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3월 6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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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내일 시간이 되느냐는 문학 선배님 전화를 받았다.
통화 중에 얼른 일정을 살펴보니 비어 있다. 일정은 없는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선배님이 내일이 며느리 49재인데 절에 같이 가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순간 혼란이 온다. 나에게 선배님 며느리면 먼 인연이다. 웃을 일도 아니고 슬픈 일에 참석해 달라니…. 그 순간은 그렇게 생각했다.
선배님은 얼마 전 며느님을 먼 곳으로 보냈다. 그 황망함이 목소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금방이라도 흔적도 없이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목소리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셨으면 그리도 힘이 없을까. 젊은 며느리를 목전에서 보내야만 했던 심정을 헤아려 안 된다는 생각을 접었다. 잠시 망설였던 마음을 털어내고 씩씩한 목소리로 가겠다고 약속했다.
49재 장소는 관악산 꼭대기 정상에 있는 연주암이다. 아득히 높은 곳이다. 다행히도 케이블카로 오르내릴 수 있게 예약하면 된다고 한다. 10시에 케이블카 탑승하는 곳에서 만나자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침 출근 시간 대중교통은 혼잡하다. 시간에 쫓길까 봐 약속 시간보다 1시간은 일찍 집을 나왔다. 지하철을 막 타려는데 옆에서 누가 툭 친다. 돌아보니 선배님이다. 아직 약속 시간은 1시간도 더 남았는데, 서로가 놀라 바라본다. 나도 그렇고, 선배님도 그렇고 그 시간에 그 자리에서 만나다니.
선배님이 하도 야위어서 몰라볼 뻔했다. 가뜩이나 왜소한 분인데 야위다 못해 가랑잎처럼 바삭거린다. 소슬바람에 스쳐도 넘어질 것 같다. 그런 선배님을 보니, 마음속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천만 번 더 생각했다. 지하철에서 내리자, 관악산 입구가 까마득히 멀게 느껴진다. 삭정이 같은 선배님 팔을 잡고 거북이걸음으로 서두른다.
일찍 만났기에 우리는 9시에 출발하는 케이블카를 탈 수 있었다. 케이블카는 내 걸음으로 2시간은 걸려야 올라갈 수 있는 산길을 10여 분 만에 정상에 내려놓는다. 서두른 덕에 1시간이라는 여백은 우리에게 넉넉한 자유를 선물한다. 선배님은 49재 지내기 전에 연주대까지 다녀오자고 한다. 연주대는 연주암에서 가파른 길을 한참 더 올라가야 한다. 관악산 정상봉 절벽 끝에 자리 잡은 작은 암자다. 우리는 서로 의지하며 연주대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은 선배님을 부축하며 고르지 못한 돌계단을 오른다.
선배님은 40여 년 동안 불자로서 연주대와 연주암을 오르내리며 봉사했다. 지난날에는 날다람쥐처럼 뛰어 오르내렸는데, 지금은 한 계단 옮길 때마다 숨이 차오른다며 힘없이 웃는다. 걷다가 숨 고르고 걷다가 숨 고르길 거듭한다.
며느님이 위암 말기 판정받았을 때,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이었단다. 가랑잎 같은 그 몸으로 울며 오르내렸을 길이다. 일 년을 그렇게 쇠지팡이가 닳도록 올라와 기도했을 것이다. 오늘은 마지막 보내는 길, 고이 보내주고자 온 마음을 다하는 모습이 애처롭다.
어느 노스님에게 시중드는 어린 제자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어린 스님이 노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스님은 그동안 뭘 배웠어요?”
노스님은 가만히 생각하다가 지팡이로 땅에다 '부드러울 유(柔)’ 자를 썼다.
노스님이 땅에다 쓴 '부드러울 유’ 자의 뜻을 어린 스님이 얼마나 이해했을지는 모른다. 부드러워진다는 거 쉬운 일이 아니다. 노스님은 부드러워지는 것을 깨닫기 위해 평생이 걸렸다. 가장 부드러웠던 동심으로 돌아가는 길, 그 깨달음의 길은 멀고도 험한 길이기에.
해맑게 웃는 영정을 바라본다. 생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뼈으스러지게 한번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도 딸 셋을 둔 엄마의 심정이려니.
조금만 일찍, 아주 조금만 더 부드러워지는 것을 터득했다면 이 세상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을까. 이 삭막한 세상에 엄마가 된다는 거, 아내가 된다는 거, 며느리가 된다는 거, 사회에 일임한다는 거 모든 것이 뾰족한 돌길임을 안다. 그 속에서 몽돌이 되려면 내 육신 어딘가는 뭉그러져야 할 터.
책임을 다해, 도리를 다해 동동거렸을 그 길이 힘들어서 서둘러 먼 길 떠나는 영가 앞에서 극락왕생을 빈다. 비록 짧은 인생이지만 잘 살았다고, 참 수고했다고, 조심조심 돌아가라고 다독인다. 생전에 얼굴도 모르는 남이었지만, 이 자리에 온 것도 시절 인연이라 여기며 좋은 곳으로 가시라고 기도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연주암은 오월 녹음 속에 싸였다. 무심히 푸르다. 종무소 마루 끝에 앉아 하늘을 쳐다본다. 그 높고 푸른 하늘에다 수없이 부드러울 유자를 그려 본다. 유한 사람이 되면 내 일상도 조금은 평온하려나, 슬픔도 근심도 성냄도 내려놓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려나….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