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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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폭설처럼 내렸다
당신의 부재도 마흔아홉 번째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엄마가 주는 마지막 돈이야”
언니 손에서 건네받은 작은 봉투
학창 시절 수업료 봉투 하나가
기억 너머에서 다시 손에 쥐어졌다
여름의 모서리들이 붉게 타들어 가면
당신은 그 계절을 담아 빈 살림을 채우곤 했다
찬밥으로 허기를 달래던 밭고랑의 오후
붉은 고추가 바삭해지도록 여름은
늘 당신 손끝에서 익어 갔다
유명 회사 화장품을 실은 자전거가
눈길을 밟고 돌아오던 저녁이면
모락모락 따뜻해지던 밥상
당신 등뒤를 따라가던 휠체어 바퀴에
전하지 못한 말들이 굴러간다
장독 뚜껑 여닫는 소리
작약과 주고받던 말
뒤꼍을 오가던 슬리퍼도
텃밭에 찾아오던 봄날도
이제 더는 마당을 걷지 않는다
사라졌다고 여긴 것들이
오래 남은 냄새로
서랍 한 귀퉁이에 머문다
낙엽보다 먼저 붉게 물든 엄마
떠난 지 마흔아홉 번째 되던 날
건네받은 봉투
다 닿지 못한 말들이 가끔
서랍 속 그 봉투를 열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