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오카리나, 새는 울지 않는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희규(광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조회수15

좋아요0

등장인물_ 정순(여, 55, 민박집 주인, 태봉 처)|태봉(남, 59, 정순의 남편, 실어증)|유미(여, 28, 상철의 딸, 동준의 여친)|동준(남, 30, 골프장 주인 아들, 유미의 남친)|상철(남, 35, 살아 있다면 59세, 회상 속 인물, 유미의 아버지)|사내(남, 40, 정체 불명의 사내, 회상 속에 등장)
때_ 현대, 큰 사건 이후 20년쯤 지난 어느 5월 초순쯤.
곳_ 댐 위의 언덕에 있는 민박집.
무대_ 외딴집. 호수의 풍광이 좋아 관광객이 심심치 않게 찾기도 하지만, 뒷산의 골프장 손님들에게 시골 맛집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기도 하다. 무대는 약간 왼쪽에 치우쳐 있는 낡은 기와집 한 채, 오른쪽에 세로로 지은 행랑채, 그리고 왼편에 평상이 하나. 행랑채는 민박용으로 사용되고 있다.

 

1. 아침 안개
무대가 열리기 전부터 휘파람새 소리 들린다. 멧비둘기의 구구 소리도 객석까지 채운다. 무대가 밝아지면서 드러나는 민박집. 안개 가득하다. 흐린 안개 사이를 휘저으며 그물을 챙긴 태봉이가 서둘러 나선다. 그를 배웅해 주고 돌아서며 하품하는 정순. 기지개를 켜고 마당을 쓴다. 허리를 편다. 휘파람새 소리 커진다. 안개가 걷혀 간다.

 

정순     (혼잣말로) 오늘도 날씨는 좋겄네. 요런 안개먼 낮은 쩡쩡할 텐디. (휘파람새 소리를 흉내 내며) 호르르 휘릭. (멧비둘기 소리) 구구 구구. (골프공 툭 마당으로 떨어진다.) 오메, 또 공이? 안개 끼먼 공도 갈 길을 잃어부러이. 오늘은 손님이 많을랑가? (공을 마루의 바구니에 넣고, 마루와 평상까지 닦고서야 앉는다.) 봄은 좋은디, 으쩐지 5월은 맴이 좀 그려…. 안개가 걷혀 불먼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어이. (풍광을 훑어보며) 산수유, 매화, 벚꽃 다 져불고 나먼 싱숭싱숭허 제이. 붕어찜을 을마나 해놔야 쓰까…. (부엌으로 들어간다.)

 

유미가 얼굴을 내밀듯 보다가 마당으로 들어선다.

 

유미     여보세요? …계세요? 사람이 안 사나? 아니, 사는 집이잖아. (차분히 집 안을 둘러보더니) 참 아늑하고 깔끔하다아. 어머? 호수가 바로 앞이야!
정순     (나오며) 아적 아침인디, 뭔 손님이다요?
유미     아, 안녕하세요?
정순     워메, 처자 혼자당가?
유미     네, 길을 잃었어요.
정순     아이고야, 어째야 쓰까이. 요 위 리조트에 온 손님인갑그만.
유미     아침 산책길에, 안개가 가득….
정순     웃길을 타야 허는디, 아랫길을 타부렀구만이. 안개가 아주 심혀, 여그는.
유미     이 골프장엔 몇 번 왔었는데도, 여긴 처음이에요.
정순     처음은 늘상이제. 날이 날마다가 첨인께이.
유미     맞아요, 아주머니! (둘러보더니) 경치가 아주 멋져요.
정순     명당이제.
유미     편안한 고향에 왔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순     처자처럼 뜬금없이 왔다가 여그서 자고 가는 사람들도 꽤 되제?
유미     자고 가는 사람이라니요?
정순     민박도 헌께!
유미     여기까지 손님이 와요?
정순     하믄! 붕어찜과 가물치찜은 여가 맛집인디!
유미     (눈을 크게 뜨며) 식사도 돼요?
정순     첨부터 식당이었응께. 처자도 식전이겄구만. 나도 아적인디, 같이 들어불까? 나 먹는 밥에 숟갈 하나 얹으먼 되제.
유미     고마워요. 사장님!
정순     쬐끔만 지달려. 여그 평상에서 묵제? (부엌으로 들어간다.)
유미     네에. (호수를 보며) 숨겨진 비밀 정원 같아. 분위기 참 좋네. 리조트에선 호수가 안 보여. 눈부시네. 바늘 같은 은빛! 일렁거려. 저 걸 윤슬?
정순     (상을 평상에 놓고 다시 들어가며) 까스 켜봐요. 붕어찜 가져올께.

 

유미, 부르스타를 몇 번 작동해 본다. 정순이 냄비를 가져와 부르스타 위에 놓는다.

 

유미     밑반찬이 이리 많아요?
정순     여그가 어디여. 남도잖어.
유미     (반찬을 맛보더니) 정말 맛있어요.
정순     참말로?
유미     이런 맛은 처음이에요.
정순     (앉으며) 후딱 붕어찜을 혔는디. 맛이 날랑가 모르겄네, 섬닷헐 것인디.
유미     (한입 떠먹고) 구우웃!
정순     어제께 잡은 붕어여!
유미     누가…?
정순     우리 집 아자씨가. 이 호수를 관리혀. 허가 내서 물괴기도 잡고.
유미     그럼 어부시겠네요?
정순     농사 짓던 사람이 서툴렀제. 헌디 20년 넘도록 헌께 도사가 다 되었어. 팔자에 없는 이 식당일도 도사!
유미     (웃으며) 도사 집안이네요?

 

맛있게 먹는 식사 중에 휘파람새와 멧비둘기가 우는 소리.

 

유미     새 소리가 부부 같아요.
정순     휘파람새, 산삐둘기. 바깥양반은 산삐둘기가 좋다는디, 나는 휘파람새가 좋아. 아, 고것 땜세 싸울 때가 있당께.
유미     싸워요?
정순     맨날 듣는 소리가 새 소린께.
유미     저는 별이 좋아요. 처녀자리. 아스트라이아.
정순     별 이름도 요상헌 것이 있네이. 여그 밤은 허벌나제. 아, 별이 호수에도 비친다니께 그랴!
유미     그…래요?
정순     별밭이제. 밤에는 새 소리허고 별빛 달빛밖에 없어.
유미     그래요? 호수에 내린 별이라니!
정순     달맨키로 훤하지는 않제. 어른거림시로 쫘아악 호수에 별을 그려부러. 하늘은 빤짝빤짝, 물에는 어른어른, 별밭!
유미     그야말로 환타스틱! 오늘 천문대 그만두고, 여기서 별을 볼까?
정순     날마다 뵈는 것은 아니제. 별은 잔잔헌 날에만 물 우에 떠요.
유미     오늘밤은?
정순     뜨제. 봄이잖어.

 

휘파람새 소리. 유미, 고개를 끄덕이며 호수를 본다.

 

유미     저 휘파람새 소리, 오카리나로 흉내내 볼까요?
정순     오까리나가 뭣인디?
유미     (핸드백에서 꺼내며) 새같이 생긴 악기! (일어서며) 별을 좋아하지만, 심심하면 오카리나를 불어요. 소리가 맑아요.
정순     (혼잣말로) 워메, 저런 것이 우리한테도 있는디…. (불안한 눈빛)

 

유미, 오카리나를 분다. 휘파람 소리를 유사하게 소리 낸다. 잠시 암전.

 

2. 낮에 우는 새
무대가 밝아지면 유미가 마당을 거닐며 통화하고 있다. 행주를 들고 나오는 정순이, 평상을 닦는다.

 

유미     (휴대폰에 귀 대고) 그러니까 일찍 일어났어야지. 나 오늘 실종될 뻔했잖아. 여기? 민박집. 기다리다가 안 오니까 그냥 걸었지. 집이 나오는 거야. …먹었어. 쥔 아줌마 솜씨가 끝내주네! …오늘 밤 여기서 민박할까 해.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타니까 여기던데? 지금? 아주 편안해. 그래, 찾아봐. 응.
정순     애인?
유미     글쎄요. 남친…이라고 해야 하나?
정순     남친?
유미     그런 셈이지요.
정순     요샛말은 도대체가 먼 말인 줄 모르겄어이. 결혼 약속, 했다는 거제?
유미     그것도 생각하는 사이라고 하면 되나?
정순     모르것당께. 요새 시상은 다 안갯속이여. 그 남친인가는 으떤 사람?
유미     …….
정순     안 혀도 괜찮혀. 나가 주책이여! 처자가 요리 이쁜께, 훤칠허겄제?
유미     …잘 살아요. …뭔가가….
정순     건강하고 심성 고우면 되제 뭐. 잘 산당게 되었구만.
동준     (숨바꼭질하듯 깜짝 등장) 자기야!
유미     어머머, 언제 왔어? 아니, 어떻게 온 거야?
동준     아침 산책길이 뻔하지, 이 길은….
유미     자기 숨어서 모른 척하고 전화한 거지?
정순     오메, 신수가 훤한 장부시구만!
동준     안녕하세요.
정순     (둘을 살펴보며) 좋을 때네. 꽃시절.
유미     자기야, 물이 여기까지!
동준     그러네.
정순     시원헌 물 드릴까? (물 한 컵 가져오며) 어디서 함 본 것 같기도 허고이?
동준     여기는 처음입니다. 감사합니다. 찰랑대는 게… 운치가 있네. (정순, 컵을 받아 부엌으로 들어간다.)
유미     그치? 별천지가 따로 없어.
동준     그러네. 음, 좋네. 자기야…. (평상에 앉는다.)
유미     새 소리도 좋아.
동준     (누우며) 우리가 골프장을 물려받으면…, 호텔 지을까?
유미     리조트는 어떡하고?
동준     격이 다른 휴양지. 리조트와 연계한!
유미     그것도 좋겠다!
동준     아버지가 여기까지 사버렸어야 했는데….
유미     그게 맘대로 되나?
동준     사고만 안 나면…, 우리가?
유미     사고? 무슨! (슬픈 표정) 아버지 생각이 나.
동준     지난 일은 잊어. 이제 그런 불안한 생각은 하지 마. 내가 있잖아.
유미     지금도 생사를 모르니, 요즘 나, 괜히 불안한 거 있지?
동준     인정할 건 인정하고, 나만 믿어. 자기 얼굴에 눈물 나지 않게 해 줄게. 응? (키스한다.)
정순     (나오다가) 오메, 그냥 혀, 혀! 나 다시 들어갈랑께.

 

동준과 유미 다정히 평상에 앉는다.

 

유미     고마워. 자기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캄캄해. 아버지도 안 계시지. 그나마 어머니는 지금….
동준     내가 옆에 있어 줄게. 끝까지.
유미     이곳은 아버지가 잠깐 산 곳이라는데, 사고 난 후 어머니는 거의 안 찾으셨어.
동준     오죽하셨으면!
유미     엄마 말이, 원래 이 수곡마을은 너른 들과 시내가 아름다운 곳이었대. 그런데 댐이 들어서면서….
동준     양면이야. 그 덕에 우리는 골프장을 갖게 되었잖아.
유미     동전의 양면. 기쁨과 슬픔,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모두가 양면….

 

잡은 고기를 담은 큰 양동이를 들고, 어깨에 그물을 걸친 태봉이 들어온다.

 

정순     (부엌에서 나오며) 아이고, 오셨소. 욕 봤소야. 괴기를 많이 잡았네?
태봉     (어눌하게) 아, 안, 못 잡….

 

태봉이 동준을 보더니 멈칫하다가 그물을 내동댕이치듯 던지고 돌아선다. 동준이도 느낌이 이상한 듯, 말을 걸려다 그만둔다.

 

유미     왜 저러셔요?
정순     사고 때문이여. 말을 잘 못 혀. 안 허는 건지, 못 허는 건지!
유미     사, 사고요?
정순     지난 세월 말혀 머혀! 지랄 같은 시상….
동준·유미     ……?
정순     느닷없이 밤에 끌려갔다가 석 달 만에 돌아오더니만 저렇게….
유미     누구한테요?
정순     몰러. 좌우지간 험한 시상을 살았어. 한밤에, 자는 사람을. 글고는 말을 잃어부렀어. 뭐라고 전후 사정을 이야글 해줘야 헐 것 아니여? 통 안 혀!
유미     네?
정순     살아온 것만 해도 다행이다 싶제.
유미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큰 병원에 가면?
정순     이이고, 저 양반 고집을? 폴딱폴딱 뛰어분께.
동준     무슨 말 못 할 사정이….
정순     (동준을 한 번 보더니) 참, 아까 처자가 여그서 자고 싶다고 혔는디?
유미     저는 좋아요. 하늘과 호수의 별을 함께 보는 것이….
동준     오늘 밤 저 보석산 천문대 가기로 예약했잖아?
유미     취소하면 되지!
동준     여긴 좀… 어쩐지…?
정순     강요는 안 헐팅께 결정만 해주시요. 저 행랑채, 방은 두 개여.
동준     리조트도?
유미     자기야! 밤에는 하늘과 호수가 별천지래. 으응?
동준     (마지못해 수긍하며) 그래도 좀…. (유미의 눈과 마주치자 이내) 그렇게 하자!
유미     자기 최고야! 그럼, 자기가 내 가방, 자기 가방이랑 챙겨 와, 응?

 

마지못해 나가는 동준을 유미, 배웅해 주러 간다. 토방에 걸터앉아 오카리나를 어설프게 부는 태봉. 유미, 들어오다가 깜짝 놀란다.

 

유미     어머! 아저씨, 오카리나를 부세요?
태봉     모… 불…. (일어서 나가려 한다.)
유미     <고향의 봄>! 같이 불어 볼까요?
태봉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 못….

 

유미가 <고향의 봄>을 능숙하게 분다. 넋을 잃고 보는 태봉과 정순. 태봉이 눈물을 글썽이며 나간다.

 

정순     (혼잣말로) 저 양반이 여글 못 떠난 이유가 이것이여. 물에 잠겨 버리긴 혔지만 자기만은 여글 지켜야겄다는 것이여. 고향 지킴이.

 

유미, <꽃밭에서> 오카리나로 분다.

 

정순     아부지를 참 좋아헌갑네이.
유미     아버지는… 행방불명되셨어요. 아버지 기억은 여덟 살에 끝났어요.
정순     아이고, 워쩐대여!
유미     실종 신고를 내고 수소문했는데도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대요. 어머니는 쓰러졌고요.
정순     그 맴을 으떻게 알 것이여이!
유미     부재자 재산 관리인 신청을 했더니, 뜻밖에 아버지 땅이 많은 거예요. 아버지는 부동산 중개사였대요. 주로 산을 사고 팔고. 엄마는 아빠가 등산을 좋아하신 줄만 알았는데요.
정순     다행이었구마이.
유미     등산도 즐기면서 부동산 중개업을 하신 거죠. 여기는 아버지가 어려서 잠깐 살다가 떠난 추억이 있대요. 여기를 좋아하셨나 봐요. 수몰되기 전에 어머니도 아버지와 함께 몇 번 와 봤다는데. 그런데 알고 보니 여기에 만 평의 땅이 있더래요.
정순     (입을 떡 벌리며) 만 평?
유미     네. 마침 골프장을 개발하던 회사에서 이 땅을 매입하겠다는 거예요. 유산이라 팔 수 없다고 거절하자, 어머니를 회사에 취직시켜 주는 조건으로 땅을 임대해 주기로 했다네요.
정순     엄마가 영리헌 분이신가 보네.
유미     엄마는 살아야 하니까 돈이 필요했고, 회사는 골프장을 건설할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윈윈이 아니겠어요? 덕분에 저는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고요. 그러다가 만난 남자가 이 골프장 사장 아들이에요.
정순     이 골프장? 오메, 우리허고는 별로….
유미     네?
정순     아니, 인연이라고, 인연!
유미     헌데, 왜 이리 불안한지 모르겠어요.
정순     결혼 앞두고는 다 그려.
유미     어머니는 반대셔요. 왜냐고 물어도 대답을 안 하고, 안 된다고 하시는데, 고민이 많아요. 더욱이나 초기 치매 증세가 있다고 정밀 검사를….
정순     그래서 더 그런갑그만.
유미     아버지의 추억이 저 호수 안에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정순     쬐끔이라도 여그서 살았다문 우리가 아는 사람일 수도 있겄는디?
유미     모르실 거예요. 살짝 살았나 봐요. 그런데 (살펴보며) 이 집이 참 편안해요. 꼭 시골 아버지의 집에 온 것 같은 느낌?
정순     나도 처자가 내 딸 맹키로 좋구만.
유미     아까, 아저씨의 오카리나, 어디서 구하신 거래요?
정순     아 거시기, (망설이며) 몹씰 바람이 분 통에….
유미     무슨 말씀?
정순     기, 기냥 물에 떠내려왔대.
유미     오카리나가 어떻게 떠내려 와요?
정순     나도 잘 몰러. 아자씨가 가져온 것이여.
유미     네?
정순     (망설이다가) 안개가 가득 꼈는디, 우리 집 아자씨가 골프장 잔디 깎은 날이었나벼, 아 요 우에 절벽이 있거든, 수몰 전에는 경치가 참 좋은 덴디, 골프장에서 내려다보먼 참말로 좋제!
유미     그런데요?
정순     거그 석벽 끝 우에 한 사람이 서 있더래.
유미     그것과 오카리나가 무슨?
정순     나 말 잘 안 헌디, (주저하다가) 딸 같은께이. 또 오래된 일이고이. 처자가 아부지 이야그꺼정 해줬는디? (뜸을 들이다가) 아긍께, 안개 그 어둑헌 디서….

 

무대를 채우는 짙은 안개, 흐릿한 조명. 오른편에 검정 중절모에 색안경을 쓴 사내가 채찍을 들고 나타난다. 무대 왼쪽 끝엔 상철이 흐릿하게 서 있다.

 

정순     ‘물엇!’ 하는 소리가 들리더래. (사내의 소리, ‘가서 물엇!’) 아, 그러더니 황소만 한 개 네 마리가 사자 맹키로 (네 마리가 달리며 짖는 개 소리, 공포심이 무대를 장악한다.) 그 사람에게 달려가 물어 뜯을라고 헌께 (상철이가 비틀거리며 그만 절벽으로 떨어지며 지르는 비명) 비명 소리가 들리더래. 안개가 캄캄혀서 자세히는 안 보였는디….
유미     맙소사!
정순     우리 집 양반이 놀래갖고 달려가 봤는디… (태봉이 숨차게 달려가는 흐릿한 모습) 흔적도 없더래. 개 끌고 온 그 사람은 안개 속으로 쓰윽 사라져 불고. 오메, 이것이 먼 일이다냐 싶어서, 요 쩌그 석벽 밑으로 가 봤는디도… 아무 흔적이 없더래여. 귀신이 곡을 헐 일이여이.

 

무대에 안개 사라진다. 조명이 밝아진다.

 

유미     그래서요?
정순     (이마에 땀을 닦으며) 회사에다가 사고 난 것 같다고 말혀도 신통치도 않제. 혀서 내가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했는디, 한 이틀 지났능가 모르겄네. 아, 한밤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더니. …조용히 끌고 안 가부요?
유미     어찌 그런 일이?
정순     경찰서도 모른다고 허제, 파출소도 모른다고 허제. 처자 어메 맹키로 요리조리 싹 다녀봐도 다 모른다는 거여. 글다가, 거시기, 애 아부지한테서 전화가 오더라고. 뭐냐, (태봉의 목소리로) 집에서 죄용히 있어야 나가 나갈 수 있다.
유미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정순     그제서야 이 멍충이가 눈치를 챘제. 요건 깡패들 짓이 아니구나.
유미     그럼?
정순     몹쓸 시상에, 그 시절엔 무서운 사람들이 있었제. 입을 딱 다물어부렀제. 대처나 석 달이나 된께 피골이 상접해져갖고 왔는디, 산송장이여! 어뜩게 혀부렀는지 (가슴을 뜯으며) 이 양반이 말을 못 혀!
유미     …….
정순     나가 넉 달을 보찰했제. 보약도 다 해줬어. 시나브로 기운을 타더만.
유미     (곰곰 생각하며) …….
정순     그물로 괴기 잡는디… 아 글씨, 그물에 웬 가방이 뜬금없이 걸려 나온 거여. 그 속에서 저 오까리난가 뭔가가 나온 거여.
유미     뭐라구요? 가만, 가방에 오카리나가?
정순     잉, 그렇당께!
유미     그것, 사실이지요?
정순     (갑자기 불안해하며) 어이? 뭣이 잘, 잘못됐당가?
유미     제가 볼 수 있을까요?
정순     애아부지가 절대로 말허먼 안 된다고, 나한테 다짐을 받아 갔는디?
유미     괜찮아요. 안심하세요.
정순     아니 아이고, 나는 디졌네 디졌어. 이 주둥이, 이 주둥이! (입을 때린다.)

 

유미가 일어나서 마당을 천천히 걷는다. 결심을 한 듯 정순에게 다가간다.

 

유미     아주머니, 그 오카리나를 제가 불어 보고 싶어요. 혹시, 제 아버지 것일지도 몰라서. 사실이라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정순     아부지? 행방불명됐담서? 어? 에이, 그럴라고? 그러먼 처자가 직접 말혀 봐. 나가 말허먼 된통 당헐 텐디…? (잠시 암전)

 

3. 저녁에 우는 새
태봉과 유미는 평상에 앉아 있다. 불안한 듯, 정순이 평상 주위를 가만히 돈다. 휘파람새 소리. 멧비둘기 운다.

 

동준     (뛰어 들어온다.) 자기야! 미안해. (엄지손가락을 세우며) 예정에 없이 필드에 오신 거야.
유미     무슨 일이?
동준     그냥 오셨다는데, 사실은 우리를 만나러 오신 것 같아. 오늘 한 라운드 쳤거든!
유미     그럼 알려줬어야지!
동준     아버지 라운딩할 때 휴대폰 꺼놓고 하시잖아. 어떻게 연락해?
유미     조용히 문자라도 보내줘야지. 화장실도 안 가?
동준     마음의 여유가 없었어. …오늘, 중요한 말씀을 하셨어.
유미     무슨?
동준     우리가 말했던 호텔, 지으실 거래!
유미     그래? 갑자기?
동준     우리도 되도록 빨리 식을 올리래!
유미     뭐라구? 내… 이야기도 들어보지 않구…?
동준     어차피 결혼할 거면 빨리 할수록 좋다고!
유미     뭐? 어차피 해야 할 결혼?
동준     우리 그런 사이 아닌가? 결혼과 동시에 어머니 땅도 함께 합해서 거기에 호텔을 짓자시는데?
유미     (어처구니없다는 듯 놀라며) 뭐?
동준     이 골프장 모두를 우리 앞으로 상속해 주신다는데, 왜 마다해? 호텔을 그냥 지어 주신대잖아!
유미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 땅을 누구 맘대로 합해? 누구 허락 받고?
동준     기쁜 소식이라 달려왔는데….
유미     기쁜 소식?
동준     자기는 기쁘지 않아?
유미     기쁜 거하고, 그거하고는 다른 문제지, 이거는?
동준     무슨 말이야?
유미     자기 집에서는 당사자 뜻은 묻지 않아? 아버지가 결정하면 따라야 해?
동준     그게 어때서? 우리를 살게 해 준 그 모든 것이 아버지 재산과 파워에서 나온 거잖아.
유미     그래도 이런 문제는 상대방의 의사도 존중해 줘야잖아?
동준     자기, 지금… 우리 집에 대해 불만이?
유미     불만이라기보다, 마음씀씀이, 배려, 존중, 이런 거!
동준     내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도 그렇다면 다른 문제는 다 이해하고 넘어가도 되는 거 아냐?
유미     (빤히 쳐다보며) 자기, 그렇게 생각해?
동준     아니 그럼 더 이상 뭘?
유미     더 이상 뭐가 필요하냐고? (홱 돌아선다.)
동준     (휴대폰 울림 소리, 받으며) 예, 조금 볼 일이 있어서. 네? 당장 올라가겠습니다. 자기야, 아버지가 지금 당장 오라고….
유미     그래, 당연히….
동준     미안해, 오늘은 좀…. 다음에 얘기해. (달려 나간다.)
유미     가겠지. 내가 저 사람을 믿고 평생을…?
정순     (접시를 든 채) 총각은 왜 벌써 가분디야? 딸기 내왔는디?
정순     (평상에 앉으며) 총각이 늘 바쁜갑네이.
유미     (앉으며) 아버지라면 깜박 죽어.
태봉     나, 나…쁘. 지, 지 앱!
정순     나쁘다는 뜻이겄제?
태봉     (주머니에서 오카리나를 꺼내며) 그, 그, 요, 요. (몸짓으로 말한다.)
정순     (통역하듯) 진짜 아부지 것이냐고 묻는디?
유미     (오카리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눈을 크게 뜬다.) 맞는 것 같아요!
정순     오메, 으째야 쓰까이. 긍께, 고것이 처자 아부지 것이 맞단 말이제이?
유미     네에, 맞아요. (얼이 빠진 듯 중얼거린다.) 이것만은 확실하게 기억해요. 이 은빛 나는 개나리색 오카리나. 아버지는 오카리나를 잘 부셨어요. 아빠가 오카리나를 가르쳐 주셨거든요.
태봉     그 마. 차, 차….
정순     그 말 참말이야고 묻는 갑는디?

 

유미, 눈물을 글썽인다. 그리고 태봉의 오카리나로 <꽃밭에서>를 연주한다. 안개 낀 절벽 위에서 상철이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모습. 끝까지 연주하지 못하고 주저하며 운다. 정순이도 눈물을 닦는다. 태봉이는 돌아선다. 상철이가 사라진다.

 

유미     아빠는 하모니카도 잘 부셨어요. 엄마가 아빠를 좋아하게 된 게 이 오카리나 때문이라고, 청혼을 오카리나로 했다고 했어요.
태봉     이, 이, 이르미….
정순     어? 당신 지금? 처자 아부지 이름이 뭐냐고 물은 것 같은디?
유미     (주저앉은 채) 박, 상, 철, 오랜만에 불러 보네, 박 상자 철자….
태봉     (벌떡 일어서며) 갖, 고 나와….
정순     갖고 나오라고라? 다, 당신, 뭣을 갖고 나와요?
태봉     가, 방!
정순     (놀라 자지러지며) 아이고마? 당, 당신 지금 뭣을? 말을 시방 헌 거여? (유미 순간 일어선다.)
태봉     (낮은 목소리로) 가방!
정순     (기어서 일어나며) 알았어라. 당신 버버리 아니었어? 말을 헐 수 있어?
태봉     (차분하게) 그, 그, 물에 걸린… 그 가, 가방. (얼굴의 땀을 닦는다.)
정순     오메, 오메! 이것이 시방 먼 일이다냐?
태봉     (큰소리로) 가방!
정순     예, 예에. 긍께라, 꼭꼭 숨켜 둔 가방 있제라.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간다.)
유미     아저씨, 괜찮으신 거예요?
태봉     (조용히) 세치 혀, 혀로 살고…, 세치 堊바닥으로 죽, 죽는다.
유미     아저씨, 무슨 가방을 말씀하세요?
태봉     아부지, 성…함이… 박…상…철? (고개를 흔든다.)
유미     아닐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지요? 저 지금 떨려요. 아저씨는 제 아버지를 아세요?
태봉     안…다고 허면… 알고, 모, 모른다고 허면… 모르는….
정순     찾았구만이라. 어찌나 짚은 곳에 숨켜 놨던지. (등산 배낭의 먼지를 털며 내온다.)
태봉     아가씨, 아, 아부지 것?
유미     가방이 아니라 배낭이네?

 

유미, 조심스럽게 배낭의 지퍼를 연다. 휘파람새 소리 바람에 묻어간다. 그리고 꺼내는 등산복 상의, 그리고 비닐로 만든 4각 서류 봉투.

 

유미     (울컥하며) 이 옷 생각나요, 사진에 있거든요. 엄마와 아빠와 같이 북한산에서 찍은 사진이. 노트북! 그리고 이 봉투는?
태봉     물, 안 들게, 바, 방수 자꾸가, 채워….
유미     아부지 것이 맞아! 나 어떡해. 우리 아부지!

 

유미가 울먹이며 방수 지퍼팩을 연다. 접혀진 큰 지도와, 그리고 전원주택 투시도가 나온다. 그리고 가족사진이 나온다.

 

유미     아빠? (사진을 가슴에 안고 뒹군다.) 아빠, 아빠야! 우리 아버지! 아 아악!

 

태봉은 돌아서서 눈물을 씻는다. 정순은 달려가 유미를 진정시킨다.

 

정순     오메, 이것이 먼 일이다냐? 처자, 처자 정신 차려, 처자! 물! 물 좀 떠와! (태봉을 보며) 뭣허요? (악을 발칵 쓰며) 얼렁 물 가져오랑께! (태봉이 부엌으로 바삐 간다.) 처자, 정신 차려, 이? 정신 차리랑께! 워메 워메, 이걸 으째야 쓰까이!
태봉     (물을 주고 나서 초조한 걸음으로 이리저리 걷다가 딱 멈춘다. 정면을 보며) 고놈을 쥑여야 혀. 안개 속에 개, 개를 풀어분 놈! 그, 그놈이, 그놈이 저 골프장… 쥔이여. 다 알아. 그, 근디 말도 못, 못 허게 나를 가둬 놓고 조져부러? 세상에 비밀은 없는 것이여! 나가 그 가방을 꼭꼭 숨켜 둔 이유가 고것이여. 나도 인자, 속 시, 시원허게 살아야 쓰겄어! 다 말혀불 거여. (유미를 보더니) 글라먼, 저 아가씨가 살아야 혀, 그러겄제이? 119를 불러야 쓰겄그만. (휴대폰을 꺼내 들고) 119? 119 맞제라이. 여그 사람이 기절해 부렀는디, 빨리 오셔야겠어라. 사람이 곧 죽어! 응급, 응급 환자여!

 

멀리서 119 경광등 불빛이 보이다가 사라진다. 태봉에게 집중하는 스포트라이트. 휘파람새와 멧비둘기가 우는 사이, 암전.

 

4. 별은 밤에 빛난다
소쩍새 소리가 들린다. 별이 서서히 돋는다. 처녀 자리. 소쩍새 소리가 커질수록 별은 더 또록또록 해진다. 정순은 부엌에서 가물치찜을 마루로 내온다.

 

정순     (혼잣말로) 같이 묵을 사람이 없네이. 이 양반은 왜 안 온겨? 허긴 바빴제이. 그 가방 땜세 여그저그 끌려 댕기느라고. 이놈의 주둥이가 문제여. 그려도 사람은 헐 말은 허고 살아사 쓰제? 안 그려? (휘파람새 소리) 참말 휘파람새 소리는 좋당께. 소쩍새 소리는 뭔가 슬퍼이.

 

태봉이 <꽃밭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들어온다. 취했다.

 

정순     저 양반이 왜 저런디야? 인자 아조 고주망태가 돼부렀네? (내려서며) 아니, 얼서 그렇게 마셨소?
태봉     (평상에 턱 앉으며) 내 헐 말은 많지만 안 헐란다!
정순     사람 말은 쥐도 새도 알아 듣는다던디? 왜 말을 안 혀?
태봉     어헛!
정순     입?
태봉     주둥이!
정순     터진 입인디, 뭐라도 씨부려야 지 값을 허제.
태봉     터진 주둥이….
정순     주둥이, 주둥이, 주둥이! 인자 그만 좀 허시요이?
태봉     혀 세 치로 살고 쎗바닥 세 치에 죽는다….
정순     말 못 허는 병신은 사람도 아녀!
태봉     이녁이 당해 봤어?
정순     (홱 돌아서며) 아무리 그려도 그렇지, 벙어리 3년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스무 해, 이십 년이 뭐여?
태봉     세 치 혀로 살고 세치 쎗바닥으로 죽는다!
정순     세 치 쎗바닥?
태봉     조용히 안 혀?
정순     놀래라. 똥싼 놈이 방귀 뀐 놈 탓을 허네?
태봉     (악을 버럭 쓰며) 조용! (깜짝 놀라는 정순이) 그 주둥이!
정순     (소리를 낮춰) 아, 친정에만 헌다는 것이 돌고 돌아서….
태봉     이녁만 아녔으면 그냥 넘어갔을 것인디, 나 모르게 왜 파출소까 정 가? 여그저그 소문을 다 내놓은께로, 거시기, 잉, 민심이 동요 헌다고 나를 끌고 가 조져부렀제. 나가 기가 콰악 맥혀분 거여, 이 화상아!
정순     아, 고것은 당신이 하도 애달아 헌께, 고것이 짠해서 그랬제. 누가 잡아갈지를 알았당가?
태봉     시끄럿! (담배를 피우려다가 홱 던져 버린다.)
정순     아이고메, 먼 말을 저리 청산유수데야? 한번 터진 입 된께 마악 퍼붓네, 퍼붓어! (입을 꾹 다물고 밥상을 든다.)

 

하늘에 별이 가득 찬다. 소쩍새 소리.

 

태봉     워메, 별이 쏟아져부네. (드러눕는다.)
정순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며) 아, 거시기, 소포가 왔습디다. 유미라고 허먼, 그 처자 아녀?
태봉     (벌떡 일어서며) 어딨어?
정순     말래에 올려놨는디? 쩌그!
태봉     (마루로 가서 소포를 들고) 메칠 전에도 만났는디, 뭔 소폴까?
정순     개볍던디?
태봉     (개봉하더니) 어? 오카리나! 먼 편지데?
유미     (목소리. 소쩍새 소리와 함께) 아저씨, 며칠 전에도 변호사 사무실에서 뵈었지만, 손편지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었어요. 잘 해결되고 있어요. 오카리나는 증거 자료로 채택되었으니, 아저씨께 오카리나가 필요하리라 생각했어요. 가장 비싸고 좋은 오카리나로 골랐습니다. 그냥 부세요. 휘파람새, 산비둘기 소리도 잘 낼 수 있으실 거예요. 물론 <고향의 봄>도 연주하시고요. …그리고, 동준 씨는 몸져누웠다는데, 저는 개의치 않기로 했어요. 시간이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죄도 상속되는 걸까요?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겠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는 이제 저희와 같이 숨 쉬고 있습니다. 늘 감사드려요. 아줌마가 말씀 안 해 주셨다면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아줌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아, 그곳의 별밭을 제대로 못 봤어요. 별도 꼬옥 보러 갈 거예요. 나중에 찾아뵐게요. 건강하세요, 그럼, 이만. 박유미 드림.
태봉     크하하하하! 그려, 맞어! 말을 혀야지, 말을. 그려야 사람답게 사는 게지! (오카리나를 불어 본다.) 후리릭 휙, 구구구구, 솟쩍솟쩍! 하하하하하. 이것은 우는 것이 아녀! 말허는 거여, 말! (덩실 춤을 추며) 말을 혀야지, 말을!
정순     오메, 저 양반이 미쳐부렀는갑네? 먼 말을 헌다는 거여? (달려와 태봉의 귀를 잡고 끌며) 당신은 말허지 마. 세 치 쎗바닥, 주둥이 놀리지 마. 말 없는 것이 더 편혀! (정순이가 태봉이의 입을 막으며 마루로 끌고 간다.) 아, 주둥이 닥쳐랑께! (계속 말하려는 태봉.)

 

처녀 자리 스피카 별이 더욱 또렷해지는 하늘, 소쩍새가 말을 한다. 바람 한 점, 이를 물고 날아가는 소리, 휘익. 암전.
-막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