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7
0
봄비와 봄바람이 헐벗은 대지에 푸른 새싹을 틔우는 은유 속에는 결국 불타는 여름 햇빛과 폭우를 견뎌 내고 드디어 풍성한 추수를 거두는 기다림이 숨어 있다. 저 넓은 들판에서는 수해를 딛고 알곡과 단 열매로 익어 가는 생명의 빛과 소리가 내 가을을 한층 더 깊게 한다. 자연의 생명과 인간의 영혼과 생명의 존귀함과 가치가 기계화 속도와 AI 인공지능으로 우리의 서정이 점점 잠식되어 가고 있지만 자연과 더불어 변치 않은 순환과 치유의 생명력은 막강하다.
이음새도 없이 찾아드는 계절 앞에서는 모두가 호기심과 기대로 밤새운 어두움이 뜨는 해 앞에서 물러가는 것과 같은 하루 순간을 붙잡고, 가을을 한층 깊게 하는 섬이 있다기에 계절의 아름다움을 찾아 집을 나섰다. 신선이 노닌다는 이름을 가진 선유도공원(仙遊島公園), 그곳을 가려면 한강 둔치와 연결해 놓은 다리를 건너야 한다.
불란서 건축가가 설계했다는 다리가 참으로 이색적이다.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것이 보기에도 범상치 않다. 보행자 전용 도로는 폭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알맞은 느낌이다. 상판 나무에 결 좋은 무늬가 들어 있는 것이며 밟는 촉감이 부드럽고 발에 힘을 주어 굴리면 텅∼텅 하는 공명이 널리 퍼진다. 가볍게 뛰어도 공중으로 솟아오를 것 같은 탄력이 있다. 아치형으로 설치해 놓은 난간과 조각품이 사뭇 유럽풍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곳곳에 지난날 한강과 주위 건물들을 지금의 발전되고 변화된 전경과 대비시켜 영상물로 보여 주며 설명도 잊지 않는다.
다리 끝자락에 서 있으려니 혈맥처럼 뻗은 양안(兩岸) 도로를 따라 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리고 강변에 죽죽 솟은 건물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런 곳에서 서울의 화려한 밤 야경과 반짝이며 흐르는 은하수가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해 본다.
가을의 전형적인 날씨를 즐기기 위해 나온 가족들이 풍선을 손에 쥐고 살집 좋은 햇살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드넓은 들을 뛰어다니며 푸른 꿈을 키우고 있다. 강둑에 설치해 놓은 의자에서는 연인들이 허리춤을 꼬옥 껴안고 속살대며 정담을 나누기도 하고 콩당콩당 뛰는 마음을 상대에게 전하려는지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이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사랑할 때는 상대를 핑크빛으로 바라본다. 그때 뇌에서는 도파민(dopamine)이라는 호르몬을 촉진시켜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고 양 볼에는 홍조를 띠게 된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생겨난 것일까? 저들의 얼굴에 꽃물이 배어 있는 것을 보니 사랑의 피돌기를 하는 것 같다. 넓은 강 따라 반짝이는 물비늘을 밀어내며 유람선이 떠가고 있다.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나들이객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드는 추일 풍경(秋日風景)이 퍽 한가롭다. 저들의 밝은 표정 속에는 내일의 꿈이 깊이 배어 있을 터인데 모든 일이 오늘만 같아 여유로웠으면 좋을 듯싶었다.
공원에 들어서자 나무와 잘 가꾸어 놓은 잔디가 산뜻한 생동감을 준다. 정인(情人)들이 어깨를 맞대고 걷기에 좋은 오솔길 따라 걷자 빈들에 가랑잎 구르는 소리며 작은 구릉에서 아가씨의 수줍은 낯빛처럼 곱게 핀 단풍 냄새가 물씬 풍겨서 좋다. 잠자리 떼가 하늘을 가르고 둔덕에 갈피갈피 쌓였던 바람이 한 자락 스칠 때마다 가지에서 몸을 섞고 풀던 잎들이 어깨며 발끝에 가을의 무게만큼씩 떨어진다. 낙엽은 나무의 눈물이라 했는데 이것들의 아픔은 느낄 수 없지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 의미를 되새겨 보며 수없이 떨어지는 낙엽을 쳐다보며 인생의 가을도 단풍처럼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하나가 정원이다. 천연의 폭포처럼 만든 시멘트 구조물 벽에서 뿜어내는 물안개가 무지개로 피고 길옆 나무들은 나무가 된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하늘거린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서정이 내 안에서 꿈틀거림을 느낀다. 번득 로미오와 줄리엣이 플라토닉 사랑을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도 풋풋한 첫사랑의 흘러간 순간을 생각해 본다.
녹색정원에는 수많은 나무와 풀잎, 엉겁의 세월로 지켜 온 유전 인자들의 군락지 저들의 몸 안에는 몇 번의 씨앗의 계절들이 들어 있을까. 그중에서 통통하고 잘생긴 것을 붙들고 눈을 지그시 담은 채 무심(無心)으로 있으려니 그들의 은유(隱喩)는 알 수 없지만 나뭇잎 수런거리는 소리가 “너 자신을 알라” 하는 것 같다. 또 공해에 찌든 세상에서 살기가 힘들겠지만 튼튼하게 자라서 인간에게 신선한 공기를 달라는 청을 넣으면서 까슬한 몸피를 살며시 쓰다듬어 주자 말도 표정도 나타낼 수 없는 나무지만 살랑살랑 가지가 흔들거리는 것이 그렇게 하겠노라는 듯하다. 내 체온과 감정을 통해 인간이 자기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참 좋으려만….
수생식물원에는 물이 나울나울 흘러가면서 정화되어 가는 과정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놓아 자연 친화적 환경을 일깨워 주는 좋은 교육장이 될 것 같다. 개울에 떠 있는 갈잎이 바람결 따라 몸을 파닥이다가 물속으로 숨기도 하고 다시 위로 솟구치며 요술을 부린다. 작은 웅덩이에서는 피라미드의 저들만이 세상이 도래했다는 듯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자기 존재를 마음껏 과시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참으로 오랜만에 동심 어린 마음에 젖는다. 지난 어린 시절 고무신짝에 물방개를 잡아 놓고 놀던 추억에 잠겨 보는 것도 좋았다.
어느 사이 태양이 도심의 끝자락에 걸려 있고 조개 구름밭에는 노을꽃이 묽게 피어 있다. 가을빛에 젖어 있는 강물이며 드넓은 들녘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무들과 어울리면서 삶의 근심, 걱정, 괴로움 다 내려놓고 상큼한 바람에 취했더니 심신이 가벼워졌다.
자연이 인간에게 베푸는 혜택을 한껏 즐기고 하루의 순간이지만 여유로움까지 덤으로 얻었다. 현대를 사는 모든 이들이 친환경 속에서 잠시 잠깐씩이라도 힐링을 느끼며 산다면 소소한 행복이 삶에 활력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AI가 우리 생활을 편하게 하지만, 감정 교류도 없이 기계화되어 가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 내 인생 삶의 여정에 작은 꽃자리 하나 생겼으니 자연과 사람과 어우러진 사랑의 세레나데 힐링의 향기를 모든 이들에게 마음껏 가을바람에 날려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