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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골목 안에는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훈모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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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나는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지금도 돈암동에서 정릉으로 넘어가는 길과 초등학교 가는 길이 문득 떠오르곤 한다. 어반 스케치 그림을 그리면서 건물들, 특히 옛집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그때의 아른거리지만 설레던 추억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돈암정은 꿈속에도 종종 나타나곤 했다. 돈암장은 담이 높았고 정원이 넓었다. 그 집 거친 시멘트 담벼락을 손으로 스치며 나는 동화 속 비밀의 정원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환국 후 돈암장에서 2년간 거주했다는 그곳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우리 골목 끝 집은 선지해장국집이 있었는데 유명한 맛집이었다. 그래서 골목에 들어서면 구수한 된장 냄새와 비릿한 고기 냄새가 늘 코끝을 간지럽혔다. 비위가 약한 나는 싫어했지만, 지금도 국밥을 먹으면 그 냄새가 난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 아들이 장가를 간다며 나에게 화동(花童)을 부탁했다. 꽃바구니를 들고 신랑 앞에서 꽃을 뿌리며 먼저 들어가는 일이었다. 엄마가 시켜서 했지만, 왜 그런 일을 나에게 시켰는지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친척도 아니고 단지 이웃인 아저씨의 결혼식인데, 그 후 아저씨는 나를 보면 아는 체를 하곤 했다.
집을 나와 골목 어귀에서 서성거리던 그날 해장국집 아저씨가 국을 휘젓다 말고 “너 어디 가니?” 하고 물었다. 난 잠깐 생각하다 “그냥요” 하고 말했다.
그 후 길을 따라 걷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꽃길을 걷는다고 해서 결혼이라는 생활도 늘 꽃길처럼 향기롭기만 할까. 삶이 고단할 때마다 세상 어디엔가 꽃길만 걷는 부부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때 그 아저씨의 안부가 궁금해지곤 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어느 날 산책길서 문득 그 말이 생각났다. 
“너 어디 가니?”
누가 묻는 것도 아닌데 마음속에서 조용히 들렸다. 남편과 나는 새로운 곳을 여행하며 체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방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든 함께였고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걷는 것으로 충분했다. 꽃길만은 아니었지만 50년을 그렇게 살았다. 마지막 괌 여행에서 원주민 불쇼를 보며 아이처럼 즐거워하던 그의 환한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지금은 혼자 걷는다. 양재천변길은 그대로인데 동행이 없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는 예전과 같은데, 내 발걸음 소리만 유독 크게 들린다. 한동안은 낯설고 허망하고 서러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차츰차츰 마음이 풀어졌다.
요즘 나는 자주 멈춰 선다, 골목 모퉁이를 돌아서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주춤거린다. 서걱거리며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을 올려다보니 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빛은 시푸르고, 아무리 옷깃을 여미고 목도리로 감싸도 내 가슴은 여전히 춥다. 아빠와 아이들이 같이 자전거를 타며 웃는 소리가 멀리서 번져오지만 내 귀에는 윙윙거리는 바람소리뿐이다.
“너 어디 가니?”
가끔은 나에게 물어본다. 한참 뒤에야 대답이 나온다.
“그냥요.”
생각해보면 사람 사는 삶도 길과 비슷하다. 젊을 때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중요했고, 중년에는 빨리 가는 것에 온 힘을 쏟았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고 보니 걷고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그저 꾸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예전에는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확연히 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길 위에 서 있다. 우수(雨水)가 지났다고 햇볕이 제법 따뜻하다. 골목골목 돌다 고요한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너 어디 가니?”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아직은 멀었지만, 당신에게 천천히 가고 있는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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