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봄호 2026년 3월 7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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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이하여 할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여행을 갔을 때였다.
이탈리아 어느 산비탈 마을 성당에 들렀을 때, 마당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할아버지, 여기 아주 유명한 성당인가 봐요.”
“그래, 세상 어느 곳인들 유명하지 않은 곳이야 있겠느냐만 이곳은 더욱 범상해 보이지 않는구나. 참된 용기란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곳으로 소문이 나 있으니….”
“네에….”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궁금하여 말끝을 흐렸다.
할아버지와 나도 줄을 서서 기다렸다.
줄은 아주 천천히 줄어들었다. 이윽고 우리 차례가 되었다.
성당에 들어서는 순간 무언가가 나를 확 잡아서 당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무슨 느낌이지?’
그 순간이었다.
바닥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그 무엇이 불쑥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아니, 할아버지! 저 칼이 어째서 저 바닥의 바위에 꽂혀 있는 것이지요?”
나는 놀라며 바닥을 가리켰다.
“그래, 왜 꽂혔다고 생각하니?”
“바위가 물렁물렁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으음, 내가 보기에도 바위가 물러 보이지는 않는구나.”
그 칼 앞에는 해설사가 설명을 하고 있었다.
여러 나라 말로 된 안내판도 세워져 있었다.
2
여러분, 이 칼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칼은 약 천 년 전 ‘갈가노’라는 기사가 꽂은 것입니다. 갈가노 기사는 자신이 애용하던 이 칼을 이곳에 꽂음으로 해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착한 일을 많이 하여 마침내 존경받는 성인(聖人)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 갈가노는 이 마을을 정복하러 왔습니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수십 마리의 말을 타고 달려와 칼을 마구 휘둘렀습니다. 갈가노와 부하들은 쇠와 가죽으로 된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 무적의 부대가 한 번 지나가면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되고 말았습니다.
갈가노가 부하들을 이끌고 이 마을로 쳐들어올 무렵, 이 마을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와 함께 힘들게 살아가는 소년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전쟁통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남의 집 염소를 몰아주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피난을 가도 이 소년은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가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얘야, 너는 어서 뒷산으로 피하도록 해라.”
“싫어요. 할머니를 두고 어떻게 저 혼자만 가요.”
“나는 살 만큼 살았잖니. 이렇게 잘 움직일 수도 없고….”
“우리 식구들을 위해 힘들게 일하셔서 그렇게 되셨잖아요. 할머니를 두고는 갈 수 없어요.”
이때 갈가노의 부하들이 집집을 찾아다니며 귀한 물건을 털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마구 헤치고, 심지어는 지붕에 불을 붙이기도 하였습니다.
소년의 움막에도 불이 훨훨 타올랐습니다.
소년은 할머니를 밖으로 모시기 위해 있는 힘을 다 썼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기어이 문 앞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소년은 할머니를 끌어안은 채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갈가노가 이 소년의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너는 왜 도망가지 않았느냐?”
소년은 대답 대신 두 주먹을 굳게 쥔 채 벌떡 일어섰습니다.
소년의 두 눈에는 분노의 눈빛이 철철 넘쳤습니다.
“어쭈, 이놈 봐라.”
갈가노는 긴 칼을 쓰윽 쓰다듬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소년은 물러나지 않고 갈가노를 노려보았습니다. 소년의 눈빛은 더욱 이글거렸습니다.
그 바람에 도리어 말이 놀라서 주춤거리며 물러설 정도였습니다.
그러자 문득 갈가노도 자신의 어렸을 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아, 나도 어렸을 적에 이런 꼴을 당한 적 있었지!’
갈가노의 아버지는 작은 마을이기는 해도 그 마을의 족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갈가노가 냇가에서 물장구를 치며 놀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온 집 안이 불타고 아버지도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웃 마을에서 쳐들어와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갈가노는 깊은 산으로 도망쳐서 힘을 길렀습니다.
청년이 되어 힘이 세어진 갈가노는 ‘나는 이제 세상으로 나가 원수를 갚는다. 나는 지금부터 기사이다’고 하며, 둘레의 마을을 돌아다니며 치고 빠졌던 것입니다.
옛일이 생각나자, 갈가노는 곧바로 말에서 뛰어내려 소년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래, 나도 어렸을 때에 적의 침입으로 아버지를 잃었었다. 미안하구나. 나는 아버지를 잃고 보이는 것이라면 다 원수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오늘의 일로 내가 너의 원수가 되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미안해.”
그리고는 자신의 칼을 땅바닥에 콱 내리꽂으며 외쳤습니다.
“나는 앞으로 어떠한 이웃도 헤치지 않겠다. 이 칼을 버리겠다.”
갈가노는 천천히 일어나서 소년과 함께 할머니를 고이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소년과 함께 조용히 자기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갈가노 기사의 칼이 꽂힌 곳은 흙이 아니라 바위였습니다.
그 뒤, 피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이 칼을 빼내려고 아무리 힘을 들여도 칼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3
해설사의 설명이 끝나자 나는 칼을 가리키며 할아버지를 쳐다보았습니다.
“아, 그때 그 칼이 바로 이 칼이군요?”
“그래, 그 뒤 이 칼이 꽂힌 자리에 이렇게 성당을 세우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는구나.”
“네에, 유럽에는 바위에 꽂힌 칼 이야기가 많은 것 같아요. 영국에도 아더왕이 바위에 꽂힌 칼을 뽑아 지도자가 되었잖아요.”
“그렇지. 아더왕은 아무도 뽑지 못하는 전설의 칼을 뽑아 지도자가 되었지. 그 칼로 외적을 무찔러 자기 부족들을 지켜내었고…. 처음에는 용기가 없었지만 고생하는 이웃을 바라보다가 마침내 용기를 내었지!”
“그런데 이곳 갈가노 기사는 도리어 칼을 버리고 성인이 되었군요. 그러니까 ‘뽑는 자와 꽂는 자’가 되었군요.”
“그렇구나. 똑같은 칼이지만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달라지는 것 같구나. 아더왕은 고생하는 백성을 돕기 위해 칼을 뽑아들었고, 갈가노는 칼을 버려서 성인이 되었구나.”
“네에, 그런데 무슨 일이든지 이루려면 온 정신을 모두 쏟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단단한 바위에 어떻게 칼이 들어갔을까요?”
“그렇지!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바위에 화살을 박아 넣은 어느 장군이 계셨어. 돌아가거든 이 이야기도 알아보자꾸나.”
“네에!”
나는 만세를 부르며 할아버지와 함께 성당을 나왔다.
문 앞에 서 있는 석상이 나에게 눈을 찡긋 하는 것 같았다. 그 석상은 인자한 얼굴로 빈 칼집만 허리에 차고 있었다.
* 이 이야기는 이탈리아의 ‘산 갈가노의 검(Sword in the Stone of San Galgano)’ 전설을 바탕으로 꾸민 것입니다. 이 전설 속의 검(劍)은 실제로 이탈리아 토스카나의 몬테시에피(Montesiepi) 성당 바닥에 꽂혀 있는데, 중세의 성인 갈가노(Galgano Guidotti)의 검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