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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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오년은 광복 81주년, 기미독립만세운동 107주년이 되는 해이다. 광복 80주년이었던 지난해는 곳곳에서 학술 심포지엄이 있었다. 서당 시절부터 작고하는 순간까지 독립운동하셨던 할아버님 덕분에 눈여겨보게 되었다.
마침, ‘충북인의 국외 지역 항일투쟁’이라는 주제로 ‘광복 80주년 기념 학술 심포지엄’이 있어 참관했다.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충북인’에 대해 박경목 교수의 기조 강연과 다섯 분의 강연을 들었다. 독립운동은 19세기 말경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여러 강대국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맞서 우리나라의 자주성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서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중국 상하이와 베이징, 광저우, 만주 지역, 일본, 러시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유럽, 남미 지역 등 세계 각지로 진출한 한국인들은 머나먼 타국에서도 독립의 일념으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나라 잃은 설움 극복하고 주권을 되찾기까지 선열들의 희생과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사회 각 분야에서 펼쳐졌던 항일운동, 교육·문화운동은 이후 독립은 물론 오늘날 근대화와 민주화를 이룬 토대가 되었다.
집중 조명되는 독립운동가가 부럽다. 우매한 자손들로 인해 작고하는 순간까지도 독립운동하셨던 할아버님은 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으니 죄송한 마음이다. 영민했던 할아버님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길은 배우는 길뿐이 없다며, 대소면에 있는 서당, 진천에 있는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충북 유일한 중등 실업학교인 청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셨다.
혼자만의 배움으로 끝내지 않고, 이웃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할아버님은 충북 지역 최초의 학생만세운동 계획에 동참했다. 학생만세운동은 3월 9일 청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그 주역은 전 중앙학교의 학생이었던 신영호였고, 오석영·이철우(필자의 할아버지)·이요습·서상경·이수천·박승하·신태동 등 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청수정 소재 김현구의 집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아!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함’ 격문 인쇄, 태극기 제작 등 만세운동 준비를 했다. 그러나 발각되어 출판관리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3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일제강점기 수감자의 처우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게다가 수감 생활로 농업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하고 강제 퇴학당했다. 다행히도 청주농업고등학교에서 2005년 2월 12일 명예졸업장을 수여했다.
할아버님은 출소 후 가사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을 지속하였다. 소작농으로 독립자금을 마련할 수 없어 1930년부터 음성군 대소면사무소에 근무했다. 일경의 눈을 피해 많은 청장년을 독립운동에 가입시키고, 원활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함이었단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1월 4일 (음력 1934. 11. 29.) 순국하던 날도 독립자금을 마련해 오다가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 504번지에서 일본의 앞잡이에게 변을 당했다. 독립을 꿈꾸던 40세의 젊은이는 조국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장남인 아버지는 할아버님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에 더 큰 불똥이 떨어질까 봐 일경의 수사 마무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일경의 눈치 보느라 슬퍼도 슬픔을 내색할 수 없는 나라 잃은 설움을 고스란히 피부로 느낀 것이다. 할아버님의 갑작스러운 참변으로 생활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다행히도 뼈대 있는 가문으로 통했단다. 할아버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집안의 자랑이다. 가난하지만 뼈대 있는 자손으로 자란 나는 학창 시절과 공직 생활에 열과 성을 다했고, 가정생활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버지는 여섯 명의 동생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등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병을 얻어 변변한 약도 써보지 못하고, 39세 젊은 나이에 작고하셨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손자들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1992년 독립운동사 자료실로부터 포상 신청하라는 우편엽서를 받고서 서류를 갖추어 제출하였으나 일제강점기 행정기관 근무한 사람은 독립유공자 선정에 제외된다는 통보를 받았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장손은 지병까지 겹쳐 1993년 작고했고, 나머지 동생들도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지난 10월 할아버님의 흔적을 찾아 음성에 있는 감우재전승기념관을 찾았다. 혹시 충혼탑에 할아버님 위패가 있을까 싶어서다.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해 없었다. 안타깝게 돌아서는데 뜻밖에 6·25동란 때 전사한 삼촌의 위패를 발견했다. 놀랍고, 반갑고, 죄송스러워 눈물부터 났다. 숭고한 넋을 위로하며, 부자 상봉의 기회를 만들어 드리겠다고 약속했다.
심란한 내 마음을 아는지 가을비가 추적거린다. 할아버님의 눈물이 고 삼촌의 눈물이며, 내 눈물이지 싶다. 마음을 추스르고 대소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있는 삼일운동 기념 공원으로 향했다.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가 의연하게 맞이한다. “슬기로운 배달민족의 얼이 타오르는 언덕에 우람찬 이 빗돌은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이 고장에서 태어나신 선열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민족정기를 새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로 시작하는 추념비에는 할아버님의 성함, 이철우(李喆雨)가 또렷하게 각자 되어 있었다. 할아버님을 대하듯 두 손 모으고 예를 올렸다. 그날의 함성, 펄럭이는 태극기, 절규하는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할아버님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나라에 바친 분이다. 그런데도 변변치 못한 후손들로 인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독립운동가가 어디 할아버님뿐이랴.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은 기울어진 가세 때문에 제대로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어렵게 살고 있으리라. 우리 형제들처럼 우매하여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지 싶다. 국가에서 발벗고 나서서 포상 신청해 주었으면 한다. 기미3·1독립만세추념비 앞에서 할아버님 함자를 어루만지며, 용서해 달라고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