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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거지의 넋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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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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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로 우려낸 구수한 국물에, 비록 푸른 물기는 없지만 엽록의 풍미를 남겨 놓은 우거지를 넣고 녹진하게 끓인 우거짓국을 먹는다. 옛말에 ‘우거지 석 독 남겨둔 사람은 오래 산다’라는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흔히 고생을 남겨두면 오래 산다는 뜻이니 우거지가 결코 좋은 음식이 아니라는 뜻일 거다. 그런데 입안에 은근히 스며들어 놓치기 싫은 감칠맛이 있는 게 아닌가.
맛있게 먹어 주고 관심을 두는 게 고마웠는지 갑자기 우거지가 넋두리하기 시작했다.
나 이래 봬도 한때는 푸르른 잎이었어요. 질기고 억세지만 연한 고갱이 감싸 주는 겉대였지요. 뚝뚝 물기 떨구는 시퍼런 젊음이 성성한 시절에 아낙네들이 나를 다듬어 슬쩍 데쳐 바람 끝에 매달아 놓았습니다.
우거지는 그때를 회상하는지 눈물까지 글썽이는 거다. 그러다가 말을 이어간다.
그럭저럭 바람에 몸을 흔들며 세월 보내다 보면 물기 걷혀 우글쭈글 제멋대로 구겨져 볼품없지만, 안으로 스며드는 깊은 맛은 더해져 갔어요. 그러다 우거지 해장국, 우거지 감자탕,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존재가 된 것이죠. 오랜 세파를 견뎌 연륜이 더해지다 보면 주위와 어우러지는 법도 배우고 맛의 조화를 이루어 다른 맛에 맛을 더해 주는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법. 주인공이 아닌 곁다리로 그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대견스럽지 않은가요.
“그럼, 대견스럽지”라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김치를 담글 때 겉잎만 벗겨내서 소금에 절인 우거지 김치도 있지요. 짠맛 스며들어 익으면 그 담백한 맛이 별미이긴 하나, 갖은 양념으로 맛을 낸 김치만 하겠는지요. 제대로 밥상에 올라갈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에요.
또 김치를 독에 넣을 때 맨 위를 덮어 공기와 접촉을 막아 맛을 더하는 역할도 하지만, 날이 갈수록 허옇게 곰팡이 스미고 흐물흐물 초라한 모양새는 오래지 않아 거둬내 외면당하기 일쑤였지요.
“그랬구나, 속상했겠다!”라고, 추임새까지 넣어 주었다.
연한 고갱이 시퍼런 등짝으로 감싸 안아 세상 사나운 바람의 매 대신 맞는, 어린 자식 감싸 안아 키우는 젊은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닮지 않았나요. 김칫독에서 맛에 맛을 더하려 자신을 내던지며 점점 초라하게 변해 가는 모습에서, 주름살투성이 제멋대로 구겨졌지만 그렇게 한 세상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온 노인분들 모습이 스치지 않느냐고요,
그러니 결코 우습게 보지 마시라고요. 버려지고 초라함 속에서도 세월 갈수록 깊은 맛으로 모든 것을 품어내는, 나 없으면 어디 그처럼 은근하고 구수한 맛을 찾을 수 있느냐고요. 섬유질이 많아 소화도 잘되고 보기보다 영양가도 좋다는데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맛, 나는 우거지라고요!
그렇게 크게 소리를 치는데, 귀가 먹먹해지더라고.
오늘은 그럴듯한 겉모양만 찾는 세상 아닌가. 자신을 던지며 험한 세상 살아와 볼품은 없지만, 깊은 맛으로 입맛을 사로잡는 우거짓국을 먹으면서 우거지와 허심탄회한 대화까지 나누었으니 좀 특별한 날이 된 듯하다.
나는 국그릇 바닥에 남은 우거지 줄기를 열심히 씹어 먹으면서, ‘맞다! 세상 사람들 귀한 것만 좋은 줄 아는데, 이리 가까이 소중한 맛이 있는 줄 몰랐다’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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