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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미소 속의 눈물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석곡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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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년이 넘었다는 노송은 마을을 지키고 있는 듯 뒷산 언덕에 우뚝 서 있다. 이 정자나무는 아이들의 놀이터도 되지만 어른들의 쉼터도 된다. 학교를 오가며 들르던 이곳은 아이들이 희망을 꿈꾸던 곳이다. 한때 이곳에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이 모이던 오래된 얘기가 있다.
고등학교는 서울서 다닐 거라며 부잣집 아들 최달구가 거들먹거렸다. 짝꿍 팔순이와 함께 가게 됐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때 이장 아들 박현구도 은혜와 같이 서울서 다닐 거라고 자랑했다. 서울서 고등학교를 다녀야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다는 거다. 자랑을 늘어놓던 달구가 석구와 창수에게 묻는다.
“너희들은 왜 말이 없냐. 고등학교 어디로 갈 거냐구.”
조롱하듯 재촉했다. 그러나 이석구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형편이 어렵기 때문이다. 오창수도 말할 수가 없었다. 노름꾼에 술주정뱅이인 아버지가 저축해 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다. 뒤돌아서 가는 석구와 창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맥없이 들어서는 석구를 본 어머니가 어디 아픈가 아들을 살피지만 제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린다. 어머니가 뒤따라 들어가 아들의 머리를 만져보며 걱정스레 웃는다. 어머니는 아들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바싹 다가앉는다.
“읍내에 고등학교가 있으면 좋은디, 어쩌겠어 할 수 없지. H시로 가야지. 통학하려면 힘들 건디 하숙을 해야 하나 어쩌지….”
“엄마, 나 취직이나 할래.”
“왜…, 학교를 안 가고 취직?”
“엄마, 나 고등학교 안 가요.”
어머니가 토끼눈을 하고는 아들을 노려본다.
“취직은 안 돼, 엄마 걱정해서 그러는가 본데 걱정 마. 우리 돼지가 몇 마리인디. 가축장에 꽉 차서 내년에는 옆에다 한 동 더 만들 거야.”
“엄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야. 돼지는 보기보다 손이 덜 가. 청소 한 번 하고 사료 주면 되는 건디 뭘 그랴. 그리고 말이여, 마을 어른들이 종종 살펴줘서 힘들 것도 없지. 또 기르기만 하면 동네 어른들이 다 팔아 주잖아. 걱정 말고 담임선생님하고 상의해서 입학원서 쓰라구. 알았지? 왜, 대답이 없어.”
“엄마가 너무 걱정돼서 그러지.”
“걱정 말라니까. 이 엄마 돼지 기르는 거 재미있어. 우리 아들 벌써 고등학교 가게 돼서 얼마나 기쁜디 그랴. 한 가지, 서울로 고등학교를 못 보내서 맴이 아프지만…, 이장네하고 선생네 현구하고 은혜는 서울로 보낸다면서…, 하긴 서울 가야 좋은 대학 갈 수 있다고 하던디, 꼭 그건 아니잖아. 지방에서도 서울대학 가는 학생들도 있잖아. 아들아, 다 너 하기 달렸어. 열심히만 해. 알았지?”
석구는 진학을 놓고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였다. 아버지만 살아 계셔도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어머니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특수작물과 돼지, 소, 가축을 기르던 아버지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농작물을 경운기에 싣고 새벽 장 보러 가던 날, 뺑소니차에 치여 안타깝게도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석구는 농사는 절대 짓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기술을 배워 어머니가 하고 있는 힘든 농사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었다. 어머니 생각도 아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를 원했다.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은 달구네이다. 큰 과수원을 비롯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뿐만 아니라 논밭은 거의 달구네 땅이다. 뿐만 아니라 읍내에 호텔과 빌딩도 갖고 있다. 달구는 초등학교 때부터 읍내 어머니 집에서 자랐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둘 있는 셈이다. 방학 때면 읍내에서 시골집으로 오곤 했다. 짝꿍이라며 팔순이와 같이 오곤 했다.
알고 보니 팔순이 외삼촌댁이 이장이었다. 그러니까 현구하고는 외사촌간이다. 현구는 팔순이가 달구를 좋아하는 걸 알았다. 부잣집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좋아하지 않나 팔순이를 의심했다. 달구는 짝꿍이 팔순이가 있으면서도 혜숙에게 선물 공세를 퍼부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들은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었다. 석구와 혜숙은 H시로 고등학교를 통학하면서 가까운 단짝이 되었다. 달구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방학 때면 내려와 혜숙을 찾아 선물 공세를 했다. 석구와 단짝이라는 것을 알면서 질투라도 하듯 혜숙을 가까이 했다. 잊지 못한다면서 자기 마음을 알아 달라고 졸라댄다는 것이다. 홀어머니에 가진 것 없는 석구를 좋아하면 평생 고생하게 된다면서 자기 말을 새겨들으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혜숙이 팔순이가 있잖은가 물었다. 팔순이는 친구로 사귀는 거지 이성이 아니라고 했다. 너만은 진심이라며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다고 들이댔다.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매일 쫓아다녔다. 아들 하나뿐인 우리 집 재산 다 내 것이 될 거라며 허세를 부렸다.

 

3년이란 세월이 흘러 그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였다. 석구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 마을은 대학생이 네 명이나 진학했다며 축제 분위기였다. 혜숙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은행에 입사하였다. 석구 어머니의 기쁨은 말할 나위 없었다. 아버지 없이 홀어머니로서 이뤄낸 기쁨은 다른 사람들의 두 배였다. 석구는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석구의 서울 생활은 말 그대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자취 생활이 이어졌고,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 어머니 혼자 애쓰는 무거운 짐을 다소나마 덜어드려야 했다. 그렇게 서울 생활이 한 해를 넘길 무렵 오랜만에 혜숙을 만났다. 혜숙을 통해 서울에 있으면서 미처 몰랐던 일들을 알게 되었다. 달구가 한 달에 몇 번씩이나 혜숙을 찾아와 선물 공세를 하며 데이트를 요청했다는 것이다. 혜숙이 싫다고 하는데도 백화점에 끌고 가 명품 옷이며 화장품까지 사주며 만나 줄 것을 강요했다. 터무니없는 것은 현구가 그런 사실을 알고 외사촌 동생 팔순에게 달구와의 관계를 끝내라고 강요한 것을 알자 달구가 분노해 현구와 한바탕 육탄전을 벌였다는 것이다. 석구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불안했다. 두 여자를 차지하려는 달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석구는 혜숙의 손목을 잡고 달구를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다. 혜숙이 일어서며 걱정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며 봉투 한 장을 건넨다. 석구는 서울 열차에 오르며 가방에 넣은 봉투를 생각해 냈다. 자리에 앉은 석구가 봉투를 꺼내 본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돈과 함께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것 알고 있어. 일 좀 줄이고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직장 잡어. 내 마음을 건네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어. 우리 서로 마음만은 변치 말자. 호호호, 사랑해!”
석구의 가슴이 뭉클하며 눈가가 붉어진다. 석구는 옆사람을 의식하며 애써 눈물을 참는다. 눈을 감자 혜숙의 얼굴이 떠오른다. 혜숙은 사촌 동생이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등학교 갈 생각 못한다고 했다. 사촌을 돕기 위해 혜숙이 취직하겠다고 할 때 석구는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면서기라 대학 갈 형편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빙긋 웃기만 했다.
“나, 돈 벌고 싶어서, 시집이나 가려고 호호호. 공부보다 돈 버는 재미도 솔솔할 테니까!”
그때 석구는 농담인 줄 알면서도 캐묻지 않았다. 오늘 이것저것 얘기하다 사정을 알게 되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옛말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은 있어도 사촌을 위해 대학을 포기하는 사촌이 있는지 믿기 어려운 얘기다. 한숨을 깊게 내쉬던 석구의 눈에 일그러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른다. 해마다 잔주름이 늘어가는 엄마,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이 있지만 진짜 자신의 어머니는 강하지만 한 여인의 일생을 생각하면 불쌍하다. 혼자 힘들게 살면서도 얼굴빛은 항상 밝다. 이웃 사람들은 어떻게 맨날 싱글벙글하냐고 물으면 호호 웃기만 하다가 우리 착한 아들 있잖아요. 잘 자라줘서 고맙지요 한다고 할머니들이 석구가 내려오면 들려주었다. 그럴 때마다 석구는 가슴이 먹먹했다. 석구는 서울까지 왔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것은 자신의 꿈인 동시에 어머니의 소중한 꿈이었다. 효도 한 번 하는 셈 잡고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가 대학교 생활이 아닌가.
석구는 고향 친구 창수를 생각한다. 친구 중 창수하고 금희가 고등학교 진학을 못 했다. 창수는 이발소에 들어갔고 금희는 미장원에서 일하고 있다. 창수는 지금 이발소 일을 그만두고 양복점에서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창수를 생각하면 괜히 미안하고 가슴이 아프다. 창수와 금희, 그들은 얼마나 마음 아파할까? 다정했던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잘되기만을 바라고 싶다.
석구는 학년이 올라갈수록 공부에 더욱 열중했다.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매달 생활비 보태라며 보내주는 혜숙의 성의는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절대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의 성의를 무시하면 안 된다고 충고까지 한다.
대학 졸업반이 되었다. 그 무렵 현구가 은혜와 결혼한다는 연락이 왔다. 현구는 건축 면허 1급을 따서 건설회사에 입사하였다. 은혜는 음대를 졸업하자마자 음악학원 강사로 일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결혼식에 꼭 참석하라며 청첩장을 보내었다. 결혼식 날 고향 친구이니 기쁜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초만원을 이룬 예식장엔 고향분들이 많이 참석했다. 깜짝 놀란 건 현구와 상면도 안 한다던 팔순이도 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 예식이 끝나갈 무렵 누군가 왔다 갔다 설치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가 팔순이를 덥치듯 끌고 나가려 하자 우르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자는 고개를 숙이고 끌려가지 않으려 버티고 있다. 자세히 보니 그 남자는 바로 달구였다.
“이년, 너 잘 만났다. 내가 널 찾느라 얼마나 애먹은 줄 알아?”
달구는 팔순이에게 폭행을 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이 달려들어 말렸다. 그때 신랑 신부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현구를 본 달구가 사람들을 밀치고 신랑한테 달려들었다.
“야, 이 자식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애먹는 줄 알아, 이 새꺄!”
달구가 신랑 현구의 옆구리를 발로 차버리자 신랑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달구가 쓰러진 현구를 구둣발로 짓밟으려는 걸 주위 사람들이 간신히 말렸다. 그 틈을 타 달구는 사람들을 밀치고 팔순이를 끌고 예식장을 빠져나갔다. 석구가 현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저런 친구가 있다는 게 너무 부끄럽다. 철없던 시절의 일들이라고 생각하고 다 잊어라.”
“정말 면목 없다. 더구나 고향분들 앞에서….”
“좋은 날인데 다 없던 일로 하고 은혜와 행복하게 살기만을 바랄게.”
“고맙다, 잘살게. 앞으로 우리 자주 만나자.”
“그렇게 하자구. 은혜야, 행복하게 살아. 축하할게.”
“고마워, 아니… 저기, 혜숙이 아냐?”
혜숙이가 헐레벌떡 웅성대는 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그들 앞에 와 섰다.
“은혜야, 미안하다 늦어서….”
은혜가 혜숙의 손을 잡으며 흐르는 땀을 닦는다.
“아니야, 서울까지 와 준 것만도 고맙지.”
“나, 서울 지리 잘 모르잖아. 한참 헤맸어.”
“괜찮아, 혜숙아. 앞으로 우리 자주 좀 보자.”
“그려, 은혜야. 행복하게 잘 살아야 돼.”
“그래, 이젠 너희들 차례다. 빨리 서둘러.”
“빨리 서둘면 체해.”
“아니다. 요즘은 고속시대잖아.”
서로 농담을 주고받던 젊은 그들, 현구와 은혜는 하와이로 신혼여행 떠난다며 서둘렀다.
석구와 혜숙이 오랜만에 단둘이 서울 거리를 거닌다. 손을 마주잡고 걷는 걸음마다 기쁨과 서글픔이 교차한다. 혜숙의 서울 나들이는 손꼽을 만큼이다. 석구 만나러 온 적이 전부다. 애틋한 두 사람은 만나면 반갑고 기쁘다. 그러다 헤어질 때 아쉬우면서 서글프기도 했다. 그들이 찾은 곳은 조용한 커피숍이었다. 별로 손님들이 없어 조용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주 만나지 못한 그들은 오랜만에 맥주를 마시며 쌓였던 얘기들을 늘어놓았다. 제일 기쁜 소식은 석구가 대기업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혜숙이 두 손으로 석구의 손을 잡고는 기뻐한다.
“고마워, 축하해.”
“혜숙이 네 덕분이야.”
“어머, 그런 소리 하면 어머니가 서운하다 하시지.”
“혼자이신데, 눈물 나지…, 건강하셔야 할 텐데. 은행 업무는 벅차지 않아?”
“글쎄, 셈수를 따져야 하니까 처음에는 긴장도 되는데 이젠 할 만해.”
“다행이네, 바쁜 직장 생활하면서도 늘 보살펴줘서 고마워.”
“어머 고맙기는, 내가 한 게 뭐 있다고…, 어머나, 시간이 다 된 것 같네. 내려가야지 이젠.”
“간다니, 이 밤에….”
“그럼 어떻게 하지, 여관이라도 가야 하나, 호호호.”
“숙녀가 그건 안 되지.”
“그럼 어쩌지, 꼬박 여기서 새우냐?”
“하하하, 우선 나가자.”
“나가긴 어디로….”
석구가 그녀의 손을 잡고 앞장선다. 2층인가 3층인가 큼직한 건물 앞에 ‘고시텔’이란 간판이 반짝이고 있다. 멈춰 서 있는 석구를 보고 혜숙이 석구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묻는다.
“여기는 고시원이잖아.”
말없이 석구가 혜숙의 손을 잡고 고시텔로 들어선다. 끌려가는 혜숙은 가선 안 되는 듯 발을 멈칫한다.
“여기는 왜, 왜….”
“가 보면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여기서 자취하는 건 아니지?”
석구가 혜숙의 잡고 있는 손을 끌다시피 2층 계단으로 오른다. 석구가 203이라 붙은 숫자 문 앞에 섰다. 석구가 문을 열자 혜숙은 깜짝 놀라 눈이 커진다.
“원룸에서 산다더니 이게 뭐야, 아니 4년간이나 이 좁은 고시원에서 살았단 말이야?”
혜숙이 두 팔로 석구를 껴안더니 불쌍한 표정이다.
“공부하는 데 지장 없으면 되는 거지….”
침대에 그녀를 앉힌다. 겨우 둘이 누울 만한 공간이다. 혜숙이 석구의 어깨를 토닥토닥하며 위로한다.
“이걸 어쩌면 좋아. 이런 곳에서 꿈을 꾸었다니 정말 고생이 많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방 하나 얻어주는 건디…, 안 되겠다. 당장 오피스텔로 옮겨줘야겠다. 내가 시간 내서 한번 올라올게.”
혜숙이 언제 준비해 왔는지 가방에서 준비해 온 반찬거리를 꺼낸다.
“우리 한잔하자. 대기업 입사했다는 축하주지.”
둘이서 상 앞에 마주 앉았다. 석구가 막걸리를 두 잔 따라 서로 마주치며 부라보를 외친다.
“대기업에 입사한 것을 축하하며!”
석구는 혜숙의 따스한 눈빛에서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에 경사 났네, 촌놈이 출세했다고, 호호호.”
“어머니를 보살펴주신 어르신들 정말 감사하지.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사촌을 위해 취업을 택했다고 했잖아. 훌륭한 것 같으면서도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렵구먼.”
그때 혜숙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대학까지 나왔잖아. 그런데 작은아버지는 대학을 못 나왔어. 그때 할아버지 형편이 두 아들을 다 대학에 보낼 수 없었으니까 부득이 그렇게 됐나 봐. 그 때문인지 작은아버지는 술주정꾼에 한때는 노름에 빠져 건달들과 어울리는 걸 아버지가 안타깝게 여기고 결혼하면 철들까 해서 서둘러 결혼을 시켰지. 아들이 둘씩이나 있는데 여전하셔…. 아들들 고등학교 진학할 형편이 못 돼 보다 못한 우리 아버지가 가족 상의 끝에 돕게 된 거야.”
“그런 말 못 할 안타까운 일이 있었구먼. 아버지가 훌륭하시다. 조카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기 자식의 교육을 포기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닐 텐데….”
“작은엄마가 농사를 힘들게 하시는데 안쓰러워서 조금이나마 힘을 덜어드릴까 해서.”
이번엔 석구가 혜숙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한다.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안쓰러워 가슴이 찡하구먼….”
“작은아버지 잘못 만나 고생하시면서도 화낼 줄 모르는 착하기만 한 작은엄마야.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건강에 유의하셨으면 좋겠어.”
혜숙이의 음성이 왠지 조금은 떨리는 듯해서 석구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석구가 혜숙이 손을 잡고 응원한다.
“자, 우리 용기 내자. 앞으로는 좋은 일만 생각하자구.”
혜숙이네와 석구네는 울타리도 없이 맞붙어 있는 이웃이었다. 그래서인지 두 아버지들이 절친하게 지냈다. 혜숙이 아버지가 면서기라 석구 아버지가 틈틈이 혜숙 어머니가 짓고 있는 농사일을 돕곤 했다. 석구 아버지가 갑자기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가게 되자 이번엔 혜숙이네 식구들이 석구 어머니 일을 도와주었다. 그런 관계가 이어져 두 남녀가 단짝이 되었다.
현구네는 아버지가 마을 이장이며 양돈장을 크게 운영하고 있다. 은혜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였는데 발령을 받아 타지에서 와 돌골마을에 정착한 셈이다. 이장인 현구네 사랑채에서 은혜네는 살게 되었다. 그런 인연이었던지 두 집은 각별한 한가족처럼 지냈다. 그러다 보니 현구와 은혜는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대학까지 동문이 되었다.
창수 하면 석구는 절친 사이이다. 창수 아버지는 술꾼이며 노름꾼이다. 석구는 책임감 없는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친구인 창수가 불쌍했다. 그런 반면 석구네는 그런 아버지마저 안 계시기 때문에 오히려 창수는 석구가 불쌍해 보여 친구들 중 가깝게 지낸지 모른다.
석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 한 창수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그렇기는 금희도 마찬가지다. 창수네와 금희네는 땅 한 톨 없어 달구네 논을 부치며 어렵게 살아왔다. 그런 두 아버지들이 성격들도 비슷하고 사는 것도 그렇다 보니 항상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끼리 어울렸다. 창수와 금희도 환경이 비슷해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만나면 열심히 기술을 배우자며 서로 위로를 했다.
달구 얘기는 안 할 수 없다. 달구 할아버지가 탄광을 해서 큰돈을 벌어 고장의 산과 땅들을 사들였다고 한다. 지금 고장에서 부자로 손꼽히는 달구네다. 그런데 달구 아버지가 딸만 넷을 낳자 읍내 단골로 다니던 술집 마담과 연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달구이다. 달구가 단짝이라고 자랑하는 여자아이가 팔순이다. 팔순이는 읍내에서 어머니가 여관을 운영한다.
달구는 서울에서 대학 다니다가 자퇴하고는 나이트클럽을 차렸다. 그러다 엉뚱하게 노름꾼들과 어울려 방탕한 길로 빠져들었다. 팔순이와 동거했는데 옴짝달싹 못 하게 감금시켰다고 한다. 고향 친구들 얘기를 하다가 석구와 혜숙이 서로 손과 손을 마주 잡는다.
“우습지? 우리 친구들 보면… 호호호.”
혜숙의 말에 석구가 잡고 있는 손을 흔들며 대꾸한다.
“맞어 맞어. 친구들 보면 마치 넓은 세상을 보는 듯 각양각색이지.”
“글쎄 말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10년, 20년 세월이 흘러 중년쯤 되면 어떻게 변할까!”
“모두 어떤 운명으로 살까. 하늘에 맡겨야지.”
“글쎄, 운명은 하늘에 맡기고 우리 열심히 살기로 해, 알았지?”
혜숙이 손을 내밀자 석구가 손을 마주 잡고 약속이라도 한 듯 손도장을 찍는다. 밤은 깊어져 간다. 남은 술을 마시며 혜숙은 잠자리를 걱정한다. 겨우 둘이 누울 만한 아주 작은 침대에서 자야만 한다. 혜숙이 펴놓은 자리에 누우며 한쪽 팔을 뻗어 금을 긋는다. 이불로 금을 그으며 절대 넘어오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처녀 총각이 한 침대에 눕게 되다니 혜숙은 쑥스럽기만 하다.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니 상관없겠지만, 그래도 결혼 전까지는 가려야 하지 않겠는가. 혜숙이 옆으로 돌아눕는다. 그때 숨을 깊이 몰아쉬던 석구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녀를 껴안으려 한다. 그녀가 두 손으로 석구를 밀어낸다. 깔깔대던 석구가 한 번만 안아보고 자겠다고 하자 꼭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혜숙이 다짐을 한다. 석구가 그녀를 힘껏 껴안고 볼에다 뽀뽀를 한다. 품에서 겨우 빠져나온 혜숙이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다.
“약속은 약속이야. 나, 비겁한 남자 제일 싫어하는 여자라구. 알지?”
혜숙이 팔꿈치로 석구의 옆구리를 툭 친다. 석구가 알았다면서 웃는다. 그들에겐 깊은 신뢰와 기대가 흐른다.
“오늘이란 날을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혜숙이 석구의 손목을 잡았다. 두 사람은 손을 꼭 잡은 채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0년, 20년이 지나 돌골마을의 젊은이들은 50줄에 들어섰다. 결혼도 하고 자식들도 낳고 각자 자기 인생을 살다 보니 자주들 만나지 못했다. 일 년 중 한두 번 설 명절 때나 간혹 잔치 때 소식을 듣곤 한다. 달구가 방탕한 길로 들어서고 팔순이를 감금시킨다는 소식을 들었다. 팔순이가 딸 하나 데리고 피신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석구가 모처럼 고향을 찾아가게 되어 열차에 몸을 실었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요즘 웬일인지 석구는 가슴이 먹먹해지며 초초해진다. 석구는 직장생활 25년간 바쁘게 자식들 바라보며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왜 이렇게 허무한 마음이 들며 가슴이 허전하다.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했는데, 뒤돌아보니 과연 이 삶이 행복한 삶이었나 자문한다. 가슴이 답답해 오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나 직장에 나가거나 모든 것이 역겨웠다. 오로지 술만이 마음을 달래주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당신, 요즘 왜 힘없어 보이지? 그리고 왜 먹지 않던 술을 그렇게 매일 마셔. 술로 살다시피 하네요. 혹시 갱년기 우울증 같은 거 아니야?”
갱년기가 여자에게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남자에게도 있는가 보다. 직장 가면 불안해지는 것은 밑에서 치고 올라오고, 위에서는 실적으로 압박하며 누르고, 그런 점도 있긴 하지만 샐러리맨들의 반복되는 생활의 스트레스랄까. 어머님 말씀처럼 좋은 직장 잡아 결혼해서 잘 살면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열심히 살아왔다. 아내는 퇴직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기적 소리에 눈을 떴다. 고향역이다. 초라했던 역전이 세월이 흐르며 현대식 건물이 제법 우람하게 세워져 있다. 고등학교 시절 통학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대학 시절 상경할 때면 꼭 성공해야 한다고 다짐하던 고향역이다. 그 씩씩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축 늘어진 어깨다.
둘도 없는 고향 친구 창수를 만났다. 시장 뒷골목 선술집에 마주 앉았다. 술잔이 몇 잔 돌아가고 석구가 침묵을 깨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 어때? 양복점은….”
“큰일이야, 기성복이 판을 쳐서 그런가, 통 손님이 없어. 맞춤복을 누가 입어야지. 문을 닫아야 하나 생각 중이구먼.”
“아, 정말 걱정이겠네.”
“그래서 고향으로 들어가야 하나 생각 중이야. 너는 걱정 없을 테지?”
“아, 나도 그래….”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유명한 대기업에 다니면서 뭘 그랴.”
“글쎄 말여. 참, 돌골로 가게 되면 누구보다 어머님을 모시게 되니 좋겠다.”
“그런디 시골에서 뭐 할 게 있냐며 펄쩍 뛰셔, 하던 일이나 하라는 구먼. 나도 걱정이야.”
“그런가? 창수 가면 나도 따라갈까 했는데….”
“무엇이?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 농사짓겠다구?”
“시골 생각이 나서 왔구먼.”
“어머니가 펄쩍 뛰실걸, 네가 무슨 걱정이냐, 죽는 소리 그만해….”
“하하하, 좋은 직장이라구,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석구는 창수와 헤어진 후 시장에서 생선과 고기를 좀 샀다. 버스에 몸을 실은 석구는 고향이 가까울수록 설렘보다는 착찹함이 밀려왔다. 창수 말처럼 농사짓겠다면 어머니가 펄쩍 뛰실 것만 같아 왠지 마음이 불안해진다. 버스에서 내린 그가 가던 길을 멈추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본다. 도시와 달리 모든 것이 멈춘 듯 조용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하다.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어머니가 부엌에서 무엇인가 일하다 반긴다.
“어머니!”
“아이구, 우리 아들 왔네.”
어머니는 아들을 두 팔로 번쩍 껴안고는 빙글빙글 돈다. 아들이 사 들고 온 생선과 고기를 받아들며 말한다.
“아이구, 사 오기를 잘했구먼. 혜숙이네하고 같이 들어야겠네. 순희 에미가 애비가 올 거라고 전화가 왔어. 그래서 닭을 찜통에 삶고 있었지.”
“예, 어머니, 그러셨어요?”
석구는 아내 혜숙이 사준 점퍼를 꺼내 어머니에게 드린다. 
“어머, 선물까지….”
포장을 풀어 점퍼를 입어보는 어머니의 얼굴이 환해진다.
“어떻게 이렇게 딱 맞는 걸 골랐냐. 고맙다, 에미야.”
어머니는 며느리가 앞에 있는 듯 밝게 웃는다.
어느새 어머니가 부엌에서 생선을 굽고 찜통 닭과 푸짐하게 한 상 차려 내온다.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몇 수저 뜨던 어머니가 갑자기 생각난 듯 석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그런디 웬일이여? 무슨 일 없는 거지….”
“예, 어머니 뵙고 싶어서 왔어요. 엄니!”
“바쁜디 뭘 힘들게 온디야. 저번보다 얼굴이 좀 핼쭉해진 것 같구먼. 아픈 데는 없는 거지?”
“예, 그럼은요. 그러고 보니 어머니도 전만 못하신 것 같은데요. 아프신 데는 없지유?”
“그럼, 아직은 괜찮아. 나이 먹어 그런가 삭신이 좀 쑤시기는 하지.”
“그렇군요. 어머님, 이젠 돼지 키우는 거 그만하시고 좀 편히 쉬세요.”
“그건 안디야, 하던 건 해야지. 그 재미로 사는디. 건강에도 좋고….”
어머니는 아들에게 몇 번이고 별일 없는가를 묻고 묻는 것을 보면 부모의 자식 걱정은 끝이 없나 보다. 석구는 어머니에게 농사짓겠다는 말문을 꺼낼 수가 없었다. 석구는 잠자리에 들면서 어머니에게 농사일에 대해 말씀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지 못했다. 이른 새벽 눈을 뜬 석구는 쫓기듯 올라가야 하는 자신이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작별하며 손을 흔드는 어머니의 쓸쓸한 모습에 울컥 가슴이 메인다. 어머니 품속 같은 고향, 외롭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늘 가슴속에 살아 있는 고향, 이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다. 늙으면 고향을 찾는다는데 그 말이 맞는 듯하다. 누가 반기든 외면하든 고향에 돌아오고 싶다는 생각으로 골몰해지며 석구의 발걸음이 무겁다.
창수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이른 아침에 찾아온 석구를 보고 의아해하면서도 말없이 반긴다. 그것이 고향이다. 아침마다 운동 삼아 점포 앞을 청소한다면서 창수가 석구를 끌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창수가 막걸리 한잔을 따라 권하며 어머니가 허락하시던가 묻는다. 말도 꺼내지 못했다고 하니 창수가 석구의 무릎을 탁 치며 잘했다고 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갈 곳은 고향인디 누가 뭐래. 그동안 양복점 하며 해놓은 것은 두 자식 가르친 것하고, 죽으면 묻으려고 사놓은 산이라구. 난 거기다 그림 같은 황토집을 짓고 염소나 기르며 살겠다구.”
창수는 청년처럼 힘이 있어 보였다. 해장술에 장사가 없다더니 비틀대며 창수가 역까지 따라와 열차가 떠날 때까지 지켜보며 손을 흔들어 준다. 가슴이 내려앉듯 찔끔 슬픔이 밀려온다. 비틀대던 석구가 좌석에 털썩 주저앉아 푹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린다.
‘난 창수만도 못한 놈이야. 많이 배웠다고 한들 서울에서 좋은 직업을 가졌다고 한들 다 헛똑똑이구먼.’
석구는 자신을 돌아보며 자조적이 되었다. 순간 창수처럼 고향에 가 살 용기가 솟구쳤다.
석구는 고향에 다녀온 후 직장생활이 점점 더 권태가 몰려왔다. 그는 술로 모든 걸 잊어버리려 했다. 참는 데까지 참아보자 하지만 그럴수록 슬럼프에 빠지고 창수를 떠올리면 부럽기까지 했다. 그래, 가서 다시 한 번 새 삶을 살아보자.

 

길고 긴 터널이라도 건너는 것처럼 1년이 길고 길었다. 석구는 오랜만에 차를 몰고 고향을 찾아가게 되었다. 읍내 창수네 양복점을 찾아갔는데 간판이 바뀌었다. 풍년식당이란 파란 글씨가 보인다. 머뭇대다 안으로 들어가 창수 소식을 물었다. 돌골 고향으로 이사 갔다는 얘기를 듣고
차를 몰았다. 찾아가는 길이 자꾸만 속력을 내고 있었다. 속도를 줄이려 해도 마음 같지 않게 속력을 내고 있었다.
돌골로 들어가는 마을 어귀 좁은 길 옆에 ‘고향목장’이란 조그마한 간판이 눈에 띈다. 일 년 전, 창수는 아마도 계획을 실천한 모양이다. 산모퉁이 새 길로 들어서니 양지바른 곳에 황토집이 보이고 창수가 말하던 염소들이 눈에 띈다. 황토집 앞뜰에 차를 세우고 빵빵 클랙슨을 눌렀다. 신호를 보내자 창수가 뛰어나오며 손을 흔든다. 석구가 차에서 내리자 창수가 달려와 벌컥 두 팔로 껴안고 빙빙 돈다.
“잘 왔다. 꼭 올 줄 알았지. 야, 차도 멋있다. 전에는 그냥 다녔지….”
창수가 신기한 듯 차를 여기저기 살펴본다. 창수가 석구를 끌고 방목장 잔디밭에 정자나무가 서 있는 평상에 앉혀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후 어머니와 같이 술상을 차려 가지고 나왔다. 석구가 창수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자 아들이라도 만난 듯 껴안고는 등을 토닥인다. 닭도리탕에 산나물이 풍성하게 차려 나왔다.
석구가 어머니를 앉히고 손수 직접 담갔다는 동동주를 어머니에게 따르자 손을 내젓는다. 그때 창수가 한잔씩 하면서 뭘 그려시냐며 석구 잔과 어머니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번쩍 쳐들며 ‘부라보’를 외친다. 창수가 석구를 환영하는 소리다. 석구가 창수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아들과 같이 사시니까 좋으시지요?”
“말렸구먼 그랴. 농사란 게 힘든 거여,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랑께.”
그때 창수가 남은 술을 마시고는 어머니에게 응답한다.
“엄마가 잘 몰라서 그랴, 쟁이 노릇하기가 더 힘든 거여. 사람 상대하는 거 얼마나 힘든 건디. 나 일찍 들어오지 못한 거 후회되는구먼. 엄마, 나 요즘 정말 행복하구만유. 그쟈 석구야? 언제 들어올 참이여?”
“글쎄, 어머니가 허락하신다면 바로 들어오려는데, 어머니가 허락하실런지 걱정인데….”
그 말끝에 창수 어머니가 들이대며 말한다.
“뭐시야…, 어매 그 좋다는 직장 말여… 그려 제일 큰 회사라며, 거기를 그만두고 이 힘든 농사 짓겠다구? 암, 엄마가 어림없지, 맞어 허락 안 할 거구먼.”
그때 창수가 술을 따라 거푸 마신다.
“엄마, 왜 그랴. 나 혼자 쓸쓸해. 마을에 누가 있어. 석구 오면 둘이서 서로 의지하면 얼마나 좋아. 엄마들이 농사밖에 몰라서 그러는디, 객지 생활 스트레스 받고 얼마나 괴로운 일들이 많은디 그랴…. 동네 가면 석구 엄마한데 허락해 주라고 잘 좀 말해줘요. 엄마, 알았지?”
“알았구먼 그랴. 허락해 주라구 할 거구먼. 걱정 말어잉, 오랜만인디 술들이나 들어잉….”
어머니가 가신 후 창수와 석구는 술을 마시며 그동안 못했던 얘기들을 나누었다. 팔순이가 이장네, 그러니까 현구네 산에다 흙집을 짓고 거기 어머니 모시고 살고 있다는 얘기부터 시작했다. 달구가 가정폭력을 해서 견디다 못한 팔순이가 서울을 떠나 K시에서 딸 하나 데리고 미장원에서 일하며 숨어 산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게 되자 모시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 석구가 더 놀란 것은 달구가 사업 실패에 이어 방탕한 생활 끝에 방황하다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거였다. 그 소식에 석구가 거푸 술을 마셨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괘씸하기는 하지만 참 안됐구먼.”
그때 창수가 대들며 핀잔을 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놈은 죽어도 싸지 싸.”
창수가 술을 따라 석구에게 권하고는 자기도 거푸 마시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사람이 말여 살아가는디 한 치 앞도 모르는 구먼. 참, 참!”
창수가 씁쓸한 표정을 짓더니 남은 술을 벌컥 마신다.
“아 글씨, 이건 뭐 믿기 힘든 말이야. 현구가 말이여 건설회사 소장인가 감독인가 했잖여.”
“소장인데, 그런디 왜….”
“아니, 넌 서울에 있으면서도 어떻게 아무것도 모르냐. 갸가 순찰… 아니지, 점검하다가 화재가 나서 죽은 사람도 있는디, 다행히 현구는 목숨은 구했지만 반신불수가 됐다는구먼.”
석구가 창수의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놀란다.
“아니, 이런 일이… 소식이 두절됐었나, 그것 참.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런디 석구야! 어떻게… 화상이 말이 아니라는디… 그런디 왜 반신불수가 됐나 몰러야!”
“글쎄, 화상이 심해서 그런가? 너무 가슴 아프네….”
그들은 아픈 가슴이라도 쓸어내듯 거푸 술만 마신다. 창수를 통해 고향 친구들의 소식을 듣는 석구의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다. 창수가 코멘 소리로 말한다.
“가슴이 아프지만 어쩌겠냐. 다 팔자려니 생각해야지. 그 일은 그 일이고, 네가 온다니까 정말 나는 좋다. 만약에 말이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이다. 엄마가 반대라도 한다면 내가 찾아뵙고 허락받도록 잘 말씀드릴게.”
창수가 손을 내밀자 석구가 그 손을 맞잡고 힘차게 흔들며 다짐한다.
“고맙다. 우리 잘 지내보자.”
“그래, 언제 올 거야?”
“허락만 하시면 바로 와야지.”
“그래, 하루빨리 와라.”
창수가 석구를 벌꺽 껴안자 서로 결의의 등을 두드린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 회관 앞 정자나무 침상에 할머니들이 앉아 계셨다. 석구가 인사를 올리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까지 쳤다. 이미 온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다. 석구 어머니를 앞세우고 훌륭한 아들 둬서 부럽다고 야단들이다. 다들 불행한 중년을 맞는 자식들인데 석구가 멀쩡히 돌아온 것을 금의환향이라고 보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아들 석구의 팔짱을 끼고 걷는다. 따스한 어머니의 손길이다.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사랑채 부엌에서 소죽을 끓이던 아버지의 모습이 불쑥 떠올라 그는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들어가 밥상을 차린다. 뜰 앞 툇마루에 모자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리 아들 좋아하는 청국장 끓였어. 오랜만인데 술 한잔 줄까?”
“예, 어머니!”
술잔을 들고 쪼록쪼록 마시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석구 눈이 커진다.
“아들아, 이상하지? 혜숙이 엄마하고 같이 배웠어.”
혜숙이 아버지가 술을 좋아해서 갈 때마다 술을 권하는 바람에 조금씩 배우게 됐다고 했다. 노인정 왕할머니한테 술 담는 법을 배웠는데 혜숙이 엄마와 같이 만든 동동주였다. 어머니가 술맛이 어떤가 묻는다.
“감칠맛 나고 좋은데요?”
“응, 그럼 다행이네. 그런디 아들, 에미한테서 전화가 왔는디, 어머니한테 허락받을 일이 있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여?”
석구의 얼굴이 굳어지며 말이 없자 어머니가 궁금해서 재촉한다.
“왜 그랴. 왜 어려운 일이라도 있는 건 아니지?”
“그런 건 아니고요 어머니, 고향으로 내려올까 해서요.”
석구가 말을 던지고는 어머니 눈치를 본다. 그때 어머니가 아들 쪽으로 바싹 다가앉는다.
“그럼, 농사를 짓겠다구?”
“예, 어머니! 허락해 주세요.”
아들의 그 말에 어머니가 놀란 토끼눈을 하고 바라본다.
“어쩌면 좋지, 아니 그럼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겨?”
“아뇨, 창수처럼 조그맣게 농장이나 하면서 어머니 모시고 싶어서요.”
어머니가 두 손으로 아들 한쪽 손을 잡는다.
“그동안 직장 잘 다녀서 고마웠고, 손자 손녀 잘 키워 대학까지 보내고 부러울 게 없었구먼. 애비 소원이라면 해야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허락해 주셔서….”
무릎 꿇은 아들의 등을 토닥이던 어머니의 맑은 미소 속에 눈물이 고인다. 무릎 꿇은 아들을 일으키며 말한다.
“농사짓지 말라고 공부 가르쳤는디…. 아, 동네분들 좋은 직장 다닌다고 많이 부러워들 했는디…, 서운하기는 혀…. 그래도 괜찮아…, 아들 소원인디.”
“이 불효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석구가 어머니를 안았다. 아들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오히려 위로해 준다.
“아니다 아니야. 이 에미 욕심이야. 우리도 창수네처럼 재미있게 살아보자… 창수네가 부럽기도 했어….”
어머니가 아들을 껴안고 등을 토닥인다. 어머니의 맑은 미소 속에 눈물이 흐른다. 남편을 일찍 보내고 홀로 평생을 아들만 바라보고 사신 어머니다. 석구 어릴 적 옥이야 금이야 보살피던 어머니다. 평생 일구신 농사로 아들 뒷바라지만 하셨다. 어릴 적 농사는 절대 짓지 않겠다던 아들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더니 농사짓겠다고 한다. 농사짓지 말라고 공부 가르쳤는데 아들이 농사가 소원이란다. 서운하지만 아들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 어머니의 맑은 미소 속에 흐르는 눈물을 석구는 가슴 아프게 바라본다. 그리고는 행복한 농촌 생활을 결심한다.
그 후 석구가 창수처럼 그림 같은 황토집에 방목장을 꾸렸다. 흑염소 씨받이 두 쌍과 산양 한 쌍, 그리고 병아리와 토끼들도 구입했다.
고향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다. 기쁘면서도 슬픈 날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꿈 많던 언덕을 오르고 있다. 석구가 현구를 휠체어에 태우고 앞서가고 뒤따라 창수가 달구를 역시 휠체어에 태우고 뒤따라간다. 그 뒤를 따라 손을 마주 잡고 아내들이 오르고 있다.
마을 뒷산 정자나무 밑 침상에 자리를 잡았다. 30∼40년 전 중학교 시절이 떠올라 감개무량하다. 추억에 빠진 듯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현구가 소리쳤다.
“그래, 고향!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 같아 너무 좋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올걸 후회가 막심하다.”
달구가 팔 순이 손을 잡으며 울컥한다.
“그래, 어려운 결정 내려줘 고맙다.”
“어쩔 거여, 순아의 애비인 걸….”
“그래, 다 팔자려니 하고 우리 사이좋게 살아보자.”
“그려, 오빠 창포집 짓고 같이 옆에 살아, 오빠 건강 조심하고….”
“그래, 나보다 순아 아버지가 걱정이다.”
그때 달구가 휠체어를 들먹거리며 다가온다.
“내 걱정은 마라, 이미 죽을 놈인 걸. 나 같은 놈은 죽어도 싸지… 죽으면 고향에 묻어나 주라.”
그때 석구가 두 손으로 달구의 한쪽 손을 움켜잡았다.
“대체의학이라고 알고 있어? 산약초를 이용한 치료법이야. 우리 열심히 약초를 캐서 복용해 보자구.”
그때 창수가 달구의 손을 잡고 위로 올린다.
“석구하고 열심히 약초 캐던 이달구야 용기 내자. 분명 기적은 믿는 사람에게 일어난다구.”
모두들 달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석구가 달구의 손을 잡아준다.
“달구야, 우리 다 함께 용기 내자!”
목멘 소리에 달구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모두들 소리 높여 합창한다.
“기적은 분명 일어날 것이다.”
그 소리가 산울림 되어 온 산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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