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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해곤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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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가면 약속 시각에 맞출 수가 없겠다 싶었으나 도리가 없다. 어쨌든 출발은 해야 한다. 구김이 없는 생머리의 아가씨가 고개를 쳐들고 잠든 뒷자리에 앉았다. 핸드폰을 진동으로 해 놓고 카톡을 훑어본 후 유튜브를 제목만 몇 가지 읽고 나서 눈을 감았다. 일과를 마치고 가기 때문에 피곤했던지 스르르 잠이 오는구나 했을 때 갑자기 전화벨 소리가 좌석 버스를 들었다 놨다 한다. 자고 있던 앞좌석이 발색처다.
“어, 왜? 퇴근 중.”
그렇게 빠지지 않는 미모인데도 조심성이 안 보이는 목소리가 높은 음자리표에 가깝다.
“만났다고? 봐줄 만해?”
주섬주섬 얻어듣는 내용인즉슨 여자친구가 남자를 소개팅으로 만난 상황과 자기도 엄마의 강요로 보긴 했는데 인제는 자기가 직접 찾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다음 얘기들은 자기의 친구의 지인과 통화 중인 친구의 친구로까지 동원된다. 하루 종일 근무에 시달리다 쉼터를 향한 승객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용으로 청각을 소란하게 괴롭히고 있다. ‘이걸 계속 들어줘야 하나’ 고민하며 둘러보니 젊으나 늙으나 모두 눈을 감고 있다. 즐기면서 듣는 중인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는 것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다. 잔잔히 들려오던 라디오 소리까지도 소음으로 따라 바뀌고 말지 않는가! 상황 파악 못 하는 아가씨의 철없는 처신을 언제까지 듣고 있을 것인가. 과천의 끝자락인 남태령의 문턱에 다다랐다. 이제부터는 30분이 걸릴지 한 시간이 걸릴지는 오직 차만이 아는 일이다. 여자의 넋두리는 도저히 끝날 것 같지가 않다.
‘안 되겠다! 총대를 메자!’ 기선 제압이 필요할 시점이다.
“어이, 기사 양반! 이게 차 속입니까 시장 속입니까? 라디오를 끄든지 지방 방송을 죽이든지 빨리 좀 조치합시다!”
목소리나 적은가.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두 가지를 다 죽인 것이다. 똑바로 앉은 앞여자의 생머리가 유난히 조신하게 가지런하다.
“허, 그것참!”
뒷좌석의 나이 듬직한 사나이의 혀 찬 소리다. 아마 ‘잘 하셨소’라는 말은 생략이 된 듯하다. 남태령을 어떻게 넘어왔는지조차 모르겠다.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건너편 신호등을 기다리는 군중 속에서 공중 도덕의 개념 없는 그 아가씨와 나란히 서 있게 되다니. 서로 말없이 곱지 않은 눈을 맞추고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나누고 있었을까.

 

며칠 전만 해도 그렇다. 종로 3가역에서 1호선 전철로 수원을 가는 중인데 마침 노인석에 자리가 하나 비었길래 서슴없이 앉았다. 요새는 좌우 살피지 않고 그냥 앉는다. 자세는 젊은이 못지않아 그런지 의아한 눈빛을 느낄 때도 있지만 잡티 하나 없이 빛나는 흰머리가 내 빽(back)이다. 나보다 먼저 타고 있던 네 명의 남학생이 건너편 출입문에 서성거린다. 그중의 한 명이 자기 발치에 크고 작은 침덩이를 종류별로 계속 뱉고 있다. 불결도 하지만 공중질서상으로도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친구 중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관자놀이가 힘이 솟는다. 입술은 요동치는데 섣불리 말로 연결을 못 했다. 많은 사람 가운데 지적을 받으면 의외의 돌발적 반응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된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비굴함을 속으로 삭이면서도 시선은 떨구지 않았다. 행여 마주치면 독한 불화살의 의미를 알아차렸으면 싶어서고 하다못해 수신호라도 보내기 위해서다. 끝내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아서 차라리 녀석들이 어서 내려버리기를 바랐는데 오히려 내가 먼저 목적지에 내렸다. 그 꼴을 안 봐 시원하지만 하던 일을 미룬 것같이 찝찝하다. 해결도 못 하고 할 수도 없는 일은 빨리 잊어야 하는데도.

 

그러고 나서 얼마 후의 일이다. 주유소의 진공청소기로 차의 내부 청소를 하는데 500원짜리 동전이 없다면서 이체를 하겠다 하길래 절차와 확인과 액수가 적어서 내가 빌려줄 테니 나중에 꼭 갚으라면서 차번호만 적어놨다. 하루가 지나고 나흘을 넘겨 3주가 지났는데도 감감무소식이다. 까짓것 동전 두 닢쯤 포기해도, 길에서 잃어버린 양 무시할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약속이니까. 우리의 다음 세대를 믿고 싶었고 아무리 적고 작은 것이라도 서로 지켜야 하는 기본을 가져야 한다는 마음에서다. 적어놨던 차번호를 들여다보고 고민을 했다. 치사한 인간이라 해도 좋다. 앞서 버스 안에서의 무개념 아가씨와 전철에서의 학생들과 이 젊은이들이 우리나라를 짊어지고 가야 할 일꾼들이고 대한민국의 주인 될 대한국민이 아니겠는가. 잘못한 건 고쳐줘야 진정한 아낌과 사랑이 아니겠는가. 나 하나 잘한다 해서 사회 전체가 순화되고 기초질서가 정립되는 것도 아니련만 결심을 했다. 적어놨던 차번호를 들고 해당 지역의 경찰 지구대를 방문했다. 친절도 하고 예의도 바르다. 역시 백발을 보더니 ‘어르신’이라 칭하면서 “잘 오셨습니다. 그러셔야죠” 하는데 하나도 빈정거리는 것 같지가 않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내가 너무 하고 있나’ 하는 속셈이 있긴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 후회까지는 아니다. 접견용 의자에 앉혀 놓고 자기 자리에서 조회를 하나 보다. 연결됐는지 한참을 통화하고 나서 소식이 올 것이니 가셔서 기다리란다. 고마운 경찰이다. 말마따나 3일 후에 천 원을 가지고 왔다. 정작 나는 휴무일이었지만 만났더라면 사과 아닌 사과도 하고 차라도 한 잔 마시면서 살아왔던 인간관계도 나눴을 텐데 아쉽다. 주변에 많은 우리의 청년들이 건전한 성인으로 익어 가도록 소망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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