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9
0
[기획연재] 수필 창작과 이론10
퇴고(推敲)란 무엇이며, 왜 필요한가
글을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좋은 글을 쓰기란 더욱 어렵다.
또한 글이란 일단 다 썼다고 해서 그것으로 그 글이 완성되었다거나 끝난 것은 아니다. 일단 다 써 놓은 글을 처음부터 다시 차분히 읽고 살피면서 잘못된 표현이나 내용, 적합하지 않은 단어나 문장, 논리적 모순 등을 찾아내어 보다 적합하고 좋은 것으로 고치고, 불필요한 것은 삭제하고, 더 필요한 것은 보충해 넣어야만 어느 정도 그 글이 모양새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글이 다 완성되었다거나 끝났다고는 할 수 없다. 일단 이렇게 끝내 놓은 글을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다시 읽고, 생각하고, 고쳐 쓰는 일 등을 거듭해야만 비로소 그 글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모두 다 완성된 글 또는 완벽한 글이 되기는 어렵다. 아무리 많이 고치고, 다시 생각하여 쓰고, 좋은 단어나 표현 등을 골라 쓴다고 해도 완벽한 글이 되기는 어려운 법이며, 언제나 아쉬움과 후회는 남기 마련이다.
흔히 글을 잘 쓰는 사람이나 유명한 작가들은 그야말로 일필휘지로 한 번에 글을 술술 써 내려가고, 그것으로써 충분히 완성된 글을 쓴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글을 고치거나 보완하는 일 없이 한 번에 완성된 글을 쓰는 것이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요, 훌륭한 작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심지어 써 놓은 글을 자주 고치거나 많이 고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거나 글재주나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물론 한 번 써 놓은 글을 고쳐 쓰지 않고서도 훌륭하고 뛰어난 글로 평가받을 정도로 타고난 글재주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 글 쓰는 사람이나 작가들은 한 번 써 놓은 글을 거듭 읽으며 고치고 보완한 다음 비로소 완성된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 보통이다. 타고난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나 훌륭한 작품을 쓰는 작가들 중에도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올바른 태도요, 글 쓰는 방법의 원칙과 정석이다. 설령 즉흥적인 글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이를 다시 읽으며 고치고 보완한다면 더욱 훌륭한 글이 될 것이다.
저 유명한 작가 헤밍웨이는 그의 불후의 명작 「노인과 바다」를 완성하기까지 무려 2백여 번이나 고치고 다듬고 다시 쓰기를 거듭했다고 한다. 또한 톨스토이나 뚜르게네프, 체홉, 고리키와 같은 서구의 유명한 작가들도 한 작품을 쓴 다음에는 그것을 단번에 발표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 동안, 심지어는 몇 달에 걸쳐 그것을 다시 읽고 고쳐 쓰기를 거듭한 후에 비로소 완성된 작품으로서 발표한 것으로 전해 온다.
뿐만 아니라 중국 당나라 시대의 가장 뛰어난 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백낙천(白樂天: 白居易)을 비롯해서 중국 송나라 때의 대문장가로서 「적벽부(赤壁賦)」로 유명한 소동파(蘇東坡)와 역시 중국 송나라 시대의 대문장가이자 정치가이며 ‘당·송 8대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구양수(歐陽修) 등도 자신들의 천부적인 뛰어난 글솜씨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쓴 글을 수없이 고치고 다듬기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구양수 같은 사람은 자신이 쓴 글을 다시 고치고 다듬기를 거듭하며, 이를 큰 자랑으로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쓴 초고를 벽에다 붙여 놓고 드나들 때마다 이것을 다시 보면서 수시로 고치고 가다듬어 더욱 훌륭한 글로 만들었다고 전해 온다. 그는 글(문장)을 잘 쓰는 비결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세 가지 비결은 이런 것이다. 즉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것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하라는 말 속에는 자신이 한 번 쓴 글을 거듭해서 다시 읽으며 고치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백낙천의 시는 그 내용이나 문학성이 뛰어나면서도 문장이 짧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것도 결코 저절로 이룩된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쓴 글을 거듭 읽으며 고치고 다듬기를 계속해 이처럼 훌륭하면서도 누구에게나 친근한 시를 지어 냈던 것이다.
백낙천은 누구나 쉽게 읽으며 공감할 수 있는 시를 짓기 위해 일부러 자신이 쓴 시를 무식한 노파에게 들려준 다음, 그가 못 알아듣는 말이나 내용이 있으면 그것을 다시 쉬운 표현으로 고쳐 썼다는 일화도 전해 온다.
소동파에 관해서는 이런 일화가 전해 온다.
소동파가 친구와 더불어 호북성(湖北省) 황강현(黃岡縣)에 있는 적벽(赤壁)에서 하룻밤을 노닐면서 그 유명한 「적벽가」를 지었을 때 이것을 본 친구가 크게 감탄하며 이렇게 물었다.
“이토록 훌륭한 글을 짓는 데 대체 며칠이나 걸렸나?”
그러자 소동파는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대꾸하는 것이었다.
“며칠은 무슨 … 단번에 지었지.”
그런데 이 말을 하고 난 소동파가 밖으로 나간 뒤 친구는 소동파가 있던 자리 밑이 불쑥 올라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무심코 자리를 들춰 보았더니 놀랍게도 그곳에는 소동파가 「적벽부」를 쓰며 고치고 가다듬은 종이가 무려 세 광주리나 될 정도로 수북이 쌓여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과장된 얘기이겠으나, 그만큼 소동파 같은 유명하고 뛰어난 문장가도 한 번 쓴 글을 거듭 고치고 가다듬어 비로소 훌륭한 글로 빚어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흔히 한 번 쓴 문장을 다시 고치고 가다듬는 일을 퇴고 또는 추고(推敲)라고 한다. 추고는 일본식 발음이므로 퇴고라고 쓰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처럼 한 번 쓴 문장을 다시 고치고 가다듬는 일을 ‘퇴고’라고 부르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고사에서 기인한다.
옛날 중국 당나라 때 가도(賈島; 777-841)라는 시인이 있었다. 그는 어느 날 나귀를 타고 가면서 문득 시 한 수를 머릿속에 떠올렸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閑居少隣竝 한적하여 이웃은 적고,
草徑入荒園 풀밭 길은 황원에 들어가는데,
鳥宿池邊樹 새는 연못가의 보금자리에 잠이 들고
僧堆月下門 스님은 달빛 어린 사립문을 살며시 미네
그런데 가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왠지 밀 ‘퇴(堆)’ 자가 마음에 썩 들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던 끝에 밀 ‘퇴’ 자 대신에 두드릴 ‘고(敲)’ 자를 쓰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밀 ‘퇴’ 자 대신에 두드릴 ‘고’ 자를 넣어 ‘승고월하문(僧敲月下門)’ 하고 읊조려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이 더 낫겠다 싶었다. 그런데 얼마쯤 또 가다 보니 아까 맨 처음에 썼던, 밀 ‘퇴’ 자를 쓰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밀 ‘퇴’ 자를 써야 할지 두드릴 ‘고’ 자를 써야 할지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다만 그는 그 시구에 보다 적합한 글자를 넣기 위해 손으로 문을 미는 시늉을 해 보고, 손으로 문을 두드리는 시늉도 해 보면서 나귀에 탄 채로 계속 가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정신을 번쩍 차렸다. 갑자기 무엇인가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
가도는 정신을 차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탄 나귀가 경윤(京尹; 지금의 시장과 비슷한 벼슬)이 행차하는 선두와 부딪힌 것이 아닌가. 이 일로 가도는 경윤 앞으로 불려가게 되었다. 경윤의 행차를 방해한 죄였다. 경윤 앞으로 불려간 가도는 자신의 무례함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그러자 경윤은 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자네의 무례함은 용서하겠네, 일부러 그런 것 같지는 않으니…. 헌데, 아까 보니까 자네가 이상한 손짓을 하면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 같던데, 대체 뭘 그리 깊이 생각한 것인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이에 가도는 그 일에 대한 지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경윤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퇴 자보다도 고 자가 더 좋을 것 같으네.”
이처럼 가도에게 ‘퇴’ 자보다는 ‘고’ 자가 더 좋겠다고 한, 이 경윤은 다름 아닌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인 한퇴지(韓退之)였다. 그리고 가도는 한퇴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자신의 시에 쓰일 글자를 ‘고’ 자로 함으로써 결국 그가 몹시 고심하던 시구는 ‘승고월하문’이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시구나 문장을 다시 고치고 가다듬는 일을 ‘퇴고’라고 일컫게 되었다.
이렇듯 퇴고는 보다 훌륭한 문장이나 시 등을 짓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수필도 마찬가지이다. 더러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하여 한번 쓰고 나면 퇴고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보다 좋은 수필, 보다 훌륭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퇴고가 요구된다. 훌륭한 조각품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일단 기본 형태의 모양을 만든 다음 다시 수없이 깎고 가다듬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수필에서 퇴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또 어떤 기준이나 방법, 또는 요령으로 퇴고해야 보다 좋은 수필, 보다 훌륭한 수필을 얻을 수 있을까.
퇴고의 기준과 방법
퇴고하는 데 있어서 어떤 특별한 기준이나 방법, 요령이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람에 따라서 퇴고의 기준이나 방법, 요령이 얼마든지 다를 수 있으며 나름대로의 퇴고를 통해 보다 좋은 글이나 문장을 만들어 내면 된다. 또 글을 많이 써 보고, 이에 대한 퇴고를 많이 하다 보면 나름대로 보다 좋은 퇴고 방법이나 요령, 기준 같은 것들을 터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퇴고 방법은 다음과 같다.
①주제는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가
주제는 그 글에 있어서 핵심이요, 생명과도 같다. 주제가 뚜렷하지 못하거나 주제가 빠져 있는 글은 글로서의 가치와 생명력이 없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글에서 글의 주제가 모호하거나 잘 나타나 있지 않은 경우를 보게 된다. 도대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 의도를 분간하기 어려운 글도 적지 않다. 또 주제가 너무 거창하거나 광범위한 글들도 눈에 띈다.
따라서 처음에 글을 쓰기 전부터 주제를 명확히 정하고 그 주제에 맞게 글을 써야 하지만, 글을 일단 다 쓰고 난 후에도 다시 한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즉, 자신이 써 놓은 글이 원래 의도했던 주제에 잘 부합되는지, 주제가 분명하게 잘 나타나 있는지, 또는 주제가 너무 거창하거나 광범위하지 않은지 등을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 결과, 잘못된 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즉시 수정하거나 보완해야 한다. 때에 따라서는 거의 다시 쓰다시피 개작해야 할 경우도 있겠지만 주제를 명확히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노력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수고와 시간 낭비를 덜기 위해서는 애초부터 주제 설정을 명확히 하고, 그에 맞게 차분히 글을 쓰는 자세가 필요하다.
아울러 퇴고를 할 때에는 주제에 대한 표현이나 묘사가 정확한지, 또 주제와 어긋나는 사상이나 내용이 없는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②문장의 흐름은 정확하며, 문장은 바르고 정확하게 쓰였는가
글은 대개 여러 개의 문장이 계속 이어지며 이루어지는데, 만일 이 문장의 흐름이 유연하지 못하거나 정확하지 못하면 그 글은 매끄럽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읽기가 거북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바르고 정확하게 쓰이고 앞과 뒤의 문장과 잘 연결되어야만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이 유연하고 좋은 글이 된다.
아울러 문장이 너무 길고 불필요한 수식어나 비유 등을 많이 쓰면 그 뜻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전체적인 내용도 산만해지기 쉽다. 또 주어와 술어의 관계가 잘못 쓰였거나 내용에 적합하지 않거나 유치한 표현은 그 글의 가치와 품위를 떨어뜨린다.
따라서 퇴고를 할 때에는 문장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보며 이렇게 따져 보아야 한다.
*문장의 흐름이 과연 유연한가, 또는 앞뒤의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거나 막히는 부분이 없는가.
*문장에 있어서 주어와 술어, 또는 수식어와 비유 등은 바르고 정확하게 쓰였는가.
*문장이 너무 길거나 불필요한 말이 쓰이지 않았는가, 또는 문장이 너무 짧거나 간략해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나 표현이 잘못 전해지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좀 더 좋은 표현, 좀 더 이해하기 쉽고 좋은 문장으로 바꿀 수는 없을 것인가.
③내용이 정확하며 논리적 모순이나 잘못된 부분은 없는가
글에 있어서 그 내용은 정확하면서도 논리적 모순이나 잘못된 부분이 없어야 한다. 만일 어떤 글에서 이런 점이 발견된다면 그 글은 가치가 상실될 뿐만 아니라 그 글 전체에 대한 신뢰감도 떨어뜨린다. 또한 그 내용이 저속하거나 다른 사람이 쓴 글을 모방한 것이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말을 지나치게 많이 이용하거나 자주 사용하는 것도 역시 좋지 않다.
따라서 퇴고를 할 때에는 자신이 쓴 글에 이러한 모순점이나 잘못된 부분이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일이다.
④단락의 구분은 정확하며, 단락과 단락의 연결은 잘 되어 있는가
문장과 문장의 연결이 유연하고 적합하게 잘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락과 단락의 연결도 유연하면서 적합하게 잘 연결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전체적인 흐름도 유연하고 조화 있고 체계적인 글이 될 수 있다. 또한 글에 있어서 한 단락, 한 단락은 모두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단락의 구분이 정확해야만 각 단락의 의미와 특성을 살릴 수 있다. 만일 이 단락의 구분이 명확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우면 각 단락의 의미와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내용이나 주제 파악이 어렵다.
따라서 퇴고를 할 때에는 단락의 구분이 정확하면서도 전체적인 연결이 잘 되어 있는지를 살피고, 이와 함께 관점의 중복이나 시제(時制)의 혼란 등이 없는지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다.
⑤문법(文法)에 맞게 쓰였는지, 단어나 용어, 문장 부호나 표기(表記)는 정확한가, 또 맞춤법은 정확하며, 잘못 알고 쓴 글자나 틀린 글자는 없는가
이러한 것들은 글을 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며, 또 맞게 써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러한 것들은 정확하게 알고 있지 못하거나 틀리게 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글을 쓰려는 사람은 글을 쓰기에 앞서 이러한 것들을 충분히 습득하는 것이 원칙이요, 당연한 자세이다. 또 글을 쓸 때나 글을 다 쓰고 난 후의 퇴고 때에는 국어사전이나 옥편, 기타 참고서적 등을 충분히 활용하여 문법에 맞는 글, 단어·문장 부호·표기·맞춤법 등이 정확한 글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이와 함께 원고지에 글을 쓸 때에는 원고지 쓰는 법에 맞게 썼는지, 또 띄어쓰기나 원고지 번호 표시 등은 정확한지도 꼼꼼히 살펴보아야 한다.
아울러 글을 쓰는 데 있어서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표준말 사용이 원칙이므로 자신이 써 놓은 글이 혹시 사투리가 아닌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조사(助詞)나 접속사 등의 사용도 정확한지 살펴보는 것도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⑥퇴고는 가급적 많이 할수록 좋고,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자주 할수록 좋다
퇴고는 아무리 많이 해도 지나치지 않다. 퇴고를 많이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잘못되거나 틀린 부분을 많이 발견해 낼 수 있고, 보다 좋은 내용이나 멋진 문구, 적합한 표현 등으로 대체시키거나 첨가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단어나 잘못된 표현을 발견해서 삭제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몇 시간 후나 며칠 후 또는 몇 달 후라는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둔 후 다시 퇴고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처음 글을 쓸 때의 기분이나 흥분된 상태, 순간적인 느낌이나 일시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한결 객관적인 상태에서 글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훌륭하고 실속 있는 퇴고를 할 수 있다.
이렇듯 퇴고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나 방법, 또는 요령 등이 있으나, 어쨌든 글을 쓰는 데 있어서 퇴고가 꼭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글은 퇴고를 통해 더욱 아름답고 훌륭한 글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수필과 수필 평론, 그 문학적 보완 관계
수필다운 수필, 문학적으로 훌륭한 수필작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수필가 자신의 문학적 능력이 뛰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와 함께 최근 중요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수필 평론, 또는 수필 비평이다. 수필 전문지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예지나 신문·잡지 등을 통해 수시로 발표되는 수필들을 치밀하게 살펴 그것들이 지닌 문학성과 문학적 장·단점 등을 객관적으로 평가해 주는, 수필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는 시나 소설, 희곡 등에 대한 비평은 오래전부터 활성화되어 왔다. 그리고 시나 소설, 희곡 등에 대해 비평은 당연한 일로 여겨져 시나 소설 등만을 전문으로 비평하는, 비평가 또는 평론가들도 적지 않다. 뿐만 아니라 문예지나 신문·잡지 등에는 이들이 쓴 시 비평, 또는 소설 비평 같은 것들이 자주 실린다. 이들이 쓴 시 비평, 소설 비평 같은 것들을 한데 모아 엮은 평론집도 자주 발간되고 있다.
그런데 유독 수필 평론이나 수필 비평만큼은 아직 크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다. 신문이나 잡지, 심지어 수필 전문지들 중에서도 수필 평론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지면 할애에 인색한 경우가 많다. 수필 평론이나 수필 비평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마저 있다. 이는 수필을 잡문으로 여기는 은근한 멸시 때문은 아닌가?
필자가 이미 오래전부터 수필 평론, 또는 수필 비평의 필요성과 그 중요성을 깨닫고 기회 있을 때마다 이를 강조해 온 것도 건전한 수필 비평 없이는 우리나라의 수필문학이 보다 발전할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다.
수필 평론이란 수필작품의 가치와 문학성, 또는 문학적 미추(美醜)를 비평하여 논하고 수필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도덕성이나 사회성, 혹은 인간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 등을 치밀하게 따지고 밝혀내는, 문학적 비평 행위를 말한다. 그리고 수필 평론가는 이러한 수필 평론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뜻한다.
말하자면 수필 평론은 수필 전문지를 비롯한 수많은 문예지나 신문·잡지 등을 통해 쏟아져 나온, 수필이란 이름의 글들 중에서 옥석(玉石)을 가려내는 작업인 셈이다.
이와 함께 비평가로서의 날카로운 시선과 합리적인 판단력, 객관적이고도 냉철한 분석력, 깊은 성찰과 문학적 관조, 그리고 수필작품들에 대한 공정한 ‘저울질’을 통해 수필다운 수필, 품격 높은 수필을 밝혀 독자들에게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것이 바로 수필 평론이다. 그러면서 수필작품으로서 결여한 부문이나 미성숙한 부분, 객관적 논리나 타당성이 박약한 부분 또는 잘못된 부분이나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 등을 객관적·합리적·논리적으로 세세히 따지고 밝혀 지적하고, 때로는 언어적 질타도 가함으로써 차후 그 작가의 문학적 성숙과 발전을 도울 뿐만 아니라 다른 수필가들이나 독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역할도 한다.
다시 말해 수필 평론이란, 수필작품들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이나 무분별한 칭찬이 아니라 수필을 쓰는 사람들과 수필을 읽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랑의 매’도 되고 아낌없이 격려의 소리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원칙이 상실되고 어떤 개인적인 친분이나 이해관계, 또는 사적인 감정 등에 의해 문학적 공정성을 잃는다면 그때는 이미 수필 평론으로서 가치가 없어지고 만다. 또 이렇게 되면 수필 평론 전체에 대한 인식도 나빠질 뿐만 아니라 수필 평론에 대한 불신감마저 생긴다.
그러므로 수필 평론가는 그야말로 그 옛날 사초(史草)를 쓰던 사관(史官)과도 같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평론가 그 자신과의 친분관계나 개인적인 애증, 학연이나 지연 관계, 편견이나 아집, 그릇된 가치관 등에 의해 수필작품을 보는 시선이나 평가가 달라지거나 객관성·공정성을 잃은 편협된 평론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객관적인 원칙과 합리적인 기준에서 벗어나서도 안 되며, 이러한 원칙이나 기준이 순간적인 기분이나 편의에 따라 자주 바뀌거나 변형되어서도 안 된다.
저 유명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司記)』는 중국에서 가장 대표적인 정사(正史)로 손꼽힌다. 그런데 사마천은 이 『사기』를 쓰면서 시종일관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궁형(宮刑)의 치욕까지도 스스로 감내할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다.
사마천처럼, 수필 평론가도 온갖 사적인 인연이나 사적의 생각, 욕심 따위를 모두 끊어 버리고 오로지 수필작품들만을 냉철히 바라보며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시각에서 작품 평을 해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수필 평론은 수필을 쓴 사람에게는 우선 자신이 쓴 수필을 다시금 겸허하게 되돌아볼 수 있게 해 준다. 이와 함께 자신의 작품에 대해 냉정하게 다시금 살피며 그 잘잘못을 깨닫고 각성하게 해주며 문학적 영역과 자아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도 한다.
또한 수필을 읽는 독자들에게는, 독자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읽어 넘겼던 수필들을 다시금 살피며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과 문학적인 오류, 또는 지니고 있는 문학성이나 문학적인 결함 등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그러면서 수필을 제대로 읽고 올바로 감상할 수 있는 지혜나 판단력을 심어 주며, 수필의 문학적 우열을 독자 스스로 판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때문에 수필 평론이 수필가나 수필을 읽는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특히 독자들은 수필 평론에 나타난 지적들을 신뢰하며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수필 평론가는 자신의 보기에 좋은 수필이든 그렇지 못한 수필이든 똑같은 애정을 갖고 대해야 한다. 그러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좋은 비평, 정확하고도 올바른 비평을 할 때 설령 자신이 쓴 수필작품에 대해 호된 질타를 당한 작가라도 그 비평을 수긍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 이렇게 될 때 수필가들은 보다 좋은 수필을 쓰고자 더욱 노력할 것이며, 비평가의 시각에서 자신이 쓰는 수필도 바라보며 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수필과 수필 평론은 서로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이해와 보완적 관계라 할 수 있다. 특히 수필가는 자신이 쓴 수필에 대한 문학적 비평을 늘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자신이 쓰고 있거나 쓴 작품들을 수시로 비평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되새긴다면 갈수록 좋은 수필을 쓸 수 있게 될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