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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월 심상 시의 고찰·1——만해 시「알 수 없어요」정론(精論)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병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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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신통(神通)과 초월(超越)
흔히 신통이란 말을 많이 써 왔다. 신통이란 신족통(神足通)만을 이르는 경우도 있다. 갖게는 신통에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 신족통(神足通)을 드는데 여기에 ①마음 두는 곳에 뜻대로 갈 수 있는 능도(能到-飛行) ②마음대로 모양새를 바꿀 수 있는 전변(轉變-變化) ③육경〔六境 -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각 작용을 하고, 의식 작용을 할 수 있는 여섯 가지 대경(對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능력 곧 성여의(聖如意 - 隨意自在)가 있는 데 마지막 것은 부처님만이 할 수 있다. 둘째 천안통(天眼通)이 있는데 세간의 모든 대물(對物)의 원근, 고락, 성기고 섬세함 등을 관찰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셋째 천이통(天耳通)이 있어 세간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넷째 타심통(他心通)이 있어 타인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생각과 선과 악을 알 수 있는 능력을, 다섯째 숙명통(宿命通)이 있어 자타의 과거세에 겪었던 생존 현상을 모두 알 수 있는 능력을, 여섯째 누진통(漏盡通)이 있는데, 오감(五感)과 의식 작용으로 일어나는 모든 고통·번뇌를 능히 끊을 수 있어 다시 미계(迷界)에 태어나지 않을 수 있는 통력(通力)을 말한다. 숙명·천안·누진의 삼통(三通)을 삼명(三明)이라 하고 부처님이나 아라한(阿羅漢)만이 완벽 무결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5신통은 범부나 사마외도(邪魔外道)도 사선(四禪)을 닦아 얻을 수도 있으나 누진통은 부처님만이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지도론(智度論)」28)1)
1)『불교학대사전』 불기 2588(단기 4327, 서기 1994). 홍법원. P928
신통과 초월을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우가 있는데 같은 것이 아니다. 단적으로 말하여 신통이란 어떠한 사념이나 의식 또는 어떠한 행위를 행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초월이란 모든 것을 뛰어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재무애한 경지를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신통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 하여 초월을 했다고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다. 신통을 부리는 경우라도 초월을 한 불보살이 행하는 신통과 초월을 못 한 사람이나 신(神)이 행하는 신통과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초월’이란 한 말로 진실의 의미를 함유하고 있다. 나아가 여러 가지 종류의 2원 대립적 개념이나 가치관을 타파한 것이다. 예를 들면 선종에서 말하는 바 ‘범부도 성인도 뛰어넘는 것’, 아울러 범부라니 성인이라니(역시 불타를 포함하여) 하는 양상(兩相) 대립의 표시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이다. 이어 범성(凡聖) 2원 두 상대의 분별 견해를 뛰어넘어 자리한 것을 말한다. (필자)

 

超越一語之眞實含義, 乃是用以突破各種二元對立之槪念或價値觀.
例如禪宗所說之「超凡越聖」, 竝非表示凡夫與聖人(亦包含佛陀)
兩相對立, 而係基於超越凡聖二元相對之分別見解所說者.2)
2)『불광대사전』 6, 대만 불광대사전편수위원회. 1989. p528

 

부처와 중생, 신과 인간이라는 차별상의 견지에서는 초월이 있을 수 없는 것, 차별상의 견지에서 바라보는 것이 인간과 신의 입장이라면 부처의 입장은 어떠한 2원 대립적 관계도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따라서 신통이라 할지라도 불보살의 신통과 여타의 신통이 같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초월경(超越境)은 완벽하게 비어 있기에 거기에서 신통을 부리는 것은 자유자재할 것이나, 신통을 부린다고 해서 다 초월경에 들었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초월경에 든 존재를 부처·불타(佛陀·붓다; Budha)라 한다. 초월경에 든 존재는 언설을 떠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습으로 나를 알아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하거나 하는 사람은 삿된 길을 걷는 것이요, 능히 여래(부처)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 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3)고 하였다.
3)『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26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초월의 존재는 언설을 떠나 있다. 어떠한 것으로 비교될 수 없는 무등등(無等等)의 위상(位相)에 있다. 무등등이란 무엇인가. 등급이 없는, 같은 급류(級類)가 없는 등급이라 할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출현하는 모든 부처가 수행할 때 그 수심(修心)이 깊어지면 큰 신통(大神通)을 얻고, 그 수심 더 깊어지면 크게 밝음(大明呪)을, 그 수심 더 더 깊어지면 더없이 높은 곳(無上呪)에 이르게 되고, 말로 다 할 수 없이 깊은 수심으로 같은 급류가 없는 등급(無等等)에 이른다고 했다.〔반야심경(般若心經)〕 무등등 그것은, 높고 낮음이 없는 등급이다. 양단(兩端)이 없고 피차가 없고 미추(美醜)가 없다. 어디에 먼지 한 점 일어날 것인가. 거기서 모래 한 알 덜어낼 수도 더할 수도 없는 것이다. 예사의 신통 그것은 수심의 초보 단계에서 혹 나타날 수 있는 현상에 불과한 것, 불보살의 확연대오(廓然大悟)한 지혜(智慧)의 밝음 앞에 별무소용인 것이다.
차별상(差別相)의 견해를 어찌 초월경에 들었다 할 것인가? 어불성설이다. 피차(彼此)가 있는 세계는 초월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초월경에서는 신통 또는 신비란 큰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신통·신비 그것은 차별상의 세계에서만 특별한 현상이라고 보아질 뿐이다.
신통 신비 그것은 2원 대립의 세계 곧 차별상의 세계에서 보면 놀랄 만한 특이 현상이라 할 수 있겠으나, 초월경 곧 차별상의 세계를 떠나 있는 무등등(無等等)의 경지에서는 일체 중생의 각기 다른 근기(根機)와 유형(類形) 근성(根性)에 합당한 제도 방법과 수단으로 부리는, 곧 방편(方便)의 형태로 쓰는 것이다. 하찮은 동물도 때로 신통을 부릴 수 있겠으나, 결코 초월경에 든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2.시적 형상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갓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노을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한용운,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라는 시 제목이 풍기는 느낌의 색채와 분위기에서 심상치 않은 호기심을 다분히 유발시키고, 또 만만하게 넘겨 처리해 버리고 말 성격의 것은 아니겠다는 예감이 앞선다. ‘알 수 없다’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알 수 없다는 말일까? 이 문제에 관하여 신동욱 교수는 “이 작품에 나오는 서정적 화자의 말씨는 매우 겸손한 어조를 가지고 듣는 사람에게 설의법으로써 내용을 말하며 묻고 있다. 먼저 작품의 제목부터가 내심으로는 어떤 믿음 또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단정하지 않고 겸손한 말씨로 나타내고 있다. ‘알 수 없다’는 말의 이면에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내포하고 있음을 작품의 내용이 보여주고 있다”4)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작품의 내용으로 보아 작가가 이미 알 수 있음을 확신하면서 겉으로는 일부러 ‘알 수 없다’고 말을 내세우고 있다는 말이 되겠다.
4)신동욱, 『시상과 목소리』, 민음사. 단기 4324(서기 1991). P213
이 시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첫 연의 ‘발자취’ 둘째 연의 ‘얼굴’ 셋째 연의 ‘입김’ 넷째 연의 ‘노래’ 다섯째 연의 ‘시’ 여섯째 연의 ‘등불’이라는 흔적 또는 몇 가지 사상(事象)들이 여러 가지 형태로 전개되는 환경과 모양새들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인식되는 흔적 또는 사상의 언어들이 그들 앞에 전개되는 사항 또는 언어들과 연결되었을 때 독자는 예기하지 못한 어느 곳으로 와 닿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리라 생각된다. 여기서 ‘알 수 없다’는 말은 내심으로 알고 있으면서, 겉으로 겸손한 자세로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말한 것이라 할 것이다. 우주 만유(萬有)로 편만(遍滿)하는 과정에서나 귀일(歸一; 하나로 돌아감)하는 과정은 시작도 끝도 없기 때문에 시간적인 개념이 쉽게 개입될 여지가 없고 그 오묘(奧妙)한 전개 과정에 의식적(意識的) 접근이 불가하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라 여겨진다.
‘바람도 없는 공중’ ‘고요히’ 같은 시구들에서 독자는 안락과 평화, 정일의 분위기를 느낄 것이다. 그런데 ‘파문’은 예사롭게는 바다, 강, 호수 같은 물을 연상케 하는 언어다. 수평선에 실바람이라도 지나가면 일어나는 현상, 그것이 ‘파문’이다. 쏟아지는 폭포수의 세찬 움직임을 ‘파문’이라 하지 않는 것. ‘파문’은 일반적으로 지극히 평면적이라 할 것이다. 그런 파문을 시인은 ‘공중’에다 ‘수직’으로 벌떡 일세워 놓았다. 그것도 ‘바람도 없는 공중’에다. 어떻게 보면 아주 무리스럽고 엉뚱해 보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바람’ 있어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파문’이라 한다면 이 시에서의 ‘파문’은 ‘오동잎 떨어지는’ 동작 곧 ‘발자취’가 ‘바람을 대동하거나 바람을 따르지 않아도’ 파문을 일으키는 능동적 ‘파문’이라 할 만도 하다. ‘떨어지는 오동잎’ 그것은 자연 현상으로 예사로운 것일 뿐 별다른 감흥이 오는 표현도 못 되는 것 같아 보인다. 가을의 붉거나 누런 빛으로 무르녹아 흐르는 정서, 어떤 회한(悔恨)이나 감상(感傷)의 정념 같은 것도 지워버렸다. 흔히 끈적거리는 인간적인 색채 모두 표백되어 버렸다. 만해의 이러한 ‘발자취’는, 상수리나무 벚꽃나무 잎같이 자잘한 아기의 앙증스런 ‘발자취’가 아니라, 큼직하고 구태여 이쁜 색채를 띨 필요성 전혀 없는 엄숙한 사실 그대로의 ‘발자취’, 산이나 들로 밋밋하게 내려오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발자취’가 아니라, 다시 말하여 가상(假相) 세계의 ‘발자취’ 또는 평면적이거나 먼지 묻은 ‘발’의 ‘자취’도 아니고, 단순한 자연법칙으로서의 떨어짐도 아닌, 하늘에서 지상으로, ‘수직’으로 ‘파문’ 지며 내리는 엄숙 청정한 법(法) 실상(實相)의 ‘발’의 ‘자취’인 것이다. 거기에 아무런 고의성이나 의도성도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식물적인 무정물의 현상에 따른 상식적 의식이 아예 지워져 버렸다. 또 ‘누구’라는 의문대명사가 주격으로 군림하는 데다 ‘발자취입니까’의 ‘입니까’라는 의문사가 따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쉽고 명료하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길을 어렵고 모호하게 유도하여 시적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사과 떨어지는 현상 앞에서 뉴턴이 만유인력(萬有引力)의 법칙을 발견하여 세상의 존경을 받았다면, ‘오동잎’ ‘떨어지는’ 현장에서 만해는 ‘알 수 없는’ 인격체의 ‘발자취’를 바라본 것이다. 어떤 특별한 이적(異蹟)이나 신통력의 발현 같은 것 아닌 언제나 있는 만고불변의 진리 곧 법신(法身)의 ‘발자취’를 바라본 것이다. 만해가 시적 혜안(慧眼)이 열리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둘째 연에서 ‘얼굴’이 나타난다. 첫 연에 나타난 ‘발자취’는 ‘수직’ 하강의 모습으로 땅을 향해 내리고 ‘얼굴’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라고 표명된 인격체의 신체적 크기나 형상, 현현(顯現)하는 조건 이런 것들을 두고 논의해 볼 때 과연 한 마디로 일목요연하게 단정지어 말할 수 있는 존재(사람), 과연 누구일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늘 위 땅 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 형상, 신체적 크기, 현현하는 조건 이런 것들은 아무것도 어디에도 없을 수 있고 어디에도 갖추어질 수도 있으리라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라는 이 인격체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알면서 일부러 ‘알 수 없다’고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그 어디에도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초월의 존재 곧 부처의 근본 모습이란 어디에 있고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있는 것 같이, 때로는 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히 그 어떤 존재가 이렇다 저렇다 하고 확정지어 단언할 수 있을 것인가? 초월 곧 부처의 실상(實相)이 그런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 ‘여래(부처)란 좇아서 오는 바도 없고 역시 가는 바도 없다. 그러므로 여래라 하고 이름 짓는 것이다(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5) 법신불(法身佛)의 속성이 그런 것. ‘알 수 없는’ 그 인격체는 시작도 끝도 없다(無始無終). 때 묻음도 한도 없다(無垢無限). 그래서 결코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오묘(奧妙)하고 기쁘고 흡족〔흔흔(欣欣)〕하며 그 어떤 장애(障碍)도 거리낌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5)『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제29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첫째 연에서 ‘알 수 없는’ 인격체의 ‘발자취’가 오동잎 떨어지는 모양으로 현현하였다면, 둘째 연에서 그 ‘얼굴’이 ‘푸른 하늘’로 나타난 것이다. 다시 말하여 만해는 ‘알 수 없는’ 인격체의 내임(來臨)하는 모습의 한 예를 오동잎 떨어지는 현상에서 보았고, 나타나는 ‘얼굴’ 모습의 한 예를 ‘푸른 하늘’에서 보았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땅으로의 하강과 천상(天上)으로의 상승에 아무런 막힘도 없고 스스러운 무애자재(无碍自在)한 예의 행태와 모습을 ‘오동잎’ 떨어지는 현상과 터진 구름 사이에 나타나는 ‘하늘’에서 보았다는 것이다.
단정 지어 그린 것이 아니다.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無所不至)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확정성(不確定性)의 무한무진(無限無盡)의 진리의 한 편모를 그리고 있다 할 만하다고 본다.
‘지루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을 두고 일제 압박을 받았던 시대의 공포스런 역사적 분위기를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꼭히 그 시대적 불운을 꼬집어 그린 것만이 아니고 그런 해석도 가능하다고는 보여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아프고 무서운 사항이 많이 있을 수 있다고 보아야 할 보편적 해석이 적절한 것 같다.
첫째 연에서 ‘누구’의 실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의 ‘자취’만 등장하는 것이다. ‘누구’의 발이 움직이는 동작의 실제와 형태는 그려져 있지 않고, 발이 내려가는 ‘자취’만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있는 것은 ‘누구’의 발이 앞이나 뒤로 가는 평면적 모습이 아니라 아래로 수직 하강해 간 그 자취만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요한 공중’ 잔뜩 고여 있는 적막 정일을 어루만지며 은밀히 내리는 ‘누구’ 그 발의 실제 모습은 알 수 없고, 그 ‘자취’로 미루어 오로지 아래로 내리는 발의 모습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게 안온하고 평화스런 분위기, 순탄하고 무장무애한 행동 양상이 둘째 연에서 갑자기 ‘지루한 장마’의 따분한 분위기에 이어 ‘서풍에 몰려가는’ 타의적이며 급박한 분위기로 돌변하는 것이다. ‘고요히 떨어지는’ 안온함이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여야 하는 험악한 분위기로 돌변함으로 해서 시적 긴장감이 고조되고, 거기 나타나는 ‘푸른 하늘’은 아무런 두려움이나 초조한 정서를 띠지 않고 당당 고결한 얼굴로 등장함으로써 충분히 생동감 있는 자긍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그렇게 숭엄한 얼굴이란 쉽고 안일한 상태에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루한 장마와 같은 견디기 힘든 세월이나 급박한 분위기, 검은 구름과 같은 무서운 경우를 당당히 물리쳐 내는 절실한 통과의례를 원만히 잘 거쳐야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름의 얼굴을 가리켜 서정주 시인은 “여기서 하필 임의 얼굴을 여름철에다 둔 것은 만해가 역경에서 고갈되지 않았던 걸 생각할 때 재미가 있다. 하필에 여름에서 이걸(임의 얼굴) 찾고, 그것도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것으로 파악한 것은 그가 더듬거리던 모색의 냄새가 날 정도로 충분히 실감이 있다. … 가장 카랑한 코발트의 가을 하늘이나 버언히 몽롱한 봄 하늘이나 가뭄의 타는 여름 하늘과는 달리, 물기까지 번즈레히 머금은 그린 빛에 가까운 걸 생각할 때, 꼭 이 얼굴로선 적합하기까지 하다”6)고 하였다. 첫째 연에서 ‘발자취’를 통하여 발의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으로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라면, 둘째 연의 ‘얼굴’은 긴박하게 전개되는 무섭고 격한 상황 속에서 직접적이고 선명하게 나타나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6)서정주, 『한국의 현대시』, 일지사. 단기 4302(서기 1969). pp. 165∼166
셋째 연에서 신동욱 교수는 “깊은 나무는 역사적 뿌리가 있는 생명 현상을 은유한 것이고, 옛 탑은 문화 창조의 역사적 흐름을 암시한다고 본다면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생명성을 의미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7)고 하였고, 김용직 교수는 “‘깊은’이란 형용사는 ‘옛’과 더불어 독특한 상상력이 작용한 결과다. 우리는 흔히 깊은 나무란 말 대신 높은 나무란 말을 쓴다. 그러나 이것은 지상에서 나무를 쳐다볼 때의 입장이 빚어낸 표현이다. 역의 방향에서 보면 그것은 당연히 깊은 나무라는 표현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꽃’이 없다는 표현 역시 주목해야 한다. 꽃이란 이미 앞에 보인 물질 상상력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천공(天空)을 지향하는 의지를 표상한다. 그런데 그 꽃이 없다는 것은 현상 내지 형태의 차원을 상상하려는 정신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상상력의 질적 변화인 동시에 가치 의식의 다른 차원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거기에는 외곽으로 나타나는 의미의 차원을 넘어서 초월적 가치로 이행하려는 의도가 검출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각될 수 있는 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비실제에 해당되는 향기는 존재한다”8)고 하였다.
7)신동욱, 위의 책. p. 115
8)김용직, 『한국 근대시사』 上, 학연사. 단기 4319(서기 1986). pp. 454∼455
여기서 ‘꽃’은 현화식물의 대표적 표상이며, 그 최고 정점에 도달한 생명력의 상징이면서, 희열의 만개를 나타낸다. 그것은 대개의 경우 화려한 빛을 가지며, 그 빛은 예사로 밝은 광명 곧 태양과의 부단한 녹색 교감을 가짐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면서 한편 ‘꽃’이 피었다는 것은 곧 시들 수밖에 별도리가 없는 희열과 슬픔의 분기점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런데 ‘푸른 이끼’는 어떠한가. 그것은 두드러진 성장이나 화려한 만개가 없으면서도 한편 시들고 떨어지는 운명을 모른다. 겨우내 그 빛이 퇴색하여 생명력이 소멸되어 버린 듯하지만, 날 다시 더워지고 비 내리게 되면 그러한 퇴색의 과정 씻은 듯 잊은 채 다시 ‘푸른’ 빛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지속적인 영원한 생명력의 표상이며, 오랜 세월 거쳐 전통과 역사의 표면에 묻어나는 듯 살아가는 유연한 기쁨의 살갗인 것이다. 따라서 이끼 창창한 곳엔 구태여 ‘꽃’의 피어남이 없다 할지라도 서운하다거나 모자람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생명의 푸른 즐거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끼’ 푸르게 묻은 그 자체가 바로 역사와 전통의 영원한 ‘꽃’이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깊은 나무란 그 나무를 보는 시각이 수직적인 입장에서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앞서 말한 바 ‘꽃’이 구태여 있어 피지 않는다 해도 좋을, 다시 말해 화려하고 눈부신 개화가 없고, 때로는 의도적 인위적 보탬이 없다 할지라도 좋을, 숱한 나무들 크게 자라나 자연적으로 서늘한 그늘 지어 된 깊고 유현한 현장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여진다.
필자는 여기서 ‘깊다’는 말을 한두 그루 서 있는 외톨나무에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 지나면서 크게 자라난 수많은 나무들이 함께 빼곡히 들어선 나무들의 숲에다 적용시키고자 한다. 흔히 수해(樹海)란 말을 하지 않는가. 숲 짙어 바다같이 넓고 깊다는 뜻 아닐까. 울창하여 그늘 짙은, 그래서 깊을 수밖에 없는 숲에다 적용시키고자 한다.
‘옛 탑’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탑, 그것은 애초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온 성스러운 구조물로 생과 사를 초탈(超脫)한 불가사의한 수행의 열매를 보존, 경배하는 장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3천 년 근접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조사(祖師), 종사(宗師)들이 4대(四大; 地 水 火 風) 육신을 벗어나면서 남긴 사리를 모신 해탈(解脫)의 증표인 것이다. 따라서 탑, 그것은 삶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허상(虛相)의 결박에서 완전히 해방된 증거를 보존하는 장치이며, 말과 글, 어떠한 행위로도 그려낼 수 없는 것이며, 어떤 등위(等位)를 매기기 불가한 위상(位相)의 상징적 유물이라 할 것이다. 탑, 그것은 문화 창조를 표상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고, 그 이상의, 가치 매김하기 어려운 유물이라 할 수 있다고 본다.
나무들 모여 크게 자라 그늘 ‘깊은’ 숲속, 무상(無常)의 절정에서 영광을 피워 올린 꽃이 없어도, 문화와 전통, 세월의 살갗으로 시드는 듯 길이 살아가는 푸른 이끼를 거쳐, 언설을 떠난 초탈의 상징인 ‘옛 탑’ 위에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 그것은 과연 ‘누구의 입김’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꼭 집어 말하기 어려운 그 주인공은 우주에 편만(遍滿)한 당체(當體)인 법신(法身)의 덕을 원만히 발현한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입김이라 함이 마땅하다고 본다.
넷째 연에서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이라 한 것은 법의 실상을 말한 것이라고 보아진다. 법을 법이라 하면 이미 그것은 법이 아니다. 이런 법의 실상을 안다면 안다고 말할 수 없는 본질적 속성이 있다. 경에 이르기를 ‘실도 없고 허도 없다. 그런 까닭으로 여래가 일체 법이 다 불법이라 설한 것이다. 수보리야 소위 일체 법이라 한 것은 곧 일체 법이 아니기 때문에 일체 법이라 이름한 것이다(無實無虛 是故如來說一切法皆是佛法 須菩提 所言一切法者 卽非一切法 是故名一切法)’9) 하였고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서 이 경전을 듣고 신심이 청정해지면 즉시 실상(實相)이 생길 것이니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이룩할 것임을 당연히 알겠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라 하는 것은 곧 이것이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 실상이라 이름하신 것입니다(若復有人 得聞是經 信心淸淨 卽生實相當知 是人 成就第一稀有功德 世尊 是實相者 卽是非相 是故 如來說明 實相)’10)라 하였으며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께서 설법하신 바가 있다고 한다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나니, 그것은 내가 설한 바를 능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설법이라 하는 것은 가히 설법할 수 있는 법이 없고 다만 그 이름이 설법인 것이다(若人言 如來 有所說法 卽爲謗佛 不能解我所說故 須菩提 說法者 無法可說 是名說法)’11) 하였다. 이렇게 법의 실상을 파악한다면 안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안다는 말을 내세울 수 있는 경우라면, 그것은 실상 법의 근원에 닿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이라 한 것이라 보아진다. 그러면서 모든 현상은 이 법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이다.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시내는 지금 ‘구비구비’ 흐르고 있지만 그 근원은 알 수 없는 것이다. 근원을 헤아릴 수 없고 안다고 할 수 없는 법의 실상에 뿌리를 둔 님의 노래를 ‘작은 시내’에 의탁하여 읊은 것이라 보아진다.
9)『금강경(金剛經)』, 불기 2529(서기 1985). 보련각. p47
10)위의 책. p31
11)위의 책. p55
다섯째 연에서 먼저 만해가 설정한 ‘알 수 없는’ ‘누구’의 ‘연꽃 같은 발꿈치’와 ‘옥 같은 손’에 관하여 논의해 보고자 한다. 유정(有情) 곧 정식(情識)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존재, 땅 위를 걷거나 공중을 날거나 하늘나라 어디 어디에 사는 존재 중에 가장 존경스런 분을 부처라 한다. 부처란 두 발로 움직이는 모든 존재의 스승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양족존(兩足尊)이라 하는 것, 양족이란 짝이 되는 여러 덕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늘과 사람 정도로 풀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하늘에 사는 존재나 땅에 사는 존재 곧 두 발로 서서 움직이는 존재 중에 가장 존경스런 스승이란 뜻이다. 부처는 서른두 가지 대인상(32 大人相)을 갖추고 있다. 그중에 손과 발이 섬세하고 유연한 모습(手足細軟相)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물새처럼 얇다란 막이 있는 모양(手足綱相) 손과 발에 세밀한 선이 많은 바퀴 모양이 있는 것(手足千輹輪相) 손가락이 섬세하고 긴 모습(手指纖長相) 발꿈치가 둥글고 큰 모습(足圓長相)12) 등이 있다.
12)『불교대사전』上, p1208. 『관무량수경』大 12권 343上. 『유마경』大 14권 538中. 『관정경』12권 大 21권 532下
32대 인상을 갖추고 양족존이 되려면 무궁무진한 공덕과 선근을 닦아야 한다. 그 과정의 어려움이란 필설로 다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모든 상(相)을 떠나야 한다. 상에는 4가지가 있다. 일러 4상(四相)이라 하는 것, 경에 이르기를 ‘일체의 모든 상을 떠나야 곧 부처라 이름하기 때문이다. …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잘리고 할 때 만약 내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화내고 원한심을 가졌을 것이다. 수보리야 또 과거 5백 세에 인욕선인이 되었을 때를 생각하니 그때도 아상이 없고 인상이 없고 중생상이 없고 수자상이 없었다. 그런 때문에 수보리야 보살은 마땅히 일체 상을 떠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어야 할 것이다(離一切諸相 卽名諸佛 … 如我昔爲歌利王 割截身體 我於爾時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何以故 我於往昔 節節支解 時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應生瞋恨 須菩提 又念過去於五百世 作忍辱仙人 於爾所世 無我相 無人相 無衆生相 無壽者相 是故 須菩提 菩薩 應離一切相 發阿 多羅三三菩提心)’13)고 하였다.
13)『금강경』大 14 이상적멸분. 보련각. 불기 2529(서기 1985). pp32∼34
4상(四相)을 네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4유위상〔四有爲相; 사물 변천 과정에 성립(成=生)되면, 머무는 기간(住)이 있고, 머물면서 허물어지고(異=壞), 없어짐(滅)의 4단계〕. 둘째 1기사상〔一期四相; 생(生), 노(老), 병(病), 사(死)〕. 셋째 아인사상〔我人四相; ①아상(我相);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고 주장하고 소유에 집착함 ②인상(人相); 나는 인간으로 짐승 등과 다르다고 집착함 ③중생상(衆生相); 나는 오온(五蘊; 色 受 想 行 識) 법으로 생긴 것이라 주장함 ④수자상(壽者相); 나는 수명을 누리는 존재라고 주장함〕. 넷째 지경사상(智境四相; 깨달은 경지를 잘못 인식하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등으로 설명한다.14) 여기서는 <아인사상> 또는 <지경사상> 등이 경의 의취에 가장 적절히 맞아든다고 보여진다.
14)『구사론(俱舍論)』26권. 137上. 『불교대사전』上. p1085
이 네 가지 상을 떠나지 못하면 영원한 중생이요, 이들 상이 너무 높아지면 삼도(三途) 곧 지옥, 아귀, 축생의 길에 윤회할 수밖에 없는 것(四相山漸高 三途海益深; 사상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산처럼 점점 높아지면, 삼도 곧 지옥 아귀 축생 등 극한 악도의 바다가 깊어진다)이다. 4상을 완전히 떠나 육도만행(六道萬行)을 쌓아가면 언젠가는 양족존의 위에 도달하게 되는 것인데 그런 양족존은 그 몸의 형체부터가 예사롭지 않게 서른두 가지 대인상(三十二大人相)을 갖추게 되어 중생의 그 모습과는 다르게 되는 것으로 시에 그려진 바 ‘연꽃 같은 발꿈치’ ‘옥 같은 손’은 바로 32 대인상 중에 족근원장상(足圓長相) 수족세연상(手足細軟相) 수족지만강상(手足指綱相) 수족천복륜상(手足千輹輪相) 수지섬장상(手指纖長相) 족질단후상(足跌端厚相)15)의 모습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보여지고, 근본불(根本佛)인 청정법신(淸淨法身)의 덕상(德相)을 구체적으로 나투어 낸 노사나불(盧舍那佛)의 ‘연꽃 같은 발꿈치’이기에 ‘갓이 없는 바다’를 밟아가는 것은 예사롭고 당연하다. 이 대목, 한 잎의 붉은 연이 바다 위에 떠 있어 푸른 파도 깊은 곳에 신통을 나타낸다…(一葉紅蓮在海中 碧波深處現神通…) 라고 한 관음 예찬문을 연상케 한다. 그 ‘옥 같은 손’이기에 ‘끝없는 하늘’을 만지는 위상초절(位相超絶)의 과정을 원만히 수행한 다음 ‘떨어지는 날’을 ‘단장하는’ ‘저녁놀’ 그것은 인간의 말과 글로 엮어내지 못할 불급절천(不及絶天)의 시가 되는 것이다.
15)족근원장상(足圓長相); 뒤꿈치가 둥글어 원만하고 장대한 모습, 수족세연상(手足細軟相); 손발이 섬세하고 부드러운 모습, 수족만강상(手足綱相);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물갈퀴가 있는 모습, 수족천복륜상(手足千輻輪相); 손바닥 발바닥에 바퀴살(법륜) 모양의 무늬가 있는 모습, 수지섬장상(手指纖長相); 손가락이 섬세하고 긴 모습, 족질단후상(足跌端厚相) : 발등이 높고 단후한 모습
지금까지의 과정을 종합해 본다면, 첫째 연에서 ‘수직의 파문’을 ‘일으켜 거느리고 내리는 발자취’를 그리고 있고, 둘째 연에서 ‘무서운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얼굴’을, 셋째 연에서 역사와 전통의 현장에서 삶과 죽음의 양단을 타파한 대성취의 위 ‘하늘’에 ‘스치는’ ‘향기로운 입김’을, 넷째 연에서 불가설의 ‘근원’ 그 샘을 떠나 길이 내리는 ‘노래’를, 다섯째 연에서 초절의 행로를 원만히 수행하고 위대한 날을 단장하는 절천(絶天)의 ‘시’를 찬미하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으로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만해가 무한 공간에 두루 편재(遍在)하면서 걸림 없이 무리 없이 작용하는 ‘알 수 없는’ 인격체를 다섯 갈래로 그리면서 그 최후 최상의 자리에 ‘시’를 올려 찬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여섯째 연을 두고 논단의 입장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짐을 볼 수 있다. 한쪽은 민족적 국가적 암담상과 절망을 불식시켜 보려는 대아적 선각자의 자세라고 보는 입장이고, 다른 한쪽은 중생의 미망을 각성시키려는 보살행의 실천상을 시화한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런 경향은 『님의 침묵』 전반에 걸쳐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이 시에서 특히 첨예하게 갈라지는 경향이 짙다. 대아적 선각자의 자세라고 보는 입장으로 신동욱 교수는 “1연에서 5연까지 화자는 대주체자의 가려져 있음을 보여주면서 그러나 살아있는 존재로서 인식하는 관찰자의 입각지를 유지해 오다가 종연에 이르러 위급하게 된 생명을 구제하는 실천자로 전신(轉身)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화자의 이러한 전신은 민족의 위급함에 대처하는 고상한 도덕적 결단임을 알 수 있다”16)고 하였다. 보살행의 실천상이라고 보는 입장으로 송욱 교수는 “사람은 항시 번뇌에 불타는 존재이며 차별을 넘어선 깨달음인 공(空; 님의 밤)에 이르기는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은 인간 조건이 지닌 의정(疑情)과 공 사이에서 불타 재가 되고, 재는 다시 기름이 된다. 이는 공이 유로, 유가 다시 공으로 변하는 우리 마음의 본성을 가리킨다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약한 등불’은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은 견성(見性)의 지혜이기도 하다”17)고 풀이하고 있다.
16)신동욱 위의 책. p216
17)송욱, 『님의 침묵 전편 해설』. p32
이 문제를 보다 타당성 있고 설득력 있게 해명하기 위해 먼저 밝혀야 할 사항은 ‘밤’의 성격 또는 의미를 규명하고 그런 다음 ‘밤’과 ‘나의 가슴’ 내지 ‘약한 등불’의 관계와 그 역능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일이라고 본다. 또 ‘타고 남은 재’에 대한 타당한 해석도 빠뜨릴 수 없는 과제일 것이다.
『님의 침묵』에 실린 작품들이 유기적 관련성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상호보완적인 뜻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시집 전체의 개괄적 내용은 <군말>에서 밝혀볼 수 있겠다. <군말>이 시사하고 있는 내용은 보다 포괄적, 다의적이다. 따라서 한 가지 특수한 의도를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할 때는 상당한 해석상의 편협성에 치우칠 우려가 없지 않고 해명의 정당성 확보에 차질을 초래하기 쉽다고 보아진다. 중생과 석가, 철학과 칸트, 장미화와 봄, 마시니와 이태리가 ‘님’이라는 다정다감한 말로 짝지워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국가와 민족에 관한 대명제도 엄연히 큰 자리를 차지하지만, 서정적이며 순수한 사랑의 분위기도 난만히 꽃피어 있다. 그에 못지않게 철학적 사유의 깊이도 상당하며, 중생 구제와 성불이라는 종교적, 인류 전체적 사명의식과 믿음이 산처럼 높이 솟고 바다처럼 깊이 출렁이고 있다. 만해가 초미의 관심과 심혈을 쏟은 것은 민족 광복이었음은 부인 못 할 일이다. 그러면서 승려였으며 불교적 진리에 신심을 쏟아 참구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저술하였음은 만해가 살아간 인생의 최후, 최고 목표는 역시 보살행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위로 부처 되기를 간곡히 염원한 수도인이었음을 증명해 주고, 따라서 그런 의지가 『님의 침묵』에서 표방하는 가장 우선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항이라고 보여진다. 나라 잃은 백성은 중생인 것이다. 하지만 중생이 모두 나라 잃은 백성 아니라는 입장에서 『님의 침묵』을 해명함이 마땅하고 무리가 없으리라 믿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 잃은 백성은 보다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가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군말>을 살펴본다면 ‘해 저문 벌판’은 바로 나라 잃은 백성의 암담한 현실을 포함한 무명 업장이 짙어지는 중생 고해의 장을, ‘헤매는 어린 양’은 구제되어야 할 미망(迷妄)의 중생을 뜻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여섯째 연에서 ‘밤’의 성격과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까지 논의된 첫째 연에서 다섯째 연까지의 시적 분위기를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 연에서의 ‘수직 파문’을 거느리고 내리는 ‘발자취’, 둘째 연에서의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얼굴’과 ‘하늘에 스치는’ ‘향기로운 입김’, ‘알 수’ 없는 근원을 떠나 내리는 끝없는 ‘노래’, ‘바다를 밟고’ ‘하늘을 만져’ 온 다음 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 곧 연화장(蓮華藏) 세계의 법열(法悅)에 찬 이법(理法)을 펼치고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시’, 다시 말해 최후, 최상의 서정적 정점에서 시의 꽃을 뿌린 다음 맞이하는 것이 ‘밤’인 것이다. ‘밤’이란 함부로 아무렇게나 미적지근하게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 그것이 아니라 무심인 듯 아닌 듯한 가운데 끊임없이 빈틈없이 이어지는 묘하고 절실한 수행의 결과로 얻어지는 위대한 자연 귀결(自然歸結)인 것이다. 이들을 종합해 보면 고해에 시달리고 번뇌와 우치와 탐심, 진심(瞋心; 성내는 마음)의 쇠사슬을 벗어나지 못하는 속세의 것, 분명 아니라 할 것이다. 청정법신, 법신의 덕상을 가지가지 구체적으로 체득하고 구현한 노사나불(盧舍那佛)의 모습이요 만해가 탄생시킨 심식(心識)의 응화불(應化佛)이라 할 만하다.
우주에 가득 생동하다가 장쾌한 붉은 시를 하늘에 뿌리면서 이어지는 것, 그것이 ‘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밤에는 그 숭엄한 응화불이 하나로 다시 응집하여 원초적이며 언설을 뛰어넘어 환원되는 형태가 밤이라 할 만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면 첫째 연에서 다섯째 연까지의 시적 정황과 의장이 여섯째 연에서 앞뒤가 와탈 배치되어 「알 수 없어요」라는 시는 혈액순환이 안 되는 불구가 된다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따라서 필자는 이 「알 수 없어요」의 밤을 숭고한 모든 것이 정일하고 엄숙한, 부서질 수 없는 금장(金藏)을 품은 무량무진한 생명의 본원체로 보는 것이다.

 

3.‘밤’과 ‘나의 가슴’의 관계
‘밤’은 위대하다. 불가해의 것이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모든 분별과 이해가 흘러나오기 이전의 연원이다. 이러한 ‘밤을 지키는’ 일의 수행은 성스럽다. ‘지키는’ 일, 그것은 ‘밤’의 어둠을 물리치는 행위가 아니라 그 무진무량한 생명의 본원체이며 모든 이법의 모체인 법의 절대적 가치와 그 위상을 조금이라도 훼손됨 없이, 그 덕상을 체득하며 불이일체(不二一切)가 되기 위한 업무 수행의 장이라 할 만하다. ‘밤’에 안긴 산허리 어디쯤에나, 광활한 벌판의 어느 한 곳에 ‘약한 등불’ 하나 걸려 있다면, 그 밤과 등불의 관계는 뗄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등불’이 있어 ‘밤’의 그러한 숭엄하고 위대한 본질을 여실히 확인하게 되고, ‘밤’이 있어 그 ‘등불’ 제 빛을 온전히 지녀 빛을 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등불’이 만약 환히 밝은 대낮에 놓여 있다면 이미 그 ‘등불’ 제 기능 상실할 수밖에 도리 없게 되고, 밝은 대낮에게 해줄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대낮은 또 ‘등불’이 존재해야 하는 필연성을 부여할 아무런 까닭도 없는 것. 이미 대낮에는 하나가 만법(一歸萬法)으로 삼라만상이 한껏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등불’, 그것은 만법이 귀일(萬法歸一)하여 하나로 응집해 있을 때 그 역능이 발휘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밤’은 ‘등불’에게 요구하는 것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또 ‘등불’이 ‘밤’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다. 둘은 서로 상대가 있음으로써 자기 발견의 절대적 조건이 되고, 둘은 이미 둘이 아니라 완벽한 짝으로서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할진대 나 ‘등불’은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일만 있을 뿐인 것 아닐까. 자기 몸 스스로 타올라 소진하고 거듭 소진한다 해도 다함없는 환희심(歡喜心)은 ‘타고 남은 재’에서 ‘다시 기름’으로 전신하며 끝없이 타올라 오로지 ‘밤’을 지킬 일만 있을 뿐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등불’은 영원한 밤의 핵심이 되고, 지칠 줄 모르고 꺼지지 않는 개안의 표지가 되는 것이다. ‘타고 남은 재’가 ‘기름’이 된다는 대목은 물상적 억지스런 변화를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다함없는 심식 작용의 불식(不息)의 의지 표명이라 할 것 같다. 보살 수행의 길에 52등위(等位)가 있다. 그중에 41위(位)를 환희지(歡喜地)라 하는데, 수많은 수행의 결과 비로소 마음을 안주시킬 수 있는 스스로의 땅에 도달한 등위를 말하는 것으로, 완벽한 몸의 즐거움과 마음의 기쁨을 체득한 경지를 일러 하는 말이다. 달리 말한다면 보살 수행의 41위에 올라야 비로소 굳건히 올라서 있을 수 있는 마음의 땅이 마련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모든 번뇌, 망상, 삶의 고뇌를 벗어나 생사를 초탈한 피안의 땅에 처음 도달한 등위라 할 것이다.

 

등불의 등위와 역능
진여(眞如)의 이(理)의 1분(分)을 증득하여 성인의 기초적 위에 올라 물러남이 없는 그 등위를 환희지라 하고, 보살 수행 더 수승해져서 수혹(修惑; 사물의 진상을 완벽히 알지 못하는 데서 오는 번뇌)을 끊고, 청정 계율(戒律)을 범하여 얻는 더러움을 다시 입지 않는 등위, 곧 42위의 이구지(離垢地)에 이르게 되고, 나아가 43위의 발광지(發光地)에 이르게 되면, 본각(本覺)이라 하여 지혜의 광명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이 광명, 물상(物象)적 빛이 아니라 마음에서 비춰져 나오는 빛이기에 그 비춰져 나옴이 ‘그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더러서 물상적 초목류가 ‘타고 남은 재’처럼 소진되는 듯하여도 ‘다시 기름’으로 전신하고 길이 ‘탈’ 수 있다는 말이 되리라고 본다. 탈 수 있는 물질이 만약 초목과 같은 고형(固形)이라면 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탈 수 있는 여력이 없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으나, 타는 것이 심상(心相)의 현상이기에 고형 물질이 타고 남은 재에 끝나지 않고 이어 액형(液形)의 탈거리로 전환되어 탈 수 있다는, 끊이지 않는 연속 연소(燃燒)성을 표출한 것이라 여겨진다. 달리 말한다면, 영속적으로 타는 모습에 고형과 액형,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전환하여 이어지는 시각적 효과를 부각시킨 표출이라 여겨진다.
보살 수행의 43등위 곧 발광지에 밝혀진 불, 그것은 5대양의 물을 다 부어도 끄지 못할 광명인 것이다. 어디에 막힘이 있을 것인가.
‘등불’ 그것, 비록 ‘약할’ 뿐이지만 만해의 마음밭(心田)에서 타오르는 환희, 곧 보살이 망망 고해(苦海)를 건너 비로소 피안의 언덕-안락의 마음밭에 오른, 말로 못할 기쁨, 그 환희의 ‘불’이라 해야 마땅할 것 같다. 보살이 성불하기 위해 육도(지옥, 아귀, 수라, 축생, 인간, 천상)를 두루 전생(轉生)하여 그 몸을 천만 번 바꿀지라도 성불을 향한 지속적인 정진과 수행은 그칠 새가 없는 것, 마찬가지로 만해의 ‘가슴’은 그칠 줄 모르고 밤(원초적 본질)을 지키기 위해서는 타고 남은 재가 다시 이어 탈 수 있도록 기름이 될 마음의 준비 또는 맹렬한 결심이 되어 있다는 의지 표명이라 할 것이다. 가난한 여인 난타(NANDA)18)가 부처님께 올려 드린 하나 ‘등불’은 복밭(福田)을 밝히는 것이라 한다면, 「알 수 없어요」에 밝혀진 ‘등불’은 청정법신을 지켜 밝히는 법등(法燈)이라 할 만하다.
18)난타; 가난한 여인, 아사세왕이 부처님을 청하여 설법을 듣고 기원정사로 가시는 길에 천곡(千斛; 1만 말) 기름으로 등불을 밝혀 드릴 때, 난타는 1원의 돈으로 겨우 기름을 사서 등불 하나 올려 드렸을 때, 수많은 등불이 다 꺼져도 난타의 등불은 꺼질 줄 몰랐다(貧者一燈)
첫째 연에서 다섯째 연까지에 담겨진 시적 형상화는 만법이 다양하게 펼쳐지는 과정과 형태를 그린 것이라 한다면, 그렇게 펼쳐진 만법의 갖은 형상이 ‘밤’이라는 원초적이며 근본적인 본원으로 귀일하는 이치를 그리고, 그 위대한 법원(法源)을 터득하고 지키는 법등의 당연히 수행해야 할 사상(事相)을 그린 것이 시 「알 수 없어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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