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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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선 님, 들어오세요!”
6번 진료실 간호사가 호명했다. 나는 나지선 이름에 눈을 번쩍 떴다. 내 옆 옆자리 여자가 검정 패딩을 벗어 앉았던 자리에 던지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나지선, 나지선? 어딘가 아는 이름인데 누구 이름일까? 폰에서 윤희영을 눌렀다.
“참 부지런도 하셔. 아침부터 웬일?”
“너, 나지선 이름 알지?”
“뚱딴지같이 나지선은 왜 누군데?”
“우리 여고 동창 중에 나지선 애 있었지? 맞지?”
“나지선, 나지선? 겨우 생각나네. 걔 언제 봤어야지. 동기회 한 번 안 나온 애를 아침부터 왜 찾누?”
“여기 병원인데 지금 불려 들어간 여자 이름이 나지선이야.”
“동명이인 아니고? 강산이 몇 번이나 지났는데… 나이 든 나지선 알겠어?”
“마스크까지 해서 그 앤지 아닌지 잘 모르겠더라. 끊어.”
정형외과 병원에 나는 왼쪽 무릎 통증으로 연골 주사 맞으러 왔다. 연골 주사는 일주일에 한 번, 삼 주 맞으면 신기하게 통증이 나았다. 다행히 1년 넘게 병원에 오지 않았는데 날이 추워선지 통증이 재발하였다. 무릎이 아프면 걷기가 힘들어 짜증이 나고 삶의 질이 떨어진다. 어디 가도 앉을 자리만 보였다. 접수 번호 15번 뽑아 진료실 앞으로 가보니 소파에는 벌써 사람들로 찼는데 5명 자리에 4명 앉아 있어 ‘실례합니다’ 하고 그 사이에 비집고 앉았다. 겨울이라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 다들 조금씩 비켜 앉는데 검정 패딩에 검은 마스크를 한 여자는 꼼짝도 안 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뒤에서 연골 수술했다느니, 방에서 넘어져 입원하였다, 외래 왔다는 등 말들이 끝이 없었다. 여자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검정 털모자 아래 삐져나온 파마머리, 갈색 털 스웨터, 회색 털 목도리, 여자는 벗어 둔 검정 패딩을 입었다.
“잠깐만요, 이름이 나지선 씨?”
“……?”
여자는 무표정하게 아주 귀찮은 듯 나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 저 얼굴, 저 코, 저 눈, 야윈 체격, 나이가 들어도 지선이네.’
“너 나지선 맞지? 오랜만이다!”
“아니, 누군데 아는 척이야?”
“나 모르겠니? 고희진, 고2 때 우리 짝지도 했었잖아!”
나는 불쑥 반가움을 나타냈으나 그녀는 무심한 얼굴이다.
“수납하고 약국 가야 해.”
“이렇게 만났는데 그냥 간다고, 나 진료받고 우리 커피 마시자?”
“싫어! 난 커피 안 마셔. 갈 거야.”
“그럼, 저기로 가자. 너 핸드폰 번호 알려 줘. 담에 만나 얘기 좀 하자.”
“핸드폰 안 가져왔어.”
“뭐라고? 그럼 너 폰 번호 불러 줘, 내가 저장할게.”
“싫어. 너 뭘 믿고 내 번호 알려 주냐.”
“얘, 무슨 말을 그렇게 하니? 몇십 년 만에 만난 친구한테.”
“친구는 무슨. 생전 안 보고 살았는데. 전화할 일이 뭐가 있다고.”
“너 이상하다. 꼭 그렇게 말해야 속이 시원하니?”
그때 지선의 핸드폰이 울렸다, 패딩 호주머니에서.
‘계집애 싸가지 하곤….’
“없다는 핸드폰이 거기서 나오냐? 얼른 받으라. 안 들을게.”
지선이 나를 흘겨보며 천천히 패딩 호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었다. 세상에, 나는 나지선 핸드폰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옛날 폴더폰이 아닌가. 파파 할머니도 아니고 뜬소문에 남편이 부자이고 아들이 약사라던데. 내가 전화 받게 자리를 비켜 주느라 화장실 다녀오니 지선은 진료비 수납하고 기어이 가버렸다. 계집애가 하나도 안 변했어. 내가 지선을 다시 만난 것은 일주일 뒤 그 병원에서다. 진료 먼저 받은 내가 지선을 기다렸다. 사십여 년을 은둔하고 사는 친구가 정말 궁금했다.
“얘, 우리 어디 가서 얘기나 좀 하자.”
“싫어. 나는 할 말 없다. 집에 갈래.”
“네 집에 늦둥이 젖먹이 있냐? 어째 차 한 잔 마실 시간도 없어?”
내가 울컥 신경질을 내자 지선은 잠시 생각하더니 잠깐만 있다 가겠다면서 겨우 나를 따라 나왔다. 병원 부근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니 잔잔한 음악과 향긋한 커피 향에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손님이 뜸한 실내 포인세티아 화분이 놓여 있는 햇살 좋은 창가에 자리 잡자 지선이 실내를 둘러보더니 안쪽 외진 자리로 갔다. 나는 아메리카노 지선은 블루베리 주스를 주문했다.
“너 동창회에 가끔이라도 나와라. 친구들 얼마나 변했는지 안 보고 싶어?”
“다들 잘 살겠지. 하나도 안 궁금하다 나는.”
“너도 참, 아픈 친구도 있고 슬픈 친구도 있고. 다들 너 소식 궁금해한다. 너 폰 번호 몰라 전화도 못 하잖아. 너 이 근처 사니?”
“이 부근에, 너는 어디 사는데?”
“얘, 나한테 처음 뭘 물었어. 우리 가까이 사는구나.”
“너는 옛날 그대로네. 잘 웃는 것도 똑같고.”
“많이 웃어 주름살 많이 져서 이젠 덜 웃으려 한다.”
“나는 세상 웃을 일이 없더라.”
“뭐라고 네 남편 부자라며?”
“부자? 난 몰라. 부잔지 가난뱅인지. 나는 남편하고 말 별로 안 한다.”
“뭐라고? 말을 안 하고 어떻게 사는데?”
“다 살아진다. 꼭 할 말만 하면 할 말이 없니라.”
“너는 할 말 안 할 말 구별하며 말해? 친구들 소식 묻지도 않네.”
“다들 잘 살겠지.”
“졸업하고 40년. 아픈 친구도 있고 성질 급하게 먼저 간 친구도 있어. 대학교수, 한식당 사장, 중국집 사장, 봉사 다니는 친구 만나면 난리란다. 친한 친구끼리는 자주 만나기도 하지. 너는 우리 기억에서 잊어버린 친구 되었어.”
“나는 사람들이 제발 날 잊어 주길 바라는데, 잘됐네.”
지선은 커다란 눈을 껌뻑이며 주스만 홀짝홀짝 마셨다. 마주 앉아 보니 세월은 예뻤던 지선이도 중년 여자로 만들어 놓았다. 지선은 말이 없었고 나는 친구들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러다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지선을 만났다. 우리는 가까운 시민 공원으로 갔다. 봄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는 공원을 거닐었다. 나는 그날 너무도 슬픈 나지선 부모님 얘기를 듣게 되었다.
땅뙈기 한 평 없는 지지리 가난한 빈농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난 아버지는 굶주리기를 밥 먹듯 하며 자랐다.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행복이었다. 열 살 때부터 입 얻어먹는 남의 집 꼴머슴이 되어 망태기에 소꼴을 베고 황소를 끌었다. 열여섯 살 때 부농의 지주댁 새끼머슴이 되었고 20세가 되자 새경을 받는 머슴이 되었다. 지주 나리는 안팎일 성실히 하는 머슴을 잘 보았는지 24살, 이웃 동네 가난한 과수 딸과 냉수 한 그릇 올린 결혼식을 시켜 주고 소작논을 떼주었다. 스무 마지기 논농사를 정성을 다해 소출을 많이 올리자 나리는 좋아했다. 그리고 나리는 틈만 나면 아버지를 불러 과수원일, 집안일까지 다 시켜 아버지는 허리 한 번 펼 수 없었다. 나리는 순사와 면서기가 동네 오면 사랑채에서 푸짐한 음식 대접을 하였다.
해방, 해방되고 이승만 정부에서 농지개혁을 시행하는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소작 농지 몰수, 무상 분배, 소작 제도 금지 시행령으로 가난한 소작농들은 농지를 물려받았는데 아버지는 지주댁 은공을 배신할 수 없다며 스무 마지기 소작논을 분배받지도 받을 줄도 몰랐다. 은혜를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리는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평생 그 땅에 농사지으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나리는 소작논을 하루아침에 남몰래 팔아버렸다. 엄마는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그 땅만 받았어도 배불리 먹고 새끼들 개고생 안 시킬 것을, 키우던 암소까지 뺏겼다고 아버지를 원망하였으나 아버지는 인두겁을 쓰고 그런 불손한 짓은 못한다고 하였다.
소작논을 뺏긴 아버지는 어린 자식 둘 데리고 지리산 아래 운봉으로 갔는데 먹고 살길이 없어 지리산 화전민 초막으로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숯만 구워 팔아도, 지천인 산채만 캐 팔아도 먹고 산다는 고향 친구 말 듣고 들어갔는데 점점 더 깊은 지리산 골짜기로 들어갔다. 허름한 수수깡 초막에서 부부는 손이 헐도록 비탈진 돌밭을 일구어 채소를 심고 옥수수, 감자를 심어 끼니를 이었다. 부부는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다래, 고사리, 취나물, 두릅 등 산채와 산도라지, 더덕, 하수오, 칡 등 약재를 캐 모아 하동 장날, 남원 장날에 이고 지고 내다 팔았다. 부부는 6·25가 난 줄도 모르고 살았다. 산채를 이고 지고 남원장에 갔는데 난리가 났다며 인심이 흉흉하고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골 깊은 지리산은 조용했다. 북쪽 공산군이 쳐내려온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용하던 명산 지리산 깊은 골짜기에 느닷없이 공비들이 숨어들었다. 공비들은 밤이면 산아랫마을로 내려가 돼지며 닭을 잡아가고 곡식을 털어갔다. 노인이고 젊은이고 협박하여 심부름을 시켰고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죽였다. 험악한 공비들 숫자가 날로 늘어갔다. 젊은 아버지는 산비탈 감자밭에서 일하다 공비들에게 잡혀갔다. 아버지는 밤이면 마을로 내려가 공비들이 빼앗은 곡식이며 가축을 지게에 지고 날랐으며, 그들 은신처로 끌려가 나무를 패고 공비들 밥을 지었다. 공비들은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총을 아버지 등 뒤에 겨누고 앞장세워 쌀, 보리, 감자, 옥수수, 돼지, 닭, 개까지 눈에 보이는 대로 털어가고 잡아갔다. 중한 암소를 끌고 나오면 주인이 고삐 잡고 울고불고 버티면 사정없이 흉기를 휘둘렀다. 농부는 시퍼렇게 눈을 뜨고 죽었다. 지리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공비들 만행에 살던 집을 버리고 피신을 하였다. 지리산 아래는 점차 경찰과 군인들이 에워싸고, 밤이면 콩 볶는 소리에 사람들은 벌벌 떨었다.
엄마는 가끔 주먹으로 가슴을 탕탕 쳤는데 목도 꺽꺽 잠겼다. 먼저 낳은 자식 둘을 끔찍하게 잃었다. 공비들에게 붙잡힌 아버지 때문에 도망도 못 가고, 사람들이 잘 모르는 굴속에 숨어 살았는데 네 살, 두 살 어린 두 아들을 굴속 깊이 숨겨 놓고 먹을 걸 구하려 남원장에 갔다 오니, 굴 입구에 청솔가지 처넣어 불 지른 흔적에 눈이 돌아갔다. 두 발과 열 손가락이 불에 데는 줄도 모르고 잔불을 헤치며 굴속으로 들어가 보니 생떼 같은 두 아이가 시커멓게 그슬려 죽어 있었다.
“아이고, 지리산 신령님요! 천벌 받을 이 짓을 누가 했으랴? 신령님은 똑똑히 보셨지라? 이 어린것들이 무슨 죄 있다고 청솔가지 처넣어 이리 모질게 죽여요? 억울하게 죽은 우리 새끼 둘 신령님 제발 제발 거두어 주소!”
엄마는 두 아이를 지리산 나무 아래 묻고는 피눈물을 뿌리며 산에서 도망쳤다. 아버지는 공비들 심부름꾼 하다 국군과 공비들 싸움이 붙었을 때 도망쳤는데 누군가 공비 끄나풀 부역자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잡혀가 죽도록 얻어맞고 갇혀 있었는데, 그날 밤 민가와 지서가 불타는 사태가 벌어진 틈에 도망쳤다. 뼈만 남은 아버지 몸은 너무도 끔찍하여 옷을 찢어 상처를 묶고 절뚝절뚝 누더기 행색으로 인가를 피해 밤길을 걷고 또 걸었다. 어디든 멀리 달아나야 했다.
“우리는 너무 무서워 죽지 않으려고 총부리 앞에 코뚜레 한 송아지처럼 끌려 댕겼는데 불쌍한 어린 새끼들만 험하게 잃었으니!”
부모님은 들판의 채소와 곡식을 주워 먹으며 몇 날을 밤길을 걸어 생전 낯선 곳으로 흘려들었다. 아는 사람 만날까 무서워 섬으로 숨어들었다. 부산하고도 영도, 이북 피난민이 난리통에 많이 내려와 사는 산비탈에 움막도 없이 거적때기 하나 깔고 기거했다. 피난민들 말을 따라 이북 말을 했다. 아버지는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했다. 엄마는 임신이 되어 뱃속 애를 지우려고 언덕을 구르고 간장을 마셔도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애를 낳아 업고 자갈치 시장에서 재빠르게 장사들 일손을 도왔다. 자갈치 아지매들이 갓난애를 보고 끌끌 혀를 차며 먹을 걸 주어 허기를 면했다. 나중에 시장 귀퉁이 땅바닥에 밀가루 포대를 깔고 생선 몇 마리 놓고 장사를 하였다. 경비가 오면 포대를 끌어안고 뒷골목으로 달아나기 일쑤였지만 죽을 먹고 살았다. 엄마는 머릿수건으로 얼굴을 푹 가리고 아버지는 거적때기 움막에서 꼼짝도 못했다. 다행히 움막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엄마는 2년 후, 1평 노점을 차지한 자갈치 아지매가 되었다. 뒤늦게 딸아이가 태어났다. 애들은 아버지가 돌봤다.
국민학교 다닐 때, 그때는 무슨 반공 교육을 왜 그리 많이 하는지 너무 무서웠어. 어쩌다 내 입에서 반공, 공산군, 빨갱이, 간첩, 말만 나와도 부모님은 질겁을 하고 내 입을 우악스레 틀어막았어. 벌벌 떨면서 그런 말은 죽어도 입에 담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 엄마 다신 못 본다고 겁을 주었어. 나는 반공 시간만 되면 가슴이 팔딱팔딱 떨려 고개를 푹 숙이고 빨리 시간 지나기만 기다렸어. 아프다는 핑계로 조퇴도 하고 결석도 하였지. 강원도 어린아이가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다가 죽고, 간첩 사건 등, 숨도 못 쉬게 무서운 일들이 일어나 나는 학교에 못 가고 이불 뒤집어쓰고 억지로 잠만 잤는데 머리가 너무 아파 밤낮 짜증을 부렸어. 우리는 왜 애들이 방학하면 간다고 자랑하는 외갓집도 없는지 궁금했지만, 아버지 표정이 무서워 묻지도 못했어. 학교에 다녀도 나는 친구가 없었어. 아버지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입 닫고 공부만 하라고 다그쳤어. 내내 집에 숨어 있던 아버지가 공부 잘하는 오빠 학교 공납금 벌려고 국제시장 지게꾼이 되었는데 아버지는 얼굴 가리개 위에 떨거지 모자를 덮어쓰고 일했어. 나보다 일곱 살 많은 오빠가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었나 봐. 육사는 학비 등 전부 공짜라고 했어. 또 오빠가 육사에 가고 싶어 했어. 오빠는 시험을 잘 쳤다고 하더니 합격 통지서를 받았어. 오빠 학교 교장 선생님, 담임 선생님 모두가 축하해 주시고 우리 집은 처음으로 웃음꽃이 피었지. 오빠는 사관학교 기숙사에 가져갈 초라한 자기 소지품을 챙기고 엄마 얼굴이 보름달처럼 둥그러지고 아버지는 설마 꿈 아니겠지 하며 자기 다리를 꼬집고 나는 비좁은 부엌에서 콩콩 뛰었어. 우리 집이 처음으로 행복한 날이었지. 그러나 그 합격의 기쁨도 잠시, 불합격 통지서가 날아왔어. 담임 선생님이 어렵게 알아본 결과 신원조회에서 걸렸다고 하셨어. 아버지는 엉엉 피눈물을 흘리셨어.
“나 때문이여. 부역자, 나가 죽지 않고 살아서 자식 앞길 망치는구나!”
옛날에 아버지가 지리산 공비들 앞장서 민가를 덮친 부역자라고, 굴속에 숨겨둔 어린 자식 둘이나 잃었는데. 아버지의 연좌제 덫에 걸린 오빠는 몇 날 며칠 미친 사람처럼 헤매다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몸을 던져 젊은 생을 마감했어. 오빠의 책상에는 ‘부역자 자식은 대한민국 그 어디서도 살 수가 없다!’ 공책을 찢어 갈겨 쓴 유서가 있었어. 실성하여 허깨비처럼 바닷가를 헤매던 아버지는 한 달 뒤 오빠가 죽은 태종대 자살바위에서 몸을 던졌어. 엄마 힘으로는 오빠, 아버지 시체도 못 건졌어. 우리 집은 적막강산이 되었고 나는 엄마도 죽을까 겁이 나 밤이면 생선 비린내 나는 엄마 몸을 꼭 끌어안고 자지 않고 엄마를 지켰어. 엄마는 심장이 벌렁벌렁 펄떡펄떡 뛰는 환자가 되었는데 밤새도록 불면증에 시달렸지. 밤에 내가 얼핏 잠들며 자기 가슴을 퍽퍽 때렸는데 옷 갈아입을 때 본 엄마 가슴은 온통 시퍼렇게 피멍이 들어 있더라. 나는 너무 겁이 나 입을 꽉 다물었지. 산동네 아이들이 벙어리라고 놀렸어. 학교에 가면 다들 행복한 얼굴이더라. 학교에서 뭐가 제일 무서웠는지 아니? 반공 교육 시간이 죽기보다 싫었어. 공산당, 간첩, 빨갱이 말만 나오면 나는 덜덜 떨었고 몸이 굳어졌어. 주위에 이상한 사람 보이면 경찰에 신고하라고 하니 나는 간첩 마주칠까 무서워 결석하였어. 내 상상에 빨갱이는 머리에 뿔이 솟았고 도깨비 몸을 한 무서운 짐승으로 상상했거든, 엄마는 신신당부하였지.
“뭐든 모른다고 딱 잡아떼거라. 아버지도 오빠도 왜 죽었는지 모른다고. 누가 무슨 말을 물어도 모른다, 모른다고 해야지 아니면 엄마 죽고 너 죽는단다. 하느님, 제발 이 애라도 살아남아 지 오빠들 짧은 명 대신 오래 살게 해 주십시오 하느님!”
엄마는 나 때문에 살았을 거야. 중고등학교 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어. 친구들에게 나도 모르는 아버지 무서운 과거가 드러날까 전전긍긍하였어. 나는 입에 자물쇠를 채웠고 내 친구는 한 명도 없었어. 고2 때 짝지인 너하고도 말문을 닫았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빨갱이와 간첩을 죽도록 저주하며 무서운 이념에 내 인생을 저당 잡혀 벌벌 떨며 살아온 학창 시절이고 기구한 내 청춘이었어. 22살에 중매 결혼하였지. 34살 띠동갑 노총각한테. 청심환을 먹으며 펄떡펄떡 뛰는 심장병을 안고 사는 불쌍한 우리 엄마 마지막 소원을 엄마 살아생전 들어준다는 사명감에 결혼했어. 엄마는 아프면서도 죽기 전날까지 악착같이 자갈치 시장에서 장사하셨지. 나 결혼시키고 우리 엄마 눈감으셨어. 지리산에 묻은 어린 두 자식, 시퍼런 바다에 수장된 오빠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내 손을 꼭 쥐고 눈감으셨어.
“지선아, 울지 마라. 너 아버지 오빠들 만나러 가니 엄마는 너무 기쁘구나. 내 딸아, 너만은 전쟁 없는 세상에서 아들딸 낳고 명 길고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한다 제발!”
엄마는 환히 웃으며 가셨어. 살던 24평 아파트를 나에게 남기고.
“지선아! 삼시세끼 밥 꼭 챙겨 먹어라, 그래야 건강하지. 그리고 다리 뻗을 내 집은 꼭 지니고 살아야 하느니라. 옛날에 집 없는 고생 억수로 하였지.”
나는 이 세상 혼자 남은 고아가 되어 어찌할 줄 몰랐어. 불쌍한 우리 엄마를 위해 할 일이 도무지 없었어. 엄마를 절에 모시고 영혼이라도 편하시라고 사십구재 올리고 부처님 전 기도 드리는 것밖에 없었어. 남편은 사업이 바쁘다는 핑계로 혼절하는 나를 위로해 주지도 않아 나를 더 슬프게 하였어. 나는 결혼하여 남매를 낳아 키우면서 혹시라도 내 부모님 성분이 드러나 내 아들딸에게 나쁜 일 생길까 전전긍긍하였지. 무서운 오빠 일이 생생하였으니까. 애들 학교에는 핑계 대고 참석하지 않았고 부득이할 때는 남편 보내고. 나는 지금도 티브이에 이념 논쟁 나오면 채널 돌려버려. 남편은 가부장적인 경상도 남자였어. 남편은 남의 시선 무서워하는 겁쟁이 여자에 바깥에도 못 나가는 등신에, 피붙이 하나 없는 여편네라 무시하기 딱 좋은 여자였지. 남편은 자갈치 시장에서 경매사로 시작해서 사업을 확장하였지.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사위에게 큰돈 사업 밑천을 주셨나 봐.
“남정네 사업이 잘되어야 여자가 편하지. 강 서방 너 꽃방석에 앉히고 살 거여. 너는 어미처럼 생고생하지 말고 편하게 살아라. 옛날 일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라.”
남편은 냉동창고 큰 건물을 올리고 일하는 사람도 늘리고 사장님으로 불렸어. 나는 아파트가 싫어 평수 넓은 단독 이층 주택에 살았어. 아들딸이 태어나고 애들이 우리는 왜 외갓집 없냐고 묻긴 하더라. 애들 학교 등록금 학원비 등 전부 남편이 처리했어. 남편은 우리 부모님 행적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혹여 자기 사업에 불똥이 튈까 걱정되어선지 아내 데리고 바깥 모임에 일절 나가지 않았지. 어업조합, 동향 모임, 동업, 동창, 등산, 조기 축구회 등 모임이 엄청 많았지만 혼자 다니더라. 여자와 같이 다닌다는 말도 들렸어. 나는 입을 다물었지. 꼭 할 말만 하니 하루에 몇 마디나 할까. 열흘간 말 안 한 날도 있더라. 우리는 남편은 하숙생이고 나는 하숙집 아줌마였어. 하숙생과 하숙집 아줌마, 우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남편은 바람도 피웠지. 나는 질투도 분노도 안 나더라. 남편에 대한 진실한 사랑이 없으니까. 그는 원래 보수주의인데 나이가 들수록 더 심해져 집에 있으면 채널 종편만 보고 진보에 욕설하지. 나는 듣기 싫어 밖에 나와 정원을 서성이다 내 방에 들어가 트로트 노래 듣고 드라마 본단다. 나는 정치판을 싫어해 선거도 안 하거든. 11시, 벌겋게 술 취한 하숙생이 큰 소리다. 나는 저녁 9시 넘기면 밥상 안 차려주거든. 하숙생이 밥때 맞춰 와야지. 밖에 나가 대문 잠금 확인하고 들어와 내 방으로 가는데 남편이 꽥 소리쳤어.
“야, 나 밥 안 먹었다고!”
“…….”
“못 들었어? 밥상 차리래도!”
나는 남편을 한번 쏘아보곤 내 방으로 와버렸지. 우린 40대부터 각방을 썼거든.
“내가 벙어리하고 사는 것도 아니고, 사람 숨 막혀 돌아버리겠네. 저 등신, 등신! 지가 잘한 게 뭐 있다고 뻗대길 뻗대냐. 속 터져 못 살겠다 이혼하자 이혼해!”
쨍그랑! 와장창! 유리컵 사기그릇 부서지는 소리 내던지는 소리, 나는 눈도 깜짝 않지. 말 못하게 한 게 누군데? 삼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그 목소리 쟁쟁한데.
“제발 니는 가만 있거라. 그 끔찍한 밑천 드러나면 내 사업도 애들 앞길 망치는 거 니도 알고 있제? 사업장이든 애들 일이든 일절 간섭하지 마라. 나는 누가 간섭하는 거 딱 질색이다. 니는 그냥 밥하고 옷가지만 챙겨주면 되는 거라.”
우당탕!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침대에 누워 꼼짝도 안 한다. 번쩍 불이 켜졌다. 나는 얼른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푹 뒤집어썼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내일 당장 이혼하자! 여우하고는 살아도 곰하고는 못 산다 카더니 딱 맞는 말인기라. 나가면 이쁜 여자 천지다. 편안하게 집구석에서 팡팡 노는 주제에 꼴값을 떨어? 야! 일어나 주둥이 있으면 말이나 해봐라!”
나는 두 귀를 꽉 막고 가만히 있지. 떠들거나 말거나 밥을 먹거나 말거나, 그릇 다 부수거나 말거나, 어차피 이 집에 내가 애착하는 것 하나도 없으니까. 이튿날, 아침 콩나물국, 김치, 무김치 올리고 잡곡 하나도 안 섞인 쌀밥 고봉으로 담아 식탁에 냈어. 나는 밥도 남편과 같이 안 먹는다. 아침은 식빵과 우유 과일로 간단히 먹고, 점심은 푸짐하게 잘 먹어. 저녁은 견과류가 많이 든 영양 떡과 과일 주스를 마셔.
식탁에 앉은 남편 앞에 A4 용지 한 장 내밀었지.
이혼 조건
이 집과 30억 내 손에 쥐여주면 이혼 도장 찍겠음.
나지선. 인장
네임펜으로 크게 쓴 용지를 읽은 남편이 픽! 조소를 날리며 종이를 북 찢더라.
“기가 차서! 이 집 평수가 몇 평인지 알기나 해? 집 건사도 못 할 등신 주제에. 30억이 애 이름이냐? 니가 뭔 일 했다고 30억 불러? 꿈도 야무지네.”
“울 엄마 자갈치 30년 비린내 덮어쓰고 생선 팔아 번 돈, 사위 사업 밑천 거금 대줘 빌딩 올렸잖아. 식모살이 35년, 40억 부를까.”
“이 여편네가 집구석에 처박혀 천지 분간도 못 하지. 바깥에도 못 나가는 병신 주제에 돈타령하고 있네. 그래 돈 있으면 얻다 쓸 건데 들어나 보자.”
“별 걱정 다하네. 나지선도 백화점 명품 가방, 명품 옷 사서 좍 빼입고 돌아다닐 거야. 죽기 전에 좋은 일도 좀 하고, 여행도 다니고 친구들이 부르네! 후후.”
“놀고 자빠졌네. 우리 개새끼 백구가 웃겠다!”
“웃으라지. 간만에 속 시원해서 나도 웃겠다 호호호.”
마당으로 나왔다. 아침 하늘이 청명하다. 묵은 감나무 가지에 걸려 있는 초승달이 예쁘다.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었다. 폰 번호를 눌렀다.
“엄마가 웬일이에요? 아침에 전화를 다 하고?”
“하늘에 예쁜 초승달 나왔어. 한번 보라고.”
“지금 수업 들어가는데 무슨 초승달 얘기? 엄마는 딸한테 그렇게 할 말이 없수?”
“할 말…?”
“내 주위 선생님들은 엄마하고 백화점도 가고 얼마나 잘 지내는데. 이젠 엄마를 위한 인생을 사시라고. 엄마, 이번 여름방학 때 우리 여행 가요. 약속!”
“여행 어디로?”
전화가 뚝 끊어졌다. 아들 생각이 났다.
“잘 있냐? 약국 바쁘냐?”
“어머니,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해봤다. 별일 없지?”
“저야 뭐…. 저기 티켓 드릴게요, 아버지 시간 맞춰 여행 한번 다녀오세요.”
“여행? 네 아버지랑? 싫다. 살던 대로 살란다.”
“문화원 가서 다른 취미도 알아보시고 영양제랑 챙겨 가세요. 어서 오세요!”
“손님 왔냐. 담에 들를게.”
우리는 조심스레 대웅전 법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불단의 부처님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넓은 법당에는 영가전을 향해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지선이 혼자였다. 벌써 제사상이 차려져 있었다. 좌우에 굵은 촛불이 켜 있고 가느다란 향불이 타고 있었다. 제상에는 배, 사과 등 과일과 메밥 5그릇과 나물, 탕 그리고 작은 잔 5개가 앞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다섯 개의 위패도 보였다. 아버지, 엄마, 오빠, 그리고 지리산 동굴에서 죽었다는 어린 오빠 둘, 다섯이구나.
“나지선, 우리 같이 왔어.”
“너희 구경났어? 여긴 왜 왔는데?”
지선이 입을 삐쭉이며 성질을 내었다. 나영이 국화꽃다발을 조심스레 제상에 올렸다. 풍성한 흰 국화꽃이 유난히 환하게 돋보였다. 지수, 유경, 나영과 나는 제상 앞에 서서 지선 부모님께 인사를 드렸다. 지선은 검정 정장 차림이었다.
“너희들 왜 이래? 내가 확 돌겠네.”
이때 문이 열리고 검정 양복 차림의 조금 비만한 남자가 법당에 들어왔다. 지선이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당신이 어떻게…?”
“그동안 장인장모님 제사에 참석 못해 미안하구려. 친구분들 고맙습니다!”
우리는 선 자리에서 지선 남편을 향해 묵례하였고 그도 인사하였다. 가사, 장삼 차림 스님 두 분이 들어오셨다. 지선이 후다닥 일어났다.
“오, 손님 많이 오셨네요. 보살님, 오늘은 울지 않아도 되겠소이다!”
“스님, 제 친구들이 왔어요.”
“자, 부처님 전 천수경 올리고 영가 제사 지냅시다.”
지선이 재빨리 회색 방석을 남편과 우리 앞에 가져다주고 두꺼운 기도 독송 집을 앞앞이 펴 주었다. 법당 시계가 10시 30분, 모두 부처님 전 향해 두 손을 합장하였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방내외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 도로 지미 사바하….
음성 좋은 스님 염불이 법당을 돌아 삼층석탑 잔디마당으로 퍼져 나갔다. 바람에 풍경이 울었다. 지선은 큰소리로 천수경을 따라 읊기 시작했다. 영가전 제사를 지낼 때 나지선 부부는 각각 흰 봉투를 제상에 올렸다. 스님이 영가 이름을 차례로 부를 때 지선은 기어이 통곡하고 말았다. 나란히 앞자리에 앉은 지선 남편이 호주머니 손수건을 꺼내 아내 손에 주었으나 지선은 손수건을 던져버렸다.
“엄마! 아버지! 오빠들! 내 친구들이 왔어요! 저기 저 흰 국화꽃 예쁘지!”
지선의 젖은 음성에 우리도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느 날, 6살 손주가 뜨거운 찻물에 다리를 데어 속상해 죽겠다는 친정 언니의 전화를 받고 북구 화상 전문 병원을 찾았다. 하나뿐인 손주이기에 언니의 사랑이 각별했던 꼬맹이가 왼쪽 다리와 발까지 둥둥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얼마나 아팠을까. 아이 엄마와 할머니는 연신 눈물을 찍었다. 아이가 갑갑한지 칭얼대어 휠체어에 태워 복도에 나가 할머니가 슬슬 밀어주니 아이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행정실 앞에서 지선을 보았다. 양복 입은 직원이 깍듯이 인사하고 있었다.
“여사님 감사합니다. 여사님 덕택에 형편 어려운 환우들이 큰 도움을 받습니다!”
“아닙니다. 그만 들어가세요. 간병 조금 하고 갑니다. 그럼 계셔요.”
손사래치며 서둘러 나가는 지선을 붙들었다. 바른말 하라고 다그쳤다.
“병원 부원장님이셔. 오래 전에 내가 실수로 왼팔을 물에 데여 여기 입원했었어. 그때 입원 환자들 보니 정말 딱한 사람들 많더라고. 전기에 두 손을 잃은 젊은이, 식탁 위의 라면 냄비 폭삭 덮어쓴 돌잡이 아기, 화재에 전신을 화상 입은 젊은 여자, 화상은 치료가 오래 가고 치료비가 비싸거든. 충격을 받았어. 가정환경 어려운 환자 도와주는 조건으로 기부 시작했어. 큰돈은 아니지만 계속하고 있어. 친구들한테 비밀이야. 부탁해. 희진아, 나 요즘 가슴도 덜 아프고 잠도 잘 자고 그래.”
검정 바지에 체크무늬 블라우스 입은 지선이 밝게 웃으며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