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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는 길을 기억한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신경용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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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봄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다. 잠깐 개나 싶으면 어느새 다시 내리고, 또 어느새 그친 듯하더니, 다시 조용히 스며든다.
대지는 젖고, 생각도 젖는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걷고 싶어진다. 이 비는 단순한 날씨가 아니라, 어쩌면 내 안의 침묵을 흔드는 하나의 움직임이다. 소란스러웠던 마음을 말없이 쓰다듬으며 멈춰 있었던 사유를 다시 흐르게 만든다.
비는 우리를 잠시 멈추게 하지만, 그 안에는 나아갈 준비가 들어 있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시골의 한적한 길로 나섰다. 어린이날 연휴, 사람들은 유원지나 도시의 공원으로 몰려들지만 나는 비 오는 들길을 선택했다.
산수유와 목련은 이미 지고, 자연은 한층 연해진 빛깔로 조용히 자라고 있었다. 길가엔 이름 모를 풀꽃들이 얼굴을 들고 있고, 젖은 흙 위를 걷는 내 발끝엔 습기를 머금은 땅의 체온이 전달된다. 비는 나무를 적시고, 나는 그 사이를 천천히 걷는다. 걷는다는 것은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내면의 조율이라는 걸 이 길 위에서 다시 확인한다.
비탈진 산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곳엔 어김없이 지난 계절의 내가 숨어 있다. 지쳐 있었던 나, 생각이 많아 침묵했던 나, 말 대신 눈빛으로 세상을 응시하던 나. 비는 그런 나를 데려온다. 그래서 봄비는 감성을 끌어내는 동시에 철학적인 사유로 이어지게 한다.
“나는 어디서부터 이 길을 걷고 있었지?”
“지금 나는 어디쯤 서 있는 걸까?”
“내가 걷는 이 길은, 결국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이 길에서, 나는 문학과 만난다. 시인이 되지 않아도, 누구나 시를 품을 수 있는 공간. 하이데거는 ‘인간은 세계-안에-존재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 길에서 ‘인간은 비 안에서-사유한다’는 문장을 새긴다.
문득 칼릴 지브란의 말이 떠오른다.
“비는 하늘이 땅을 사랑하여 보내는 입맞춤이다.”
그래서일까. 이 비는 우울하지 않고, 위로에 가깝다. 사랑의 언어이자, 침묵의 음성이다. 숲이 짙어지고,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고, 풀 내음이 공기 속에 퍼지면 나는 말이 줄고 마음이 느려진다. 그제야 비로소 생각은 침전되고, 그 사이에 삶의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문학이란 거창한 이론이 아니라 이런 날, 이런 길에서 삶을 다시 바라보는 눈일지 모른다.
철학 또한 정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질문을 꺼내 두고 그 곁에 오래 머무는 태도일지 모른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본질 없이 태어나 스스로 본질을 창조해 간다”고 했다. 봄비 속을 걷는 이 시간은 어쩌면 내가 나의 본질을 다시 써 내려가는 조용한 선언일지도 모른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목적 없이도 나는 이 길을 택했다. 그 선택 안에 이미 나다움이 있다. 비가 길을 적시듯, 생각은 내 안의 굳은 신념을 적시고 부드럽게 만들어낸다.
산다는 것은 결국 어떤 외적 답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기에게 묻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비는 정답을 말하지 않지만, 질문을 끌어낸다. 그리고 그 질문은 삶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안으로 데려온다.
봄비는 그런 태도를 가르쳐 준다. 잠시 멈추고, 듣고, 걷고, 묻고. 그리고 다시 조용히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것. 그 발걸음은 반드시 내가 원하는 곳으로 향하지 않아도 괜찮다. 중요한 건 그 걸음 하나하나가 내 마음의 풍경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며칠째 내리는 이 비가 어쩌면 내 안의 문학적 시간을 깨워 준 것 같다.
내 안의 언어가 너무 딱딱해졌다고 느낄 때, 비는 다시 부드러움을 주고, 기억을 되살리며, 묵은 감정을 천천히 덜어내 준다. 그 비 덕분에 나는 오늘도 말이 아닌 마음으로 한 문장을 쓴다. 종이 위가 아니라, 젖은 길 위에 조용히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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