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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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인 나는 지구인이다. 그러므로 평등할 권리가 있다.
미국에서 흑인 봉제사 파크스(Rosa Parks)는 버스 안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는 요구를 단호하게 “No!” 하고 거부했다. 불평등을 마다한 이 언동으로 그녀는 14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했다. 1955년의 일이다. 5년 뒤, 흑인 목사 킹(Martin Ruther King)은 애틀란타의 한 백화점 식당에서 흑인과 백인이 따로 앉아 식사해야 하는 것에 항의하다가 다른 서른세 명의 흑인들과 함께 투옥되었다. 고약한 흑백 인종 분리법(짐 크로우법) 위반으로 교도소 농장에서 복역하며 평등을 주장하던 목사는 큰 사회적 반응을 얻지만, 끝내 백인의 흉탄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링컨 대통령이 인종 차별을 없앴다지만, 세기(世紀)가 두 번이나 지난 지금도 차별의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의 반상(班常) 차별이나 적서(嫡庶) 구별이 철폐된 일과 그들의 흑백 논쟁은 같은 평등을 위한 일이다. 지구촌의 자유와 평등을 먼저 외친 나라는 서양 국가 아니었나.
1979년, 콜로라도주립대학교의 구내식당 출입구에는 입장하는 학생들의 식권을 확인하는 한 여성이 지키고 서 있었다. 40대의 그 백인 여성은 과묵하기는 해도 무척 친절하게 보였다. 환한 낯으로 주고받는 아침 인사 ‘굿모닝’은 하루의 행복을 시작하는 신호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유독 동양인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달랐다. 내가 인사말을 던지면 외면하고 못 들은 척하고 딴전을 부리면서 팔을 뻗어 식권만 거두는 거였다. 가는 인사만 있고 오는 인사가 없는 불평등은 여간 불쾌한 일이 아니다. 그것도 연일 반복된다면 여간 슬픈 일이 아니었다. 이방인의 영어에 문제가 있나 싶어 가다듬어 다시 말하여도 같았다. 배식을 받아 자리에 앉기는 하지만 목구멍은 가시와 씨름해야 했다. 아침 인사 때문에 불쾌한 나날을 보낸다는 건 여간 슬픈 일이 아니었다.
어느 날 아침, 굳은 각오로 또 그녀와 마주했다. 여자의 입에서 ‘굿모닝’이 나오기 전에는 식권을 건네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아침의 첫 강의 시간에 맞추려 일찍부터 줄을 선 학생들은 촌각을 다툰다. 작정한 대로 또박또박 ‘굿모닝’ 하였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한 번 더 큰소리로 외치듯 해도 외면은 여전했다. 물러설 때가 아니어서, 더 큰소리로 외친다. 길게 선 줄 끄트머리까지 들릴 더 큰소리로 ‘굿 모 닝 매 덤’ 하고 ‘매덤’을 붙여주기까지 하였다. ‘매덤~’의 억양에 비꼬임이 들어갔으니 비위가 무척 꼬였을 것이다. 얼굴이 빨개진 그녀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하∼이’ 했다. 식판을 앞에 하고 중앙의 자리에 버티고 앉아 살피니 흑인들은 북쪽 구석빼기 자리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수군거리고 있었다. 큰소리의 대답 인사를 기대했지만, 며칠 뒤부터는 그 자리에 그녀 대신 다른 이가 서 있었다. 불평등의 현장은 한쪽이 사라지기까지 냉혹하였다.
서양인들이 한국인을 대할 때 마늘 냄새가 난다고는 하지만, 동양의 사람들이 서양인을 만날 때 썩은 치즈와 역겨운 버터의 냄새를 참는 것도 그 정도는 된다. 밥상머리에서 칼과 쇠스랑을 들고 설치는 것도 수저 든 동양인보다 더 우아하다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네들은 사람의 유색을 혐오하면서도 검둥개를 옆에 앉혀 놓고 밥을 먹는다. 어느 쪽도 상대를 인정하고 나면 모두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는 말이다. 없는 식객이 구걸하러 간 것으로 보면 천사도 걸인이 되고 대작도 종으로 보일 것이다. 나는 그네들이 내는 학비의 갑절이나 더 비싼 학비를 냈고, 달라는 식비 다 줬지 얻어먹으러 간 식객이 아닌데도 그랬다. 그들 선대의 많은 이는 몇 세기 전 유럽에서 보내진 범죄인이거나 구빈법(救貧法)의 대상인 낭인(浪人)들이 아니던가.
이 대학 경제학연구소의 윌콕스(Wilcox) 박사는 영국에서 뼈대가 대단한 가문의 후손이라며 뽐내듯 말한 적이 있다. 그냥 미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듯했다. 뼈대라면 한국에도 엄청난 대들보 가문이 즐비하다고 맞장구를 쳤더니 호기심을 보이기도 했었다. 길게 시간을 내어 족보 이야기를 더 들려주려고 하였지만, 늘 빵 봉지를 도시락으로 들고 다니는 그여서 가벼운 시간 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는 앵글로색슨의 백인이고 나는 배달의 황인이었다. 황백의 관계가 꽤 돈독해지자 구내식당 아주머니가 보여준 불평등을 보상받는 거 같기는 하였다. 미래를 위해 현재를 던지는 용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바로 능력의 차이다. 오늘보다 내일을 진단하는 능력은 손해를 각오하는 일이기도 해서 그렇다. 정치 지도자의 그런 능력은 국민을 앞에 두는 민본(民本)에 서 있어야 한다. 민주의 출발이 거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