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계단참에서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명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0월 680호

조회수9

좋아요0

눈이 펑펑 내리던 겨울의 어느 날 오후, 운동 삼아 계단을 오르던 중이었다. 7층 계단참을 막 디디려던 순간, 발밑에 흑갈색의 곤충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본능적으로 다리를 들자, 몸이 휘청하며 소름이 돋았다. 하마터면 내 발에 밟혀 압사할 뻔한 곤충의 처참한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방비 상태로 돌아다니고 있는 건 사슴벌레였다.
산이나 풀숲에서 겨우살이할 녀석이 어쩌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허리를 굽히고 녀석을 찬찬히 살폈다. 몸은 길쭉하고 세 등분으로 갈라져서 갑옷 같은 단단한 껍데기에 둘러싸였다. 매끈한 등은 커피콩처럼 대칭을 이루었다. 집게 모양의 턱은 특이하게 사슴뿔을 닮았다. 사슴벌레는 일반적으로 딱지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그 밑에는 부드러운 속날개 두 장이 더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잘 날지 못하는 곤충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기어다니는 게 더 익숙해 보였다.
곤충의 움직임을 바라보다 녀석의 생사가 내 행동에 달려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발에 밟혀 목숨을 잃을 정도의 큰 상처를 입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해충이든 익충이든 살생을 금하는 종교의 계율이 아니더라도 본능적으로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느껴졌다. 한낱 하잘것없는 벌레에 지나지 않지만, 부모 형제를 떠나 계단참에 홀로 떨어졌을 때 얼마나 놀라고 두려웠을까. 짠한 마음에 어떻게든 녀석을 지켜주고 싶었다.
사슴벌레는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알기나 할까. 녀석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는지, 바닥에 붙어 버린 듯 꿈쩍하지 않는다. 한참을 지켜보자, 두어 번 꿈틀대더니 조금씩 움직였는데, 벽 쪽을 향해 가기 시작한 건 다행이었다. 벽에 가까워졌을 때 위험 범위를 벗어난 것 같아 나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지금 녀석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사람이다. 누군가 계단을 사용할까 봐 불안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나는 계단을 뛰어올라 마지막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위에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점점 뚜렷해지며 가까워졌다. 그에 맞춰 점차 내 발걸음도 빨라졌다. 7층에는 쌍둥이 형제를 둔 맞벌이 부부가 산다. 늘 외할머니 손을 잡고 유치원을 오가는데 오늘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놀았다. 할머니가 아이들을 집에 두고 잠깐 슈퍼에 내려갔단다. 그새 집 밖으로 나온 아이들이 할머니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나는 녀석의 상태가 궁금해 7층 계단참으로 뛰어올라갔다. 아이들 소리가 두려웠는지 사슴벌레는 모퉁이에서 더듬이를 바짝 세우고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내가 계단참에 우뚝 서 있는 걸 본 아이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다가왔다. 녀석을 발견하곤 눈을 반짝이며 쪼그려 앉았다. 혹시 해코지할까, 불안하여 나도 따라 앉았다. 곧이어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얘 이름이 뭐예요?”
“사슴벌레란다. 사슴뿔처럼 생긴 집게를 가지고 있어서 사슴벌레라는 이름이 붙었단다. 또 다른 이름은 집게벌레라고도 하지.”
“그렇구나! 그런데 왜 여기 있어요?”
“원래는 산꼭대기나 풀숲에 사는데, 바람에 날려 여기에 떨어졌나 봐.”
“그럼, 얘 엄마랑 아빠한테 데려다주면 되잖아요.”
아이들은 녀석을 건드리고 싶었는지 손이 왔다 갔다 했다. 만지면 집게에 물려서 피가 날지도 모른다고 하자 겁먹은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숲으로 옮겨주자는 아이들 말에 좀 더 두고 보자고 했다. 녀석은 다시 모퉁이를 따라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또 한 번 7층 계단참에 이르렀다. 녀석은 모서리에서 맴도는 게 지루했던지 대각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때 위층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내가 위험을 감지함과 동시에 녀석도 느낌이 이상했던지 가운데 멈춰서 움직이지 않았다. 위에서는 계속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아저씨 한 분이 7층 계단을 내려서고 있었다. 나는 얼른 계단을 등지고 녀석을 막아섰다. 내 등을 지나친 아저씨가 이상하다는 듯이 두어 번 쳐다보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운동화 발로 녀석을 구석으로 살살 밀어 놓았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한 차례 더 계단을 올라 7층에 다다랐다. 녀석은 계단참 모서리를 한 바퀴 돌아 계단과 계단 사이 가까이에 있었다. 그 틈새에 이르면 아래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내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구석으로 몰았다. 혼란스러운지 한동안 꼼짝 않고 경계심을 나타냈다. 웬만하다 싶어 녀석을 두고 계단을 올랐다.
다섯 번째 7층 계단참에 이르렀을 때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없는 동안 정신을 차리고 계단 틈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나 보다. 그렇다면 계단과 계단 사이로 떨어진 게 분명하다. 오르던 발길을 돌려 난간 아래 계단 턱을 살피며 내려갔다. 1층에서 주위를 살폈으나 흔적이 없다.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계단을 짚고 올라갔다. 4층에 이르렀을 때였다. 계단 턱에 걸린 채 버둥거리는 녀석을 발견했다. 무심결에 팔을 뻗어 올렸다.
주머니를 뒤지니 휴지 한 장이 나왔다. 휴지로 녀석의 몸을 조심스레 감쌌다. 살며시 집어 오므린 손안에 넣고 다른 손으로 뚜껑을 만들었다. 뒷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엔 가지를 펼친 나무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주변은 풀숲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 풀숲에 녀석을 놓아주었다. 갑자기 푸근해진 바닥이 믿기지 않는지 몸을 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을 지켜보자, 조심스럽게 바닥을 비비적댄다. 그만하면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곤충이지만 몸이 환경을 인식할 것이고 생사 또한 녀석의 선택에 달렸음이다. 나는 숲을 뒤로 하고 조금은 흡족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