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한국 현대시인 열전』에서 바라본 1960년대 시 다섯 개의 풍경(상)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미연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조회수88

좋아요0

1.
필자는 최근 우리나라 1960년대와 1970년대 일부를 아우르는 『한국 현대시인 열전』(국학자료원)을 펴냈다. 여기서 다룬 시인은 모두 29명인데 계간 『미네르바』의 기획으로 한 호에 두 시인을 다루었으니 거의 3년이 걸렸다. 문단적 사건이나 에피소드들을 수집하는 등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힘들고 먼 길이었다.
집필하기 시작했을 때 1960년대 활동한 분들이 작고하셨다. 지금은 작고한 분들이 더 늘었다. 정진규, 이성부, 이승훈, 이탄, 조태일, 오탁번, 이가림, 박제천, 김형영, 김지하 등이 작고하셨다. 1960∼70년대 한국 문단의 중심이 되신 분들이다.

 

2.
1960년대 한국 시인들 활동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1960년대 시인들의 개인적인 문단 활동에서 그 양상이나 문학적 성향이 비슷한 특징을 가진 시인들을 하나의 계열로 묶었다. 다섯 가지 계열로 분류해 본다. 첫째 등단작의 특징상으로 본 경우, 둘째 대표적 두 동인회의 상대적 활동, 셋째 특수 소재에 대한 집중적 탐구의 경우, 넷째 문학의 저항성 등 세계적 시선을 모은 경우, 다섯째 이론 학문과 시의 일체성 등으로 구분하였다.

 

2-1. 등단작의 특징상으로 본 경우
1960년대 출신들의 등단 모지(母誌)는 신문사 신춘문예나 월간 문예지가 『現代文學』이 중심이고 그 밖에는 정부(공보부)가 공모하는 ‘공보부 신인예술상’(문학, 미술, 음악, 국악, 무용, 연극 등)에서 문학 분야(시)가 해당이 된다.
서울에 있는 신문사의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시인들은 정진규, 이성부, 박이도, 이수익, 이탄, 조태일, 강희근, 문효치, 오탁번, 이가림, 강인한 등이다. 그중에서 개성이 있는 시편들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 필자가 바라보기에는 이성부의 1967년도 동아일보 당선작 「우리들의 糧食」을 들 수 있다. 이성부의 경우 등단 시기는 약간 다르다. 19세 때 19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이 되고 이어 20∼21세 때에 월간 『현대문학』에서 1∼3회 추천을 받는 시기를 지나 제대 후 대학 복학을 앞두고 1967년 동아일보에 느닷없이 또 한 번의 신춘문예를 「우리들의 糧食」으로 당선했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당선 때 이름은 한수현이라는 가명을 썼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아를 만지면서/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거기 모인 구릿빛 건강의 힘을 쌓아 둔다/ 톱날에 잘리는 베니어의 섬세,/ 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한다 잘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을 몰아쥐고/ 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해머 소리, 자갈밭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 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어 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 거기엔 입, 입술이 살아 있고 천재가 살아 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노오란 나의 음주,/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지껄이며/ 나도 또한 제왕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내/ 문 밖에 나와 서 있는 그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 어딘가에 저녁이 죽어 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리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을 내놓는 김치 깎두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 베니아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 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물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세요.(한수현, 「우리들의 糧食」 전문)

 

인용시는 58행 장시다.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다. 하긴 같은 해 중앙일보 당선작은 70행이 넘어섰던 기억이 난다. 그해는 이상하게도 길이로 승부를 걸겠다는 풍조였을까? 인용시는 나중에 알려졌지만 1962년 『현대문학』 추천 시인 이성부가 필명으로 응모했다. 특히 이 시는 지식인 노동자를 화자로 하는 이른바 지식인 노동시라 할 만하다. 이 작품을 신춘 당선작이라는 이벤트성 화제로만 읽지 않고 그냥 등단 5년 차 신인의 의욕적인 시로 읽는다 해도 그 질량에서 대단하다 할 것이다. 아직 문단에 노동시가 일반화되지 않은 시절 불쑥 시대 한복판에다 내던지고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지식인 노동자의 하루 가운데 퇴근부터 중간 생활 거점을 거쳐 아내가 있는 집까지 당도하는 과정과 그 어우름의 생활과 정서와 일상이 녹아 있는 작품이다, 제목도 ‘우리들의 양식’이라 하여 노동의 하루가 보다 확충된 의미로 활달한 전개를 보여 준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귀가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와” “톱날에 잘리는 베니아의 섬세, 쾌락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 들어가는 노을녘의 기교들” “잘한다 잘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을 몰아쥐고/ 빛나는 구두의 위대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이런 구절들이 이어지면서 지식인, 구어체, 노동 현장의 상황들, 감독관의 거드름 피우기, 노동의 힘, 지식을 경멸하는 분위기 등등 시적 구절로는 적합하지 못한 서사적 줄거리가 권위 시대의 문법들을 일깨우고 있다. 오버랩 되는 부분, 리얼한 어눌함, 건너뛰기 같은 문체의 신선도와 무의식적인 흐름, 새로운 시적 양식 따위가 이성부의 창조적 시법이라 할 것이다.

 

한편 정부(공보부)에서는 신진 예술인의 진작을 위해 신인예술상 제도를 마련했는데 문학(시) 분야에서도 괄목할 수상자를 탄생시켰다. 여기 수상자로는 이근배, 이수익, 강희근 등이 배출되어 성공적인 결실이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이 상의 경우 발표 지면이 따로 없다는 것이 약점이었다. 강희근의 경우 1966년 6월 제5회 신인예술상 문학 부 특상(종합 최고상, 시부 수석상)을 받았는데 발표는 월간 『현대문학』(당해년 8월호)에 발표하여 수상의 존재감을 높였다. 강희근의 수상작은 「演技 및 日記」였다.
강희근은 이에 1년 앞서 19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 서정시 「산에 가서」로 당선되어 순서정의 서정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 작품에 대한 심사평(서정주, 박남수)은 “순국어에 의한 능숙한 구사력”이라 하여 이제까지 주어진 당선작들이 시대의식이나 분단 휴전선에 의한 현실감이 대종을 이루었음에 비해 고유한 국어 의식에서 비롯된 강희근의 당선작이 상대적으로 돋보였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서울신문에 게재된 전봉건의 글 「자의식과 정주류」는 강희근 시의 국어 의식에 대한 비판적 의도로 비춰지고 강희근 신인에게는 신인 시의 비확장성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읽혀졌다. 1년 후 강희근은 당선작으로서는 좀체 보기 힘든 실험파 슈르풍의 시를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공모하여 시부 수석상에 이어 5개 장르 통합 심사에서 최고상 ‘특상’을 거머쥐었다. 작품의 길이에서도 시 질량의 무게를 가늠할 수가 있었다. 제목에 있어서도 거의 쓰이지 않던 체언과 체언 사이에 드는 접속부사 ‘및’을 쓴 것부터가 이채로운 것이었다. 시 전체를 보기로 하자.

 

1./ 부드런 내의 속에, 꿰맨 내의의/ 벌룸한 구멍 속에/ 갖다 놓을 기쁨의, 내 힘대로의 기쁨의/ 내음새.// 풀어놓은 물감에 떠밀린 발치의 소리/ 소리의 서너 겹 언저리/ 스콜이라도 남국(南國)의/ 일년 수 겨드랑이에 부딪는 스콜의/ 촉수(觸手).// 2./ 살아내는 나날의 자미(滋味)/ 수초(水草) 잠긴 바다의/ 물유리에 비치인 내 헤픈/ 시력(視力) 안,/ 엉뎅인 굽이로 들앉아 아물댄다/ 찔리는 눈까풀의 자미(滋味), 질근질근한/ 자미여.// 가수나의 배꼽 잘 만진 손톱의/ 기럭지,/ 들이민 온갖 먼지의 표피(表皮) 안/ 붉힌 핏발의 살이여.// 3./ 헝클어진 머리에 쏟히는/ 섬칫 내리앉는 내 일상의 사랑.// 들밭 가으로 도는 나무의 풀이/ 아침의,/ 흥건히 빨아내는 이슬의 성욕(性慾) 속에서/ 무참히 학대해 가는 아침의/ 풀이여 또 연기여.// 4./ 징검다리인 채 별은, 서러움인 채 별은/ 은하의 물굽이에 자물리고/ 또박또박 허공의/ 내 뜨거운 볼의 깊이로 자물리고/ 별은 떠내려간다./ 내 손 밖에서 때론/ 둥실거릴 뿐이다// 참 찰지기는 가수나 또래의 별이/ 밤을 넘어 내 시정(市井)의,/ 또 전문(電文)을 전해 주는 일이다// 5./ 돌 밑의 깔리인/ 물에, 마알간 물에 접힌 얼굴이여/ 내 건져내는 얼굴은/ 그 얼굴 반생(半生)의// 사돈부인으로 치면 살아낸 반생의/ 정조(貞操) 한아름.// 6./ 요일의 한 나절, 굼벵이 기듯/ 한 나절/ 냉수 기침의 할 아범의/ 나이 짧은 할아범.// 슬하엔 나타나라/ 손자의, 꿰입을 내의의 손자여/ 그러나 얻다 놓을 기쁨의 내의인가/ 손자(孫子)여.(강희근, 「演技 및 日記」 전문)

 

인용시는 우선 눈에 띄는 형식상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제목에서 아무도 써 보지 않은 부담스런 부사어 ‘및’을 쓰고 있다. 「연기 및 일기」를 보는 순간 당선자의 기지나 해학적 관점이 돋보인다. 이 제목으로 당선이 되자 서울 시내 주요 문화부 기자들이 제맘대로 기사를 썼다는 것 아닌가. “제5회 공보부 신인예술상에 강희근의 시 「연기와 일기」가 최고 특상으로 뽑혔다”처럼 ‘연기 및 일기’는 기자의 받아적기 오류로 보는 데가 대부분이고 K신문 문화부 기자 하나만 살아남아 ‘연기 및 일기’를 바르게 기사를 썼다.
대신 이 무렵 공모 제도를 고수한 주관처에는 「연기 및 일기」를 따라서 ‘바다 및 수평선’ ‘미녀 및 티’ ‘강사 및 교수’ 등 체언 사이 부사어 ‘및’ 활용 시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는 비공식 언급들이 있었다. 그리고 사상계 출신 선배 시인은 당선자를 보고 “우리는 이자 짐 싸서 방 빼야 하겠어”라는 변용형 축하말 건네기를 예사롭게 했다는 강 시인의 추억담이 실감되기도 했다.

 

강희근의 「연기 및 일기」는 우선 의미를 따라가는 시가 아니다. 관념이 있고 줄거리가 있는 시가 아니다. 이미지는 대목마다 있지만 의미에 봉사하지 않는다. 의미는 슈르레알리즘에서처럼 나타나지 않고 이미지는 그 자체로 제시되고 있다. 이를 불연속적 무선 선상의 이미지라 말한다. 그리고 감각적이다. 성애감이 본능적 터치로 유발되고 돌출한다.
시는 화사한 본능의 노출로 거리낌이 없는 성애감이 질퍽거리고 새디즘적 마조키즘적 뒤틀리는 이미지 행진이 지속된다. 벌룸한 구멍, 굽이로 들앉는 엉뎅이, 가수나의 배꼽, 이슬의 성욕, 눈까풀의 자미, 붉힌 핏발의 살, 헝클어진 머리, 자물리고, 뜨거운 볼의 깊이, 전문을 전해 주는, 돌 밑에 깔리인 물, 반생의 정조 한아름, 굼뱅이 기듯 등이 프로이드의 무의식이나 본능적 생체 에너지에 접목되어 있다.
강희근은 이런 에너지의 뱉어냄이 명징한 의식이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냥 떠오르는 사물 따위에서 동반해 오는 것들에게 용해해 주는 수준이다.
강희근 시인의 술회에 의하면 시를 쓰는 그날, 낮에 도서관에서 동아일보의 1966년도 신인예술상 공모 광고를 접하고는 아무 말 없이 문화동 하숙집으로 가서 저녁을 물리고 책상에 블문곡직 앉았다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에 대한 정리된 스케줄 없이 ‘책상, 원고지, 볼펜’ 삼자와 동행하는 데까지만 합의요, 의식이었다는 것이다. 강 시인의 시론적 참고는 이어진다.
“프로이트도 서정주 시론 시간, 학내 문학 써클에서의 ‘다다’나 합평회 수준의 설익은 이해에 준하는 것일 뿐, 그러니까 강희근 자체가 프로이트요 준비된 정신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맨몸 강희근은 맨몸의 연기자이고, 그것을 받아 적는 시 쓰기(일기)가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이면 시 「演技 및 日記」는 1950년대 조향이 있고 1960년대 중반 강희근을 그 후속에 세울 수 있게 한다. 물론 조향은 후반기 멤버들이 우군이고 강희근의 경우 현대시의 이승훈 정도가 우군의 편대를 이룬다고 볼 수는 있으나 강 시인의 대학 내 <다다> 동인들(박제천, 선원빈)이 잠자리 수준의 허약한 우군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신인예술상 시부 심사에서 강희근의 본능적 생체 에너지를 발견한 시인은 광주 출신의 김현승 시인이었다. 김 시인은 1930년대 등단 초기에는 모더니즘, 이미지즘에 경도된 바가 있지만 조향이나 강희근식의 가열찬 실험이나 무선 선상의 불규칙적인 이미지를 선호했던 시인은 아니었었다. 그런데 그는 왜 강희근의 무의식이나 성애적 본능 돌출의 진보적 지향의 편에 서 주었던 것일까? 그것은 김 시인 자신이 실험으로 끌고 가 보지 못한 미개척 세계에 대한 향수요, 그 가능성이 아직 한국 시단에 필요한 여지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 아닌가.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김현승 시인은 강 시인이 한 해 전에 순수 서정시로 서울신문에 당선된 자임을 알고는 그 두 세계의 간극을 왔다 갔다 한 점에 주목을 했고 아울러 그 바탕에서 「연기 및 일기」를 쓴 강희근은 보기 드문 시단의 인재라고 말했다 한다.

 

2-2. 1960년대 동인 활동의 선두주자 이승훈과 조태일의 경우
1960년대 한국시단의 젊은 시인들 기류는 신춘문예 등단자들의 동인 체인 <신춘시>와 『현대문학』 출신 문인들이 주축인 <현대시>가 대립하는 가운데 생겨난 기류이다.
<현대시>의 대표주자는 이승훈, <신춘시>의 대표주자는 조태일 시인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훈은 인간 내면의 조명에 시각이 닿고 조태일은 시대나 역사에 대한 저항의식이 그 일관된 시적 모티브가 되었다. 이러한 내면은 모더니즘을 얼굴로 하는 세계이고 시대나 역사는 현실 정치에 저항하며 통일지향으로 세계를 확대해 가는 기류를 보여준다. 당시 현대시 멤버로는 정진규, 이유경, 이수익, 박의상, 이건청, 오세영, 오탁번, 마종하 등이 참여했다.
이승훈의 경우 모더니즘의 이론과 실제에 뚜렷한 컬러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시세계가 어떻게 흐르는지, 그 과정과 도달점은 어디까지 가는 것인지 대표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승훈에 대해 검토해 보자.

 

1) 이승훈의 자술 성장기와 카프카
이승훈은 고3이 되자 아버지의 병이 늘 과제였으므로 의대 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극도로 불화하고 아버지는 형언할 수 없는 자기포기와 인간 부재가 주는 불안 엄습으로 이승훈은 가출한다. 그러나 의대 입시가 가출하고 싶을 때 가출한 학생에게 돌아올 수 있는 요행이 아니었다.
그는 영월도립병원으로 돌아와 있던 아버지 그늘 아래 유배의 땅 영월에서 재수의 체험을 하고 있었다. 이때 읽은 독서체험이 스스로의 시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음을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카프카의 「城」과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빠져 들었다. 여기 이르러 그는 “늦은 저녁에야 K는 눈 덮인 마을에 도착한다. 「성」은 이렇게 시작된다. 고독이 아니라 절망에 대하여, 절망한 인간의 내면에 대하여, 불안에 대하여, 창백하고 우울한 삶에 대하여, 가을 저녁 강원도 산골에 내리던 눈에 대하여, 남몰래 시들어 가던 삶에 대하여 카프카는 무슨 말을 했던가?”
카프카 문학은 인간의 부조리, 존재의 불안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그것을 흔히 피투성(被投性) 곧 내던져진 존재로 설명이 된다. 이로써 카프카는 싸르트르와 카뮈에 의해 실존주의 선구자로 이해되었다.

 

2) 이승훈이 만난 시론적 근거들
앞에서 말한 『이승훈의 문학 탐색』에 나오는 박찬일과 이승훈의 대담 ‘자아 찾기의 긴 여정’을 보면 이승훈의 시론적 근거들이 순서대로 매우 밀도 있게 전개된다.
첫째, 미적 모더니즘: 20대부터 내면의 세계를 탐사하다. 바깥 세계보다 내면 세계에 집착하고 그것은 성장 배경에도 원인이 있다. 이른바 비대상의 시다. 관념과의 싸움이 아니라 심리(나)와의 싸움이다.
둘째, 언어가 시를 쓴다: 라깡을 만나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 이미 있었다. 나는 내가 아니라 타자이다. 결국 무의식이 타자이다. 메타시, 시론시, 텍스트 자체가 상호텍스트성이다. 데리다 등의 출현.
셋째, 올라가기 : 나는 계속 올라가고 있다. 모더니즘, 후기 모더니즘, 해체주의를 거쳐 불교의 선사상(禪思想)까지 왔다. 일관된 목표가 자아 찾기이다. 데리다의 차연 개념과 불교의 선공 사상은 분명 서로가 관계가 있다. 데리다는 차이와 연기만 있다는 것이고 자아는 없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흔적만 있다는 것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원리가 무엇인가. 자아 없음과 무아이다. 『금강경』에서 보살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을 버려야 한다는 부처님 말씀이 나온다. 특히 아상을 버리라는 말이 충격적이다. 자아 탐구나 자아 소멸이니 하는 것이 결국은 아상에 대한 집착이기 때문이다. 그후 무아(無我), 무주(無住), 불이(不二), 공(空) 등이 내 사유를 지배하게 되었다. 자아 탐구에서 자아 소멸을 거쳐 자아 불이로 나아간 것이다.
넷째, 독자의 탄생과 저자의 죽음: 이 부분은 이승훈의 이야기에 유관한 바르트(1915-1980)의 텍스트 이론이다. 바르트는 작품의 기원에 저자가 있고 그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이야기나 영상, 그림, 음악을 매개로 독자나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라는 단선적인 도식을 부정했다. 카피라이터라는 개념은 문화적 생산물이 단일한 생산자를 가진다는 전제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저자란 어떤 것을 0에서부터 창조한 사람이다.
바르트는 근대 비평의 이런 원칙을 밀어낸다. 그는 텍스트가 생성하는 과정에 ‘기원-초기 조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르트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작품이라는 말을 피하고 텍스트라는 말을 썼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들이 어느새 텍스처(직물)가 직조된다. 이 작품,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한 마리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저자의 죽음이 이루어진다.

 

3) 시인은 이론가이지만 시인이다
이승훈, 한국의 1960년대 출신 대표적인 모더니스트 시인이다. 그의 유년과 청년은 보편적 의미나 가치를 예거할 수 있다. 그로부터 출발하는 시인은 카프카, 이상 등으로 잎메기꾼을 삼는 할 말이 있고 할 말의 시를 쓸 밖에 없는, 달리 말하면 시와 시론의 양수레바퀴를 굴리면서 가는 그만의 모더니즘적 궤적을 지닌 시인이었다. 그의 모더니즘은 스스로 말하여 실존주의, 후기 모더니즘, 후기 구조주의, 불교의 선사상 등으로 계보를 잇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자아 탐구, 자아 소멸, 자아 불이라는 지향의 끈을 이어 놓은 셈이다. 그는 이론적 물굽이에서 학자적 탐구의 범주를 드나들었는데 소쉬르 프로이트, 바르트, 데리다, 라캉 등이 그 언덕이다.
이쯤에서 이승훈은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말한다면 한국시 최고의 이론가일 것이다. 그를 제쳐 놓고 1960년대 한국시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그의 시가 이론들 위에서 이론을 끌고 가는 형국일 때가 있고 혹시는 그 밑에서 눌려 있을 때가 있지 않은가 한다. 둘째 조태일에 대해 검토해 보자.

 

4) 조태일, 한 시인의 탄생과 주변
조태일 시인은 처음부터 독재 또는 유신 독재 저항과 독재가 이루어지는 범위인 국토를 지켜 내기 위한 회복의 정신을 추구한 시인이다. 그에게 영향을 준 스승이 있는데 김광섭(경희대 교수)이나 김현승(광주 출신, 숭실대 교수) 시인 정도가 아닐까 싶다. 조태일은 학위 논문으로 「김현승 시 연구」를 써서 김현승 시의 심층에 파고들었다.
그는 서울 지역의 신문에서 여는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인들이 모여서 만든 동인체 <신춘시>(1963년 창간) 멤버로 활약하면서 시 토양의 외연을 넓혀 나갔다. 신춘시는 지면이 주어지지 않아 당선이 되고도 사라져 버리는 당선자들에게 지면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당시 멤버를 살펴보면 박봉우, 권일송, 김원호, 박열아, 박응석, 신명석, 신세훈, 윤삼하, 장윤우 등 창간 멤버와 그 이후 이근배, 이탄, 강희근, 이가림, 강인한, 윤주형, 김종철, 박정만 등과의 교류 속에서 동인지의 존재감도 넓혀 나갔다.
조태일의 경우 스스로 창간한 계간 시지 『시인』(1969)에서 김지하, 김준태, 양성우 등이 등장함으로써 문단과 당시 사회에 폭풍적 사태 유발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시대를 꿰뚫는 문학 단체 참여와 그 핵심 간부를 통한 강력한 실천 운동이 시적 저항에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7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주도했고, 1987년부터 민족문학작가회의에 참여했다.
이 글의 텍스트는 동인지 『신춘시』(1963-1969)와 시집 『국토』, 『산속에서 꽃속에서』(1991)와 인터넷 자료를 선택하여 최소 자료와 단시간 독해라는 효율적 접근을 시도하고자 했다.

 

5) 첫 무대 『신춘시』에 나타난 「나의 처녀막」과 「식칼론」
조태일은 동인지 『신춘시』에 「나의 처녀막」(1-3) 세 편, 「식칼론」(1-5) 다섯 편 등 총 13편을 실어 그만의 시적 행보를 시작했다. 평론가 염무웅은 시집 『국토』에서 「처녀막」에 이르러 비로소 조태일 씨는 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의 문제를 자기 시의 중심적 주제로 맞아들이고 그 문제와의 싸움에 최대의 정열을 바치게 되었다고 발문을 썼다.

 

오월 내가 누워 있던 잔인한 새벽은/ 침실은 저 가까운 기억의 바다로 가/ 크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하라// 물마른 가지 위/ 마지막 인정처럼 걸려 있는/ 하루가 지루한 학동들의 상학 길에/ 처량하게 처량하게 널려 있는// 나의 당신의 처녀막은/ 혁명으로 파열돼서 부끄러워라/ 부끄러워라 당신의 병사의 시인의 처녀막도/ 혁명으로 파열돼서 정말 원통해라/ 아아 내 작은 한 줌의 자유여 민주여(조태일, 「나의 처녀막 1」부분)

 

“나의 당신의 처녀막은 혁명으로 파열되어 부끄러워라 정말 원통하다”고 외친다. 그것은 어린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에 널려 있는 파열이므로 더 황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처녀막은 순결을 상징한다. 시인은 여기서 찢긴 처녀막이 한 줌의 자유와 민주라고 외친다. 4월 혁명으로 숭고했던 그 민주와 자유가 혁명의 아침으로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 아닌가.
조태일의 시는 제목에서 상징적 비유로 쓰인 대신 “혁명으로 파열된”이라는 비유의 직접성으로 그 순수한 자유와 민주가 독재 정권으로 짓밟히고 오염되었음을 분개하고 있다.
조태일 시인의 두 번째 연작시 「식칼론」 5편 역시 『신춘시』에 실렸다. 연작이란 할 말이 많다는 것이다. 조 시인은 하고 싶은 말을 작품으로 다 토해내고 있다.

 

창틈으로 당당히 걸어오는/ 햇빛으로 달구었어/ 가장 타당한 말씀으로 벼리고요/ (중략)/ 흐르는 피 앞에서는 묵묵하고/ 숨겨진 영양 앞에서는 날쌔지요/ 비장하는 데 신경을 안 세워도 돼/ 늘 본관의 심장 가까이 있고/ 늘 제군의 심장 가까이 있되/ 밝게만 밝게만 번뜩이면 돼요/ 그의 적은/ 육법전서에 대부분 누워 있고/ 아니요 아니요/ 유형 무형의 전부요(조태일, 「식칼론 1」부분)

 

위 시를 읽으면 햇빛으로 달구고 말씀으로 벼린 식칼은 실제 식칼이 아니다. 흐르는 피 앞에서는 묵묵히 침묵하고 대신 중심 부분에서는 날쌔게 움직이는 요리사의 식칼인 셈이다. 그런데 식칼은 “본관의 심장 가까이 있고/ 제군의 심장 가까이 있는” 것이 식칼이다. 본관과 제군은 군대의 지휘자와 병사들이다. 그러므로 시는 민주와 자유를 빼앗아간 혁명군을 풍자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식칼은 혁명군 반대쪽에 있는 민중의 비유적 표현으로서의 식칼이다. 그 식칼이 쓰여져야 할 대상(적)은 육법전서와 그 이상의 유형 무형에 존재하는 권력이다. 육법전서를 시에서 쓴 시인은 김수영이다. 그러므로 조 시인의 시는 김수영의 참여 시류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6) 혼과 육으로 쓴 시인의 국토시
1970년대는 우리 시단에서 순수 서정시라는 오랜 전통을 깨고 민중의 과감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의 혁명기이다. 많은 시인들 가운데 조태일 시인은 왕성한 시 창작과 실천을 통해 1970년대라는 군부 독재의 칼날을 온몸으로 맞받아 나갔다. 시인의 시적 실천 가운데서도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 「국토」 연작이다.
시집 『국토』에서 「국토 서시」를 붙였다. 국토시를 다 쓰고 난 뒤에 시집을 내면서 붙인 총체성의 시일 것이다.

 

“발바닥이 다 닳아 새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중략)//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일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조태일, 「國土 序詩」 부분)

 

총 5연 중 1연과 5연을 옮겼다. 발바닥이 닳도록 밟아야 할 땅, 삶을 불 지피고 숨결을 보탤 일, 그래서 피와 살결과 뼈까지를 내놓는다는 비장한 각오의 시다. 윤동주 시집 머리말을 쓴 정지용은 동주를 일러 일제에 살은 내놓고 뼈는 가졌다고 가여워했다. 그러나 국토에 헌정하는 혼과 뼈는 실천에 관한 것이므로 경우가 다르다. 무엇은 가지고 무엇은 내놓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헌정일 것이다. 조태일 시인의 시집 『국토』에는 연작 번호가 47번까지 나간다. 그러나 다음 시집 『산속에서 꽃속에서』를 보면 거기도 연작이 지속되어 80번까지 나가지만 일단 여기서는 7번까지만 들여다볼까 한다. 「논개양 국토 6」을 보자.

 

논개양은 내 첫사랑/ 논개양을 만나러 뛰어들었다/ 초겨울 이른 새벽/ 촉석루 밑 모래밭에다/ 윗도리 아랫도리 내의 다 벗어던지고/ 내 첫사랑 논개양을 만나러/ 南江에 뛰어들었다// 논개양은 탈없이 열렬했다/ 내가 입맞춘 금가락지로 두 손을 엮어/ 왜장을 부둥켜 안은 채/ 싸움도 끝나지 않고 숨결도 가빴다// 잘한다 잘한다 남강이 쪼개지도록 외치며/ 논개양의 혼속을 헤엄쳐 다니는데/ 물고기란 놈이 내 발가벗은 몸을 살짝 건드렸다/ 아마 그만 나가 달라는 논개양의 전갈인가 보다/ 내 초겨울 감기를 걱정했나 보다// 첫사랑 논개양을 그렇게 만나고/ 뛰어나왔다/ 논개양을 간신히 만나고 뛰어나왔다(조태일, 「논개양 국토 6」 전문)

 

시 전문이다. 초겨울 어느 날 진주 개천예술제 백일장 심사위원으로 초대되어 가서 그 전날 의암을 바라보는 모래밭에서 소주를 마시던 중 갑자기 남강에 뛰어들어 논개를 만나고 나온 것이다. 임진왜란의 2차 계사년 진주성 전투에서 7만 민관군이 순국하자 진주 기생 논개는 남강 의암에 올라가 춤을 추며 왜장을 유인하여 물속에 함께 뛰어든 것이다. 그 순국의 애국적 거사에 대해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기록이 전해 오는데 조태일 시인은 기회를 갖게 되자 논개의 당시 결행처럼 옷을 벗어 던진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시인이 379년 전에 죽은 애국한 여인을 처녀 논개로 호출하여 논개양으로 부르는 것을 보고 시인의 천진성과 진정성에 감복하게 된다. 시인은 이로써 선배 시인 만해(한용운)나 수주(변영로)나 파성(설창수)의 대열에 섰다. 아니면 더 오랜 세월로 되돌아가 청년 정약용의 나라 근심에 합류한 것이다. 초겨울 강물에 아무나 뛰어들지 않는다. 그는 뛰어들었다. 시인은 아직도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있다고 한다. 역사는 흘러갔지만 시인의 의식은 역사의식 속에 있다. 지나감은 없어진 현재가 아니라 현현되는 현재라는 것이다.
시인은 고인이 되었지만 시를 통해 논개의 이름 안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 자리가 국토이고 그 살아 있음이 국토 정신이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조태일이 왜 국토를 쓰고 식칼을 쓰고 처녀막을 썼는지 그의 시 정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한다.

 

2-3. 주제의 집중화로 세계를 드러내 보인 두 경우, 문효치와 이건청
시에서 주제의 집중으로 시인의 시세계가 드러난다고 볼 때 이를 실현한 시인이 눈에 띈다. 문효치와 이건청이 그들이다. 문효치의 경우를 먼저 접해 보기로 하자.

 

1) 사회적 죽음과 시적 부활
1971년 공주에서 무령왕릉이 빌견되고 서울에서 그 유품 전시회가 열려 문효치 시인이 관람한다. 이를 계기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이어지는 시 창작이 시작된다. 이상의 약전은 역사적 사건에 의해 고난을 겪은 문효치의 사회적 죽음과 시적 부활의 여정이다. 활발한 문효치의 시작 활동은, 그에게서 결핍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상 심리의 발로가 아닌가 추측된다. 6·25라는 전쟁은 그에게서 하늘인 아버지의 희망을 빼앗아 갔다.

 

사람아,/ 참 오랫동안 너를 잊었었구나// 차마 끄슬린 도회/ 또는 포장(布帳)친 촌읍의 장거리에서/ 바쁘고 피곤하기만 한// 무명의 배우처럼/ 슬플 줄도 기쁠 줄도 몰랐었구나// 소음의 홍수 속에서/ 떠밀려 나리는 낡은 목선(木船)처럼/ 잃어버리고 만 너였구나// 텅 빈 육신의 한 구석/ 저 혼자 텅텅 내리치는 가슴의 고동에/ 소스라쳐 깨어나는/ 사랑아, 너를 잊고 있었구나// 게릴라전이 지나간/ 요새(要塞)의 골짜기처럼/ 바람 부는 저 건너 언덕엔/ 피아(彼我)의 창백한 의지가 화장되는데// 손을 다오/ 부드럽기만 한 살갗/ 참 오랫동안 너를 잊었었구나(문효치, 「煙氣 속에서 서」 전문)

 

인용시는 제1시집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한 시집의 표제는 그 시집의 세계를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煙氣 속에 서서」는 시인이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을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존재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연기가 자욱한 것이다. 연기는 불에 탈 때 나오는 기체이다. 그렇다면 그 불의 정체는 무엇인가. 시인이 존재하는 공간적 배경은 한반도이고 시간적 배경은 1966년에서 1976년이다. 이때는 이미 전쟁이 휴전되고 23년이 지난 시인이 33살이 되던 시기였다. 그렇다면 연기를 만들어낸 불의 정체는 무엇일까.
전쟁은 시인에게서 아버지를 빼앗아 갔다. 그의 하늘은 어둡고 캄캄하다. 하늘 같은 존재인 아버지가 사라지고, 마음에 심화가 치밀어 오른 것이다. 심화가 만들어낸 연기는 물리적 공간이 아닌 심리적 공간을 가득 채운다. 그의 심리적 공간인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이 울화로 가득한 것이다, 그래서 시의 첫 연이 “사랑아/ 참 오랫동안 너를 잊었었구나”가 된 것이다. 이 「연기 속에 서서」는 피난 때 열차 지붕 위에서 만난 터널의 체험이 그의 의식 속에 각인된 아픔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문효치는 “1·4 후퇴 때에는 열차의 지붕 위에 피난을 했었다. …터널을 만날 때마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빌었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앓고 있다// 로마의 폭군/ 그의 미친 하루의 祝祭를 위해 기르던/ 독한 맹수의 우리처럼/ 고독이 포효하는 창고에만 갇혀 있다// (중략)// 그대 한아름 안고 돌아오는 꽃밭/ 잎잎에 뚜걱 뚜걱 진땀을 흘리며/ 꽃은 잔인한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다(문효치, 「病中 1」)

 

문효치의 병은 “어디가 아픈지는 모르지만/ 하여간 나는 앓고 있다”는 병이다. 이로 보아 문효치의 병은 육신의 병이 아니고 마음의 병이다. 사실 육신의 병보다 어디가 아픈지 모르는 병이 더 무섭다. 육신의 어느 부위가 아프면 외과적 수술이나 내과적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스스로 고쳐야 한다. 이 마음의 병은 문효치가 시인으로 등단하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ROTC 장교로 임관해야 하는데 연좌제 때문에 부당하게 탈락되었다는 사실의 충격으로 시작되었다. 외적인 충격에 의해 그는 “로마의 폭군/ 그의 하루의 축제를 위해 기르던 독한 맹수의 무리처럼/ 고독이 포효하는 창고에 갇혀 있다”는 마음의 병이 들었다. 대학에서 훈련을 받을 때만 해도 그는 학사 장교의 꿈을 꾸었다.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도 하였으나 시인 장교로서의 화려한 꿈을 꾸다가 일시에 절망과 좌절의 “고독이 포효하는 창고에 갇혀”버렸다. 시인으로서 겪는 사회적 죽음의 체험이다. 화려한 시인 장교로서의 꿈이 깨지고 “동기생 소대장들이 있는 전방 부대에서 굴욕적인 분대장으로 복무하는” 소외감을 “고독이 포효하는 창고에 갇혀 있다”는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2) 무령왕과의 조우와 생명의 상승
연기 속에서 헤매던 문효치가 백제의 유물과 만난 것은 동병상련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백제의 유물은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이며 무생물이다. 그러나 시인에게 이 사물은 자연의 사물과는 달리 영혼이 있는 사물이다. 이 유물들은 무령왕의 무덤 속에 천오백여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무령왕의 육신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영혼은 유물들과 함께 부활한 것이라고 문효치의 시적 상상력은 인식하고 있다. 즉 부활한 백제의 혼령들과 만난 셈이다.
문효치는 백제 유물들을 만나고 나서 시적 상상력에 불이 붙는다. 그는 “이 무렵을 전후해서 나는 백제 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시를 썼다”고 한다. 이때의 만지작거림은 손으로 한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유물들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 결과 1973년에 「무령왕의 金製冠飾」과 「무령왕의 청동 飾履」를 발표한다. 백제 시 창작이 시작된 것이다. 이로써 문효치의 사회적 죽음에서의 해탈이 미동의 숨결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무명(無明)을 벗기 위한 해(解)와 행(行)의 작업이 비롯되는 것이라는.

 

3) 불교적 사유와 만난 시의 상상력
문효치의 상상력이 금동 미륵 보살을 만나게 되면서 미물의 목숨에 애틋함을 가지게 된다. 백제의 유물들이 무정한 물체가 아니라 신비로운 생명체로 의식이 되면서 자비의 눈이 뜨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허무의 센터멘탈리즘을 넘어서」란 글에서 “내가 틈만 나면 공주 박물관에 송산리 고분에 공산성에 부여의 여기저기에 익산의 미륵사지에 석촌동 방이동 고분에 가서 그들을 껴안고 어루만지는 것은 이런 영감을 하늘로부터 받아들이기 위한 나의 기도이다”라고 했다.

 

저녁나절/ 얕은 안개처럼/ 봉선사에 스며들다가/ 종각 토방에 걸려서 넘어진 김에/ 반가사유상의 흉내로 앉아 있으니/ 청설모 한 마리/ 달빛 한 조각 물고 지나가다가/ 놀란 눈으로/ 물고 가던 달 한 조각/ 내 시선 위에 넌지시 걸어놓고 가더라(문효치, 「봉선사에서」 전문)

 

불교적 사유와 만난 시적 상상력은 시 미학적 이미지 형상화에 치중하게 된다. 물론 그의 시 세계도 한층 심오해진 것이 사실이다. 위의 시에서 “저녁나절/ 얕은 안개처럼/ 봉선사에 스며들다가/ 종각 토방에 걸려서 넘어진 김에/ 반가사유상의 흉내로 앉아 있으니”에서 보듯 그 제목이 「봉선사에서」임에도 염불이나 발원 같은 불교적 용어나 행위가 전혀 없이 오직 시 미학적 이미지 형상화에만 치중해 “얕은 안개처럼/ 봉선사에 스며들다가”에서 보듯 자신을 안개로 비유하여 객관적 사물화의 이미지로 형상화한다. 안개라는 자연의 사물로 비유한 다음에 종각 토방에 걸려 넘어진 김에 반가사유상의 흉내로 앉아 있으니”에서 보듯 안개가 자연스럽게 불가적 사유의 반가사유상으로 변신한다. 그러고도 “청설모 한 마리/ 달빛 한 조각 물고 지나가다가”와 같은 놀라운 시 미학적 이미지의 비감을 이룩한다. 이는 선시(禪詩)의 경지에 방불하다.

 

4) 향수와 귀향, 물소리의 이미지
문효치의 “스스로 죽어가고 있던” 생명 곧 그의 시적 상상력이 무령왕의 유물들을 만난 다음 그의 가슴으로 “날아드는 새” 곧 백제의 예술혼에 의해 “날아오르는 새”가 되어 백제의 옛 땅을 비롯해서 전국을 떠돌다가 마침내 일본에까지 다녀온 과정을 살펴서 그의 시 창작은 생명의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와 원형 회복을 위한 귀향 의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시에 공간적 생명의 고향은 자연이고 시간적 생명의 고향은 유년이라는 사실도 인지할 수 있었다.

 

고무신 코 끝에/ 한 사내의 유년이/ 앉아 있다// 보랏빛 둔덕 위 풋내 스밀 때/ 허기진 몸 속으로/ 피어오르는 어지럼증// 산이 내려앉고/ 바다가 솟구쳐/ 허둥대던 50년이/ 고무신 코 끝에 모여 있다// 현기증 속에서/ 어머니의 목숨 끝자락을 부여잡고/ 그래도 파랑새 날려보내며/ 유년이 앉아 있다.(문효치, 「농악1」 전문)

 

시 제1연의 “고무신 코 끝에/ 한 사내의 유년이/ 앉아 있다”는 향수의 이미지이다. 한 사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1960대가 된 문효치 자신이고 유년은 그의 어릴 적 모습이다. 유년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는 없다. 향수로만 그려볼 뿐이다. 제2연의 “보리밭 둔덕 위/ 풋내 스밀 때/ 허기진 몸 속으로/ 피어오르는 어지럼증”에서 보리밭 둔덕 위와 풋내 스밀 때도 유년의 이미지와 함께 그려지는 향수의 이미지이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고향, 유년, 자연에 대한 향수이다.
제3연의 “산이 내려와 앉고/ 바다가 솟구쳐 허둥대던 50년이/ 고무신 코 끝에 모여 있다”는 고향을 떠나와 한 사내가 되기까지의 행로이다. 그의 행로는 “산이 내려앉고/ 바다가 솟구쳐/ 허둥대던 50년”이었다. 이 50년의 행로가 “고무신 코 끝에 모여 있다”고 한다. 그의 유년은 1960년대의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기였다. 이 어려운 시기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고무신이다. 제9시집 2부 「남내리」에는 「농악」 연작시 4편이 있는데 이들은 다 고무신 이미지로 시작한다. 「농악2」는 “고무신 코 끝에서/ 뻐꾸기 울음소리가 흘러내린다”이고 「농악3」은 “고무신 코 끝이/ 눈물로 번쩍인다”이며 「농악4」는 “고무신 코 끝에서/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이다. 그리고 농악이 고무신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시의 이미지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농악 자체가 농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고 고무신은 가난하고 헐벗은 1960년대를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추적해 보면 그때 날려보낸 파랑새의 날갯짓이 오늘의 문효치를 있게 한 힘이다. 이 힘의 원천은 보리밭 둔덕 위 풋내로 상징이 된 자연이다.

 

3. 마무리
이어서 문효치는 생명 존중의 마지막 자리까지 탐색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과정을 정리하면 아버지의 월북이 문제가 되어 장교 임관에서 탈락하고 하사로 입대하여 동기생 소대장 밑에서 분대장을 지냈던 그 억울함과 분통과 박탈감 등이 그의 심리적 내면을 죽음 이상의 세계로 몰아갔던 것이리라. 거기다 제대할 때까지 군수사 기관의 감시를 받았다는 것이니 스스로를 사회적 죽음으로 표현한 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던 실제 상황 그 이상이었으리라. 그러나 문효치는 1971년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만나면서 백제 시인으로서 시적 생명이 부활하게 된다. 백제 시인 문효치의 상상력이 금동 미륵 보살 반가사유상의 눈길과 만난 다음부터는, 저 미물의 목숨, 목숨의 애틋함에까지도 닿아 있는 자비에 젖어갔다. 이를 가리켜 불교적 사유와 만나는 시적 상상력의 개가에 이른 것이다. 그는 이제 병명이 없는 무병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밖으로는 지워졌던 생활의 기력을 되찾아낸 것이었다.
이쯤에서 필자는 백제의 영혼적 불멸을 붙들고 일어선 이후 문효치의 시대 역사에 대한 후속 태도나 지향에 대해 어떤 쪽으로 후원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아버지의 길로 갈 것인가, 지금껏 살아온 대로 아버지에 반하는 현재의 삶에 머물러 살 것인가에 관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 그의 칠순 기념 시 전집 출판 기념회에서 친구 강희근이 「저자의 인간과 문학」에서 이야기한 내용을 참고로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가 이 자리 계시는 고은 선생처럼 통일 지향의 시를 쓸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지금 이대로 한국적 서정과 그 순수의 마당에 일몰을 같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무도 나서서 어떻게 하라, 이것이 옳다, 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정치적 지향은 그의 실존적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지 한 순간의 태도나 심정적 판단 사항이 아닌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