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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을 읽는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혜숙(인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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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서울 나들이다. 일이 끝나고 인천행 전철을 타려던 발길을 개찰구 앞에서 멈춘다. 서울에 올 기회가 흔치 않은데 그냥 돌아가기가 아쉬웠다. 마음에 두었던 곳이 생각났다. 짧은 겨울 해가 어중간하였으나 걸음을 재촉한다.
성균관 경내는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할머니 세 분이 명륜당 서쪽 마루에 걸터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신다. 이웃집 툇마루에 마실 온 듯 스스럼없다. 이곳은 조선시대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던 교육기관이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이념이 바뀌고 문물이 달라졌다. 더 이상 이 최상의 면학 기관으로 젊은이들을 불러들이지 못한다. 인생 막바지에 든 노인들만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마당에 한 쌍의 나무가 의연하다. 비록 잎은 다 떨어졌지만 우람한 둥치와 치솟은 키가 위풍당당하다. 은행나무를 한눈에 알아본다. 멀찍이 선 채로 높은 우듬지를 한참이나 우러른다. 가지 끝 가느다란 나무 초리에 하늘을 찌를 듯한 결기가 살아 있다. 두 그루는 천생연분처럼 붙어 있지만 사랑의 열매는 맺지 못한다. 모두 수나무이기 때문이다. 나이도 크기도 엇비슷한데 한 그루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차별을 두지 않는다.
명륜당 은행나무의 나이를 오백 년 언저리로 본다. 나로서는 가늠할 수 없는 세월이다.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 이 노거수가 지금도 성장할까? 거대한 몸집은 유지하고 지탱하기에도 버거워 보인다. 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옆으로 뻗은 가지마다 잔가지가 삐죽삐죽 솟아 나와 자랐다. 굵은 가지에선 끝이 뭉툭한 유주(乳株)가 거꾸로 자라고 있다. 두 개는 크고 한 개는 그보다 작다. 열대지방 나무의 공중 뿌리처럼 땅에 닿도록 자라서 뿌리가 내린다고 한다. 새로운 뿌리를 향한 열망도 갖고 있다.
넘치는 생명력에도 불구하고 나목은 세월의 흔적을 감추지 못한다. 풍성한 잎으로 치장하고 있을 때는 속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웅장하고 화려한 겉모습에 마음이 쏠려 아픔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맨몸이 드러나니 외과 수술 흔적이 두드러져 보인다. 빈 몸통 속을 시멘트로 메웠다. 관절이 뒤틀렸고, 축 늘어진 팔은 각각 너덧 쌍의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거저 살아지지 않는 법이겠다. 발치를 덮은 수북한 낙엽이 나무를 토닥인다.
나뭇잎들은 하루하루 써낸 일기장이다. 한 권의 책을 엮고도 남을 기록이다. 따뜻한 봄볕의 은혜와 그 덕으로 새싹을 냈을 때의 기쁨. 푸른 잎을 너풀거리며 하늘을 누리던 날의 환희가 쓰였을 것이다. 땡볕으로 잎이 시들고 강풍에 상처 입은 일도 적혔을 것이다. 도시의 매연과 각종 오염을 막아내기 위해 잎 뒤에 두꺼운 큐티클 층을 만드는 비법도 적어 놓았겠다. 충실하고 절절했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대기가 차가워지면 잎에 새긴 생생한 기록을 켜켜이 굳은 몸속 세포에 간직한다. 그리고 공해에 찌든 잎을 닦아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한 해를 열심히 살아낸 자신에게 보내는 위로요 칭찬이다. 마침내 때가 되면 매몰차게 떠나보낸다.
버리는 것은, 거듭나기 위한 각오다. 비워야 새것을 담을 수 있다. 그런데도 나는 얼마나 많은 허접한 물건들을 껴안고 사는가.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는 빈 항아리들, 꽃을 잃은 화분들, 수년째 비어 있는 것들은 짐이 되어 나를 압박한다.
방 두 개를 점거하고 있는 책들은 어떤가. 책장은 이미 포화상태를 이루었다. 설 곳이 없는 책들은 뒷자리의 시야를 막고 포개져 누웠다. 작심하고 골라내다 보면 사연도 있고 미련이 남는다. 이래저래 다시 주저앉힌다. 키보드 하나로 모든 궁금한 것들을 찾아낸다. 전집으로 된 사전도 꺼내 볼 일이 없다. 인연 있는 문인들이 보내주는 작품집이 시나브로 책상 위아래를 잠식한다. 각자 심혈을 기울여 쓴 글들을 한 번 읽고 버릴 수 없다. 작가의 사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는 듯하다. 책은 교양을 쌓고 인식을 넓히는 보석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드물다.
물건만이 아니다. 핸드폰에 이따금 ‘저장 공간 부족’이라는 메시지가 뜬다. 남이 보내준 정보,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언젠가는’을 기다리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잠시 스쳐 간 인연도 구석구석 숨어 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중한 것은 미뤄 두고 의미 없는 일에 허세를 부리는 일도 허다했다. 지킬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지 못하고 모두 끌어안고 있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내게 독이 되는 줄도 모르고 응어리진 감정들을 껴안고 살았다. 나무가 우람하게 버티고 있는 힘은 제 몸의 일부인 잎새조차 다 버릴 수 있는 단호함이다.
늦잎 한 장이 가지 끝에서 대롱거린다. 한겨울에 이곳으로 나를 부른 것이 너구나. 지는 낙엽이 한 권의 명저처럼 마음을 울린다. 툇마루에 앉은 노인들은 이미 그 뜻을 읽었겠구나. 이우는 겨울 해가 등을 떠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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