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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높낮이를 지우는 언어——허형만 시에 나타난 사물·몸·기억의 미학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왕식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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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_ 세계 앞에 머무르는 언어를 위하여
문학을 읽는 일은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에 앞서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다.
특히 시를 읽는 일은 언어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와 마주하는 자세를 스스로 점검하는 데 있다.
이 논고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시 읽기는 개념적 해석과 이론적 분류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의미를 확보하는 속도는 빨라졌으나 사물 앞에 머무르는 시간은 짧아졌다. 그러나 시의 본질은 이해의 속도가 아니라 존재와 접촉하는 밀도에 있다. 본 논고는 이 점을 다시 환기하기 위해 허형만 시 세계를 탐색의 중심에 놓는다.
허형만의 시는 거대한 선언이나 이론적 전제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세계를 규정하거나 압도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물 앞에 머무르고 몸의 감각으로 세계를 접촉하며 그 접촉 속에서 인식의 결을 형성한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개별 작품에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지속된 사유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의 시는 거대한 이념을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사물과 감각 속에서 인간 존재의 위치를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이는 상징의 과잉과 해석의 확장 속에서 시가 놓치기 쉬운 근본적 질문을 되돌려 놓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본 논고의 목적은 허형만 시의 의미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다. 외려 그의 시가 드러내는 인식의 구조를 따라가며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의 윤리를 확인하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그의 시 다섯 편을 중심에 놓고, 사물 인식에서 출발한 시적 사유가 노동 속 자기 성찰, 접촉을 통한 관계 윤리, 자연과 나란히 서는 존재 인식, 그리고 일상 기억의 공동체적 확장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이 탐색은 작품 해석의 축적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조명하려는 시도이며, 시가 인간 존재 이해에 기여하는 사유의 장임을 확인하려는 작업이다.
이 글이 지향하는 바는 단순한 비평적 해석의 정리가 아니다. 그것은 시를 통해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재정립하는 데 있다. 문학은 현실을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감각을 정돈하는 언어의 형식이다. 허형만의 시가 보여주는 관조와 절제, 그리고 관계 중심의 인식은 속도와 단절이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서 더욱 의미를 지닌다.
이 글은 한 시인을 해석하는 작업이 아니라 시가 열어 놓은 사유의 공간에 함께 머무르는 기록이다. 언어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 세계와 나란히 서기를 선택할 때 문학은 비로소 존재 이해의 깊이를 확보한다. 이 논고가 그러한 머묾의 시간 속에서 읽히기를 기대한다.

 

2. 사물 앞에 머무르는 윤리_ 판단을 유보하는 시적 인식
허형만 시 세계에서 사물은 해석의 대상이 되기 이전에 먼저 관계의 장을 형성한다. 시인은 사물을 설명하거나 의미화하려 서두르지 않는다. 오히려 사물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인식의 속도를 늦춘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시에서 흔히 발견되는 상징적 과잉이나 해석의 확장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전략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의 시에서 세계는 즉각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충분히 바라보고 느껴야 할 존재로 놓인다.

 

가까이 다가서기 전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어 보이는 아무것도 피울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겨울 들판을 거닐며
매운바람 끝자락도 맞을 만치 맞으면 오히려 더욱 따사로움을 알았다

 

듬성듬성 아직은 덜 녹은 눈발이
땅의 품 안으로 녹아들기를 꿈꾸며 뒤척이고
논두렁 밭두렁 사이사이
초록빛 싱싱한 키 작은 들풀 또한 고만고만 모여 앉아
저만치 밀려오는 햇살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발 아래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흙의 무게가 삶의 무게만큼 힘겨웠지만
여기서만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픔이란 아픔은 모두 편히 쉬고 있음도 알았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겨울 들판을 거닐며」 전문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자연 풍경의 재현을 넘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재조정하는 시적 실험으로 읽힌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대상의 묘사보다 묘사를 수행하는 태도다. 시적 화자는 눈발과 흙, 들풀과 햇살을 관찰하지만 그것들을 의미의 틀에 가두려 하지 않는다. 그는 해석의 속도를 늦추며 사물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확보한다. 이러한 태도는 존재가 드러나는 순간을 기다리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 앞에 머묾’의 사유와 접속한다. 세계는 설명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용되어야 할 장으로 이해된다.
작품 속 감각의 배치는 이러한 존재 인식의 구체적 기반을 형성한다. 질척이는 흙의 촉감, 겨울 공기의 밀도, 생명의 미세한 움직임은 단순한 서정적 장치가 아니다. 그것들은 몸을 통해 세계와 접촉하는 지각의 층위를 보여준다. 메를로퐁티가 강조한 바와 같이 몸은 세계를 바라보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얽혀 있는 존재 방식이다. 허형만의 시적 주체 역시 관찰자가 아니라 참여자로 위치한다. 세계는 시선의 대상이 아니라 신체적 경험 속에서 함께 생성되는 장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감각적 접속은 작품 종결부에서 윤리적 태도로 전환된다.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심은 인식의 절제를 선언하는 문장이다. 이는 대상의 의미를 규정하려는 언어의 권력을 자발적으로 중지시키는 행위이며,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앞에서의 책임 윤리와 상응한다. 세계를 해석하지 않는 선택은 무지의 표현이 아니라 타자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않으려는 태도다. 허형만 시에서 판단 유보는 지적 보류가 아니라 관계의 존중을 실천하는 윤리적 결단으로 이해된다.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인간 중심적 인식 구조를 은근히 해체한다. 들판은 결핍된 공간이 아니라 잠재적 생명의 장이며, 그 가능성은 화자의 태도 변화 속에서 드러난다. 세계의 가치가 변화한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이동한 것이다. 이는 외부 현실의 변형이 아닌 인식 구조의 전환을 통해 의미가 생성되는 허형만 시학의 특징을 보여준다.
요컨대, 「겨울 들판을 거닐며」는 감각적 체험을 기반으로 존재 인식과 윤리적 태도를 결합시키는 작품이다. 사물 앞에서 멈추고, 몸으로 접촉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과정 속에서 시는 세계와의 관계 방식을 재구성한다. 이러한 시적 구조는 허형만 문학이 단순한 자연 서정을 넘어 존재론적 사유와 윤리적 실천의 장으로 기능함을 입증하며, 그의 시 세계가 현대 서정시 담론 속에서 독자적 위치를 확보하는 근거가 된다.

 

3. 자기 성찰의 노동_ 존재를 닦는 수행의 미학
허형만 시 세계에서 사유는 추상적 관념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몸의 경험과 반복적 행위를 통해 인식이 형성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새로이 이사를 와서
형편없이 더럽게 슬어 있는
흑갈빛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지나온 생애에는
얼마나 지독한 녹이 슬어 있을지
부끄럽고 죄스러워 손이 아린 줄 몰랐다

 

나는, 대문의 녹을 닦으며
내 깊고 어두운 생명 저편을 보았다. 
비늘처럼 총총히 돋쳐 있는
회한의 슬픈 역사 그것은 바다 위에서 
혼신의 힘으로 일어서는 빗방울

 

그리 살아온
마흔세 해 수많은 불면의 촉수가
노을 앞에서 바람 앞에서
철없이 울먹였던 뽀얀 사랑까지
바로 내 영혼 깊숙이
칙칙하게 녹이 되어 슬어 있음을 보고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온몸으로 온몸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녹을 닦으며」 전문

「녹을 닦으며」는 사물에 대한 관찰을 넘어 행위 자체가 존재 인식의 중심으로 전환되는 허형만 시학의 핵심 지점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녹이라는 대상보다 그것을 닦는 몸의 지속적 움직임이다. 시적 화자는 사물의 상태를 분석하거나 상징화하지 않는다. 대신 반복되는 노동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며 존재 이해의 경로를 확보한다. 이는 사유가 관념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인식을 몸의 실천 위에 정초시키는 시적 구조라 할 수 있다.
녹은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시간의 축적이 가시화된 흔적이다. 그것은 삶의 경과가 표면에 남긴 응결이며, 화자는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와 직접적으로 접촉한다.
이때 노동은 정화의 행위라기보다 기억과 대면하는 의식에 가깝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가 드러나는 방식이 사유가 아닌 수행 속에서 나타나듯, 이 작품에서 존재 이해는 행동을 통해 열린다. 녹을 닦는 행위는 사물의 변화를 넘어서 주체의 존재 상태를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
특히 작품에 나타나는 감각적 경험은 인식의 구체적 기반을 형성한다. 손가락의 통증, 표면의 거칠음, 반복적 마찰의 리듬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메를로퐁티가 말한 신체 지각의 구조와 연결된다. 몸은 세계를 인식하는 외부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얽혀 있는 존재 방식이며, 허형만의 시적 주체는 바로 이 신체적 접촉 속에서 자기 존재를 재인식한다. 감각은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통로가 된다.
또한 이 작품의 수행 구조는 결과보다 과정의 지속성을 강조한다. 녹이 완전히 제거되는 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닦아내는 행위가 계속된다는 사실이 의미를 형성한다. 이는 동양적 수행 미학과도 맞닿는다. 깨달음은 도달하는 사건이 아니라 반복 속에서 스며드는 체험이며, 존재 이해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으로 지속된다. 허형만 시에서 노동은 목적 지향적 성취가 아니라 자기 정렬을 위한 시간의 형식이다.
이 과정에서 나타나는 자기 인식은 자기 비난이나 회한에 머물지 않는다. 화자는 과거를 제거하려 하지 않는다. 외려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 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러한 태도는 레비나스적 윤리의 확장으로 읽힐 수 있으며, 자기 자신을 타자처럼 존중하는 관계 윤리로 이어진다. 성찰은 처벌이 아니라 화해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는 허형만 시 전반에 흐르는 관용의 정신을 형성하는 근간이다.
요컨대, 「녹을 닦으며」는 허형만 시의 미학적 핵심을 집약한다. 사물과 접촉하는 몸의 노동이 존재 인식으로 전환되는 구조, 반복 속에서 축적되는 사유의 리듬, 그리고 자기 이해를 향한 수행적 태도는 그의 시가 감각적 서정을 넘어 실존적 층위로 확장되는 이유를 보여준다. 여기서 노동은 현실 재현의 장치가 아니라 존재를 정화하고 이해하는 방법이며, 시는 그 수행의 흔적을 기록하는 언어로 자리한다.

 

4. 관계의 체온_ 인간 접촉의 시학
허형만 시 세계에서 사물은 고립된 대상이 아니라 관계를 발생시키는 매개로 기능한다. 「문」은 이러한 시적 인식이 가장 간결한 언어로 구현된 작품이다.
문은 건축적 구조물로 존재하지만, 시 속에서는 인간 사이의 접촉과 환대의 감각을 환기하는 장치로 전환된다.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자동화된 편의가 강조되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손으로 잡는 문손잡이의 온기를 강조한다. 이 선택은 단순한 감각적 회상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본질을 재확인하려는 시적 태도다.

 

세상이 좋아져
회전문처럼 스스로
돌아가며 열리는 문도 있고
자동문처럼 앞에만 서면
스르르 열리는 문도 있지만
손잡이가 있는 문은
잡아주는 손의 따뜻한 촉감으로
얼마나 행복한가.
사람도 마찬가지라
환한 미소로
가까이 다가와 잡아주는 손은
얼마나 따뜻한가.
—「문」 전문

 

「문」은 허형만 시 세계에서 사물 인식이 인간 관계의 윤리로 확장되는 결정적 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문은 공간을 구획하는 구조물이 아니라 관계가 발생하는 통로로 재구성된다. 기술 문명이 제공하는 자동화된 개방 장치들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시적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손으로 잡아 여는 문 손잡이의 촉감이다.
이 선택은 향수적 감각의 환기가 아니라 존재 이해의 방향을 제시하는 인식의 전환이다. 세계를 이해하는 중심 감각이 시각에서 촉각으로 이동하는 순간, 관계는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경험의 장으로 변화한다.
이 작품에서 촉각은 단순한 감각 요소가 아니라 윤리적 의미를 생성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손잡이를 잡는 행위는 물리적 작동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타자와 연결되는 몸짓이며,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이다.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에서처럼 몸은 세계와 분리된 주체가 아니라 세계 속에 얽혀 있는 존재 조건이며, 허형만 시의 주체 역시 촉각적 경험을 통해 관계의 실재성을 확인한다. 문을 여는 행위는 공간 이동이 아니라 관계의 가능성 속으로 들어가는 참여적 사건이 된다.
또한 자동문과 손잡이 문 사이의 대비는 기술 비판이 아니라 관계 인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자동화된 구조는 접촉을 생략하지만, 손잡이는 체온을 요구한다. 이 체온은 단순한 물리적 온도가 아니라 타자 인식의 정서적 기반이다. 레비나스의 타자 윤리가 얼굴의 마주침에서 발생하듯, 이 작품에서 관계 윤리는 접촉의 감각에서 발생한다. 허형만의 시는 인간을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접촉을 통해 구성되는 존재로 이해하며, 관계의 윤리를 감각적 경험 속에 정착시킨다.
문을 여는 행위가 관계 진입의 몸짓으로 해석되는 순간, 사물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인간 사이를 연결하는 매개적 존재가 된다.
이는 하이데거가 언급한 사물의 세계-형성 기능과도 접속되는 지점이다. 사물은 도구적 기능을 넘어 인간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는 장이며, 허형만 시에서 문은 관계적 존재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적 장치로 기능한다. 이러한 인식은 사물과 인간의 위계를 해체하고 상호 작용 속에서 의미를 형성하는 관계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어진다.
요컨대, 「문」은 허형만 시학의 확장 구조를 보여준다. 사물 앞에 머무르는 관조, 몸의 노동을 통한 자기 성찰이 타자와의 접촉 속에서 관계 윤리로 전환되는 흐름이 이 작품에서 완성된다. 시는 거대한 사회 담론을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적 교감의 필요성을 감각의 차원에서 설득한다. 이러한 방식은 허형만 시가 서정의 영역을 넘어 존재론적 관계 이해의 장으로 기능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의 시에서 접촉은 단순한 감각 경험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근본 조건이며, 시는 그 조건을 일상의 장면 속에서 조용히 드러내는 언어로 자리한다.

 

5. 존재 위계의 해체_ 자연과 인간의 동등성 인식
허형만 시 세계에서 자연은 인간을 둘러싼 배경이나 상징적 장치로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동일한 존재 층위 위에서 마주 서는 동반자로 나타난다. 「바위와 개미」는 이러한 인식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으로, 삶의 후반에 이른 화자가 자연과 마주하는 장면을 통해 존재의 위계를 해체하는 시적 사유를 보여준다.

 

나는 어느덧 생의 팔부 능선에 다다랐다.
투명하게 비어 있는 하늘과의 짧아진 거리와
내려다보이는 땅과의 거리가 아득해진 나이
희망하며 살아온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잠시 바위 위에 앉아 지난 삶을 돌아보는 시간
바위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나는 바위 속으로 서서히 걸어 들어간다.
은은한 꽃향기와 바람 소리가
내 걸어가는 길을 얼어준다.
등불을 들고 내 앞에서 인도하는 바위는
성자를 닮았다
나는 일순!
바위 위에서 좌선하고 있는 한 마리 개미를 보았다.
—「바위와 개미」 전문

 

「바위와 개미」는 허형만 시 세계에서 자연 인식이 단순한 관조의 단계에서 벗어나 존재론적 전환으로 나아가는 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자연은 인간을 둘러싼 풍경이나 상징적 장치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동일한 층위 위에서 마주하는 존재의 타자이며, 시적 화자는 그 앞에서 자신을 중심으로 위치 짓는 방식을 내려놓는다.
생의 고도에 도달했다는 자각에서 출발하는 시적 발화는 곧 인간 중심의 회고로 향하지 않는다. 외려 바위 위에 앉는 몸의 자세를 통해 자신을 자연 속 한 존재로 배치하며 존재의 위계를 완화한다.
작품에서 바위와 개미가 동시에 인식되는 장면은 존재 위계 해체의 결정적 순간이다. 거대한 것과 미세한 것이 동일한 시야 안에 놓일 때 세계는 크기와 기능에 따른 서열 구조를 상실한다.
이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가 대상화되지 않고 스스로 드러나는 장면과 맞닿아 있다. 화자는 자연을 지배하거나 해석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과 함께 놓이며 존재의 다양성을 수용한다. 이때 자연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위치를 재구성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바위에 대한 촉각적 경험은 메를로퐁티의 신체 현상학적 인식 구조를 환기한다. 바위의 온기와 질감, 공기의 흐름, 향기의 확산은 시각적 관찰 이전에 몸의 접촉을 통해 세계가 이해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허형만의 시적 주체는 자연을 바라보는 외부 관찰자가 아니라 자연 속에 얽힌 존재이며, 이러한 신체적 접속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경계를 완화한다. 세계는 대상과 주체로 나뉘지 않고 경험 속에서 함께 구성된다.
개미의 등장은 이러한 존재 인식을 윤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다. 인간보다 미세한 존재가 동일한 장면 속에서 좌선의 형상으로 제시되는 순간, 인간 중심의 가치 척도는 흔들린다. 이는 레비나스적 타자 윤리가 인간 범주를 넘어 확장되는 지점을 연상시킨다. 타자의 존엄은 크기나 기능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며,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중의 근거가 된다. 허형만 시에서 자연은 위로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겸허하게 만드는 윤리적 거울로 작용한다.
이러한 자연 인식은 남도적 체험 기반의 토양 감각과도 깊이 연결된다. 자연은 관념적 사유의 대상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접촉되고 체험되는 현실이다. 바위와 공기, 생명의 움직임은 철학적 개념 이전에 몸으로 경험되는 존재 조건이며, 이 경험은 세계 이해의 토대를 형성한다. 허형만 시의 생태적 인식은 추상적 환경 담론이 아니라 체험적 존재 감각 속에서 형성된다는 점에서 독자적 깊이를 지닌다.
요컨대, 「바위와 개미」는 허형만 시 세계의 존재론적 지평을 명확히 드러낸다. 인간은 중심이 아니라 다양한 존재와 함께 놓이는 하나의 구성원으로 재위치된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세계는 지배와 서열이 아닌 공존과 관계의 구조로 이해된다. 허형만의 시가 자연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취할 때, 그의 시적 사유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확장하며 깊이를 획득한다. 자연과 나란히 서는 이 태도야말로 그의 시가 제시하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 이해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6. 기억의 공동체성_ 일상 속 역사 복원의 시학
허형만 시 세계에서 기억은 개인적 회상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적 시간과 접속하며 역사적 층위를 드러낸다. 「버버리찰떡」은 이러한 기억의 확장 구조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작품으로, 음식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통해 개인 경험과 사회적 기억을 동시에 호출한다. 시 속에서 찰떡은 단순한 향토적 사물이나 감각적 체험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공동체의 흔적을 담아내는 매개로 작동한다.

 

떡할매가 힘들어하면
이발사도 한 말 치고
순사도 한 말 치고
체보도 한 말 치고
초등생 아들도 한 말 치고 학교 가야 했다는
찰떡이 안동에서 왔네.

 

꼬박 하루 걸리던 서울 유학길에
신문지에 말아 노모가 건네주던 떡 아침 첫 떡을 사오라던 심부름에 떡매를 쳐주고 사왔다고 전해지는 찰떡이
안동에서 왔네.

 

떡이 워낙 크고 맛이 좋아
한 입 베어 물면 말을 할 수 없어
버버버 벙어리처럼 된다는
버버리찰떡 안동에서 왔네.

 

일제강점기 김노미 할머니가
지금은 사라진 안동시 안흥동 경북선 철길 밑에서 
찰떡에 팥고물을 잔뜩 묻혀 팔기 시작했다는 
전설적인 떡이 안동에서 왔네.

 

이 떡 냠냠 맛있게 먹으며
말 많은 세상 차라리
버버리가 되었으면 좋겠네.
버버리가 되어 강물로나 흘렀으면 좋겠네.
버버리가 되어 바람으로나 흘렀으면 좋겠네.
—「버버리찰떡」 전문

 

「버버리찰떡」은 허형만 시 세계가 개인적 성찰의 범주를 넘어 공동체적 시간과 접속하는 지점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에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의 재현이 아니라 생활 감각 속에서 재구성되는 역사적 체험으로 나타난다. 시적 대상인 찰떡은 음식이라는 일상적 소재이지만, 그것은 개인의 미각 경험에 머무르지 않고 시대와 공간, 공동체의 노동과 이동, 전승의 흔적을 동시에 호출한다. 이처럼 사소한 물질적 대상이 역사적 층위를 드러내는 매개로 작동하는 구조는 허형만 시학의 중요한 확장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지명과 인물, 유통의 경로는 역사 서술의 형식을 취하지 않으면서도 집단 기억의 축적 과정을 드러낸다. 이는 리쾨르가 말한 기억과 서사의 상호 구성 관계와도 맞닿는다. 기억은 단순히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속에서 재배치되며 공동체적 의미를 획득한다. 허형만의 시는 거대 사건을 직접 기록하지 않는다. 대신 생활의 장면을 통해 역사적 감각을 체험하게 한다. 독자는 특정 사건을 인식하기보다 공동체가 살아온 시간의 질감을 느끼게 되며, 이 과정에서 기억은 개인적 정서를 넘어 사회적 층위로 확장된다.
또한 이 작품에서 음식의 물질성은 메를로퐁티적 신체 경험과 연결된다. 맛과 질감, 씹는 행위는 단순한 감각 묘사가 아니라 세계와 접촉하는 신체적 방식이다. 기억은 관념 속에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감각 속에 각인되며, 이러한 감각적 기억은 공동체 경험을 재현하는 통로로 작동한다. 허형만 시에서 음식은 향토적 정서를 환기하는 소재가 아니라 존재 경험을 역사와 연결하는 감각적 매개다.
작품 후반부의 침묵 지향적 발화는 현실 인식의 또 다른 층위를 드러낸다. 말이 넘치는 시대 속에서 말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태도는 단절이 아니라 존재를 보존하려는 윤리적 전략으로 읽힌다. 이는 레비나스적 의미에서 타자에게 의미를 강요하지 않는 책임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침묵은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여백의 제공이며, 독자가 기억의 의미를 스스로 구성하도록 열어두는 방식이다. 허형만 시의 언어 절제는 바로 이 참여적 해석 구조를 가능하게 한다.
이처럼 「버버리찰떡」은 허형만 시 세계의 사회적 확장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사물 관찰에서 출발한 시적 사유는 몸의 경험을 거쳐 공동체 기억으로 확장되며, 개인의 삶은 역사적 시간과 접속한다. 이는 거대 담론 중심의 역사 서술에 대한 대안적 방식으로, 생활 감각 속에서 역사성을 복원하는 시적 전략이다. 그의 시는 사건을 기록하지 않으면서도 시간의 지속성을 체험하게 하며, 공동체 기억의 정서적 기반을 형성한다.
요컨대, 이 작품은 허형만 문학이 지닌 현실 인식의 깊이를 드러낸다. 일상의 물질적 경험이 사회적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 속에서 시는 인간 삶의 지속성과 공동체의 기억을 기록하는 장이 된다. 그의 시가 사소한 사물을 통해 역사적 울림을 생성하는 이유는 기억을 개인의 내면에 가두지 않고 공동체의 시간 속으로 확장시키는 이러한 시적 구조에 있다.

 

7. 결론_ 세계와 나란히 서는 시의 윤리
본 논고는 허형만의 시 다섯 편을 중심으로, 그의 시 세계가 어떠한 인식 구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존재의 윤리를 구성하는지 살펴보았다. 분석 결과 허형만의 시는 거대한 관념이나 선언으로 세계를 설명하기보다, 사물 앞에 머무르는 태도에서 출발하여 몸의 경험, 관계의 체온, 자연과의 동등성, 공동체 기억의 확장으로 점층적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소재의 나열이 아니라, 시가 세계와 맺는 방식 자체를 재구성하는 한 방법론이며, 오늘의 문학이 다시 회복해야 할 감각과 윤리의 방향을 제시한다.
첫째,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서 확인되는 판단 유보의 태도는 허형만 시학의 출발점이다. 그는 세계를 즉시 규정하거나 의미화하지 않고 감각이 머무는 시간을 확보함으로써, 해석의 권력을 절제하는 윤리를 드러낸다.
둘째, 「녹을 닦으며」는 사유가 관념이 아니라 행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복되는 노동 속에서 형성되는 성찰은 결과보다 과정의 지속성에 방점이 찍히며, 시를 수행의 언어로 전환한다.
셋째, 「문」은 촉각의 체온을 통해 관계 윤리가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보여준다. 문 손잡이의 온기는 기술의 편의가 지우기 쉬운 인간적 접촉의 가치를 재확인하게 하며, 사물이 인간 사이의 윤리적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다.
넷째, 「바위와 개미」는 자연과 인간의 존재 위계를 해체한다. 거대한 바위와 미세한 개미, 그리고 인간이 한 장면 속에 나란히 놓일 때 세계는 서열이 아니라 공존의 구조로 재편된다.
다섯째, 「버버리찰떡」은 기억을 개인의 회상에서 공동체의 시간으로 확장한다. 생활 감각 속에 축적된 역사성은 거대 담론의 방식이 아니라 체험의 방식으로 독자에게 전달되며, 시가 공동체 기억의 보존과 갱신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다섯 작품을 관통하는 허형만 시의 핵심은 ‘세계 앞에 머무르는 언어’에 있다. 그의 시는 세계를 소유하지 않으며, 타자를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낮은 자리에서 오래 바라보고, 몸으로 접촉하며, 관계의 온기를 회복하고, 자연과 나란히 서고, 기억을 공동체로 넓힌다. 이러한 태도는 문학을 단순한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감각을 정돈하는 윤리적 실천으로 되돌려 놓는다.
요컨대, 허형만의 시는 시가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시가 어떤 방식으로 세계와 관계 맺느냐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분명하다. 언어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 세계와 나란히 서기를 선택할 때, 시는 존재 이해의 깊이를 확보한다.
본 논고는 허형만의 시 세계가 바로 그 선택을 지속해온 기록임을 확인하며, 그 선택이 오늘의 문학에 요청되는 윤리적 방향임을 결론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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