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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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없다는 생각은 사람을 깊은 외로움으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단순히 혼자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다. 나는 오래도록 그런 빈자리를 안고 살았다. 누군가를 따라 배우고 싶었지만, 마음 깊이 섬길 만한 이를 만나지 못했다. 그 허전함이 나를 바람 부는 들판에 홀로 서 있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현자를 만났다. 그가 건넨 한마디는 내 삶의 방식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양각은 화려하나 비바람에 쉬 풍화된다. 음각은 오래 남아 고졸해진다. 바위에 음각한 부처는 세월이 지나면 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바위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머리에 벼락을 맞은 듯했다. 돋을새김한 것은 금세 닳고, 움새김한 것은 오래 간다. 부처도 양각되면 닳아 없어지지만, 음각되면 바위 속으로 들어가시는구나.
이는 단순한 조각 기법의 차이가 아니었다. 사는 방식 자체에 대한 깨달음이었다. 양각으로 사는 것은 자신을 세상 위로 드러내려 애쓰는 것이다. 나의 외로움은 남 탓이 아니었다는 것이 깨달아졌다. 나는 드러나려 했고, 앞서려 했고, 그래서 쉽게 상처받았고, 그래서 자주 지쳤던 거구나. 남들의 시선에 사로잡혀 진정한 나를 잃고 있었구나. 아, 나는 양각으로 살았구나….
신기하게도 스승을 만났다고 생각한 그날부터 마음이 조금씩 달라졌다. 경쟁하려는 마음이 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부드러워지니 그 자리에 친절이 자리를 잡았다. 분석하고 따지던 머리에서 직관으로 느끼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상대를 대상으로 보지 않고 나와 같은 사람으로 보게 되었다.
어떤 모임에서 뒷사람이 자꾸 내 등에 대고 심한 기침을 했다. 그런데 예전처럼 예민해지지 않았다. 마스크 뒤에서 힘들게 기침하는 그 사람의 고통이 느껴졌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따뜻한 물 한 잔을 떠다 건넸다. 사람들의 작은 무례도 웃으며 넘길 여유가 생기고 타인을 경쟁 상대가 아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받아들이게 됐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너그러워졌다. 자신을 닦달하지 않고, 쉬엄쉬엄 가도 괜찮다며 제 어깨를 다독이게 했다.
그러나 깨달음이 깊어갈수록 나는 두려워졌다. 스승의 행보가 나를 실망시키면 어쩌나? 스승을 잃을까 봐 불안해졌다. 깨달았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아직 아무것도 깨치지 못한 것 같았다. 스승은 그의 말씀과 지혜일 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불안이었다. 부처가 말한 ‘손가락과 달’의 관계처럼 스승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달 자체는 아니다. 손가락에 집착하면 달을 놓친다.
스승을 잃지 않는 법은 그를 붙들어두는 게 아니라, 말씀을 내 삶에 새기는 것이다. 현자는 언젠가 떠날 수 있어도, 그 가르침은 내 태도로 남아 닳지 않으면 된다. 이것이 바로 음각의 원리가 아니겠는가. 가르침이 나의 존재 방식 깊숙이 새겨져 나와 하나가 되는 것 말이다.
나는 수필을 가르친다. 수필은 삶의 작은 조각들에서 의미를 찾는 문학이다. 제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나는 선생이라기보다 위로하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실은 내가 더 많이 배우고 위로받는다. 제자들의 삶 앞에서 고개가 숙어질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여러분보다 문학을 조금 먼저 배운 선배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오신 여러분의 인생을 존경합니다.”
참된 교육은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만나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이해가 만나 새로운 깨달음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배움이다. 스승은 모든 걸 아는 사람이 아니다. 서로를 비춰주는 거울 같은 사람이다. 그 거울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큰 지혜다.
“배운 것은 20%만 기억하라. 80%는 네 것으로 채워라.”
나의 현자는 인생의 자세를 말했다. 지식은 남의 것이지만, 태도는 네 것이다. 읽고 배운 것 위에 네 삶을 입힐 때, 그것이 진짜 너의 것이 된다. 지식이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몸과 마음이 하나 된 앎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어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내 삶에 스며들지 않으면 남의 것이다. 하지만 한 줄이라도 내 가슴에 새겨져 내 행동을 바꾸면 그것이 진짜 배움이다. 음각으로 새겨진 지혜는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어진다. 부처가 바위 속으로 들어가듯이.
인생은 끝없는 탐구여서 늘 학생이고, 나는 여전히 배우는 제자다. 동시에 누군가 앞에선 선생이기도 하다. 이 모순이 가르침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좋은 스승이 되는 길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좋은 스승이 답을 다 아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라는 건 짐작된다. 적절한 질문을 던지고 함께 고민하고 흔들리며, 그 속에서 조금씩 따뜻해지는 사람이 좋은 스승일 거라는 생각이다. 진정한 지혜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데서 시작된다고 했던가.
가을이 깊어간다. 더는 외로움이 무섭지 않다. 내 안에 새겨진 가르침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리라. 스승의 말씀이 태도가 되는 한, 나는 스승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음각의 스승이 되고자 정진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