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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사의 동종(銅鐘)

한국문인협회 로고 홍미숙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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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에 2019년 11월 최치원문학관이 개관되었다. 이 문학관은 신라 최고의 문장가로 널리 알려진 고운(孤雲) 최치원의 업적과 학문·사상을 기리기 위해 설립되었다. 그곳에서는 매년 최치원문화제 행사를 개최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관심과 찬사를 받았다. 이처럼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그의 가르침은 계속되었다.
이곳뿐 아니라 최치원의 흔적은 전국 곳곳에 많다. 그가 거쳐 간 곳에는 그가 남아 있다. 아마 전국에 ‘공부의 신’인 그가 남긴 문화유적이 ‘전쟁의 신’ 충무공(忠武公) 이순신보다 많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는 이순신보다 더 먼 신라 시대 사람이다.
최치원문학관이 경북 의성에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뻤다. 한편으론 그의 고향이 경주인데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다. 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지만 이곳 의성에 문학관을 지었다는 게 궁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런데 찾아가기도 전에 큰 꿈을 안고 개관한 문학관이 2025년 3월 25일 불에 타버렸다. 화마가 할퀴고 간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최치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최치원문학관은 차마 마주 바라볼 수 없게 불에 타 버렸다. 뼈대도 추릴 수 없게 되었다. 문학관과 한 몸이 되어 살아가던 뒷동산의 나무들도 활활 타버리고 말았다. 한 성묘객의 부주의가 대형 산불로 번져 나가면서 어마어마한 재산 피해와 인명 피해를 남겼다. 화마가 경북의 의성 지방을 삼켜버리고, 인근 안동, 청송, 영양, 영덕, 울진, 대구까지 큰 피해를 남겼다. 그 당시 전 국토가 불에 모두 타버릴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생각마저 들어 TV 뉴스에 눈과 귀를 뗄 수 없었다.
최치원은 경북 의성과도 관계가 깊었다. 그가 이곳의 천년고찰 고운사(孤雲寺)에 머문 적이 있었다. 이곳에 머물면서 불심을 키웠을 것이다. 의성에 최치원문학관이 세워진 이유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가 머물렀던 곳에 산불로 문학관과 같은 날 큰 재앙을 입고 말았다. 주변의 산들만 보아도 불길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완전 숲의 길이 숯의 길이 되어버렸다. 소나무들은 모두 다 타버렸고, 활엽수들은 움이 트지 않을 때여서 그랬는지 그나마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그 현장을 여름에 찾아갔다. 녹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산이 검은빛을 띠고 있다. 드문드문 활엽수들이 푸른 잎을 힘없이 달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나무 타는 소리와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안타깝게도 경북 곳곳에 일어난 동시다발 대형 산불로 최치원문학관과 고운사의 전각들이 대부분 불에 타버렸다. 29개의 전각 중 18개가 불에 타고 11개만 화마를 이겨냈다고 한다. 뜨거운 불에 몸을 지켜낸 전각들이 대단할 뿐이다. 아직 화마가 휩쓸고 간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만나볼 수 있었다.
먼저 고운사 입구에 자리한 최치원문학관에 들렀다가 바로 고운사로 향했다. 산들이 불에 탄 그대로의 모습이다. 나무들이 우거져 있어야 할 여름인데 나무들이 피할 수 없었으니 모두 숯이 되어버렸다. 다행히 도롯가의 은행나무들은 살아남아 푸른 잎을 달고 있다. 겸연쩍어 보이긴 하나 뜨거운 불길에서 살아남은 은행나무가 신통할 뿐이다. 나뭇가지와 줄기 안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던 은행잎들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상상이 안 된다.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681년)에 의상이 창건하여 원래 이름을 고운사(高雲寺)라고 하였다. 그 후 최치원이 여지, 여사 두 승려와 함께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雨花樓)를 짓고 본인의 호를 따서 고운사(孤雲寺)로 개칭하였다. 이후 이 약사여래불과 석탑을 건립하였다. 창건된 지 200여 년 뒤 최치원이 이곳에서 머물며 그의 호를 따서 사찰의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고운사는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가 전방 기지로 삼고 의병활동의 본거지로도 활동했던 곳이다. 이곳에는 대한민국 보물 가운루, 연수전(延壽殿),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 등 3점이 있다. 그러나 모두 소실되었다.
경북 의성을 향해 달려올 때부터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두렵기조차 하였다.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들어오니 불에 타버린 전각들의 흔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대로 무너진 게 아니라 화마와 맞짱을 끝까지 뜨다가 끝내 장렬하게 전사한 모습이었다. 불을 피한 일주문과 천왕문 안의 전각들이 대부분 잔해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멀리서도 잔해 속에 덩그러니 존재를 알리고 있는 동종(銅鐘)이 보인다. 이 동종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이다.
뉴스에도 화마에 만신창이가 된 그의 모습이 한동안 등장하였다. 그나마 불덩이 속에서도 집은 잃었으나 형체만은 지켜낸 동종이다. 그는 집과 형제들은 모두 잃고 중화상을 크게 입은 채 집터를 그대로 지키고 서 있다. 얼마나 뜨거웠을지는 궁금해할 일이 아니다. 고운사의 동종이 집과 형제들을 잃고, 비를 주룩주룩 맞고 있다. 빗물이 그의 눈물인 듯 내 마음도 슬퍼졌다. 그때 그렇게 기다렸던 비가 내가 찾아간 내내 하염없이 내리고 있다.
고운사는 고찰이기도 했지만, 최근 최치원문학관이 개관하면서 의성의 대표적 관광지로도 더 사랑받았던 사찰이었다. 최치원이 이곳에 머문 연유로 그의 문학관이 7년 전에 개관하였으나 안타깝게도 문학관 역시 화마에 비켜가지 못했다. 옛 멋은 사라졌지만 그래도 하루빨리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화마가 휩쓸고 간 전각들 자리에는 풀꽃들이 드물게 피어나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링거를 맞고 있는 느티나무도 열심히 회복 중이다.
대웅전에서 흘러나오는 스님의 예불 소리가 이처럼 구슬프게 들려온 적은 없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불전함에 마음을 전하고, 비를 맞고 있는 동종과도 작별을 고했다. 하루빨리 상처를 치유하고 제 모습을 찾기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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