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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를 위한 변명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정권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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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여름은 무난히도 덥고 길었다. 열대야에 시달리던 뜨거움은 간 곳이 없고 어느새 풍경이 짙은 노랑, 빨강, 따뜻한 오렌지 등 김해의 산과 들은 가을 색조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가을은 추억, 향수, 설렘 같은 단어들과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익숙했던 풍경은 낯설어지고 찬란하면서 쓸쓸한 기분이 동시에 느껴지는 가을은 나를 시인으로 만든다.
시적 감성을 느끼며 공원을 거닐다 쓸쓸함이 묻어 있는 K를 보았다. 패기 왕성하고 당당했던 젊은 날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연못가에서 홀로 가을을 즐기는 남루한 복장의 K를 보면서 바삐 사느라 잊고 있었던 한때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내가 K를 처음 만난 것은 어느 문화 행사에서였다. 사회 활동을 하던 그가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와 책임감 있는 리더십으로 K 주변에 늘 사람이 모여들었다. K는 그동안의 잘못된 제도적 관행을 깨뜨리고 새로운 제도와 절차를 정착시켜 내고자 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동력을 개혁적인 시민 사회와 도덕적인 세력에서 찾았다. 자부심과 기개가 대단한 젊은 리더였다.
명예와 부를 다 가지려는 것은 누구에게나 지나친 욕심이다. 그중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그는 명예를 선택하겠다고 어느 공개 행사장에서 말했다. 사회적 명성과 지위를 갖게 된 K가 돈과 상관없이 삶을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긴가민가했다. 어느 정도의 지위와 힘이 생긴 K에게 부를 이룰 수 있는 여건은 충분했다. 실제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했던 그는 불의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보기 드문 의로운 지사(志士)였다.
K를 알아가면 갈수록 놀랍고 정감이 갔다. 그는 서민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민중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있다. 원대한 포부와 자긍심에 겸손하기까지 했다. 강한 젊음으로 이루어진 그에 대한 평가는 양분되어 있었다. 긍정적인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각박하고 인색했다. 그의 의로운 성정을 이해하기보다 권위의식과 건방이 넘치는 사람으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다. K가 자신의 참모습을 알아 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K에게도 약점이 있다. 사람을 보고도 쉽게 못 알아보는 것이다. 어느 친구는 K가 자기를 못 본 체하고 지나가더라고 내게 말할 정도였다. 내가 아는 K는 어느 모임이나 단체에서도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헌신과 배려가 몸에 배인 사람이다. K의 품성을 아는 나는 K가 시력이 약해 오해를 받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학창 시절 지도한 교사들도 책임감이 강하다 보니 지나친 의협심 때문에 오해를 받을 수 있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아무튼 사회의 지도자로서 그는 불의를 스스로 용납 못하는 순백한 사도였다.
분명한 것은 의를 배반하는 자는 장수하고 순응하는 자는 요절하고 의를 좇는 자는 빈궁하고 거역하는 자는 부귀하였다는 어느 혁명가의 말처럼 한참 일할 나이에 K는 배낭을 메고 방랑으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때 나는 차라리 K가 조금 영악하고 욕심이 있었다면 하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순수하지만 무력한 정의와 불순하지만 영악한 불의가 대결했을 때 불의가 승승장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모순이 항상 순수한 영혼을 괴롭히고 있다.
지난 30여 년간 K는 나의 친구이면서 멘토였다. 그가 품은 이상에 공감하여 가슴 설레기도 했다. K가 눈물을 흘리면 함께 가슴을 쳤고 그가 좌절하거나 의욕을 잃으면 나도 실망해 어쩔 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그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다. 역사를 의식하며 살아온 그의 삶을 옆에서 지켜본 나는 비록 그가 사회의 낙오자가 되었다고 해도 그의 이상과 정의감을 믿고 있다. K는 한평생 자신이 역사에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를 걱정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갈 인물이다.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이다. 제주 유배 생활하던 추사가 그의 제자 이상적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선물한 <세한도>에 찍힌 도장의 문구다. 추사는 <세한도>에 ‘세상은 흐르는 물처럼 오로지 권세와 이익에만 수없이 찾아가서 부탁하는 것이 상례인데 그대는 많은 고생을 하여 겨우 손에 넣은 그 책들을 권세가에게 기증하지 않고 바다 바깥에 있는 초췌하고 초라한 나에게 보내주었도다’라고 썼다. 다들 위리안치의 유배 중인 추사를 멀리하지만 이상적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도 오늘은 스스로 위리안치라 느끼는 K에게 이상적 같은 친구가 되고 싶다.
불타는 여름을 견뎌낸 산이 노랑, 빨강, 오렌지색으로 아름다운 풍광을 이루듯이 K도 인고의 세월을 끝내고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자동차 오디오에서는 ‘우린 늙어 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 가는 겁니다’ 누구든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용기를 얻는다.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서 덩그러니 혼자 있게 되는 경우가 있기 마련이다. 노사연의 <바램>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의 등을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K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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