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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다녀가는 풍경

한국문인협회 로고 홍종우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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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빛을 머금은 찬란한 햇살이 창가를 스치며 천천히 강의실을 물들인다. 정돈된 책상과 의자 위로 금빛 빛줄기가 길게 드리워지고, 아직은 텅 빈 공간에는 고요함만이 감돌고 있다. 햇살을 따라 창가를 부유하는 먼지마저도 아름답게 느껴지는 오후의 이 정적은 곧 시작될 무언가를 기다리는 풍경이다.
이윽고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하나둘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침묵 같던 공간에도 작은 숨결이 일렁인다. 소란스럽지 않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따뜻한 생기의 물결이다. 바로 이때부터가 나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이다. 나의 역할은 아이들과 책 사이를 잇는 다리가 되어 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익숙한 손길로 도서 대출용 회원증을 챙겨 어린이 자료실로 향한다. 잠시 후 각자의 손에 책 한 권씩을 쥔 채 강의실로 들어선 아이들의 얼굴에는 곧 펼쳐질 이야기 속 세상에 대한 조용한 설렘이 맺혀 있다. 어떤 아이는 빼곡한 문장 속에서, 또 어떤 아이는 그림 한 장면 속에서 자신만의 상상과 호기심을 조금씩 채워가리라. 아이들이 책 속 세상에 스며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오래 전, 나 또한 처음으로 동화와 마주했던 그 순간이 아련히 떠오른다.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말하는 새』라는 동화책은 하굣길 길가에 주저앉아 단숨에 읽어 내려갈 정도로 나를 사로잡았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글자 사이사이로 펼쳐지는 낯선 세계는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다. 작은 새가 말을 건네는 순간, 나 역시 그 세계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사람들은 나를 ‘책벌레’라 불렀다. 새롭게 눈을 뜬 세계가 너무도 강렬했던 탓에, 책 속에 빠진 나에게 부모님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의 시간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가장 조용하면서도 강한 시작이었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그 시절의 나처럼, 오늘날 도서관을 찾은 아이들은 책장을 넘기는 소리조차 아까운 듯 조심스레 페이지 속으로 잠겨든다. 작고 따뜻한 강의실 안은 오늘도 아이들의 시간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강의실 문을 나서면, 조금 떨어진 도서관 자료실과 쉼 공간에는 저마다의 일상으로 흘러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편안한 의자에 등을 기대고 신문을 읽는 어르신, 몇 시간째 긴 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사람, 그리고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잠을 청하는 익숙한 얼굴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삶을 가만히 품어주는 도서관은 언제나 말없는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그 침묵 속에는 누구나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도서관은, 어느 동네, 어느 도시에서든 사람들의 일상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더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람들과 책을 잇는, 조금은 색다르고 아름다운 도서관들이 존재한다.
낙타 등에 책을 싣고 오아시스를 향해 나아가는 이동도서관. 그 도서관은 사막을 건넌다. 또 어떤 도서관은 버스에 몸을 싣는다. 아르헨티나의 작은 마을에서는 폐버스를 개조해 아이들에게 책을 나누어 주기도 한다.
노르웨이에는 책을 싣고 바다를 누비는 ‘책 배 도서관’도 있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바닷물이 깊숙이 들어온 피오르 물길을 따라 이 도서관은 잔잔히 항해한다. 그런가 하면, 바닷가 절벽 위, 마치 유리온실처럼 지어진 스웨덴의 작은 마을 도서관도 있다. 그들의 도서관은 단순한 건물을 넘어 삶 속 깊숙이 스며든 이야기의 터전이자 공감의 공간이다.
책은 더 이상 지식의 저장소에 머물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마음과 마음 사이를 잇는 단단한 다리가 되어 준다. 이런 생각에 잠기다 보면 문득 얼마 전에 읽은 보후밀 흐라발의 「아주 시끄러운 고독」 속 주인공 한탸가 떠오른다. 책을 비롯한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한탸에게, 고된 노동과 외로움을 견디게 해 준 것은 책이었다.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은 마침내, 압축기에 자신을 던져 책 속으로 녹아드는 삶에서 절정을 이룬다. 한탸는 비록 실존하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내게 남긴 울림은 매우 깊다. 한탸가 마주한 그 고독하고도 시끄러운 순간, 어쩌면 우리가 그런 시간 속에서, 책을 통해 자신을 잃고 다시 찾아가는지도 모른다.
책은 때때로, 소음 가득한 세상 속에서 조용히 마음과 마음을 이어준다. 가장 깊은 위로가 되고, 말없이 존재를 껴안는 흔적이 된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아도 책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때로는 말없이 다녀가는 풍경처럼, 그렇게 스며들어 마음을 채우고 삶을 이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 누군가는 책을 통해 마음을 쉬고, 누군가는 그저 조용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도서관은 그런 모든 마음에 문을 열어 둔 채 오늘도 그 자리에 있다. 나는 그 속에서 아이들이 책을 만나고, 또 다른 세계를 열어가는 순간들을 지켜볼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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