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5월 687호
10
0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말’로 시작하여 ‘말’로 귀결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일 셀 수 없이 많은 말을 쏟아내면서 우리는 끝없는 문장 속에 파묻혀 살아간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내뱉는 말들이 영혼의 어느 깊은 곳에서 나와 상대방의 가슴에 어떤 무늬를 그려내는지 깊이 성찰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특히 언어를 운명처럼 다루는 문학인들에게 말은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존재의 형상을 규정하고, 때로는 시대의 흐름을 바꾸어 놓는 엄중함을 지니기도 한다.
문학이란 결국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 보이지 않는 몸짓에 이름을 붙여 세상 밖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이다. 머릿속에 머무는 생각은 형체가 없는 혼돈이며, 이름 붙여지지 않은 채 부유하는 어둠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형체 없는 사유가 작가의 치열한 고뇌를 거쳐 문장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것은 강력한 생명력을 얻는다. 서구 철학의 근간인 ‘로고스(Logos)’가 논리와 이성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현현(顯現)’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문학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말은 곧 어둠 속에 은폐되어 있던 존재를 환한 빛 가운데로 불러내는 창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로고스에 대한 말 풀이 중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는 말’ 뜻이 있다. 말이란 게 머릿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말로 입 밖으로 나오게 되면 뜻을 우리가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있는 것이며 보여준다는 것은 밝은 빛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릿속에 있는 말은 어둠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그것이 입을 통해 나오게 된 말은 빛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이처럼 말은 상대방을 실존하게 하고, 그를 빛의 영역에 서게 하는 고귀한 도구다. 작가가 건네는 다정한 문장 한 줄은 독자의 가슴에 환한 등불을 켜는 것과 같다. 반대로 차갑고 날 선 언어는 타자의 세상을 순식간에 어둡게 하고, 그를 고립의 벽 속에 가둬 버린다. 빛의 또 다른 속성은 ‘따뜻함’이다. 빛으로서의 언어는 사람의 온도를 높여준다. 이 기주 작가는 그의 저서 『언어의 온도』에서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이라고 했다. 지식으로 이해되는 말은 금방 휘발되지만, 가슴에 새겨진 따뜻한 말은 한 사람의 인생을 평생 지탱하는 위안의 성소가 된다.
사람들 사이에는 누구나 자신만의 ‘섬’이 있다고들 한다. 정현종 시인의 노래처럼 고독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그 섬과 섬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량이 바로 ‘말’이다. 임종의 순간,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온 힘을 다해 가족의 손을 잡으려 하는 절박함처럼, 언어는 타자에게 내미는 가장 간절한 손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미는 짧은 고백의 손길은 단순한 음성 정보가 아니라, 상대방의 삶에 온기를 불어넣는 빛의 전이다.
언어학자 훔볼트는 언어를 ‘에르곤(Ergon; 이미 이뤄진 것)’이 아니라 ‘에네르게이아(Energeia; 이뤄내는 힘)’라고 정의했다. 언어는 박제된 화석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역동적인 에너지다. 실제로 말의 힘은 물리적 실체마저 변화시킨다. 물을 향해 쏟은 사랑과 감사의 말이 아름다운 결정체를 빚어내고, 비속어가 그 구조를 파괴한다는 실험을 사진으로 찍은 사례들도 있다.
김윤나 작가가 『말그릇』에서 언급했듯, 말은 단 몇 초 만에 세상 밖으로 나오지만 그 안에는 한 사람의 평생의 경험과 인격이 함축되어 있다. 말 한마디에 힘을 얻어 죽음의 벼랑 끝에서 돌아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무심코 던진 언어의 대못에 가슴이 박혀 평생을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 속에 사는 이도 있다. 널빤지에 박힌 못은 널빤지가 썩어야 빠지듯, 가슴에 박힌 아픈 말은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의 가슴이 썩어 문드러져 죽을 지경이 돼야 말의 못이 빠지는 법이다.
오프라 윈프리의 삶은 이 ‘언어의 에네르게이아’가 어떻게 불행을 기적으로 치환하는지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다. 사생아로 태어나 폭력과 성적 학대라는 처참한 어둠 속에 던져졌던 그녀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가진 여성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매일 써 내려간 ‘감사 일기’에 있었다고 한다. 절망이라는 심연 속에서도 감사의 말을 선택하여 기록했던 행위는, 어둠을 밀어내고 희망이라는 빛을 길어 올리는 강력한 원동력이 된 것이었다.
우리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마음을 바꾸고, 그 마음의 집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바꾸어야 한다. 올림픽 동메달리스트가 은메달리스트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낀다는 연구 결과는 우리가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풍경이 달라짐을 보여준다. 아쉬움과 후회의 말 대신 자족과 찬미의 언어를 선택할 때, 우리의 생은 비로소 빛의 궤적을 그리며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 것이”라며 구설의 위험을 경계했다. 언어가 오용될 때 그것은 도끼가 되고 칼이 되어 영혼을 살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을 잘 쓰는 명장이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쓰듯, 우리 문학인들은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죽어가는 영혼을 소생시키는 묘약을 빚어내야 한다. 단순히 침묵하는 경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투명하고 따뜻한 빛이 되는 문장을 건넬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 ‘언어의 힘’을 운용하는 작가의 진정한 자세일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유독 날 선 언어들이 범람하고 있다. 익명의 장막 뒤에 숨어 타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냉소와 혐오의 말이 도처에 소용돌이친다. 이런 시대일수록 우리 문학인들은 언어의 원형인 ‘빛’의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문학은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어야 하며, 단절된 마음들을 잇는 든든한 밧줄이 되어야 한다. 오늘 우리가 종이 위에 새기고 입술로 내뱉는 말들이 누군가의 어두운 마음에 비치는 한 줄기 빛이 되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문장이 고독한 섬들을 연결해 주는 손길이 되기를 바란다.
말은 빛이다. 그리고 그 빛은 반드시 말하는 이에게도 되돌아와 그의 삶을 환하게 비출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언어, 시대의 온도를 높여주는 문장으로 우리 곁의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듬는 봄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서로에게 빛이 되는 언어를 건넬 때, 비로소 우리 공동체의 온도는 조금 더 살 만하게 상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