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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오는 봄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희경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6월 6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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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말일 아침, 나는 잠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허리 옆구리에 담이 결리며 온몸이 아파 거동이 쉽지 않았다. 얼마 전에 등에 담이 들어 파스를 붙이고 나았던 터라 당황스럽기만 했다. 소염진통제를 먹으니 그나마 아픔이 약해졌다, 마치 나아지는 것처럼. 그러나 일주일 만에 약을 끊으니 아예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불편함 속에서 낫기를 기다리며 시간만 보내다가 할 수 없이 동네 한의원에 갔다. 나는 그날을 쉽게 잊을 수 없다. 짙은 가을빛 나뭇잎들은 벌써 많이 지고, 찬바람만 윙윙 불었다. 어느덧 11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엔 고통과 힘듦으로 정신이 없었다. 침상에 올라가는 것조차 힘들었다. 남들이 자기 의지대로 움직이는 것이 한없이 부러웠고, 내 자신이 더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내 일상의 계획은 다 사라졌다. 카프카의 소설 주인공을 떠올리며 속울음이 터지는 나날이었다.
‘무엇이 잘못 되었던 걸까?’
많은 생각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체력이 노화에 불을 붙였나. 힘이 부족하니 짜증과 피곤함이 더 커졌던 걸까. 그래서 만사가 귀찮아졌던 것은 아닐까.’
스트레스 지수가 지나치게 높다는 검사 결과에 스스로도 놀랍고 믿기지 않았다. 몸을 숙이거나 구부리는 것은 처절한 고통을 동반하였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치료만이 구원의 손길이었다.
치료 두 달이 지나면서 차츰 나아지니까 어느 순간 옆의 환자들 고통도 알 수 있었다. 힘든 개개인의 상황, 때로는 짧은 외침과 비명까지 비로소 들린다. 어제의 나를 보는 듯했다.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모로 누운 내 허리에 침이 스무 개쯤 꽂힌 것 같다고 추측하게 되다니. 그저 고맙기만 하였다. 참으로 긴 터널 속을 걸음마하는 아기처럼 걸어오지 않았던가. 새삼 그동안의 고통이 지니는 무거운 의미를 생각하며 저절로 감사하게 된다.
치료 방법을 바꾸고 더 큰 통증이 와서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또다시 쩔쩔매기도 했다. 모든 게 쉽지 않았지만 의사선생님과의 진료 약속을 어기지 않았다. 걷는 게 나아졌다고 자기 일처럼 박수치고 좋아하던 의료진의 성원도 기억하였다. 일체의 잡념을 떨치고 나 자신의 건강 회복에 집중했다. 더 이상 침 맞고 치료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떨쳐냈다. 지금 상태인 것만도 기적이라고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병원 가기, 약 먹기, 침 맞기를 유독 싫어하던 나였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이 낯선 것들이 불쑥 친구같이 여겨지기에는 역시 시간이 필요한가 보다. 마음이 가벼워지니 체력이 점차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침 맞기가 일주일에 네 번에서 세 번으로 줄더니, 두 번으로 줄었다.
그러면서 나의 활동도 조심스럽게 변화되어 갔다. 겨우내 침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눈 설레의 황량한 벌판에 혼자 서 있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어도 앓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고독한 고행의 길이었다. 내 건강관리는 내 몫임을 다시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유독 냉기가 심했던 이번 겨울의 된바람 속을 큰마음 먹고 발맘발맘 걸어 보았다. 한겨울 햇빛이지만 등을 쓰다듬어 주는 듯 따스하였다.
걷기를 조금씩 늘리면서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살며시 집안 청소를 시도하였다. 오랜만에 방 정리도 하였다. 내친김에 서랍을 열었는데 갑자기 눈에 띈 조그만 투명비닐 속 만화영화 주인공인 아기공룡 둘리. 중학교에 근무할 때, 1학년 효림이가 교무실 내 책상 위에 수줍게 두고 갔던 것이다. 그때, 이건 무얼까 궁금해서 열어보니 며칠 복용할 약처럼 작은 약포지가 켜켜이 들어 있었다. 하나를 잡고 꺼내니 약국에서 병원 처방약을 줄 때처럼 줄줄이 붙어 나왔었다. 자그마한 사탕이며 초콜릿 등이 각양각색으로 들어 있는 약포지마다 둘리가 귀엽게 웃는 스티커가 붙어 있는 게 아닌가.
“어머!”
동료들이 감탄사를 연발한다. 각각의 둘리 사진 밑으로 약 제목이 모두 다르게 붙어 있기에. ‘선생님을 웃으시게 하는 약’ ‘선생님 감기 걸리지 않게 하는 약’ 등 하나하나 읽을 때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끼고 아끼며 잘 모시고 있다가 하나씩 떼어내 옆자리 선생님들도 드리고, 나도 새알 초콜릿 한 알 한 알을 음미하였다. 고 깜찍하고 고마운 여정 끝에 마지막 하나 남은 것은 끝내 먹을 수 없어 남겨두었다. 그리고 이제 내려놓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둘리가 있는 부분만 오려서 기념으로 두었다. 가끔 꺼내보곤 했다. 글쓰기를 사랑하던 예쁜 제자, 효림이를 생각하며.
초록색 아기공룡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하얀 발바닥을 보이며 여전히 웃고 있다. 금방이라도 당장 ‘호잇!’ 주문을 외우며 우주 악당을 물리치려고 일어날 태세다. ‘선생님께서 젊어지게 되는 약’ 글귀가 마치 확대경을 들이댄 것처럼 커다랗게 보인다. 십여 년 전 감동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아이의 따스한 마음이 봄물결인 양 살며시 다가왔다. 나는 바람을 타고 가벼이 그 시절로 떠나고 싶어졌다. 둘리와 함께. 아, 그리움은 흔들림 없이 고요하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돛단배가 아닐까. 서서히 스미어드는 평안함에 내 마음도 돛을 달고 멈추어진 항해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힘없이 15분 이상 걸리던 한의원 가는 길. 5분 정도에 힘차게 걸어간 봄날 초입에 드디어 의사선생님께서는 ‘진료 끝’을 선언하셨다.
“고생 많이 하셨어요! 추후 관리로 몇 번만 일주일에 한 번씩 봬요.”
단비 같은 말에 울컥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러나 너무 좋은 나머지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던 동토의 마음에 온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기분 좋게 나오는 길, 한의원 실장님이 팔을 크게 벌리며 문간까지 따라 나와 끌어안는다.
“축하드려요!”
봄햇살처럼 따스한 이들의 진심이, 그 소박한 기운이 나를 다시 일어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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