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섬세한 감성과 고절한 정한의 정서——장지혜 시집 『누가 삭막한 세상에 눈물 뿌려 주었던가』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사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가을호 2025년 9월 72호

조회수73

좋아요0

1.들어가며
좋은 시 한 편을 만나면 참 기쁘다. 시집 한 권을 정독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더욱 귀한 시간이다. 사람마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다르고, 그 사물을 통하여 가지는 세계관과 가치관이 모두 다르기에 그 세계를 탐색한다는 것은 즐거운 여행이다.
장지혜 시집 『누가 삭막한 세상에 눈물 뿌려 주었던가』를 읽고 시인의 ‘섬세한 감성과 고절한 정한의 정서’를 느꼈다. 장지혜는 2013년 『문학세계』로 등단한 후 『영남문학』 2016년 봄호에 수필로 등단하였다. 이후 좋은 작품을 창작하여 각종 공모전에서 수상도 많이 하였다. 그간 필자가 강의하는 영남대학교 문학예술과정에 다니며 창작에 매진하였다. 그의 시정(詩情)과 시풍(詩風)은 유려하고 감흥이 넘친다.
요즘 문인이나 독자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낯설게 표현하라’는 말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전자를 두고는 진부한 언어로 시적 긴장감이 없는 쓰나마나한 시를 쓰지 말고, 신선한 언어로 그 언어의 주인이 되라는 말이고, 후자는 테마도 없고 사상도 없이 언어유희로 말장난하는 시를 비판하는 말이다. 그런데 장지혜 시인의 시를 읽으면 신선하고 긴장감이 있는 낯선 언어이면서도 정겨움이 묻어나며 감흥에 젖게 된다. 이런 시가 바로 좋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 명장가 백낙천 시인은 시를 써서 무식한 노파에게 물어봐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간다’라고 할 때까지 퇴고를 거듭하여 발표했다고 한다. 이렇듯 한 편의 작품을 창작할 때는 진지한 자세로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하며, 시류에 따라간다며 횡설수설하는 시를 써서 독자를 현혹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장 시인의 시집에 있는 84편은 모두 아름다움을 식별하여 가늠할 수 있는 미의식을 갖추고 있다. 테마의 유형은 ①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정한의 정서이며 ②알레고리(Allegory)적 표현 양식으로 전위적(前衛的)인 세계 구축 ③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반추하는 자아 발견 ④일상에서 접하는 사물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 도출과 문학적 형상화 ⑤관념적이고 주지적인 감성의 형상화를 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을 탄생시키는 데 디딤돌이 되는 언어들은 사랑·그리움·이별·그대·당신 등의 사어(死語) 또는 추상적인 대상과 꽃·동백·장비·감·커피 등의 생어(生語) 또는 구체적인 대상을 소재로 삼고 있다. 또한 반곡지, 장연사 등의 일정한 장소와 공연장, 축제의 장, 기행 등에서 느낀 정서를 섬세한 감성 또는 강렬한 심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장 시인의 시선은 그 어떠한 낯선 대상과도 빠른 조우로 미적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

 

2.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정한의 정서
장 시인은 자서(自序)에서 ‘세상에 사랑이 없다면/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있을까요?/ 사랑을 위해 사랑을 하렵니다/ 아름다움을 위해 사랑을 하렵니다/ 나의 사랑은 나의 구원이자 나의 꿈이고/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는 생명수입니다/ 사랑하는 임이여!/ 그대 이름은 오직 사랑입니다’라고 했다. 시인이 그토록 갈구하는 사랑은 어떤 것일까. 그건 바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은 이성의 사랑도 될 것이고 인류적,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시인이 갈증을 느끼며 염원하는 사랑은 ‘예술적 사랑’이다. 그래서 시인은 사랑을 향해 손을 내밀고, 사물을 가슴으로 안으며 자연의 말을 듣고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설한에 잎 다 떨구고
봉오리 방싯 맺었네
겨우내 머리맡에서
사랑한다 속삭이며
가슴 한쪽에
꽃불 지피더니

 

밤새 활짝 핀 꽃 한 송이
아, 누가 묻혀놓았나
저 연지 빛 입술자국!
—「장수매」 전문

 

그리움과 기다림의 정서를 섬세하고 젖은 감성으로 보여준다. 조매(早梅)에 관한 많은 시들이 있지만, 이처럼 강렬한 이미지를 던지는 시도 드물다. 시인은 사물을 그저 스쳐보지 않고 사랑의 눈으로 아름다움을 발현하고 있다. 이 아름다움은 기다림과 인내의 결과로 얻어진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2연에 ‘꽃 한 송이’라는 표현이 시적 맛을 내고 있다. 이 시를 보면 일자지사(一字之師)라는 고사가 연상된다. 당나라 때 제기스님이 쓴 「早梅」라는 시 중에 ‘가지 몇 개에 꽃망울이 터졌구나’를 정곡 시인이 ‘가지 하나에 꽃망울이 터졌구나’로 고친 이야기다. 마지막 두 행에는 ‘아, 누가 묻혀 놓았나/ 저 연지 빛 입술 자국!’이라고 했다. 그리움을 표현하는 절묘한 구절이다. 시인의 가슴에 쟁여 있는 에로틱한 그리움이 연지 빛 입술 자국으로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제7회 전국문학인꽃축제 우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이 시와 같은 맥락은 다음 시에서도 볼 수 있다.

 

감빛이 하도 고와
내 마음 알알이 감빛으로 물들여
남천강변 서실 창에 매달아 놓고 싶어라
지나가다 우리 님 보시거들랑
감홍색 물감 듬뿍 적셔
화선지에 옮겨 주실까

 

아주 짙게 물들이면
금방 홍시 되어 터져 버릴 것 같고
연하게 물들이면 싱거워서 맛이 없겠네

 

더도 덜도 말고
주홍빛으로만 물들여 주오
아, 참
배꼽은 젖꼭지처럼 꼭 찍어주오
—「감」 전문

 

흡사 허난설헌이나 황진이 또는 이영도의 시를 보는 듯하다. 화자는 그리움을 색채로 드러내고 있다. ‘감’이라는 대상을 만나기 전에 ‘주홍 빛’이라는 그리움을 이미 안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여기서 화자는 ‘님’이라는 청자를 통하여 아름다운 사랑을 대리 수행하고 있다. 감홍 색 물감을 듬뿍 적셔서 내가 바라는 사랑의 모습을 완성시키면서 그 애교스러운 젖꼭지까지 표현해 주기를 바라는 등 참으로 맛깔스러운 시어가 아닌가. 이렇듯 장 시인은 도달할 수 없는 그리움의 원형을 시각적 심상의 세계로 펼치고 있다. 장 시인의 사랑과 그리움의 원형적 심상과 같은 맥락으로 정한의 정서를 살펴보자.

 

사랑하는 그대여
비 오는 날의 수성못이 보이는
스타벅스 카페에는 3층까지 테이블마다
제 각각 사연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네
향기로운 커피향이 우리의 발길을
바삐 당기고 우리는 운 좋게 2층 창가에
자리 잡았다네
창밖에는 우산 속의 다정한 연인이
횡단보도 앞에서 멈춰 섰다네
남자는 오른손으로 여인의 어깨를 두르고
다소곳이 머리를 기울여 왼손으로 아이스크림을
긴 머리 여성의 입술에 물리고 있었다네
클림트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네 
아,
그들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횡단보도 앞에 정지한 발 앞으로 차들이
빗물을 감으며 쌩쌩 지나고 있었다는 걸
아무도 위험하다 눈치 채지 못한 것이니
그 사랑스러움의 극치는
온전히 그들의 몫이었다네
그대여 뜨겁게 사랑을 하거든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든
그대의 여자에게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려주지 않으려오? 
—「우산 속의 연인들」 전문

 

대구에서 많이 알려진 카페에서 비 오는 날의 풍경을 담았다. 시인 일행이 앉은 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우산 속의 연인을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긴 머리 여성’과 ‘입술’이라는 관능적 언어와 ‘사랑스러움의 극치’는 곧 화자의 정한(情恨) 또는 자기 연민일 수도 있다. 화자는 그 연인들의 모습이 클림트의 <키스>보다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오스트리아 출생의 구스타프 클림트는 황금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의 대표작 중에 <키스>라는 그림을 제재로 도입하여 구체화시키고 있다.

 

3.알레고리적 표현양식의 전위적인 세계 구축
앞에서 살펴본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정한의 정서와 맞물리면서 이번에는 알레고리적 표현양식으로 고독한 장 시인의 전위적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너와 마주하면
나는 가을색과 데이트한다
짙은 브라운 바탕 크림색 터치의
보드라운 스카프를 두르고
눈시울 적시는 아직도 떨리는
스무 살의 추억으로 만난다

 

너를 마주하면
나는 가을 언어와 데이트한다
가지 끝에 팔랑이는 단풍의 조율
하나둘 옷을 벗는 나뭇가지의 떨림
가려진 커튼사이로 들려오는
카페의 은밀한 밀어와
달빛에 젖은 풀벌레 소리 스며드는
베갯머리의 애잔한 고독과 만난다

 

나는 가을향기와 데이트한다
갓 볶아낸 너의 냄새와
가을마다 찾아오는 아슴한 낙엽 타는 냄새에서
못다 한 사랑의 가슴앓이로 너를 만난다

 

너와 마주하면 나는
가을색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고
여행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는
추억속의 내밀한 보헤미안이 된다
—「 가을색 커피」 전문

 

화자는 은유보다 더 충만한 상상으로 유추하며 소재를 해석하고 있다. ‘커피’라는 사물에 농밀한 색채를 도입하여 그리움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여기서 화자의 그리움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가을이라는 계절에서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애수(哀愁), 못다 한 사랑의 밀어(蜜語), 애잔한 고독, 이별의 아픔을 회상하며 집시가 되어 상상의 여행을 통하여 이들과의 조우(遭遇)를 하고 있다.

 

그 여자 팜므파탈
몽환의 암갈색 눈동자 흔들며
씁쓰럼 달콤 팔 색 향기 흩뿌리고
사뿐히 내 앞에 앉는다

 

밀고 당기는 눈빛
불같은 혓바닥 장밋빛 입술 위로 구르며
검은 계곡 깊이 호리듯 말듯 그 여자 달아난다
꽃뱀처럼 휘감아 도는 허리
뼛속 깊은 곳 황홀한 전율
아아! 그 눈빛 그 입술
뜨거운 숨 멎지 않았던가
본능이 꿈틀대는 중독된 그리움
그 여자 죽도록 맛있다
—「갈색 커피」 전문

 

시인의 특권은 어떠한가. 시인은 온 세상의 술을 다 마실 수도 있고, 모든 여자나 남자를 다 사랑할 수도 있다. 시인은 과학보다 먼저 과학을 지배하고 의학보다 먼저 생명을 구제할 수 있다. 장 시인의 알레고리적 표현은 수사학(修辭學) 이상의 풍류기법(諷喩技法)이다. 앞의 시는 커피의 색채를 다루었다면 이 시에서는 커피의 맛을 다루고 있다. 
장 시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커피의 맛은 어떠한가? 이는 그 맛의 정복(征服) 이전에 정복 이상으로 치명적인 유혹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그 제재(題材)로는 암갈색 눈동자, 장미빛 입술, 꽃뱀 등을 통하여 시각적인 심상으로 중독된 그리움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4.자연을 노래하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모습을 반추하는 자아 발견
장지혜 시인의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정한의 정서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또 다른 기법으로 이것을 이것이 아닌 저것으로 나타내어 숨은 주제를 드러내는 상관화된 이미지 정서로 치환시키는 시를 살펴보자.

 

자인 들녘은 지금 누드 빛으로 팽창하는 중
살구꽃 자두꽃 도화꽃 누가 예쁜지
잔뜩 부풀은 요염한 자태
산야는 온통 색에 빠져 물감을 퍼질러 놓았다

 

꽃받침을 발랑 까고 앉아 햇볕을 쬐는
저 살구꽃 당돌한 끼 좀 보소
제아무리 매화를 닮았다 하나
청심한 매화 향기를 따를 수 있으랴
화기를 다 탕진하여 손대면
화르르 흩어지는 정념을 뉘 알랴마는
눅진한 바람은 까닭 없이 안고 우네

 

자두꽃 소담한 꽃송이 맑고 여린 입매
소박한 여인의 자태 매초롬한 가지마다 함박웃음
서로 모여 마음을 합쳐 꽃피우니
향기로운 암향이 주위를 진동한다

 

새야새야 도화꽃에 앉지 마라
진달래 빛 도화살에 눈이 멀어
두견새 울음소리 애다
붉은 유두 빛 농밀한 자태에 녹아들면
세상일이야 잊힌지 오래 일터
눈 뜨면 지난 청춘
—「봄꽃」 전문

 

봄꽃에 취하지 않을 자 어디 있으랴 만은, 막상 시로 옮기려면 쉽사리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장 시인의 강열한 언어 행진은 막힘이 없다. 흡사 조선 중기의 여류 시인 이옥봉과 설죽 시인처럼, 농밀한 시어가 질펀하게 쏟아지고 있다. 시인이 살고 있는 경산 자인 들녘을 ‘누드 빛으로 팽창하는 요염한 자태’라고 컬러풀한 동사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당돌하고 농염한 자태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인간의 한계를 슬퍼하게 되는 고독과 그리움의 원형을 나타내고 있다.

 

가도 가도 꽃 천지 꽃물이 흥건하다
새빨간 꽃잎에 샛노란 꽃가루 암내를 풍긴다
누구는 생비린 살내음 같다 말하고
누구는 퀴퀴한 향기가 음부에서 나는 야릇한 냄새 같다고 했다
너도 나도 봉긋한 가슴 옷섶 들추듯이
다문 입술에 혀 밀어 넣듯 꽃잎 벌리며 색을 탐하였어라
어떤 이는 봄바람에 하느작거리는 꽃잎을 보고
아름답고 서러운 여인의 내밀한 유혹이라 말하고
어떤 이는 퍼붓는 봄 햇살에 술 취한 표정으로
키스를 부르는 육감적인 입술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색끼 흐르는 요부의 몽롱한 눈짓 같다고 말하였어라
무장무장 넘실대는 꽃바다에 빠진 사람무리
너도 나도 색에 취해 발갛게 달뜬 얼굴이다
진자홍 분홍 하얀 색색의 반들거리는 물색을
남겨 두고 내딛는 헛발질마다 아쉬움이 차인다
뒤돌아보며 허적이는 발걸음, 기어코 선술집에서 낮술을 불렀어라 
—「양귀비 꽃 축제」 전문

 

본 작품은 제1회 송암(松巖)문학상 수상작이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서정윤 시인은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주관적 묘사들이 빼어나다. 그 꽃에서 자신의 내면을 찾는 노력이 돋보인다’라고 평가하였다.
장 시인은 양귀비꽃의 관능적인 색감과 요염한 자태를 상대성 원리로 보면서 ‘서러운 여인’과 ‘헛발질’이라는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을 바라보며 대상에 의한 자기 발견 또는 확인을 한다. 그리고 그 시선이 어떤 대상을 향하는가를 두고 세계관이라고 한다. 그러면 위 시에서 화자는 허무주의로 빠졌다는 것일까. 그렇게 흐른다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그렇지 않다. 여기서 ‘선술집’과 ‘낮술’을 통하여 피안(彼岸)의 세계를 도입하여 성관을 이루고 있다. 이것이 시의 맛과 멋이며 낭만이다. 그러면서 시각, 후각, 촉각에 의한 공감각적 심상으로 형상화에도 성공을 시키고 있다.

 

5.일상에서 접하는 사물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 도출과 문학적 형상화
장지혜 시인은 일상에서 접하는 평범한 소재를 수사학적으로 비범하게 풀어내고 있다. 시 「겨울 동백」에서 겨울 동백을 ‘가슴이 더운 한 마리 짐승’으로, 시 「낙화 예찬」에서 낙화를 ‘정인이 다녀간 비단 금침’으로, 시 「수묵화 전시회」에서 수묵화를 ‘선경의 세계’로, 시 「꽃무릇」에서 꽃무릇을 ‘마지막 핏빛 정한’으로, 시 「장미 향기」에서 장미 향기를 ‘이슬로 빚은 개짐’으로, 시 「커피 맛」에서 커피 맛을 ‘천사의 페르소나’로 은유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조로, 시의 본질과 인식의 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쏟는 미적 탐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엄마 손 잡고 나서는 아가처럼 외씨버선 고부라진 길 따라
개나리 진달래 조팝꽃 정답게 피고 지는 곳
오지 바람은, 조선의 400여 년 세월을 돌아 하늘 끝 육지 속의 섬
두들 마을에 똬리를 틀었다, 마을 앞 화매천 가 암석에 새겨진
낙기대 세심대의 뜻을 바람은 수도 없이 쓰다듬으며
방황하는 철새들에게 읊조렸을 터인데
오, 하늘은 무심치 않아 원리 청천에 지지 않는 별을
붙들어 매어 새들이 길을 찾아 깃을 들게 하였다

 

범상하지 않은 재주로 시 서화에 빼어났으나 근검과 겸양을 몸에 익혀 
자신이 가꾸지 않은 재물은 내 것이 아니라하여 물려준 만석 재산을 
뿌리치고, 마을 언덕에 도토리나무를 심어 죽을 쑤어 나누어
애민을 실천 하였도다, 그 정신 잊지 않고 73세에 음식디미방
조리서를 한글로 편찬하여 실행으로 모범을 이루었다

 

임이여! 오소서 향기로운 이름으로 오소서
이제 다시 하늘의 뜻을 살피어 계수나무 맑은 꽃 향 피워
아픈 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세상에서 마음의 병 모두 구제하는
평등 나눔으로, 달콤한 인의 향기 구름처럼 피게 하소서

 

이제, 삼백년 도토리 숲 울울창창 뻗쳐 여기까지 다달으니
그 눈빛 그 정신 한 톨의 풀씨까지 피톨처럼 돌고 돌아
자연 속에 살아 숨 쉬니 조선의 큰어머니
여중군자 장계향, 널리 널리 찬탄하오리다
—「향기로운 여인 장계향」 전문

 

조선의 어머니 여중군자 장계향 공모전 수상작이다. 영양 두들마을에서 정부인 장씨(貞夫人 張氏)의 생애를 사유와 직관을 통해 고찰하고 있다. 한 편의 시 안에 지역 특성과 역사를 가늠하는 서경의 세계와 정부인의 사상과 애민 정신을 서정적 감성으로 드러내고 있다. 다음 작품을 보면 시인의 창작 정신과 웅숭깊은 수사학적 기량을 볼 수 있다.

 

저건 글씨가 아니다
살갗에 지문이 닳도록 퍼렇게 지우고 또 쓰고
영혼을 물들여 가슴팍에 절절한 외침으로
깎아 새겨 찍어낸 알몸의 비첩(碑帖)이다

 

저건 사람이 적어 놓은 필적이 아니다
한사람이 태어나기까지 수억 년의 공을 드린
조물주의 비장한 계시의 묵시록이다

 

아, 저건 분명 사람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 아닐 게다
선지자의 몸을 빌어 어느 십자가에 피를 흘린
골고다 언덕에서 성령의 말씀으로
받아 쓴 성서로운 혈흔일 게다

 

저건! 유장한 언어를 먹먹하게 가두고
무한한 침묵의 깊은 바다로 닿게 하는
가슴 울컥거리는 성서로운 혈흔일 게다
사람들아, 무얼 더 묻겠는가
—「황순원 육필원고 수정본을 보면서」 전문

 

은유법의 눈부신 결정체를 볼 수 있다. 이 시는 황순원 문학관에 문학 기행을 다녀와서 쓴 작품이다. 황순원 선생의 육필 원고를 두고 ‘알몸 의비첩(碑帖)’, ‘계시의 묵시록’, ‘성서로운 혈흔’으로 비유하고 있다.
장 시인의 시선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은 존재의 근본을 규명 받아 새로운 의미로 탄생한다. 이렇듯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 가치의 윤곽을 드러내는 집요한 시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6.관념적이고 주지적인 감성의 형상화
장지혜 시인의 심상은 고요하고 침잠하는가 하면 역동적인 심상으로 서정의 언어들이 쏟아지면서 형식이나 문장을 뛰어넘고 있다. 그러면 먼저 산사에서 느끼는 사색적 감성을 보자.

 

고즈넉한 장연사 풍경은 침잠하고
허공에 걸린 만월, 온화한 미소 지으니
첩첩한 봉우리 산 그림자에 걸려있네

 

산방의 스님 찻물 내리는 소리에
고깔 쓴 육화봉, 성큼 다가앉는다
차 향기 그윽하니
노송의 푸르름, 솔향으로 화답하네

 

어제의 이지러진 달이 오늘은 꽉 찬 만월이라
본유상주, 생멸의 이치가 달 속에 있네
깊은 밤은 가부좌 튼 석불에 법문을 새기고
구름을 비껴선 달빛이
호수처럼 깊어가는 장연사의 산방
—「장연사의 달빛1」 전문

 

청도에 있는 산사로 명상하기 좋다고 알려진 장연사에서 쓴 사색적 감성의 형상화다. 여기서 시인은 본유상주(本有常住)라는 화두를 생각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본유(本有)이기 때문에 불생(不生)이며 상주(常主)인 고로 불멸(不滅)이다라는 이치를 깨달으며 만월(滿月)을 제재로 심상을 전개하고 있다. 시 속에 한 폭의 수묵화가 펼쳐지고 있어 시 중유화(詩中有畵)라는 말이 실감 난다. 다음의 시는 관념적이고 주지적인 언어로 역동적인 심상을 보자.

 

천둥 우렛소리 천지가 진동한다 질끈 감아버린 눈이다 태산처럼 다가오는 벼락 치는 그 움찔거리는 신명을 차마 어찌 눈으로 볼 수 있으리 차라리 두 귀로 보아야 하리 깜깜한 바다물결에 마음을 뉘인다 숨죽이듯 잔잔한 파도 소리 잠시 후에 덩 더쿵 덩더쿵 장구가락에 작은 포말이 수면 위로 튀어 오른다 은비늘이 꿈틀거린다 뒤이어 북소리 둥둥 울린다 꽹과리 소리에 요동치는 물비늘, 그물 가득 유리가루처럼 반짝이는 물고기의 힘찬 차오름에 감은 눈이 눈부시게 어지럽다 마침내 작은 북소리 두두두 물길을 길어 울린다 어부의 어깨에서 신명의 혼바람이 꿈틀댄다 팔의 힘줄과 목선의 정맥이 튀어 오르고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이 환호의 추임새로 포효한다 태산 같은 울부짖음, 바다의 혼령이 만선의 고깃배 위로 승리의 손을 흔들어준다 바다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잔잔한 파도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며 한바탕 신명의 가락을 읊조리다 마침내 꿈의 귀향을 외친다 “꽹과리 장구 징 북을 쳐라! 만선의 깃발 곧추 세우고 닻을 올려라!”
—「사물놀이 한마당 공연을 보며」 전문

 

장 시인의 창작기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 시에서는 상상을 통하여 서정적 감성의 형상화로 역동적인 심상이다. 사물놀이 공연을 보며 풍물의 가락에서 청각적 심상과 시각적 심상으로 서정적 언어와 서경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장구가락에서 포말이 튀어 오르고 은비늘이 꿈틀거리는 등, 소리에서 느껴지는 심상과 풍물패의 모습이 연상 작용을 통하여 새로운 인식의 세계를 펼치고 있다. 이렇듯 소재에 대한 해석과 의미화를 시키는 상상으로 언어예술이 지니는 미를 창조하고 존재 가치를 추론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의미를 찾아내는 원형적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7.마무리하면서
시는 문학의 꽃이며 정수(精髓)다. 시인은 이상의 세계를 꿈꾸는 자유인이며 창조자다. 이러한 시인의 내적 세계의 상상과 심상을 그 누가 평가를 할 수 있으랴. 다만 표면상 드러나는 시어와 이미지를 촌평하는 데 그칠 뿐이다.
장지혜 시인은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조로 시의 본질과 인식의 문제에 세심한 주의를 쏟는 미적 탐구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의 언어 행진은 과감하며 숨김이 없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처럼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내적 필요성’에 의해 쓴 시다. 가슴에 쟁여 있는 고독과 그리움이 시적 원형질로 응축되어 있다가 삭막한 세상을 향해 눈물로 뿌려진 것이다. 표제 작품에서 말하는 ‘꽃이 꽃다운 세상, 따뜻한 감동의 눈물이 흐르는 세상’이 시와 함께 완성되지 않았을까. 이러한 세상은 사회문제나 정치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추구하는 ‘사랑, 그 인내의 시작’에서 비롯된 예술세계의 완성에서 피어오르는 아름다움의 향기가 아닐까.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