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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구조 타파를 부르짖은 혁명가——이주홍의 「어머니」에 나타난 망이·망소이의 가족 관계 및 사회상

한국문인협회 로고 홍정화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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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작품의 배경
작가 이주홍(李周洪)은 1906년 5월 23일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1925년 『신소년』에 동화 「뱀 새끼의 무도」를 발표하였다. 그는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나라보다 서구의 신문물을 수용하면서 공부를 계속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낯선 외국에서 일하면서 겪은 다양한 경험은 그의 이후 작품 세계에 중요한 소재로서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어 1929년 단편 「가난과 사랑」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작가는 아동 문학을 비롯해 소설, 시, 희곡, 수필, 번역, 연극 평론, 미술 평론, 그림, 서예 등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에 걸쳐 폭넓게 창작 활동을 하였다. 그는 1949년 배재중학, 동래중학 교사 생활을 거쳐 국립 부산수산대학교(현 부경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1972년 정년 퇴직한 뒤 동 대학교의 명예 교수로 재직했다.
이주홍의 문학 작품 활동 내역을 보면, 1946년 중편 소설 「가족」, 단편 소설 「명암」 「거문고」, 시 「벽」, 1947년 첫 동화집 『못난 도야지』, 동화 「쫓겨난 개」, 아동극 「토끼의 가정」, 1948년 단편 소설 「김 노인」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은 풍자와 해학을 주축으로 흥미성을 중시하였고, 소위 읽히는 재미를 강조한 독자 중심주의에 속하는 아동 문학가로서도 활동을 하였다. 작가 이주홍은 1966년 『문학시대』를 주재하였고, 구상, 송지영 등과 ‘갈숲’ 동인으로, 김정한 및 박지홍 등과 ‘윤좌(輪座)’ 동인으로 활동하며, 부산 아동 문학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수많은 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1987년 1월 3일 별세하였다.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사건의 묘사와 자연스런 표현, 그럴듯한 사실성이 작품의 특징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또한 현실성 있는 작품을 구상하는 소설가로서뿐 아니라 순수한 동화 작가로서의 면모도 보여 준다고 알려져 있다.
작가의 수상 현황을 보면, 1957년 제1회 부산시 문화상, 1962년 제1회 경상남도 문화상, 1979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1983년 제1회 불교 아동 문학상, 1984년 대한민국 문학상 아동 문학 부문 본상을 각각 수상했다. 이상의 수상 실적에 더 나아가 1981년 이주홍 아동 문학상, 1987년 이주홍 문학 연구상이 제정되었음은 작가의 위대한 성과물이기도 하다.
작가의 고향 경남 합천 일해공원에 2006년 동상 및 「풍경」 시비가 세워졌고,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동 금강공원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부산광역시 강서구 낙동강 제방 도로 옆에 「엄마의 품」 시비가 건립되었다. 또한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 범어사 문화의 거리에 1996년에 건립된 「감꽃」 시비가 세워졌고, 이어 부산광역시 남구 대연동 부경대학교 대연 캠퍼스에 「해변」 시비가 세워져 작가의 명성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 주는 듯하다.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이주홍의 중편 소설 「어머니」는 『창작과 비평』 1977년 여름호에 실린 작품으로서 고려시대의 신분 구조를 타파하려고 봉기한 혁명가 망이와 망소이 형제의 불우하지만 따뜻한 가족 관계와 시대적 모순을 다루고 있다. 대체로 역사 문헌에서는 공주 일원을 중심으로 발생한 망이·망소이의 난으로 기록되어 후세들에게 설명되고 있다. 객관적으로 서술된 당시의 문헌을 바탕으로 혁명적인 사건을 현재의 시각으로 재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관점이 가능하다. 먼저 당시 난의 진행 상황을 살펴본 후 그 사건의 특징을 간단히 점검해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고려시대의 망이·망소이(孟伊·孟小伊)의 난(亂)은 12세기 후반, 1176년(명종 6년)에 발생한 신분 해방 요구와 함께 사회 불만이 폭발한 천민 반란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 후기 민란 중에서도 대표적 사례로 꼽히며, 특히 천민 출신 인물들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은 무신 정변(1170) 이후,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고, 지방의 통제력은 약화되고 사회적 혼란이 심각했으며 천민들에 대한 인간적 대우가 무너진 사회 현실이었다. 구체적으로 신분 제도가 견고하여 노비 제도가 시행되고 행정 구역도 향·소·부곡(鄕所部曲) 등으로 별도 관리되어 차별적인 신분 제도가 철저하게 유지되어, 하층 민의 불만이 누적되어 있었다.
난의 주동자는 망이와 망소이 형제로 알려져 있으며, 공주 지역의 소부곡(小部曲) 출신이었다. 당시 소부곡은 일반 농민보다 더한 차별을 받는 천민 계층이었고, 이들은 국역과 세금 부담이 극심했다.
1176년 공주 지역에서 망이와 망소이가 중심이 되어 반란이 발생되어 주변 지역의 향·소·부곡민들이 호응하면서 반란 세력이 확대되었다. 이들은 신분 해방과 조세·역의 거부, 불합리한 제도에 대한 저항을 보였다. 고려 조정은 토벌군을 파견해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들의 반란은 실패했지만, 신분제의 모순과 지방 통제력 약화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며, 천민·하층민들의 자각과 해방 의지를 보여 준 사건으로, 이후에도 다른 민란들(만적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이 계속 발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고려 후기 사회의 혼란상과 무신 정권의 부패를 보여 주는 상징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고려시대의 신분 구조 타파를 부르짖고 봉기한 혁명가 망이와 망소이 형제의 변혁을 위한 분투 등 사회상과 그들의 어머니, 아들의 인간적 관계를 분석하기로 한다.

 

2.이주홍과 관련 문단 일화
작가 이주홍은 일제 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문학 활동을 하였으나 21세기를 살아가는 독자들은 그 거인의 작품을 접할 기회가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이주홍이 활동했던 시대의 문학적 저변으로서 문학 관련 인프라와 인간관계 역시 21세기 독자들은 생소하고 궁금한 것도 사실일 것이다. 이에 따라 이주홍의 중편 소설 「어머니」를 본격적으로 분석해 보기 전에 작가 이주홍의 삶과 작품 세계와 관련된 경상대학교 강희근 교수의 글(경남일보, 2006. 11. 13.)을 소환하여 살펴본다. 이어 강 교수의 글을 토대로 잠시 손을 놓고 문단의 전해지는 일화들을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갖기로 한다.
향파 이주홍은 경남 합천에서 태어나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토목, 제탄, 식료품 공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1949년부터 배재중학과 동래중학을 거쳐 부산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1972년 부경대학교로 통합된 대학의 명예 교수를 지냈다. 향파는 소설, 동화, 시, 수필, 희곡, 동시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활동한 광폭의 역량을 가진 거인 같은 문인이었다.
향파는 진주 의곡사 주지였던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 1908-1991)과 교분을 가지면서 부산과 진주를 오가며 숱한 일화들을 남겼다. 청남은 경북 금능에서 태어나 1921년 해인사에서 삭발 수계했고, 1930년 진주 의곡사 주지가 되어 23년간 주지로 재직하였다. 의곡사는 청남이 파성 설창수와 더불어 개천예술제 창제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부터 예술제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고, 청남은 예술제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의 대부 역할을 하게 되었다. 향파 이주홍도 1949년 시작되는 개천예술제 이후에 청남과 아주 각별한 사이가 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술제 초창기에 의곡사를 드나들었던 문인으로는 김광섭, 모윤숙, 구상, 박노석, 정진업 등 주로 자유문학파들이었다. 그중 6·25 직후 월남해 온 문인이었던 구상 시인은 1950년대 초에 설창수와 의형제를 맺고 시대적 어려움을 달래기 위해 술로 나날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상 시인은 우리나라 시인 중에서도 가장 자기관리에 철저했던 문인으로 전해지는데, 당대의 구상 시인이 젊은 시절 술로서 다음과 같은 숱한 일화를 남겨 후배들에게는 그 자체로 전설적인 야사로도 받아들여진다.
한 가지 일화로서 젊은 구상 시인은 만취한 상태에서 용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경내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에다 방뇨를 하여 청남 스님을 당황스럽게 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향파가 나서서 곤란한 상황을 수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구상 시인이 시내 수정동 소재 술집에 가서 외상으로 술을 마시고는 향파가 그 술집에 와서 마시고 있다는 전갈을 청남에게 보냈다. 향파라면 청남이 묻지도 않고 버선발로 달려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구상의 그런 믿음은 언제나 적중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청록파의 조지훈은 수도여고 교사 시절, 예술제 백일장에 여학생들을 데리고 와 의곡사에 머물렀는데, 청년 조지훈 시인도 술버릇이 평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일화를 소개하면, 젊은 조지훈은 대취한 뒤 아무 데서나 방뇨를 한 후, “조지훈이, 조지훈이”라 반복하다가 뒤에 가서는 ‘훈’자를 떼고 자기 이름을 불러댔다는 것이다. 당황스런 상황에서도 데리고 온 여학생들은 그저 깔깔거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향파는 서울에서도 지훈이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는 길에 대선배 박종화의 집 대문에다 몇 번이고 발길질을 하여 경범죄를 범하는 전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듣고 있었던 터이므로 주사가 있지만 애교로 보아주자고, 아량을 베푸는 것이 좋겠다고 청남을 설득시켰다는 것이다.
향파와 청남이 이렇게 교분이 두텁고 막역한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모두 서예와 동양 고전에 대한 취향이 같았다는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고 한다. 향파의 서예 수준도 당시 대단한 경지에 이르고 있었고, 청남은 촉석루 현판과 국전 심사위원장이라는 이력만 가지고도 한국 서예의 정상에 자리 잡은 대가인 것을 확인하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향파도 술을 대단히 즐기는 애주가일 뿐 아니라 음주량 면에서도 선두 그룹에 뒤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청남이 시인, 작가 등 문인들의 기행에 가까운 술집 해프닝에 대한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 서예 작품을 적당한 판로로 적당히 넘기는 것을 향파는 안타까워하면서 밤새워 술잔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남에게 “이보게 청남, 이제 작품을 그만 내놓게. 대신에 술을 아예 빚어 놓게. 예술제가 코앞에 닿지 않았는가.”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향파 이주홍은 우리나라 문인들과의 숱한 교류와 회합을 통하여 넉넉한 인간사회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일화에서도 보았듯이 그는 정이 깊은 성품을 지니면서, 은은하게 향기를 내면서 주변을 돌보며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인정을 지니고 살았다. 그래서 그랬던가. 무엇이든지 쓰고 싶은 것을 쓰자는 취지로 동인지 ‘갈숲’을 주재했고 본격 수필 동인지 『윤좌』를 내면서 마음 맞는 이들과 어울렸다. 여기에도 청남이 조용조용 후원금을 썼다고 한다. 향파는 청남의 예술적 후원을 여러 경로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작가 이주홍은 우리나라 문단 역사에서 잊힐 수 없는 거목임에 틀림없다.

 

3.혁명가 망이·망소이 가족의 인간성
작품에서 망이 가족은 망이 부모, 아내와 아들 및 동생이자 혁명 동지인 망소이 등 6명이 등장한다. 그의 부친은 사망한 것으로 작품이 시작되며, 그의 어머니는 당시 모든 백성이 그렇듯이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그의 아들에게 부처님과 아버지 망혼이 자신을 지켜주고 있다고 자녀들의 근심을 해소하기 위해 그렇게 말한다. 망이 어머니는 불상 촛불 앞에 합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작품 속에서 자주 보여진다. 망이·망소이 노모는 혁명가의 모친답게 근엄하고 자식들을 엄히 챙기는 모습이 곳곳에 등장한다. 노모는 망부(亡夫)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아이 낳으면 죽고, 낳으면 죽고 하다가 사십이 넘어서야 만득으로 겨우 얻어 그것들을 유난히 귀애했던 망부(亡夫)는 그날 어린 것들이 멍히 쳐다보고 있던 것과 같은 표정의 눈으로서 어린 것들을 돌아다보며 끌려가고 있었다. 그때 망이는 네 살이었고, 제 동생 망소이는 연년생의 세 살이었다. 망부는 장관이 지나가는 길 앞에서 진작 비켜나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작품에서는 그 이후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한다. 매를 칠 때 망부가 “우리도 꼭 같은 육신을 감추고 태어난 인간이 아니냐, 나는 새도 아닌 인간이 어떻게 그 이상 더 빨리 비켜 날 수가 있는 일이냐”고 항변했다고 해서 청석골 중턱 검은 바위들 옆 큰 소나무 밑에 제 손으로 파게 한 흙구덩이 속에다 생매장을 해 죽였던 것이다. 망이의 부친은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작별하고 만 것이다.
망이는 마을 간 줄다리 시합을 계기로 모인 장정들을 반란군으로 유도하여 주청사를 장악하고 점령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산행병마사란 이름으로 자임했다. 그가 혁명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청사에 머물며 새벽 2시가 되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집에서 걱정을 하고 있을 노모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옆에 누워 있던 망소이도 잠을 못 이루고 있었는데, 망이는 동생 망소이가 집에 남아서 어머니를 돌보는 것에 힘을 쓰기를 희망하지만 망소이는 혁명에 참여를 원하여 형님을 따라나선 것이다. 마을 간 줄다리기를 가장한 거사 당일의 풍경이 작품에서 전개된다. 망이·망소이 형제는 줄을 메고 마을을 떠나던 날 아침 노모에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고별인사를 하러 방에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한창 승강이를 했었다. 망이가 동생에게 한 당부가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이어진다.

 

“또 말해봤자 그 말이 그 말이다만 난 이미 각오를 한 사람이야. 그러니 네가 남아 있어서 어머니를 지켜줘야겠단 말이야. 어머니 어머니 해도 우리 두 형제에겐 어떤 어머니니!”

 

그러나 동생 망소이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두 형제가 혁명가로서 결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만큼 말을 해도 형님은 제 말을 못 알아듣는 모양이오. 형님도 생각을 해보시오. 형님은 나더러 집에 남아 어머니를 보호해 있으라고 하지만 우리의 이번 일이 실패를 하고 만다면 아무리 남아서 지켜드리고 싶다 해도 지켜지지가 않는 거란 말이오. 그 대신 단 한 사람이라도 힘을 보태어서 일이 성공된다고 생각을 해보시오. 그땐 가만있어도 어머니는 절로 살아지는 거다 그 말씀이오.”

 

작품에서는 두 형제의 신체적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한 뱃속에서 난 형제간이면서도 망이와 망소이는 판이하게 다른 점이 많았다. 형이 작은 키인데 비해서 동생이 헌칠하게 키가 큰 것부터도 그랬지만, 형 망이가 어디까지나 처신을 중시해 모든 일에 침착한 것과는 좋은 대조로서, 동생 망소이는 사람을 대하는 데는 서글서글한 대신에, 한번 비위에 틀어졌다고 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어코 제 고집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다고 비교하는 형식으로 작품은 적고 있다. 
작품의 발단이 제시된다. 즉 형제가 줄다리 행사장으로 떠나는 날, 노모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줄 메고 떠나는 자식들을 눈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두 형제 역시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노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 마을 쪽을 돌아보며 걸었다고 한다.
한편, 작품에서는 노모에 대해서도 성격과 사람됨됨이를 설명하고 있다. 그녀는 남편의 형사(刑死)에 뒤따라 가산까지 몰수당하고 두 어린 것을 굶겨 죽이지 않기 위해서 십 리 이십 리 길을 멀다 않고 몇 해나 이어 밥을 빌러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조금도 체면을 손상시키거나 비굴해 보이는 데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녀를 예로서 대해 그녀에게 밥 한술이라도 더 떠 보태어 주려 했다는 것이다. 여러 마을로 구걸을 하러 다닌 때문으로서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 많아, 키가 크고 걸음걸이가 건드렁건드렁하다고 해서 사람들은 황새 할머니란 별명을 붙여 불렀다. 그녀는 평소에 말수가 적어 필요한 말 이외엔 말을 잘 않는 성미였지만, 때로는 우스갯말을 곧잘 하기도 하면서도 결코 말하는 자기는 웃지 않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사람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천민인 탓으로 해서 권력 가진 사람들로부터 설움받는 팔자 한탄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럴 때에조차 황새 할머니는 그들의 말에 동조하는 대신으로 엉뚱한 응수를 한 때가 적지 않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세상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부처님 마음이 고르시어 그래도 그 높으신 분네들은 선인의 편에 드는 사람들이에요. 아주 악인들이었다면 우리들이 수만이라도 살려 남겨주시지 않았을 게 아니겠소.”

 

노모는 어린 아들들이 고집을 부려 남의 말을 잘 안 들으려고 할 때가 있으면 곧장 죽은 남편의 이야기를 꺼내 들려주는 일이 있었다. “너희 아버진 너희 아버지 자신이 죽인 거야. 고집이 남달리 세셨거든! 너희 아버진 그때 그 죄가 아니었더라도 죽었을 사람이야. 평시부터 입바른 소릴 너무 많이 하셨으니까.” 그러면서 망부의 올곧은 성품을 나타내는 말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두꺼비야 두꺼비야, 나는 엉금엉금 기어나와 비를 즐기고 있는 너희들이 부럽다. 우리는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로 너희 미물들만도 못한 신세를 타고 나왔던가 말이야. 새도 제맘대로 날고, 물고기도 제맘대로 놀고, 나무도 돋고 이 세상 만물치고서 네 자유로 살아가지 않는 게 하나도 없는데 어찌하여 우리 인간만 부리는 인간과 부림받는 사람의 구별이 있어 왔던고 말이야.”

 

위와 같은 반골 성향의 기질을 가진 아버지와 근엄한 어머니의 성품으로부터 혁명가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태어난 것으로 볼 때, 그들은 혁명가 기질을 가진 부모의 가정교육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작품에서는 망이 노모의 사리분별력을 알려주는 장면을 보여준다. 즉 망이가 다음 날 줄다리기에 모인 군중들을 움직여서 거사를 감행하겠다는 결심을 밝히자 어머니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이란 잃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려운 거야. 혹시나 잘못됐다가 내가 너희들을 잃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러나 너희 아버지에겐 그게 효도가 되는 일일지도 모르지. … 너희 형제가 태어났을 때 마을 사람들은 모두 느지막이 둘이나 득남을 했다며 축복을 해주었어. 그런데도 너희 아버진 잠든 너희 둘의 얼굴을 내려다보고는 혼자서 눈물을 떨어뜨리고 있잖았겠어. 우리만 해도 더 참아내지 못할 고통인 걸 너희들까지 무슨 죄가 있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서 말야.”

 

이어서 노모는 눈물을 삼키는 듯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다음과 같은 아버지의 말을 꺼내 보탰다.

 

“손톱만 한 것도 마음에 거슬리는 일을 참아내지 못하던 느희 아버진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고 있었어. 난 내 명대로 못살 사람이지. 그렇지만 이놈들이 언제까지 우리를 이렇게 구박할 건가 내가 죽더라도 이 내 눈알을 빼어 저 본읍 공산 상상봉에다 걸어놓고 보아줄 테다. 하고 말이야.”

 

망이가 첫 번째 전투를 앞두고 삿갓을 눌러쓰고 집을 찾았다. 아들에 이어 아내가 밖으로 달려 나와 말없이 쳐다보고 있는 사이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서자 불단 앞에 앉아 있던 노모를 만난다. “왜 왔느냐? 싸움이 끝났느냐? 어서 가거라. 관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서도 통수가 이렇게 빠져나올 틈이 있으란 말이냐!”고 불심이 대단한 노모는 아들에게 단호한 독려를 하는 모습이다.
첫 번째 전투를 벌이던 망이는 토벌군에 의한 주민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토벌군에 항복을 결정하고 선처를 약속받고 모두 귀가시킨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도 귀가하여 노모에게 엎드려 통곡을 하자, 노모는 질책을 하지 않고 “그동안에 얼마나 고생들이 많았느냐. 승패는 병가상사라는 말도 있지. 필요만 하다면 날은 얼마든지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격려를 한다.
그러나 노모와 함께 지난 지가 2∼3일도 못 되어 우도처치병마사 이부는 조정의 명령이라면서 망이의 노모와 처를 수감했다. 망이는 이부를 찾아가 “소인들이 풀려나올 때 국고의 곡식을 내어 위로까지 해주신 나라의 은택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은정이 이렇도록 급히 변할 수가 있는 일입니까!”라고 항의하자, 이부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야. 국고의 곡식으로 달랜 것은 너희 난적들을 해산시키자고 한 수단이었지 너희들이 고마워서 은혜를 내려준 줄 알았더냐!”라고 응수하여 조정과 토벌군의 본색을 드러낸다.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관군과의 전투에서 두 차례에 걸친 항복으로 난민군들을 고향으로 보내주는 인도적인 성과를 보여주었으나 자신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항복을 했음에도 노모와 아내를 옥에 가두어 인질로 활용하는가 하면 그들 형제들을 체포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들은 산중을 헤매며 친구의 집에서 은거하기도 하는 등 피신을 하는 고난의 생활을 하다가 부모님 산소로 향한다. 그들은 “아무리 항복을 청한 난민군들에 대한 관의 비정한 화답 때문에 취해진 부득이한 일시의 도피라 하더라도 혼자서 몸을 피해와 이렇게 산턱에 누워 있는 이 꼴이 변명될 수 있는 일일까?” 하는 비참한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노모가 떠올라 질책을 하는 듯하였다. “너의 아비가 어떻게 죽었더냐”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해주던 말소리가 회상되는가 하면 이번에 옥사한 노모의 무덤이 이 산의 어디엔가 있는 것 같기도 한 생각이 들어서 잠이 깊이 와지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산중 동네 친구 집에서 은신하던 중 동생 망소이가 찾아와 형제는 만나게 된다. 동생을 통해 듣게 된 너무나 슬픈 가족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노모가 옥사를 하자 동민들이 그 시신을 받아다가 청석골 부친의 무덤 옆에 장사지냈다는 이야기, 망이의 아내와 망소이, 꺽쇠의 아내가 모두 관비로 붙들려 공주 관아로 끌려갔다는 이야기, 그래서 남은 어린 자식들은 모두 유리걸식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

 

다시 산중 몽택의 집에서 만난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그간의 정황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망이는 가족에 대한 회한에 젖는다.

 

“관비로 끌려간 아내! 지금 생각하면 한때도 알뜰하게 사랑해 본 적이 없이 남들만큼 편하게 해준 적도 없이 노상 고된 살림살이에 명령만 해왔던 지난날이 후회스럽기도 했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서로 살을 대고 자보는 혈육의 밤이었다. 망부(亡父)가 처형을 당해 죽고 난 다음 해부터 다섯 살 나던 망이와 네 살 나던 망소이 두 어린 형제는 이렇게 불도 안 켠 어둔 밤에 나란히 누워서 재너머 마을로 밥을 빌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어떤 날 밤엔 깜깜한 고갯길을 넘다가 넘어졌다며 밥에 붙어 있는 흙과 티를 떼내고 먹여주며 어머니가 울고 있는 것을 볼 때도 있었다.”

 

망이는 망소이를 만나 인제는 형제가 만났으니 죽음을 당한대도 외롭지가 않을 것 같았다. 망소이는 절망하지 않고, 비관하지 않고, 위급한 경우를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이성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 무엇보다 믿음직하다고 망이는 생각한다.
산중 몽택의 집에 은거하던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밀고의 기운이 돌자 그곳을 나와 피신을 한다. 망소이는 계룡산으로 가자고 하나 망이는 명학소 청석골의 어머니 무덤이나 들러보고 가자는 것이다. 청석골은 감시망이 꽉 쳐져 있어 위험하다고 말하며 “지금 당장으로선 산다는 것이 뭣보다 중요합니다. 살아만 있다면 무덤은 언제라고 볼 수가 있는 게 아닙니까!”라고 말하자, 망이는 “글쎄, 동생 말이 그르다는 게 아니지만, 나 하자는 대로 따라줬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결국 망소이는 뭔가 께름직하면서도 형의 청을 더 거역할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실은 자기도 내심으론 그런 생각이 있어 왔던 터라 그대로 형의 뒤를 따랐다. 그들 형제가 어머니 무덤 앞으로 가 엎어지면서 ‘어머니!’를 외치며 울고 있는 사이, 관군들이 덮쳐 잡았다. 망이가 “내가 동생이 말리던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빨리는 잡히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을!”이라고 한탄하자, 망소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혁명가다운 최후를 정리하는 한마디로 보인다.

 

“형님! 지금 그런 말씀을 하면 뭘 합니까. 장한 일을 하다가 죽는걸요. 저는 조금도 원망을 않습니다. 단지 남겨 놓고 가는 처자들이 불쌍하기는 하지만, 제가 형님하고 같이 죽게 된 일이 무엇보다도 다행하군요. 그리고 우리와 뜻을 같이한 친구들이 지켜주고 있는 가운데서 죽는다는 게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입니까!”

 

4.망이·망소이 난 당시 사회상
작품에 나타나고 있는 당시 고려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무신정권이 득세하고 있었다. 문신들의 전횡에 견디다 못한 정중부 등의 무신들이 문신들을 살육하고 무신정권을 수립하여 처음에는 천민 집단을 비롯한 백성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 정중부 독재체제를 형성하여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민란 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앙 권력의 무자비한 살육이 혹시나 자기들의 신변에까지 밀어오지나 않을까 겁이 나 두려워 전전긍긍하고 있는 지방 수령들을 볼 땐 속이 시원하게 두들겨 부숴보고 싶은 충동이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에게 힘을 준 것은 계급이나 신분이 낮은 사람도 웃사람을 꺾고 올라설 수 있다는 무신 쿠데타의 교훈이었다. 그만큼 눌려 지내온 무신들이었는데도 단합해 행동을 하니까, 그 철벽같이 견고해 있던 문신 지배층이 일순간에 박살이 난 것이다. 그런데 하루하루 기반이 다져지고 있는 정중부의 통치는 백성들이 바라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반 공장, 백정 등의 천민들보다도 더 한층 낮은 노비에 이르러서는 사육하는 동물보다도 더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노비는 일반 상품과 같이 제도상으로 매매가 행해지고 있었다. 대대로 물려주는 상속물이 되기도 하고 남에게 건네주는 앙여물이 되기도 하고, 임시로 물건 대신에 잡히는 전당물이 되기도 했다. 노비는 국가기관의 교육은 물론, 양민과 혼인하는 것도 허락이 되지 않았지만, 설령 경우에 따라 양민으로 해방이 되었다 하더라도 거기서 난 자손은 다시 노비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매매되는 노비의 가격은 대체로 통용되는 시세가 있었다. 부곡, 향, 소 등의 격리지역에 묶여서 방직, 제화, 죽세공, 음악, 연극의 제공 같은 특수한 노동력을 제공하는 천민들 역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 행세를 못하고 지내는 점에 있어서는 노비들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터에도 무인 천하가 되고 나서부터는 그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새 이름의 잡새들이 백성들의 지친 어깨 위에 잇달아 날아내렸다. 새 무인 천하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자 백성들은 차라리 문신 천하가 나았던 것이 아닐까 의식하게 되고, 나아가 그들만의 세상을 꿈꾸게 되었다. 망이가 마음속으로 거사할 결심을 굳혔던 것은 바로 이런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궐기하는 백성들의 중론 통일이 안 된다는 점이 망이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다. 백성들은 관아를 점령하고 있는 것을 마치 정중부 일당이 문신 천하를 타도하고 새 정부를 만들어 놓은 것과 같은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망이는 다음과 같이 그들을 설득한다.

 

“우리가 정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했단 말이오. 설사 우리가 정권을 잡아보고 싶다 하더라도 우리들 같은 무학한 처지로서는 정치할 능력이 없지 않소. … 나라의 악제도를 뜯어고쳐서 우리도 다 같은 사람 구실을 하고 살 수 있도록 집권자에게 보장을 약속받자는 거요.”

 

그러나 일부 백성들은 시원스레 복수도 못하는 민란이라면 처음부터 뭣 때문에 일어났던 거냐는 불만을 토로했다.
망이가 가는 곳마다 불안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주민들은 울상을 하고 “병마장군, 우리는 어쩌면 좋으오?”라고 하소연하면, “큰 결심이 필요한 때가 왔소! 이제 우리에게 사생이 결정될 마지막 시작이 찾아준 거란 말이오!”라고 독려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그러나 죽느냐 사느냐는 우리의 단결 하나에 달려 있는 것이오! 죽겠거든 가만히 앉아서 토벌군을 맞이하고, 살겠거든 힘을 합쳐 끝까지 싸워 주시오! 우리 공주 백성 전체가 반역했으니, 설사 한두 사람이 빠져보려 한다 하더라도 이미 중립은 없게 되어 있는 것이오!”

 

전황이 불리하자 망이 반란군을 비롯한 공주 권역의 민란 부대들은 해산하고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하도록 선처를 약속받았다. 그러나 관군이 돌연 반군 토벌과 함께 거사에 열성적으로 지원한 후방의 백성들을 모조리 체포한다는 소문과 함께 진격이 이루어져 망이와 망소이 형제는 가야사라는 절로 쳐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절로 들어선 것은 우선 무엇보다도 장기전에 대비해야 할 군량 조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먼저 중들을 철저하게 단속해 놓아야 합니다. 중들은 옛적부터 권력자 편에 붙은 수족들이 아니었습니까”라고 주장하면서 산중의 중들이 반란군의 동태를 관군에게 샅샅이 제보해 주었기 때문에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전한다. 당시 불교는 호국 불교로서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새로운 권력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불교는 대승 불교로서 국가의 안전을 지켜야 할 가치로 숭상하고 있었으니 토벌군을 도운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된 것이다.
관군과의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난민군 중에서 동요하는 무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원인으로는 첫째, 전쟁 기간이 장기화함에 따라 군량 보충이 곤란해서 군사들을 만족하게 먹여 낼 수가 없는 사정이었다. 둘째, 식량 등이 풍족하지 못하고 싸움이 언제 끝날지 기약이 없게 되자 군사들은 집 생각을 하고 식솔들을 누가 먹여 살릴 것인가의 걱정이 점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는 토벌군의 매수 전략에 말려들어 군사들이 나날이 집단 이탈을 감행하여 더 이상 항전을 지속해 갈 수가 없을 정도로 진지를 텅 비우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무기를 버리고 관에 자수를 해 오면 식량을 분배해 주고 죄를 묻지 않고 안전하게 고향으로 보내 준다는 관군의 회유책이 난민군의 결속을 와해시켰다. 토벌군은 난민군의 허점을 놓치지 않고 망이와 망소이 등의 본진을 포위했다. 당시 진중에서는 논쟁이 벌어져, “분명히 말해서 이 남은 병력과 무너져 버린 사기로서는 더 싸움을 지탱해 낼 수가 없습니다. 승산 없는 싸움으로 왜 귀중한 인명만 없앨 것인가?”라는 주장과 “우리의 싸움은 이번만으로서 끝이 나지는 않을 겁니다. … 승패는 병가상사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일시의 수치 같은 것 참고 이겨나가는 게 대장부 남아의 뱃심인 건데…”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망이는 전신에 불을 쏟아붓는 듯한 치욕을 느끼면서 사람을 보내어 처치병마사 정세유에게 다음과 같은 조건을 달며 항복할 뜻을 전했다.
“나라를 거역한 죄는 만번 죽어 마땅하오나 저희 천민들의 심중을 깊이 성찰해 주시고, 투항하는 난민군에게 인명 보전을 약속해 주시면 이날로 무장을 해제하고 항복하겠습니다.”
그들은 “죄를 물어 난민군을 잡아 죽이는 일만 없게 보증해 주신다면 망이 등 두목들은 어떠한 처벌을 받아도 불만이 없겠노라”는 뜻도 아울러 전달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 무의미한 인명 손상만이 남은 문제가 되어 있는 난민군으로서는 변할 수 없는 천민 해방의 항거 의식은 또다시 숙제로 미루어 둔 채 우선은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토벌군 최고 책임자인 정세유로서는 대세가 이미 기울은 것으로 판단하여 망이 등의 투항이 고맙게 여겨지지를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많은 소문이 난무하여 망이와 망소이 형제에 대한 다음과 같은 소문이 돌기도 하였다.

 

“분명히 매수를 당한 게지 뭐야. 자기 어머니가 인질로 옥에 붙들려 있는데도 끄떡 않고 싸워오던 그가 왜 갑자기 항복설을 내놓겠어? 처치병마사한테서 톡톡한 벼슬자리 하나라도 약속받은 건 아닐까?”

 

그러는 와중에서 날이 어두워진 시각에 관군이 갑자기 징을 올리며 공격을 시작해 오더니, 미처 정신을 수습할 사이도 없는 때에 정세유 병마사의 하회만 기다리고 있는 망이, 망소이, 꺽쇠 등의 밀실을 덮쳤다. 전연 예상하지 않았던 기습에 두령들은 당황하여 피신을 해 다행이었지만 부상을 입은 형을 껴안고 담을 뛰어넘었던 망소이의 행동은 영웅적인 무용담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그들 형제는 산중으로 피신하여 부모님이 묻힌 산소를 찾다가 매복한 관군에게 체포되어 효수형에 처해져 천민 해방이라는 꿈은 그저 일장춘몽으로 끝나버린 허망한 역사적 사건으로 전해져 올 뿐이다. 당시 문신이나 무신 등 지배층의 기득권 방어 의지가 대단하여 천민 계급이 비집고 들어가기에는 너무나 견고한 것이었다. 그들의 틈을 내준 것은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 오백 년이 지나서였다. 고려왕조에서 싹튼 인간의 본원적 평등이 현실화되는 데 긴 역사의 흐름이 요구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작품의 분석 및 평가
이 작품은 1970년대 발표된 것으로서 이주홍 작가라는 대가의 면모를 후대의 독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작가의 행적을 더듬어 그가 활동했던 당시의 문단의 사정과 인정 넘치는 선인들의 가치 체계를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발굴하여 소개한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할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천민 집단의 항거를 통하여 당시의 신분 구조 실태와 일반 백성들의 소박하지만 후손을 위한 미래 사회를 꿈꾸는 장면을 작품으로 담아, 후일의 작가들의 작품 활동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할 것이다. 이 작품에 대한 특징을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시대의 민란을 소재로 하여 당시의 투쟁의 과정과 실패의 원인 등을 작품화한 것으로 스토리를 사실적이고 치밀하게 구성하여 당시의 역사적 공간과 인간관계에 대한 진심을 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역사소설이 외세와의 전쟁이나 궁중 비화 등 지배층 위주의 한담 수준을 다룬 것이 많지만 아직 천민층의 혁명을 소재로 한 것은 드물다. 황석영의 「장길산」도 같은 유형으로서 양자 간의 차이점을 비교할 기회가 있어야 할 것이다. 특히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전쟁 지도자인 망이 형제의 부모와 혈육 간의 애정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인간적 갈등을 주요 내용으로 했다는 점은 유망한 시도이기도 하며, 그들 노모의 근엄한 어머니상과 망부의 반골 정신 및 형제 간의 설득과 존중의 장면은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를 바라본 것으로 보여 역사를 넘나든 가치 체계의 일관성 유지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이 작품을 통하여 지배체제의 혼탁을 살펴보았다는 면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고려 초기 문인 지배체제하에서 문인들의 안하무인의 무인에 대한 지나친 무시로 탄생한 무인정권 역시 그들만의 이해관계에 집중하여 사회는 날로 피폐해졌다. 천민 집단을 비롯한 하층민들의 처지는 개선이 되지를 않자, 천민 집단의 항거가 일어났다는 권력의 이동을 추적하였다. 그러나 하층민들의 전력 부족, 정보 부족으로 관군에 대한 대항력은 미미할 수밖에 없어, 그들은 개선을 요구하며 타협하는 방식의 투쟁을 보여주어 특이한 대응 방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하층민들의 항거 방식을 역이용하는 무신정권의 횡포는 분노를 일으킨다. 물론 이들을 달래기 위해 행정구역 개편과 약간의 식량 배분 등의 개선이 있었다. 당시 종교로서 불교의 역할이 부각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단지 불교는 국교로서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으며 대승 불교에 걸맞게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절에 소속된 스님들은 부를 축적하고 정부의 권력 앞잡이 노릇을 할 뿐이었던 것으로 언급이 되고 있다. 작품에서 불교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친 것은 당시의 혼탁한 사회상을 단순히 그대로 소설에 담은 것 같아 아쉬운 점으로 생각된다. 불교의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모습이 작품에 가볍게 덧칠이라도 되었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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