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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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썰미로는 이불로 보였다. 하늘색과 하얀색이 어우러진 화사한 봄이불이 쫙 펼쳐져 있는 줄 알았다. 가까이 다가갔다. 좁쌀, 녹두 크기나 될까, 콩보다 작아 귀엽고 앙증맞은 하늘색 얼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양지바른 곳 무리지어 있어 외롭지 않아서일까. 순한 표정이 밝고 환하다. 아파트 뒷산 평평한 풀밭에 넓게 자리 잡은 풀꽃, 다정한 친구처럼 말을 걸어왔다.
“내 이름을 알고 있니?”
문득 할머니의 비단이불이 떠오른다. 가슴 찡하고 뭉클하다. 한 살 터울 여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할머니는 짝 없는 내 예단 이불 한 채 먼저 만드신 후 동생 이불을 만드셨다. 할머니의 손끝으로 한 땀 한 땀 엮은 따스한 비단이불, 그 곱고 귀한 비단이불이 땅에 펼쳐져 있다니 놀랍고 신기하다.
하늘색 얼굴이 신비스럽다. 만지고 싶다. 살짝, 손끝이 스치자마자 얼굴과 몸이 분리된다. ‘살짝’ ‘호기심’이란 단어가 한 짓이다. 나뭇가지 주워 다시 잎사귀들 제치며 뿌리를 찾았다. 땅속의 뿌리는 거친 돌과 잔가지 나무토막, 흙덩이들과 뒤엉켜 있었다. 비단처럼 보드랍고 하늘하늘 아름다운 작은 풀꽃들이 덮어주고 있는 것은 고운 것만이 아니었다.
비단이불은 맞벌이와 두 명의 육아에 지친 나를 포근히 감싸주었다. 힘든 하루, 잘 견뎌줬다고 살포시 토닥이는 이불, 이불을 덮고 자야 마음이 안정되고, 자고 나면 다시 새롭게 일어설 수 있었다. 고단한 나를 위로하며 푸른빛 희망을 잃지 않게.
풀꽃 이름을 찾아보았다. 큰개불알풀이라고?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열매의 모양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순 넘도록 큰개불알풀을 몰랐었다. 작아서 더 신비스럽고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야생화의 한 무리를 보지 못했다면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비단같이 아름답다고 해서 ‘큰지금(地錦)’ ‘땅비단’, 봄을 전하는 까치 같다고 ‘봄까치꽃’이라고도 불린단다. 이름이 이채롭다. 야생화라 그런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름을 알고 나니 주변에서 자주 마주친다. 아파트 정원수 소나무 아래, 산책로 가로수 주변, 언덕배기 등 여기저기 ‘땅비단’이 피었다. 특히 푸른 길가 넓은 공터에서 이름 모를 키다리 잡초 곁 무성한 초록빛 풀 속에 하얀 별들이 무수히 떴다. 한낮의 쏟아지는 햇살 먹어 은하수로 변신할 걸까, 땅의 눈부신 별들이 하늘의 별 못지않다.
날씨가 다시 추워졌다. 해 질 무렵 먹구름에 바람이 세차다. 피었던 꽃들 어쩌나 싶어 아파트 정원에 나가 소나무 아래 핀 별들을 찾았다. 어느새 사라졌다. 쭈그려 앉아 자세히 보니 고개 떨군 별들, 좁쌀보다 작은 눈물 한 방울씩 매달고 있다. 우는 걸까? 며칠간 지켜보니 잠을 잔 거였다. 네 장의 꽃잎 서로 얼굴 맞대어 푸른 몸속에 자라처럼 쏙 감췄다.
꽃샘추위 회오리바람에 떨어진 땅비단 꽃잎, 얼마나 많았을까. 그럼에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퍼져 가는 생명력이 경이롭다. 바람의 노래와 전설 같은 봄눈의 하얀 이야기를 찰랑찰랑 전해주고 싶었을까. 무수히 달린 푸른 잎사귀마다 꽃대 하나씩 옆구리에 차고 식구를 늘리고 있다. 햇살 한 줌 더 있는 곳으로 뻗어가려고 바지런 떨어 손발에 알배도록 몸을 단련시킨다. 푸른 피 씽씽, 붉은 피 아닌 푸른 색깔 피라 더 진하고 피돌기를 잘할까. 궁금하다. 야생의 척박한 환경, 잡초들 영역 다툼 속에서 더 강해졌을 터, 무엇보다 꿈을 잃지 않아서였겠지. 녹두 알처럼 작아도 봄꽃 전령사, 온 땅을 별빛 반짝이는 비단으로 아름답게 펼쳐 나가겠다는 의욕이 돋보인다.
땅비단은 알고 있었다. 너무 작아 밟히고, 돌에 으깨지고, 거센 바람 속에서도 수천수만 송이 봄꽃으로 피어 자기 존재감을 알렸다는 것을. 치열하게 살아온 덕분에 꽃이 군락을 이루어 비단이불로, 눈물방울이 점으로, 순간 모습을 감추기도 하고, 반짝이는 은하수로 변신시키는 마술을 부렸다고, 땅비단이 수줍어하며 말한 것 같았다. 꿈꾸는 과정이 삶이라고, 자신의 이름이 여러 개가 된 이유를 묻는 이들을 이해시키려는 듯싶기도 했다.
나를 키워주신 할머니의 비단이불은 내 그림자를 덮어주었다. 서툴고 힘든 엄마로서의 눈물을, 팽팽한 활시위 같은 직장생활의 긴장감을, 자신을 채찍질로 조급해하는 불안감을 다독이며 서서히 잠재워 갔다. 비단이불은 그림자를 버리지 않았다. 그림자를 애처롭게 쓰다듬고 안아주었다. 가뭇없는 세월 속에 상처가 꽃이 되듯,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 알알이 박힌 반짝이는 푸른 별들이 비단이불에 내려앉았다.
나는 ‘큰개불알풀’을 ‘땅비단’으로 불러주고 싶다. ‘큰지금’ 이름은 큰개불알풀보다 부르기가 어색하고 친근하지 않다. 야생화에 관심 없던 내가 비단이불처럼 쫙 펼쳐진 땅비단 꽃밭에 마음을 뺏긴 것은 나를 키워주시고 정을 듬뿍 주신 할머니의 사랑이 땅비단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흔하고 하찮고 작은 것들이 나를 일깨운다. 인간의 쓸모에 따라 제거의 대상인 잡초에게도 의미 있는 이름이 많다. 누구에게나 가장 아름답던 시절과 모습이 있는 것처럼 따스하고 찬란한 모습을 연상하고 기억할 수 있는 이름으로 불러주면 오직 좋을까!
“땅비단, 땅비단!” 자꾸자꾸 이름을 불러본다. 이름을 부를수록 땅비단 자락 햇살 머금어 푸르게 물들여 간다. 머지않아 소풍 가는 아이들, 까만 머리에 땅비단 꽃핀 되어 엄마들 입가에 미소 짓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