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호모머신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종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2월 684호

조회수74

좋아요0

휴무일, 들를 곳을 떠올리며 차에 오른다. 병원, 미용실, 우체국, 문구점, 마트, 방문 순서도 정한다. 그곳에서 할 일과 새로 살 것들도 떠올린다. 정하고 떠올리고, 또 정하고 떠올리며 운전하는 사이, 차는 직장 근처까지 와 있다. 이런! 내가 얼마나 오랜만에 쉬는데 나를 또 일터로 몰아넣어! 차에게 나에게 마구 화를 낸다. 그러다가 또, 떠올린다. 김유신과 천관녀를.
술에 취해 말 위에서 잠든 김유신을 그의 말이 첫사랑 기녀 천관의 집으로 태우고 간다. 김유신은 자신의 결심을 어긴 말에 분노해 천관녀가 보는 앞에서 애마의 목을 베고 그녀 앞에서 돌아선다.
나는 난데없이 말을 버린 김유신이 되어 차를 죽이려 든다. 두 손에 잔뜩 힘을 넣고 목을 조르듯 핸들을 거칠게 짓누른다. 홧김에 클랙슨까지 눌렀는지 차가 괴성을 내며 반항한다. 왜 이래! 술도 안 먹고 왜 술 취한 김유신인 척해? 목적지 설정도 안 해 놓고 실컷 딴생각하다 이제 와서 차를 잡냐고!
손아귀 힘을 풀고 길 안내에 진심이던 네비게이션을 바라본다. 길을 벗어나면 경로를 재설정해 주고 과속 단속 경고음을 내며 노인과 어린이 보호 구역을 알려준다. 과속 방지턱까지 알리며 목적지 도착 시간도 알려준다. 컨트롤 패널엔 자동차의 모든 컨디션이 자동 입력되어 있다.
다시, 뜬금 있듯 핸들을 쓰다듬는다. 네가 그리 잘났으니 내가 잘못하는 거다. 이 많은 기능이 나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 생각 없는 운전자로 만든다. 그렇다고 기계의 기능을 덜어낼 순 없잖은가. 인간 관계와 기계 관계를 생각한다. 도로 상황마다 투덜대는 남편보다 네비게이션의 깍듯한 멘토대로 운전하는 것이 편하다. 시답잖은 선생님보다 챗봇님이 빠르고 현실적이다. 그러니 정보의 습득과 저장 의지가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언제든 터치하고 노크해도 한결같은 기계는 내 빈약한 기억력을 비웃거나 혼내지 않는다.
잘 지내야 한다. 둘러보면 일상이 기계와 이뤄진다. 더 이상 기계에 반항하지 말자. 그저 기계를 이해하며 이용하면 된다. 그때는 김유신의 결심을 어긴 애마가 처치되었지만, 지금은 기계의 결심대로, 설정대로 못 따르는 내가 처리될 수 있다. 사이보그 기계 인간이 인간 세계를 점령하여 인간을 배양하던 터미네이터 영화는 이미 오래전 얘기가 아닌가. 어쩌다 기계 인간의 지배를 받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저항 무리가 아닌, 저항 무리를 찾아내어 기계를 편드는 못난 인간이 될 것만 같다.

 

네비게이션과 화해하듯 얼굴을 들이밀며 기계 친화적 인간이 된다.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다시 목적지를 말한다. 그러고는 나보다 더 나 같은, 내 이름을 숫자로 개명한 기계 5869,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된 내 핸드폰을 바짝 움켜쥔다.
더불어 기계, 나는 호모머신(Homo machine)이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