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타자의 거울을 통한 성찰적 응시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인경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조회수9

좋아요0

1. 여는 글
문학의 의미에 대해 사람들은 시대성에서 그 의미를 찾는다. 문학은 시대의 모습과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는 빠르게 흘러가고 빠르게 흘러가는 만큼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사람들은 도시 속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들 사이에서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해 바쁘게 움직인다. 각자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그 속에서 소통을 모색한다. 이렇게 우리는 사방이 벽인 공간에 있으면서 디지털 기기와 함께 일상을 채워 나간다. 주변의 사람들이 누구인지,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것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며 문학은 그러한 모습을 담아낸다.
여기 현대인의 자화상을 잘 보여주는 세 편의 소설이 있다. 김혜진의 「이남동 터널」, 김주현의 「방울 소리 찰랑 찰랑」, 권지예의 「베로니카의 눈물」 등이 그것이다. 세 소설 속 주인공들의 정체성은 종종 주변의 다른 인물들과 맞물리거나 겹쳐진다. 하지만 작품 속 1인칭 시점을 통해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을 충분히 나타내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내적 독백은 작품 속 여러 상황과 인물 간의 관계를 표출하기보다 고요하고 정적인 느낌을 준다. 이러한 인물들의 양상은 생활에 던져져 자신만의 세계를 쌓고 있는 외로운 도시인의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에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적으로 응시해 볼 수 있다.

 

2. 서로 다른 상황 속 공감의 여유
사회 계층화 현상이란 사회구성원이 가진 사회적 지위가 서열화되어 있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특히 우리 시대에 집은 어느 집, 어느 아파트에 사느냐에 따라 서열이 매겨진다. 집의 소유와 형태에 따라 상류층과 하류층을 구분하는 사회 계층화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곧 계급주의적 시선을 가지고 사람을 차별하는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경향을 바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사람들은 집이라는 대상을 사람의 안정을 잘 설명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살기 위해서 의식주가 기본 바탕이기 때문이다. 김혜진의 「이남동 터널」의 주인공 ‘나’는 8년 전 분양받은 오피스텔 901호에서 삶의 희망을 기대하고 찾으려 했다. 하지만 당시 오피스텔 건물이 그녀에게 주던 벅찬 감동의 흔적들은 이제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우편함에 붙은 광고지들과 엘리베이터 안에 얼룩덜룩한 거울, 지저분하고 볼품없는 건물의 모습은 그녀가 생각한 희망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게다가 같은 입장이었던 ‘홍 사장’이 갑자기 죽게 되어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삶에 대한 공허한 마음은 더욱 커진다. 홍 사장은 골치 아픈 주택을 처분하고 싶다면서 대출이자를 걱정하는 하소연을 그녀에게 자주 해 왔었다. 하지만 홍 사장의 얘기를 듣는 그녀 역시도 정부의 재개발 무산의 불안감으로 억울한 마음이 커져 홍 사장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이 모든 상황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 게 자신이라는 결론에 이를 때 즈음이면 절망감이 엄습”해 와 잠을 설쳤다. 언제 한번 보자던 홍 사장을 장례식장에서 마지막에 보게 될 줄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는 식사 테이블에서 떨어뜨린 방울토마토가 사람들의 발에 치여 결국 보이지 않는 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느 순간 자신의 삶도, 가졌던 희망도, 소유한 오피스텔도 언젠가는 저리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념이 계속 이어졌다.

 

그녀는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을 견디며 한참 더 서 있다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생각하면 문제가 아닌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게 문제였나 싶으면 저게 문제인 것 같았고, 그런 자그마한 문제들이 쌓여 지금에 이른 것 같았다. 아니, 이 오피스텔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기회를 모두 흘려보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결단을 미루고 있는 자신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인지도 몰랐다.
—김혜진, 「이남동 터널」(『축복을 비는 마음』, 2023)

 

주인공 ‘나’의 노심초사하는 모습은 삶의 갈림길에서 방황하고 결정하지 못해 흔들리는 많은 사람의 모습을 대변한다. 우리는 누구나 삶의 경계 선상에서 아찔하게 매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오늘이 평온했다면 내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것이 모두의 인생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집을 소유하면 삶이 평온하고 기댈 곳이 생길 것으로 생각했다. 허름한 동네를 필사적으로 살펴본 후 빌라 하나를 소유하면서 더 나은 집을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다른 사람들이 지금 사 놓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는 말에 휩쓸려 오피스텔을 분양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손해가 거듭되었고 지금은 월세도 나오지 않고 세입자도 잘 구해지지 않는 상황이다. 이것은 허울 좋은 주인으로서 가진 비극적 형상이었다. 어렵게 얻은 오피스텔 901호의 건물은 이제 흉물스러운 형체로 재개발의 처분만을 끝없이 기다릴 뿐이다.

 

무엇보다 누군가를 내쫓는 사람이 된다는 게 점점 더 꺼림칙하게 여겨졌다. 내쫓기는 사람들의 분노와 원망 섞인 말을 듣는 것도, 그 사람들의 눈빛을 마주하는 것도, 그들이 버리고 간 손때 묻은 살림살이들을 처분하는 것도 점점 내키지 않긴 마찬가지였다.
—김혜진, 「이남동 터널」(『축복을 비는 마음』, 2023)

 

여기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윤리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평소에 보여주는 도덕과 윤리는 어떤 모습이며 문학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이 작품은 윤리, 도덕이라는 의미가 사람 사이의 사건과 어떻게 결합이 되는지 잘 보여준다. ‘나’와 ‘홍 사장’, 세입자인 ‘그’와 ‘최경환’ 등과 같은 약자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상처받고 고통을 견디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그녀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공들여 쓴 문자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지만 끝내 전송 버튼은 누르진 못했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닫고 눈을 감아버렸다. 버스가 도로로 진입한 모양인지 어느 순간 덜컹거리던 차체가 잠잠해졌다.
주말까지는 기다려 봐야지.
한참 만에 그녀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그렇게 중얼거렸고 그러고 나자 또 얼마간 더 기다릴 자신이 생겼다.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낡고 허름한 집들을 통해 배웠고 계속 배우게 될 전부인지도 몰랐다.
—김혜진, 「이남동 터널」(『축복을 비는 마음』, 2023)

 

‘나’는 홍 사장의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버스에서 세입자 경환에게 보낼 문자를 찍는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 말을 해줘요. 언제까지라고 말이라도 해주면 내가 준비할 수가 있잖아요” 하지만 그녀는 결국 전송 버튼을 누르지 않고, 주말까지는 기다리기로, 그리고 더 기다릴 수 있는 자신을 갖게 된다. 그녀가 세입자의 상황에 대해 공감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감은 기본적으로 이해와 존중이 중요시되는 덕목이고, 이것은 자기중심적 생각을 완화하게 한다.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며 상호 간에 해결 방안을 찾게 한다. 자신의 욕망과 이익보다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 타인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또한 내가 지금 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작품 속 ‘나’는 홍 사장을 통해, 세입자 경환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응시하게 되면서 허름한 집을 통해 배웠고, 앞으로 계속 더욱 배워 나가면서 ‘공감’의 여유를 갖기로 한다.

 

3. 환(幻)과 멸(滅)의 순간, 들리는 삶의 소리
자기 성찰의 시청각 기능을 잃은 현대인은 현실에 의해, 현실적 조건에 의해 상당 부분 마비되어 살아가기 마련이다. 특히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공간은 건조하고 냉랭하며, 항상 무엇인가 망설이고 있기만 하다. 여기 그러한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있다. 김주현의 「방울 소리 찰랑찰랑」의 ‘나’는 봉투 하나에 잡지 한 권, 또 봉투 하나에 또 잡지 한 권을 넣으며 기계적으로 주어진 일상을 메워 나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이 진부하다고 생각한다. 삶은 부조리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지만, 단지 진부할 뿐이라 한다. 우리의 삶은 회색과 푸른색의 경계 지점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더욱 고통스러운 것이다. 이때 자아와 타자 사이, 실제와 이상 사이의 경계에서 살아온 자들이 우연히 만나서 사랑하고 대화하며 절망을 이겨 내보려 한다. ‘나’는 “너무 따지지 말고 늘 먹고 자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반복하여 추어라”라는 어느 춤 스승의 말을 기억하며 연애상담을 하는 직장 동료에게 “저질러요, 그 사람이 좋다면. 같이 살든 뭘 하든”이라는 경쾌한 조언을 한다. 하지만 정작 마음에 두고 있는 ‘그’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히지 못한 채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에게 또 다른 그녀가 있다는 것을 떠올려야 하는 모호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어정쩡하게 그녀와 더불어 만났지, 운동을 하라고, 지구력을 키우라고 너는 나에게 말했었지. 그게 마지막 말이었던가. 어쩌면 너는 내가 강해지기를 바랐는지도 몰라. 그래서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그래서 네가 가끔 기댈 수 있는 사람이기를. 물론 그건 내 생각일 뿐이겠지.
나는 무엇을 믿을 수 있을까. 그걸 알기 위해서라도 누가 말을 해주면 좋을 텐데. 이런 소소한 것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그렇게 나는 헤매야 하는 걸까. 그렇게 사람들 사이를 헤매고 있는 걸까.
—김주현, 「방울 소리 찰랑찰랑」(『조금 늦게 달이 보인다』, 2023)

 

모든 존재론적인 질문들은 항상 무겁다. 인간이 무엇이고, 우리의 삶이 무엇인가? 우리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 많은 이들은 삶을 묻는 대신 삶을 살아가고 사랑이 무엇인지 물어보기보다는 끊임없이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 ‘나’ 역시도 사랑의 대상을 찾아 무의미한 관계에 몰입하기도 한다. 그것이 지겨워진 순간, 사람들과 멀어져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위로하며 눈에 들어오는 별과 별자리 운세에 관심을 둔다. 어느 날은 무당이 건넨 방울에 놀라 소스라치게 꿈에서 깨기도 한다. 그만큼 어떤 식으로든 나를 알아갈 수 있다는 것에 골몰한다. 하지만 여전히 앞날을 알 수 없고 자신의 곁에 누가 있을지도 알 수 없어 “차라리 자전거를 타는 것이 낫겠어”라고 읊조린다. ‘나’는 누군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위로받고 싶지만, 선뜻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내면의 병은 서로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치유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의 치부를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고 서로 마주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자기 스스로 마음을 속이고 자기 위안을 하며 상처를 키우는 경우가 많다. 그 속에는 상반된 현실적 두 극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소멸과 생성, 상처 속에는 두 종류의 흐름이 공존한다. 엔트로피의 흐름을 따라 상처는 뼈를 부식시키고 살을 녹이며 붕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엔트로피의 흐름을 따라 상처는 뼈를 접합시키고 새살을 돋아나게 한다. ‘나’가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이고, ‘그’라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다시 응시해 보는 것이다.

 

어느 순간 마지막 찰랑, 하는 소리가 들렸어. 잠시 사위가 고요해.
곧 나는 숨을 고르곤 아무 데로든 걸어가기 시작했어. 어딘가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그리고 생각했어. 다시 봄이 오면 자전거를 탈 거라고. 내 속도로 달릴 거라고. 내 옆으로 누워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그 사람이 말해줄까. 멀리 앞을 내다보세요. 페달을 밟고 당신의 속도로 나아가보세요. 당신 옆에 똑같이 페달을 밟고 나아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나요.
나는 지금도 그런 마음으로 걸어가고 있어. 언제든 방울 소리가 찰랑찰랑, 찰랑찰랑 울리는 때가 있겠지만.
—김주현, 「방울 소리 찰랑찰랑」(『조금 늦게 달이 보인다』, 2023)

 

방황의 형식은 곧 방황자의 낭만적 내면성과 연결된다. 이 여정의 방황에서 환(幻)이 멸(滅)하자 거기에 펼쳐진 풍경은 방황으로부터 돌아온 여행자의 현실로의 귀환이다. 이 작품은 환과 멸의 힘겨루기를 이루며 만들어 내는 아찔한 균형의 순간, 그 찰나의 미학을 내적인 독백으로 읊조린다. 환과 멸, 그 힘의 균형은 두 세계를 나란히 공존하게 하는 것이다. 두 세계를 바라보며 환의 감각을 동원하여 실존을 일깨운다. 이때, 찰랑찰랑 방울 소리는 ‘나’에게 “어딘가로 가는 것이 중요하니까”라고 존재의 본질을 찾게 한다. 어디로든 간다는 것은 삶이 지속하는 신호음으로 울려 퍼지는 것이다.

 

4. 내일의 일상을 찾기 위한 점화(點火)
권지예의 「베로니카의 눈물」은 그동안 우리가 누렸던 문명의 혜택을 통해 인간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여행의 서사로 보여 준다. 작중 주인공은 ‘모니카’라는 세례명으로 쿠바의 아바나라는 도시에 짐을 풀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베로니카’는 쿠바 밖의 세상은 칠십 평생 단 한 번도 가지 못한 사람이다. 그녀는 병원에서 근무할 정도의 교육도 받았지만, 나라의 사정상 일을 그만두고, 여전히 열악한 삶을 살고 있다. 남의 집을 관리하며 그 집에서 묵는 손님들의 식사와 청소 등의 일을 하고 있다. 하지만 늘 삶의 활기가 넘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웃음과 꿈을 잃지 않는다. 반면에 한국에서 작가의 삶을 살아온 ‘나’는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글을 쓰려 했으나, 그곳 생활의 불편함으로 불만과 불평이 커져만 간다. 그만큼 ‘나’가 묵은 집의 환경은 문명의 혜택이 여러 가지로 부족한 곳이다. 호텔의 담벼락에 일렬로 서서 무선 인터넷의 희미한 전파를 활용하는 사람들, 그들의 모습은 그녀에게 생경한 풍경이었다.
흔히들 요즘 ‘정보화 시대’라고 한다. 1990년대 후반부터 컴퓨터가 도입되고 인터넷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현대사회는 말 그대로 정보의 홍수가 아닐 수 없다. 스마트폰의 발명으로 사람들은 길을 걸으면서도, 지하철이나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면서도, 심지어는 밥을 먹을 때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필요한 정보는 스마트폰으로 바로 검색만 해도 수많은 정보가 나타나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시대와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베로니카를 통해 자신이 그동안 누려온 문명의 혜택이 얼마나 소중한지, 때론 과하게 넘쳤는지를 절실하게 알게 된다.

 

두루마리 휴지를 10센티씩만 끊어 쓰기로 했다. 모카포트에 커피도 한 스푼 넣고 끓이기로 했다. 마른 빵 위에 병에 말라붙은 잼을 발라 한 끼를 때웠다. 전기밥솥에 한 번에 잔뜩 해두었던 찬밥에 물을 넣어 끓여 먹거나 스파게티 면을 삶아 고추장을 비벼 먹기도 했다. 주스잔 3분의 1에 럼을 넣고 얼음과 콜라를 채워 쿠바 리브레 한 잔을 만들어 발코니에 나앉아 마시는 게 유일한 낙이 되었다.
—권지예, 「베로니카의 눈물」(『베로니카의 눈물』, 2019)

 

이곳에서 ‘나’의 생활은 휴지를 센티로, 커피를 한 스푼으로 정해 쓰는 그리고 음료조차도 겨우 맛을 느끼고 마시며 발코니에 앉아 있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된다. 그동안 ‘나’는 문명의 도시가 주는 생활의 편리함에 젖어 누려온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래서 초록 오렌지 반쪽을 귀하게 먹는 베로니카의 순수한 기쁨 앞에서 은근히 질투가 났다. 베로니카가 한동안 오지 않는 상황에서는 집의 현관문 열쇠를 방 안에 넣고 나와 꼼짝없이 거실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되기도 한다. 겨우 주변 이웃의 도움으로 방문을 열리자 뻥 뚫린 자신의 방 문짝을 멍하게 바라본다. 그것은 마치 열려고 했으나 열리지 않았던 훼손된 자신의 마음처럼 보여 이국에 홀로 있다는 서글픔은 더욱 커진다. ‘나’는 베로니카에게 이곳에 와서 쓴 글이라는 것이 가계부처럼 변하고, 부족한 생필품으로 먹는 것에 집착하는 이상한 작가가 되고 있다는 불평과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그러자 베로니카는 너무 집착하고 애쓰지 말라고, 그냥 힘을 빼고 파도에, 리듬에, 인생의 시간에 몸을 기대라고 한다.

 

모니카, 중요한 일이라고 너무 집착하고 애쓰지 마. 그런 건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아. 그럴수록 그 중요한 일이 너를 괴롭히는 거야. 인생은 그저 흐르는 거야. 그냥 힘을 빼고 흐름에 몸을 실어. 춤출 때처럼. 우린 그래서 모두 춤을 잘 추지. 여긴 쿠바야!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어. 그냥 파도에, 리듬에, 인생의 시간에 몸을 실어.
—권지예, 「베로니카의 눈물」(『베로니카의 눈물』, 2019)

 

베로니카의 위로를 받은 후에 ‘나’는 그녀와 어머니와 딸처럼 친밀한 관계가 된다. 그리고 삶에 대해 관대해지는 법을 서서히 배워 나간다. 그만큼 베로니카를 통해 익숙해진 쿠바의 생활은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을 응시하는 계기가 된다.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 자신을 대상화시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게 한다. 이곳에서 글은 쓰지는 못했지만, ‘나’는 더 많은 삶의 자양분을 얻어 가는 성찰적 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한동안 나타나지 않던 베로니카가 가져온 선물은 ‘엔센데도르’이다. ‘엔센데도르’는 불을 피울 수 있게 하는 점화 도구이다. 처음 이 집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한 것은 ‘엔센데도르’였다. 음식 조리와 온수 사용을 위해 아직도 성냥을 사용하는 곳, 그리고 아주 능숙하게 성냥으로 불을 피우는 베로니카, ‘나’는 자신이 그런 공간에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나’는 ‘베로니카’가 없으면 성냥으로 불을 피우는 일을 쉽게 할 수 없다. 어느 날, 성냥불을 경배하듯 모시고 온수 보일러 화구에 가져갔다. 갑자기 펑! 소리와 함께 활활 불길이 세차게 붙는다. 이 모습에 “오 오! 나도 해낼 수 있구나!”라는 큰 성취감을 느낀다. 이러한 그녀의 모습은 자기 스스로 일상의 불을 점화한 시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메를리-퐁티는 “공간성의 경험은 우리가 세계에 고정됨을 표현한다”라고 했다. 아무리 초라하고 작더라도 주체가 고유한 공간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람됨’의 조건 가운데 중요한 것이다. 그 공간은 우리에게 보살핌을 베푸는 일차적 보호막이고, 안정감을 제공하는 존재의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나’는 성냥으로 불을 아직도 켜야 하는,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쿠바, 그리고 그곳에 ‘베로니카’를 통해 무심히 생활했던 일상의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문명의 혜택이 포화상태인 도시에서의 자신의 삶을 응시하는 계기를 갖는 것이다.

 

5. 마무리
현대 사회문화는 많은 사람의 슬픔에 대한 반영이다. 그래서 완벽하지 못한 인간은 결국 슬픔을 찾아다닌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려 노력하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끊임없이 바라보고 이해하면서 함께 걸어가야 한다.
김혜진의 「이남동 터널」에서는 사람과의 관계가 간단히 물건을 옮기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여러 경험을 통해 알게 된다. 김주현의 「방울 소리 찰랑찰랑」에서는 또다시 ‘미안해’라고 하는 ‘그’를 이해하고 자신이 앞으로 가야 할 길로 나선다. 권지예의 「베로니카의 눈물」에서는 낯선 나라에서 어머니와 같은 ‘베로니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이렇듯 소설의 존재는 하나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사람에게 인생의 가치관에 변화를 줄 수 있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어 위로를 받고, 자기 생각이 옳다고 했던 사람이 변화하는 계기를 갖기도 한다. 타자의 거울에 비친 성찰적 응시는 우리가 오늘과 내일 그리고 주어진 삶을 걸어가는 길로 이어질 것이다.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