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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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설렌다. 첫 만남인 양 나를 반겨준다. 사르륵 사르륵 안개비가 내 얼굴을 감싸 안는다. 축축한 공기에 젖어서야 우산을 받쳐 들고 나무 계단을 오른다. 오후 4시, 내려오는 사람은 있는데 오르는 사람은 없다. 빼곡한 비자나무와 작살나무 숲. 삐죽한 화살촉을 내민 화살나무 숲을 구불구불 오른다.
성산일출봉, 해발 180미터 안내판이 나타난다. 드디어 성산일출봉 정상을 밟았다. 싸한 향긋한 풀 향기가 나를 맞아준다.
꼭두가 텅 비어 있다. 그림자도 없다. 스멀스멀 안개비 내리는 정상은 축축한 정적이 감돈다. 수없이 올랐지만 성산일출봉에 인적이 끊긴 적 있던가. 내가 사람이 아닌 듯하다. 전생은 이 산속에 살았던 한 마리 사슴이었을지 모른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텅 빈 성산일출봉의 품에 홀로 안겨 있다는 황홀함에 머리가 아득하다. 그리고 경외심에 가슴이 떨린다.
나무 의자에 앉아 배낭에서 보온병을 꺼낸다. 스푼으로 커피를 한술 떠 컵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품위 있게 마신다. 얼마 만에 정상에서 혼자 마시는 커피인가. 따뜻한 커피 향이 온몸을 돌돌 말아 천천히 안개 속으로 퍼져 나간다. 한기를 느끼던 몸이 확 녹아버린다. 이 순수, 이 맑음. 온 산이 내 것인 양 열감에 떨리는 가슴. 정상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를 위해 나는 수없이 산을 오르는지도 모른다.
40여 년 전이었다. 처음 제주도에 왔을 때의 기억이 새롭다. 댕기꼬리처럼 치렁치렁 늘어진 푸른 소철과 야자수 가로수길, 낭떠러지에 매어 놓은 아슬아슬한 밧줄, 한 사람씩 그 줄에 매달려 성산일출봉 벼랑을 오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발아래는 제 성깔을 못 이겨 삼킬 듯이 큰 입을 벌리고 요동치던 바다, 하늘과 바다가 한 몸이 되듯 불분명한 푸른 선, 사방이 막혀 있는 지금의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어찌 비하랴. 그때 함께 오르던 오빠도 내 짝꿍도 떠난 사람들이다.
빗줄기는 가늘다 굵었다 날 쉼도 없이 내린다. 그제야 젊은 한 쌍이 빗속에 나타난다. 혼자 무섭기도 하였는데 사람이 반가웠다. 그들에게 부탁해 사진 몇 장을 찍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를 제주에서 듣고 싶어 혼자 나선 길이다. 마른장마에 시달려 온 나는 가뭄에 목말라 풀죽은 푸성귀처럼 비를 그리었다. 머무는 4일 동안 신령님도 내 마음을 아는지 줄기차게 비를 내려주었다. 그리고 장대비를 맞으며 정신없이 해안 도로를 혼자 걸었고 성산일출봉을 오른 것이다.
하산 길은 언제나 여유가 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젖은 숲을 살피며 천천히 내려온다. 비에 젖은 붉은 엉겅퀴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다. 그 옆 자잘한 흰 꽃무리가 나를 반기듯 살살 실바람에 움직인다.
“저 흰 꽃은 이름이 뭐였지?”
하얀 찔레꽃 같기도 하고 6∼8월에 성산일출봉 절벽에 핀다는 ‘갯기름나물꽃’ 방풍화인가. 녹색 잎에 물방울이 떨어지면 구르는 모양이 연잎처럼 아름답다는 나무다. 빗방울 톡 또르륵 잎에 구르는 소리. 안개비 오는 날이 제격인 ‘갯기름나무’를 만나다니. 눈을 떼지 못한다. 멈추고 꽃무리들의 속삭임에 귀를 대어 본다. 혹 내게 무슨 말을 할까. 혼자 말하고 혼자 대답한다.
내게도 저런 꽃 같은 젊음이 있었을까. 분명 있었으련만 화려했던 기억이 없다. 울적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다잡는다. 나는 오늘 성산일출봉 정상에 혼자 올라 안개를 벗하였다. 따뜻한 커피를 산에 올라 마실 만큼 건강한 두 다리를 가졌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의 불씨가 남아 있다. 가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
허허로운 삶 아닌가. 무엇을 더 바라랴. 바라는 게 있다면 내가 받은 만큼 조금이나마 돌려주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따뜻한 커피 한 잔 나누며 누구에게나 마음의 문을 열고 먼저 다가가야지….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낯가림이 심한 것은 유독 부모님이 물려주신 천성인 것을 어쩌랴.
자세히 보니 엉겅퀴 꽃술이 가늘게 떨린다. 노랑에 검은 점과 줄무늬가 아름다운 호랑나비 두 마리가 꿀을 따는지, 신선놀음을 하는지 엉겅퀴 꽃술에 함께 입을 콕 박고 있다. 꼬리를 위로 치켜들고 있는 모양은 무슨 뜻일까. 사랑놀이인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어떠랴. 제주도는 파랑과 녹색과 안개가 어우러지는 이때가 아름다운 것을.
아! 아름다운 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