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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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벽돌의 라인을 따라 걷는다. 길바닥에 박아 놓은 붉은 벽돌은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려는 벽돌만큼 단단한 저들의 굳은 의지가 아닌가. 줄을 잇는 붉은 벽돌 한 장 한 장에는 미국 독립을 쟁취하고 자유를 지켰던 자부심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보물찾기라도 하듯 길바닥의 붉은 라인을 따라 묶어 둔 과거를 훑는다. 미국 독립 역사의 현장인 보스턴에서 자유를 향한 발자취를 더듬는다. 과거의 흔적을 찾아 지금 걷는 이 길은 단순한 산책길이 아니다. 붉은 라인이 유혹하는 것은 내일을 향한 결단과 희망의 길이다. ‘프리덤 트레일’에 자유롭게 편승한다.
보스턴 커먼에서 첫걸음을 시작한다. 잔디와 숲과 분수가 어우러진 공원은 평화롭고 아름답다. 보스턴 시민의 쉼터인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방목장이었던 이곳이 지배를 위한 무자비한 처형장으로, 독립전쟁의 첫 전투를 잠재우기 위한 영국군의 훈련장으로, 역사의 물결이 휩쓸고 지나며 피와 눈물이 겹겹이 퇴적된 곳이라니, 이 아침의 고요한 평화 속에는 침묵의 울림이 묵직하게 배어 있다. 목을 매달았던 나무를 베어낸 그 자리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연설하셨단다. 숲에 스며든 분노의 아우성과 피의 흔적을 덮어주고 영혼을 위로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적당히 덮어주기도 하면서 작은 흔적도 찾아내어 이어지는 것이 역사 아니겠는가.
붉은 벽돌의 길은 오르락내리락 휘어지며 돌고 돌아 도시를 휘감는다. 황금색 돔의 ‘메사추세츠 주청사’ 건물을 지나고 독립전쟁 당시 화약 창고로 쓰였던 ‘파크 스트리트’ 교회도 사진에 담는다. 이곳은 노예 제도 반대를 외치며 연설했던 곳이자 독립기념일에 미국 국가가 처음으로 울려 퍼졌던 유명한 장소다. 역사적인 현장에 섰다는 뿌듯함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는 방문객의 하얀 발걸음일 뿐, 다시 흔적을 위한 사진의 배경으로 박아 넣고 발걸음을 옮긴다. 바닥에 박힌 붉은 의지를 따라 다음의 흔적을 찾아간다.
도심 가운데의 ‘래너리 묘지’다. 보스턴 학살 사건의 희생자와 보스턴의 유명 인사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잠들어 있는 영혼마저 일깨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굳이 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이끼가 들붙고 비문이 문드러진 낡은 묘비들은 존재만으로도 자유의 소중함과 행동하는 가치를 기억하라고 묵언 설교를 한다. 누구의 묘비 앞인지 한 무리의 여행객이 고개 숙여 경청하고 있다. 그 모습마저 묘비의 존재 이유를 말해주는 듯 결코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이 아닌가. 되살아나는 영혼의 붉은 돌길은 걸어서 3분이면 닿는 ‘킹스 체플’과 묘지로 이어진다. 청교도의 나라에 성공회 교회가 설 자리가 없었기에 묘지의 구석에 세울 수밖에 없었던 작은 건물과 오래된 묘지다.
킹스 체플 담을 끼고 돌아서 내려오니 보스턴 최초의 공립학교였던 건물이 기다리고 있다. ‘보스턴 라틴 스쿨’로 세워졌으나 학교가 이전하고 시청사 건물이 세워졌단다. 이 학교 출신으로 독립 선언서에 사인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의 동상이 청동 옷을 입고 우뚝 서 있다. 그의 명언 중 ‘시간은 금이다’를 떠올리며 빠른 걸음으로 붉은 길을 걷는다. 뾰족한 흰색 첨탑이 인상적인 ‘올드 사우스 미팅 하우스’가 대각선의 위치에서 눈에 들어온다. 청교도 교회였는데 미국 독립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그 유명한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에 사전 집회가 열렸던 곳이란다. 식민지 청중의 성난 함성이 작은 건물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같다.
멈춘 자리에서 살짝 몸을 돌리니 붉은 벽돌의 투박한 건물이 보인다. ‘올드 코너 서점’이다. 「엉클 톰스 캐빈」「주홍글씨」 등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을 탄생시킨 작가들이 들락거렸던 곳이다. 나다니엘 호든의 「주홍글씨」의 배경이 된 곳이 실제로 이곳 보스턴이 아닌가. 사회 변화를 이끌고 간 문학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한 명작이 바로 저 옛 서점의 진열대를 통해 퍼져 나갔다니 쉬 발길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금은 멕시칸 음식점과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모퉁이 건물이지만 그들이 남겨 놓은 흔적의 끄나풀을 잡고 상념에 젖는다. 흔적 없이 사라질 나의 시간을 일시 정지한다. 나만의 흔적을 남겨 놓기 위해 붉은 벽의 응시와 내 시선을 접목해 본다.
붉은 벽돌길은 ‘올드 노스 교회’로 이어진다. 교회의 관리자였던 로버트 뉴만이 두 개의 불을 켜고 ‘육지로 오면 하나, 바다로 오면 둘’이라는 암호를 보내면 폴 리비어는 밤새 말을 달려 영국군 군대의 상황을 식민지군 민병대에 알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한 ‘랜턴 스토리’의 현장이다. 은세공자였던 폴 리비어가 어둠을 뚫고 달려간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 긴장감이 한 줄기 바람으로 골목을 휘감는다. 찰스강 위의 다리를 건넌다. ‘벙커 힐’ 전투에서 숨진 많은 희생자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기념탑이 멀리서 보인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푸르고 상쾌하다. 소중한 가치를 잊지 않으려 보듬어 내일로 전하는 보스턴이 아름답다.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걸으면서 읽는 독서라고 했다. 마음을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문학의 힘도 함께 되새겨보는 귀한 발길이었다. 붉은 벽돌로 길바닥에 새겨진 선을 따라 자부심 가득한 저들의 영광스러운 흔적을 한나절 내내 찾아다녔다. 과연 저들의 역사가 부끄럽고 치욕적인 것이어도 그렇게 했을까. 승리한 역사만 귀한 게 아니다. 반성하고 각성하게 하는 슬프고 아픈 역사도 소중하게 보듬을 줄 알아야 하리라. 일제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려고만 하는 우리의 행위는 과연 바람직할까. 정리되지 않는 생각의 꼬리가 길어진다. 부당한 과세와 권력의 횡포에 떳떳하게 맞선 저들의 선조에 대한 작은 흔적도 소중하게 보존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보스턴이 좋다. ‘프리덤 트레일’은 습관에 젖어 적당히 안주하려는 내 의식을 부끄럽게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