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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이불

한국문인협회 로고 엄희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9월 6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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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그리움이다. 코끝에 스치는 나뭇잎 익는 냄새, 그 향이 서서히 다가와 내게 머문다. 개천변의 벚꽃잎도, 도로변의 은행잎도, 우리 집 목련 잎도 빨강, 노랑, 커피색으로 알록달록 익어 간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 때문인지 아직 대지의 숨결은 무겁지만, 곧 가을 냄새가 공기를 바꿔 줄 거라는 기대에 마음이 가볍다. 귀뚜라미 울음이 시끄럽게 들리는 것을 보니 가을은 분명 오고 있다.
나는 창문을 활짝 열고 여름 내내 초록 그늘을 드리운 목련 잎과 눈맞춤을 한다. 그 잎이 어느새 누렇게 변해 맥없이 뚝뚝 떨어진다.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참지 못하고 현관 밖으로 나가 울안, 울밖을 둘러보니 가을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짙은 베이지색 융단을 깔아 놓은 듯 운치 있고 가을 색이 짙다. 채도가 다른 갈색 잎 무늬로 수놓은 명품 카펫 같다. 센스 있는 주부가 꾸민 거실이 느껴진다. 밟기도 쓸어버리기도 아깝다. 하지만 이웃의 시선이 있으니 빗자루와 쓰레기 봉투를 챙겨 들고 나갈 수밖에…. 그러다 문득 누군가를 불러 차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볼수록 아름다운 갈색 톤이 신비롭다.
작가 이효석 선생은 낙엽을 태우며 ‘커피 볶는 냄새가 난다’는 명문장을 만들었고, 나도 지금 이 분위기에 어울리는 글귀를 생각한다. 혼자 즐기기엔 너무 아까운 정취다. 그러나 빗자루를 들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에서 낭만은 잠시 접어 두기로 하자.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싸리비를 대는 순간, 낙엽들이 비질을 밀어내 듯 저항을 한다. 움찔했다.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쓸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지난밤에 이슬을 머금었는지 한 잎씩 밀착되어 떨어지지 않고 바닥에 찰싹 붙어 있다. 빗자루로는 역부족이다. 어쩔 수 없이 쪼그려 앉아 한 잎씩 줍기 시작했다. 손끝에 닿는 감촉이 싫지 않다. 다리가 저려 목욕 의자를 들고 나와 편하게 앉아 한 잎, 두 잎 주워 담으니 한결 쉽고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랑의 손길이 닿아서인지 잎들도 내 손 안에서 온순하다. 10분이면 끝낼 일을 한 시간 넘게 놀이하듯 즐기니, 지루하지도 힘들지도 않다. 한 바구니를 꼭꼭 채우고도 넘쳐 흘러, 김장 때 쓰던 커다란 양은 함지를 꺼내 담았다. 한데 모아 보니, 나무 한 그루가 쏟아낸 잎이 산더미다. 여름 내내 햇살 에너지를 나무에 전하고 뿌리에 머금은 물과 양분을 올리느라 고생한 흔적이다. 그래도 그렇지, 제 역할 다했다고 후드득 떨어지는 모습은 삶의 여정 같다.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장단 맞춰 노래하며 즐길 수 있는 법을 배워야겠다.
낙엽을 쓰레기로 버릴 수는 없다. 쓰임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믿음으로 나는 이불을 만들기로 했다. 내 정원을 덮어 겨울 칼바람을 막고, 얼어붙은 땅의 기운을 누그러뜨려 땅심을 북돋아 보자는 속셈이다. ‘그래 맞아. 낙엽들을 정원의 이불로 쓰는 거야.’ 그 생각에 손놀림이 바빠졌다.
얼어붙을 정원에 이불을 덮어 주면 새봄에 고개 내밀 새싹들의 방한복이 생긴 셈이다. 한아름씩 낙엽을 꺼내 평평하게 깔고,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니 그럴듯하다.
몇 년 전, 남이섬 옐로카펫 산책로를 걸으며 느꼈던 감동이 되살아난다. 남이섬에 있는 송파 옐로카펫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추억과 그리움을 끌어냈고, 그 길에서 얻어 낸 밑바닥 감성은 메말랐던 마음을 촉촉하게 적셔 줬다.
남이섬의 대표이사 겸 디자이너인 강우현 선생의 역발상 경영법이 들어맞은 것이다. 기후 탓으로 낙엽이 빨리 끝나는 남이섬 가을 정취를 살려낸 아이디어가 흥미롭다. 1년에 20여 톤씩 곱게 물든 은행잎을 공수해 산책로를 만들어 추억놀이를 하고 있는 그의 창의성이 존경스럽다. 무가치한 것을 가치로 바꾼 최고의 선순환 사례다. 아니, 쓸모없음을 쓸모 있음으로 바꾼 좋은 본보기다.
송파구청은 아직도 도로에 떨어진 낙엽을 해마다 600여 톤씩 수거해 경기도, 강원도 등 수도권 농지 10여 곳에 제공한다고 한다. 쓰레기로 버려야 할 낙엽이 특수 농작물 보온재로 좋고, 퇴비로 활용해 수천만 원에 가까운 처리 비용을 절감한다고 하니 일석이조다. 우리 삶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전환의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제 내 정원의 낙엽 이불도 빛을 발할 것이다. 지금이 좋으면 내일도 좋다. 이런 날은 힘이 솟는 음악을 듣고 싶다. 딸이 보내 준 영상 하나를 다시 본다. 쿠바의 95세 할머니, 앙헬라 알바레스가 그래미 신인상을 받으며 “늦을 때란 없습니다”라고 외치는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그 외침이 내게는 낙엽 이불을 덮은 듯 따뜻하게 들린다. 저무는 인생도 충분히 활기찰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할머니다.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른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광화문 은행나무 길을 걸어 본다. 이제 그 길은 확장되고 정비되어 예전 모습은 없지만 친구와 함께 걷던 기억은 여전히 향기를 피운다.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지만 그리운 얼굴, 잊고 지냈던 목소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것이 가을바람에 실려 내 마음에 스미기를 바랄 뿐이다.
낙엽 이불 덕이었을까. 이듬해 봄, 우리 집 목련꽃은 유난히 탐스럽고 화려했다. 오가는 이들이 올려다보며 황홀해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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