주지 못한 그림을 은별이는 아이들에게 마음껏 그려줄 것이라고. 계단을 내려간 당신은 모래 위에 만들어진 대형 캔버스 속으로 들어간다. 어느새 달려온 남자가 화폭 안으로 스며든다. 10년 전 바다를 벗어난 당신과 남자는 푸른 파도가 한눈으로 들어오는 찻집으로 들어갔다. 남자와 당신은 커피를 한 잔씩 시켜서 앞에 놓고 마주 보고 앉았다. 남자가 말했다.
“30년 만입니다.”
당신이 웃으며 대답했다.
“네, 30년을 걸어 힘들게 왔네요.”
“먼 길 돌아오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남자가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당신과 남자의 입술 사이를 뚫고 나온 웃음소리가 카페 벽에 부딪히며 커피잔 속으로 내려앉았다. 남자의 양볼에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남자는 볼우물에 다정함을 가득 담은 채 말했다.
“그대의 딸은 엄마와 똑같이 생겨서 무척 예뻐요.”
남자는 당신의 SNS 사진첩에서 은별이를 본 것 같았다. 남자의 말에 당신이 말했다.
“웃을 때는 아빠를 꼭 닮았어요. 양쪽 뺨에 예쁜 볼우물이 패여요. 저한테는 없는 쌍꺼풀도 있고.”
남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돌면서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는 것을 당신은 놓치지 않았다. 그것을 감지한 탁자 위의 커피잔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남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색한 미소가 둘 사이를 기웃거렸다. 남자는 말없이 커피잔만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무언가 말할 듯 입술을 깨물다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페를 나온 당신과 남자는 식당에서 낙지 연포탕과 함께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숙소로 들어갔다. 낯선 공간이 불편했던 당신과 남자는 엉거주춤 서 있다가 침대 양 끝으로 조심조심 앉았다. 어색한 침묵이 한동안 흘렀다. 바쁘게 뛰던 심장을 고르던 남자가 당신을 바라보았다. 당신도 남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눈과 눈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당신과 남자는 몸에 두른 표피들을 하나씩 걷어내고 나란히 누웠다. 남자가 조용히 당신을 바라보다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당신은 남자의 머리를 고요히 안았다. 남자와 당신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심장 소리만 들으며 서로를 느꼈다. 갑자기 남자가 얼굴을 들고 침묵을 깨뜨렸다.
“30년을 기다렸어요.”
남자가 당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당신은 남자의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연주 소리를 느꼈다. 남자의 연주가 이어지면서 조심스러운 음표가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참았던 그리움이 당신의 몸속에서 흘러나오며 G선상의 아리아를 조용히 불러내었다. 설렘이 피어나던 당신의 몸은 다시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음악의 흐름을 따라 당신과 남자는 정성스럽게 서로의 몸을 연주했다. 남자의 몸에서 울려 나오던 피아노 건반이 조금씩 빨라지면서 격렬한 리듬이 내달려 나왔다. 온음표에서 십육분음표로 다시 32분음표로 숨 가쁘게 바뀌었다. 채 호흡을 고르지 못하고 뛰어오르던 32분음표가 64분음표로 바뀌었다가 숨이 차오르자 스타카토를 불러내었다. 그리고 다시 메조 스타카토를 데려왔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었는지 128분음표를 몰고 왔다. 서로 부딪히며 한참을 격렬하게 날뛰던 음표들은 산꼭대기까지 다다르자 방 안을 차고 올라 창문에서 부서지며 숨 가쁜 호흡을 쏟아내었다. 놀란 겨울바람이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30년 동안 빚어내지 못했던 그리운 문장들이 남김없이 달려와 참았던 이야기들을 몸 구석구석 피워 올렸다. 억겁의 세월을 건너와 만난 견우와 직녀는 자명고가 되어 오래오래 울었다.
10년 전의 그림을 떠올리며 잠시 쓸쓸해진 당신은 걸음을 멈추고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석 달 전에 보았던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지인의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을 먹으려고 들어간 식당에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초대 시인으로 나온 텔레비전 속의 남자는 예전 그대로였다. 방송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와 있는데 이번에 발간한 시집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고 여자 아나운서가 말하고 있었다. 전시회를 준비하느라 바빴던 당신은 남자가 시집을 발간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남자는 이번 시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시라며 낭송을 시작했다. 
“여름과 겨울 사이의 문장.”
남자가 제목을 말하는 순간 당신의 심장이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겨울 바다에서 만났지 우리는// 오랜 빙하기를 거쳐 달려온 이야기 하나 여름 바다에서 겨울 바다로 뛰어들었지 너는 나의 얼굴 위로 눈부신 햇살 한 줌으로 내려앉았고 나는 보표 위에 서서 G선상의 아리아를 그리며 겨울 해바라기처럼 긴 목을 드리우고 있었지 하늘도 이분음표로 뒤따라왔지.”
요동치던 심장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남자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숨을 삼켰다.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머릿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운명은 난데없이 문을 두드린다는 것을 당신은 알게 되었다.4)
“말없이 수평선을 바라보며 걸었지 호기심 많은 겨울바람 옷깃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부끄러움에 젖은 귀 기울이기 시작했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지 이따금 미소를 지었고 소리 내어 웃기도 했지 수줍게 혹은 햇살처럼 밝게 때로는 오월처럼 싱그럽고 푸르게 그러다 문득문득 늦가을처럼 쓸쓸하게 애잔하게.”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10년 전의 시간들이 달려오면서 생살이 낱낱이 저며지기 시작했다.
“너는 내 손을 호주머니 속으로 데려갔지 여름 바다의 뜨거움이 두근거리는 마음이 너를 따라 조심조심 움직였지 너의 손과 만난 나의 기다림이 설렘으로 떨고 있었지 나의 마음과 만난 너의 그리움이 울컥하고 있었지 겨울바람이 낮은 음자리표로 달려와 두근거림과 떨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려 했지만 틈이 없었는지 메조 스타카토를 만들고만 있었지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지 나에게는 너의 마음만 보였지 너는 알레그로로 뛰는 나의 심장만 느끼고 있었지.”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에 젖어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래 위를 따라가며 시간의 다리를 새겨놓았지 윤슬 가득 내린 겨울 바다 지키고 있는 갈매기 떼가 손짓하는 곳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어 갔지 말없이 말도 없이 말을 못하면서 그래도 모래알만큼이나 수많은 언어들을 빚어내면서 소중한 문장들을 쌓아 올렸지 모래밭에 남은 발자국들 바다 울음소리로 지워지고 높은음자리표에 그려진 젊은 날 초상은 여름을 잊은 겨울 바다 위에 서서 문득문득 아련한 수채화를 낳기도 했지.”
화면 속의 남자가 뜨거운 눈빛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에 얼핏 눈물이 스치고 있었다.
“여름이 낳은 겨울-그 겨울과 여름 사이의 문장들 속에서 채 맺지 못한 청춘은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바닷속으로 흘려보낸 채 기약 없는 만남의 약속 파도 갈피에 끼워둔 채 그렇게 떠나왔지 모래의 행과 행 사이 촘촘히 새겨놓은 떨어지지 않는 발자국들의 한숨들 바람 날개 속에 묻고 눈물로 얼룩진 미완성 입맞춤 모래밭 그림자로 세워두고 완결되지 못한 매서운 칼바람 심장 속 비밀로 간직한 채 다시는 만들지 못할 이야기 가슴으로 써 내려갔지 애잔한 눈빛으로 배웅해주는 갈매기들의 이별가를 뒤로 둔 채 그렇게.”
남자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리고 마지막 숨결을 고르듯 입술을 떼었다.
“겨울과 여름 사이의 문장을 지웠지 우리는.”
아나운서가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가님, 서사가 있는 시 같은데 혹시 이 시를 쓰게 되신 배경이 있으신가요?”
기다렸다는 듯 남자는 입을 열었다. 
“한여름 밤의 꿈 이야기입니다.”
아나운서가 웃으며 말했다.
“네, 한여름 밤의 꿈, 좋네요. 누구나 한여름 밤에는 꿈을 꾸지요. 셰익스피어의 희곡처럼요. 셰익스피어는 희극으로 끝을 맺었는데, 작가님의 한여름 밤의 꿈은 희극인가요? 비극인가요?”
남자는 잠시 뜸을 들이다 당신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모두 희극이 아닐까요.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기쁨과 행복이 들어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것도 희극과 비극이라는 이분법적인 것으로 나누고 싶지는 않아요. 꿈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깨어나는 순간 사라지지만 꿈속에서 행복했던 시간들은 기쁨과 희망이 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모래 위를 걷다가 멈추어 선다. 남자와는 그동안 가끔씩 SNS에서 만나곤 했지만 서로 아는 척은 하지 않았다. 시집을 내거나 상을 받을 때 혹은 전시회를 할 때 축하 문자를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당신은 그것이 서운하지 않았다. 당신은 남자를 사랑했고, 만났던 순간 행복했다. 그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할까. 당신은 수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당신이 떠난 어느 날 남자는 어쩌면 은별이와 함께 이 바다를 찾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슬픈 일은 아닐 것이다. 또 다른 색깔의 기쁨이고 행복일 것이다. 지금의 당신처럼.
바다를 벗어난 당신은 남자와 함께 앉았던 커피숍에 들러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편의점에 들러 고양이 사료와 간식을 사 들고 예약한 숙소로 향한다. 고양이 가족은 그사이에 소풍이라도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사료 봉지와 간식을 고양이 집 곁에 놔두고 숙소 안으로 들어간다. 10년 전 남자와 들어갔던 방이다. 당신은 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창문 앞에 이젤을 펼치고 화판을 올린다. 100호짜리 캔버스 안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고 은빛으로 빛나는 모래 위에서 연인들이 왈츠를 추고 있다. 갈매기들의 날개 사이로 반짝이는 잔물결이 흐르고 있다. 여자는 아직 옷을 입지 않았다. 당신은 화구통에서 붓과 물감통을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심호흡을 한다. 당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행위는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존엄한 의식이다. 그런 당신의 마음을 남아 있는 사람들은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이 시간이 당신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는 것도.
당신은 준비해 온 면도날을 꺼내어 왼쪽 팔목에 조심스레 올린 뒤 힘을 준다. 손목은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면도날을 받아들인다. 검붉은 피가 스며 나온다. 당신은 얼른 빈 물감통을 갖다 댄다. 금방 붉은 피로 가득 차오르는 물감통이 놀랐는지 나직하게 떨고 있다. 순간 현기증이 몰려온다. 당신은 잠시 탁자를 잡다가 손수건을 꺼내 팔목에 묶는다. 하얀 손수건에 붉은 물이 배어들고 있다. 당신은 물감통에 붉은 수채화 물감을 넣고 붓으로 젓는다. 그리고 캔버스 속 여자에게 옷을 입힌다. 생기를 잃어버렸던 여자는 강렬한 붉은 드레스를 입고 얼굴에 홍조를 띤다. 연미복을 입은 남자를 바라보며 눈부시게 웃는다. 맨발인 여자에게 당신은 빨강 구두도 신겨 준다. 여자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송림 사이로 무지개가 피어오르고 있다.
올봄에 당신은 건강 검진을 통해 간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식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올해를 넘기기 힘들다는 선고를 받았다. 처음에는 절망했지만 곧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당신을 위한 가장 아름다운 의식을 치를 계획을 세웠다.
가끔씩 은별이는 당신을 그리워하겠지만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기 바빠 잊고 지내는 시간이 늘어날 것이다. 존엄한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던 엄마를 이해해 줄 것이다. 당신이 남긴 편지를 읽으며 당신의 순간순간이 다 행복이었다는 것을 남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림 속의 연인들을 바라본다. 40년 동안 단 두 번 만난 남자를 40년을 사랑하며 그리워하였다. 사랑이라는 것은 함께 있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같은 공간 속에서 숨을 쉬어야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깊이와 농도의 무게가 사랑을 결정짓는다. 당신과 남자는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사랑과 믿음이 있었다.
당신은 커피숍에서 사 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침대 위에 반듯하게 눕는다. 왼쪽 팔목에 묶은 손수건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은별이와 남자에게 써 두었던 편지도 꺼내 함께 올린다. 조심을 했는데도 봉투에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보인다. 남자와 은별이가 편지를 읽으며 마음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잠시 지혈되었던 손목에서 다시 붉은 물이 스며 나온다. 하얀 침대 시트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나른한 어지럼증과 함께 평화로움이 밀려온다. 잦아드는 의식 사이로 당신은 생각한다. 살면서 한 번쯤은 마법 같은 일을 겪는다고. 도저히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이해되지 않는 일을 경험하게 된다고. 그런 마법이 있기에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갈 힘을 얻을 수도 있다고. 남자는 당신에게 찾아온 마법이었다고. 은별이는 그 마법을 완성시켜 준 기적이었다고.
검은 나비 한 마리가 당신의 입술 위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시야가 희미해진다. 당신은 조용하게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잦아드는 맥박 소리가 12월의 창틈으로 새어나간다. 침대 위로 떨어지는 오른팔이 애잔한 신음을 나직하게 뱉는다. 창밖 양지쪽에 피어 있던 풀꽃 한 송이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겨울바람 한 오리가 달려와 다급하게 창문을 두드린다.

 

1∼3) 가곡 <그리움>, 이은상 작사, 홍난파 작곡.
4) 베토벤의 비서 안톤 쉰들러가 <운명 교향곡> 1악장의 첫머리를 가리키며 한 말을 참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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