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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채문수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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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인간이 탈을 쓰도록 유혹한다. 인간은 본연의 사악을 감추려고 천사의 얼굴을 빌린다. 악인은 그럴싸한 미소 뒤에 비수를 숨긴 채 다가온다. 하회 양반탈처럼 넉살 좋은 웃음에 가려진 속내를 선량한 이들이 꿰뚫어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강단 앞에서 강론을 펼치는 일부 성직자조차, 금기의 벽 뒤에서 쾌락과 돈을 탐닉하는 시대다. 선인의 탈을 쓴 채 악행과 추행과 사행을 일삼는 자들이 되레 떵떵거리는 세상이다. 자고 나면 어제의 상식이 힘없이 무너지는 속도의 시대다. AI의 거센 물결 속에서 정신을 차릴 틈도 없다. 보이스피싱 같은 신종 범죄는 평온한 가정을 무참히 짓밟고 벼랑 끝으로 내몬다. 참으로 분통 터지는 안타까운 세상이다.
외신은 강대국들의 신무기 전쟁놀이 뉴스를 홍수처럼 쏟아낸다. 많은 사람들이 죄 없이 죽어가고 가족들의 비극은 극에 달해 있다. 포격으로 무너진 건물, 불길 속에서 피 흘리며 삐져나오는 아이들과 여인들…. 그 처참한 광경은 눈뜨고 볼 수가 없다. 화면 속 비극에 분노를 터뜨려 보지만 강대국의 횡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극의 현장은 위성을 타고 생생하게 전해져 온다. 양심 있는 사람들은 분노하고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지만 속수무책이다.
“이 나쁜 인간들, 죄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많이 죽이고 삶의 터전을 쑥대밭으로 만들다니, 천벌을 받아 마땅해.”
다혈질인 박충현 차장이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마치 입안에 든 오물을 뱉어내듯 낮고 불쾌한 음성이었다. 옆자리의 김 기자가 슬쩍 곁눈질할 뿐, 누구 하나 동조하는 직원은 없었다. 다들 제 앞가림하기 바빠 타국의 비극에 무관심한 탓이었다.
이 시간쯤이면 타사들의 가판 신문이 앞다투어 배달된다. 충현은 커튼을 젖히듯 신문을 펄럭이며 넘기다 짧게 한마디를 던졌다.
“잘들 만든다.”
평소 지각이 잦던 H신문도 오늘따라 제시간에 도착해 있었다. 신문을 대충 훑어본 뒤 별일 없으면 퇴근하는 게 충현의 일과였다. 하지만 타사에 ‘도꾸다니(특종)’ 기사가 실려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즉시 윤전기를 멈추고 비상회의를 소집해야 하며, 퇴근은 저 멀리 물 건너간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라며 신문을 넘기던 충현의 눈길이 멈췄다.
H신문. 다른 일간지보다 기본 지면이 적은데도 한 면 전체를 할애한 특집 기사가 눈에 확 띠었다. ‘흙에 사는 사람’ 기사 끝에는 최강일 기자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못된 놈.”
이름 석 자를 확인하자마자 조건반사적으로 비속어가 튀어나왔다.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역류하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이 자식, 언젠가는 기어이 그 가증스러운 탈을 벗겨버리고 말겠어.’
충현은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모멸감과 말 못할 울분을 삭일 길이 없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단 한 번만이라도 이 감정을 시원하게 쏟아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가슴속에 겹겹이 쌓인 앙금이 조금이라도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참는 것도 한도가 있지. 언제까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어.”
충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누군가의 가증스러운 탈을 반드시 벗기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여우처럼 교활한 그 탈을. 그게 최강일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충현이 탈에 매료된 것은 중학생 때 국립박물관에서 본 하회 양반탈 때문이었다. 특히 턱 부분이 따로 분리되어 끈으로 연결된 구조가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주먹코에 게슴츠레하게 웃는 눈매, 그리고 헤벌어진 입은 위엄 있는 양반이라기보다 이웃집 노인의 순박한 표정을 닮아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탈에 대한 막연하지만 강렬한 흥미가 싹튼 것은. 지금 되짚어보면, 분리된 턱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는 그 생경한 가능성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 같다.
고교 시절 하회마을 수학여행은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친구들이 영의정까지 지냈던 유성룡의 전통가옥이나 유물을 구경할 때, 충현의 발길은 마을 어귀 공방으로 향했다. 깎고 다듬어지는 탈의 형상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고등학생에겐 제법 부담스러운 가격이었으나, 망설임 끝에 그는 박물관에서 보았던 양반탈을 주문했다. 제작 기간이 필요해 두 달 뒤에나 소포로 보내주겠다는 답이었다. 주문을 충동적으로 마치고 돌아서자마자 불안이 엄습해 왔다. 이 사실을 알면 불호령을 내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도리동 모래밭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친구들이 한창 유희에 빠져 있을 때도, 충현의 머릿속은 온통 탈 생각뿐이었다. 박물관에서 본 그 탈을 소유하게 된다는 설렘, 약속이 지켜질지에 대한 의구심, 혹여 조잡한 물건이 오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이 가시덤불처럼 엉켜 마음을 어지럽혔다.
기다림의 두 달은 너무 길었다. 마침내 도착한 양반탈은 박물관의 전시품보다 채색이 한결 밝고 선명했다. 오히려 손때가 묻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어머니의 매서운 꾸중을 한바탕 듣고 나서야 겨우 탈을 자기 방 벽에 걸었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났고 마음이 넉넉해졌다. 방 안에 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한 위안과 자신감이 생겨났다. 대학 입시와 취업 전선에 뛰어들 때도, 사랑하는 여인이 생겼을 때도 충현은 탈을 향해 간절히 빌었다. 그 영험함 덕분인지 삶의 굽이마다 큰 맺힘 없이 일이 풀려나갔다. 세월이 흐를수록 양반탈은 충현의 마음속에서 수호신으로 자리 잡았다. 충현은 해외 출장을 다녀올 때는 그 나라의 탈을 수집하는 버릇이 생겼다. 지금은 서재 방 가득 세계의 탈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람들이 제 얼굴 위에 짐승의 마음을 감추고 호인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기자가 된 이후였다. 특히 회장은 마음속에는 늑대가 살고 있는데도 포대화상의 인자한 탈만 보여 주었다. 약자들을 집요하게 짓밟는 비정하고 잔인함이 몸에 배어 있었다. 고위층이라 할지라도 눈 밖에 나면 어김없이 ‘빨갱이’로 몰아세웠고, 온갖 패악을 부리며 인격을 폄훼하는 기사를 쓰도록 강요했다. 사냥에 성공한 늑대의 포효 같은 비정함. 그것은 소름 끼치도록 몸서리쳐지는 그 인간의 진면이었다. 그 일가는 권력에 갖은 줄을 대고 편법을 동원해 부동산투기로 거부가 되기도 했다.

 

새벽녘 흩뿌린 비가 먼지를 씻어낸 덕분인지, 하늘은 눈부시게 맑았다. 싱그러운 바람이 사람들의 기분을 들뜨게 했지만, 충현은 교외가 아닌 교정으로 취재를 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웠다. 며칠 전 국장은 충현을 불러 대선 현장의 생생한 기사를 주문했다. 단순히 짜깁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야당 후보의 단점을 낱낱이 파헤치고 여당 후보의 면모를 부각시켜 유권자들의 표심을 흔들라는 노골적인 지시였다.
“이번엔 절대 좌파 빨갱이가 당선돼선 안 돼. 목숨 걸고 사선을 넘어와 지켜낸 나라인데…, 그 빨갱이 놈들이 설치게 둘 순 없지. 회장님 뜻이야.”
국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박 차장, 이번에 여당 후보에 대해 제대로 한번 써봐. 하늘로 비천하는 용을 만드는 거야. 번개와 벼락을 치고 뇌성을 울리면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용을 그려보란 말이야. 저 개, 돼지 같은 인간들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말이야.”
충현은 이런 식의 취재가 넌더리가 났다. 차라리 초년병 시절이라면 모를까, 연차가 쌓일수록 양심의 가책은 무거워졌다. 신입기자를 보낼까 고민도 했지만, 회장의 특명이 떨어진 이상 직접 발로 뛸 수밖에 없었다. 무거운 발걸음이었다. 생계라는 굴레가 그의 족쇄가 되었다. 휴일임에도 카메라 가방을 챙겨 나서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눈초리가 싸늘했다.
언젠가 동창 모임에 다녀온 아내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쏘아붙였다.
“여보, 당신은 도대체 언제 진급하는 거예요?”
생나무 가지를 찢듯 느닷없고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충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기자란 직업에 진급이 그리 대수냐며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내는 ‘당신이 무능해서 진급이나 하겠어?’라고 묻는 듯한 연민 섞인 눈길을 던졌다. 그러고는 옷을 갈아입는다는 핑계로 방에 들어가면서 문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아내와의 사이에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해자가 가로놓여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충현은 쏘아붙이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오늘, 그는 평소처럼 다녀오겠다는 말만 안방에 보낸 채 정견 발표가 열리는 공원으로 향했다.
현장에는 다양한 계층의 청중들이 모여 있었고, 정견 발표는 이미 중반을 넘어서고 있었다. 여당 후보가 이런저런 공약을 쏟아냈지만, 충현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역대 후보들이 늘 우려먹던 레퍼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새로울 것 없는 공약이 남발되는데도 동원된 운동원들의 광기가 지나칠 정도였다. 한 마디 끝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환호와 박수는 흡사 광신도들의 부흥회를 방불케 했다. 다시 좌파 정권이 들어서면 나라가 망한다는 구국 일념에 목숨이라도 건 애국자 행세를 했다. 후보의 연설이 계속될수록 그들의 눈빛은 신들린 듯 번득였다. 후보들의 연설은 하도 여러 번 들어서 첫 마디로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이 되었다.
충현은 단상의 후보를 보며 엉뚱한 상상에 빠졌다.
‘저 자는 지금 어떤 탈을 쓰고 마음속에 도사린 사악한 마음을 위장하고 있을까?’
강렬한 햇볕을 피해 나무 그늘로 몸을 숨기고 사진 몇 컷을 찍었다. 당장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특종은커녕 피라미 한 마리라도 건져야 할 형편이라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연설이 끝나자 후보의 이름을 연호하는 함성이 아까보다 더 거세어졌다. 후보의 차량이 빠져나가자 운동원들도 썰물처럼 따라 나갔다. 며칠 전 야당 후보 연설이나 오늘의 여당 후보 연설이나 변별력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충현은 교문 밖으로 발길을 옮기며 문득 가족들과의 외식을 떠올렸다. 다 같이 밥을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오늘은 식구들과 모처럼 외식이라도 해야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후텁지근한 날씨 탓인지 시원한 음료가 생각나 편의점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릴 때였다.
“아니, 이거 박 선배님 아니십니까?”
H신문의 최강일 기자였다. 말끝에 묘한 뉘앙스를 담은 웃음을 흘리는 그를 본 순간, 충현은 큰 나무 밑을 지나다 목덜미에 송충이가 떨어진 듯 소름이 돋았다. 왈칵 열이 올랐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최 기자는 충현이 운동장에 들어설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 최 기자. 웬일인가?”
“저도 선배님처럼 뭐 좀 건질 게 있나 해서 나와 봤죠.”
최 기자가 비위 좋게 한마디를 보탰다.
“선배님은 후배들 안 시키고 직접 뛰시네요. 날도 더운데 시원한 맥주나 한잔 하시죠.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충현은 순간 찰거머리 같은 그를 떼어낼 궁리를 했다.
“그래, 한 건 건졌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충현은 말끝을 흐렸다. 선후배 가리지 않는 그 안하무인의 말투도 싫었지만,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그의 눈빛이었다. 상대를 꿰뚫어보는 듯한 그 싸늘한 시선. 마치 옷을 한 꺼풀씩 벗겨 내는 것 같은 섬뜩함이 느껴졌다. 귀공자 같은 흰 피부에 가냘픈 체구 어디서 그런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지 늘 의문이었다. 어쩌면 유약한 인간이 본능적으로 휘두르는 날 선 자기방어 기제일지도 몰랐다.

 

두 사람의 인연은 충현이 P일보에서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K대에서 이름난 운동권 출신이었던 최강일이 수습으로 입사했을 때, 그는 이미 쟁쟁한 운동권 경력을 훈장처럼 앞세우고 들어왔다. 두 사람은 극과 극이었다. 충현이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지 않는 신중파라면, 최강일은 삯은 다리라도 놓여만 있다면 일단 뛰어들고 보는 저돌적인 스타일이었다.
“최 기자, 이 기사 이렇게 좀 고쳐 쓰지.”
“아, 그래요? 선배님, 그럼 그 기사 그냥 취소하시죠.”
목소리에 날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명백한 거부였다. 처음부터 작정한 도전이었다. 옛날 선배들이라면 이런 투의 대거리를 들었을 때, 당장 기사 뭉치를 그 면상에 집어던졌을 것이다. 충현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눌러 임계점을 넘지는 않았다. 나이가 든 탓일까. 서슬 퍼런 패기는 간데없고, 비겁한 인내와 구차한 요령만 느는 것 같아 씁쓸했다.
어느 날은 부장이 그를 따로 불렀다.
“박 차장, 밑에 최강일이 말이야. 그 친구 좀 잘 키워 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오더임이 분명했다. 눈치로 보아하니 회장실이나 사장실쯤에서 내려온 지시 같았다. 하지만 정작 최강일은 매사에 도전적이고 다혈질이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일에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어디서 그런 불도저 같은 추진력이 솟구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적으로 돌린 채, 강신 무당처럼 아슬아슬하게 작두를 타고 있었다. 그는 호오가 분명해 타협점을 찾기 어려웠다.
결국 잘 키워주고 자시고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는 수습기자 과정인 ‘사스마와리(경찰서 순회 취재)’ 기간도 채우지 않고 사표를 던지고 미련 없이 떠나 버렸다. 떠나면서 남긴 그 묘한 고별의 말은 독한 약의 뒷맛처럼 오래도록 충현의 입맛을 쓰게 했다.
“선배님. 선배님은 그 ‘찌라시’ 사주한테 충성하면서 오래오래 건재하세요.”
참기 힘든 빈정거림이었다. 최강일은 충현의 가슴에 대못을 탕탕 박아 놓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유유히 사라졌다. 충현은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안면 근육만 딱딱하게 굳혔다. 그간 수많은 선후배가 탯줄이 끊기듯 일터인 신문사를 떠나갔지만, 이토록 패악을 부리면서 떠난 동료는 없었다. 혹시 최강일은 자신이 선배들의 따돌림으로 등 떠밀려 나간다고 오해했던 것일까.
그날 충현은 자신을 반추해 봤다. 기백도 없이 무력한 자신이 초라하고 쓸쓸하게 느껴졌다.
최 기자가 떠난 뒤 시원할 줄 알았으나, 오히려 가슴엔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얹어놓은 듯한 중압감이 가시질 않았다.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지만, 굳이 수소문하지는 않았다. 거의 잊혀져 갈 무렵 야당 성향의 H신문 정치부 기자로 자리를 잡았다는 풍문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급여가 절반밖에 안 되는 곳으로 서슴없이 옮겨간 그 용기가 내심 부러웠다. 물론, 다시 마주치고 싶지는 않았다.
상념에 잠겨 있던 충현을 깨운 건 옆자리에서 누군가 전화기에 대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였다. 그는 다시 손에 든 H신문을 내려다보았다. 신문의 ‘흙에 사는 사람’의 제하에는 백민식 교수 인터뷰를 한 면 전체에 할애하고 있었다. 지면 사정이 넉넉지 않은 신문사로서는 이례적인 파격이었다. 지면 중앙에는 지게를 진 채 웃고 있는 백 교수의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고, 그가 농장에서 일구고 있다는 ‘자연 학습장’ 이야기까지 상세히 게재되어 있었다.
백민식. 그는 충현의 국문과 동기였다. 군부 독재를 증오하며 젊음을 비상금처럼 아끼고 싶었으나, 현실에 야금야금 좀 먹히던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였다. 재학 중에도 충현은 어머니의 매사에 앞장서지 말라는 말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그런지 결코 앞장서지도 적극적이지도 못했다. 동기들이 절반 이상 스크럼을 짜고 데모 대열로 뛰어들 때쯤에야, 그는 뒤를 힐끔거리며 마지못해 합세하곤 했다. 백민식은 항상 앞장서 나아갔다. 그는 결국 연행되었고 퇴학이 되고 실형을 살고 나와 몇 년 후 세상이 달라지자 복학이 되었다. 졸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루가스 자욱한 거리에서 연행되어 가 곤욕 치른 백민식의 모습이 잔상으로 떠올랐다.
충현은 졸업과 동시 재벌 언론사인 P일보에 입사했고. 뒤늦게 복학한 백민식은 재학 중 시인으로 등단해 학교에 남았다. 충현은 기사의 다음 대목을 읽어 내려갔다.
‘그들은 언제까지 그 암울했던 시절, 돌멩이 하나 던지지 못했던 자신들의 나약함을 위장하고 합리화할 것인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민주화의 주역이었다고 과장된 무용담으로 일관하는 그들은 측은할 뿐이다. 그들의 동료인 백민식 교수야말로 그 서슬 퍼런 시대를 온몸으로 돌파해 온 산증인이다. 정작 백 교수는 그 어둡고 살벌한 시대를 온갖 고통을 감내하고 묵묵히 헤쳐 나왔다….'
“망할 자식.”
욕설이 신음처럼 터져 나왔다. 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거리로 나선 자들만 투사고, 나머지는 사이비였단 말인가. 오늘따라 억누를 수 없는 분노가 뜨겁게 가슴속에서 들끓었다. 기사는 시종일관 기성세대를 향한 매도로 가득했다. 직접 멱살이라도 잡고 싸워야만 민주 투사고, 나머지는 죄다 군사정부의 부역자였단 말인가? 최강일의 기사는 시종일관 기성세대를 파렴치한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여전히 촌지에 길들여진 타성을 벗지 못한 채 한심한 작태를 반복하고 있다. 보도 자료를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베껴 쓰는 자들을 과연 저널리스트라 부를 수 있을까? 민주정부가 들어선 지금, 그들이 단 한 줄이라도 과거의 침묵에 대해 사죄했더라면 나는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비극은 권력 앞에 곡학아세했던 자들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한 데서 기인했다고 본다. 양심이 마비된 후안무치한 사회. 지식층이 이 모양인 한, 우리 사회의 민도는 천민 근성을 벗어날 길이 없으리라.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최강일은 충현을 철저히 비웃고 있었다. 권력과 자본에 기생해 연명하는 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화살을 쏘아댔다. 그것은 기획 기사라기보다 모순된 사회와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을 향한 선전포고였다. 예리한 메스로 치부에 상처를 낸 뒤 매운 재를 쉬지 않고 뿌려대는 격이었다.

 

충현은 내일 데스크에 넘기려던 원고를 다시 살폈다. 이 기사가 나가면 녀석은 또 한마디 던질 게 뻔했다. 가끔 충현의 기사가 나갈 때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와 빈정거렸다.
“아이고, 박 선배님. 기사 자알 읽었습니다. 촌지 받으신 걸로 술이나 한잔 사 주시죠?”
그는 남의 오장을 저돌적으로 긁어대는 못된 습성이 있었다.
“이봐, 최 기자. 자네 뭔가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충현은 울화가 치밀었으나 참고 참았다.
“아뇨. 제가 선배님한테 무슨 오해가 있겠습니까. 오해가 있다면 세상에 대한 오해가 좀 깊을 뿐이죠.”
충현은 부서져라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애먼 전화기에 분풀이를 하곤 했다. 후배와 진흙탕 싸움을 할 수도,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정면으로 치받고 들어온다면 변명이라도 해보련만, 최강일은 늘 교묘하게 급소를 치고 빠졌다. 취재 현장에서 마주칠 때마다 녀석은 끈질기게 엉겨 붙으려 했고, 충현은 가능하면 그를 피했다. 예리한 칼날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녀석의 독설을 감내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여러 기자와 합석했을 때, 작정하고 따져 물으려 했으나 최강일은 여우처럼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헤어지는 길에 최강일은 특유의 묘한 미소를 띠며 툭 던졌다.
“선배님이 안타까워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냥 저희 쪽으로 옮기시는 게 어때요?”
왜 생각이 없었겠는가. 하지만 옮길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우선 처우가 너무 차이가 났다. 그뿐 아니라 촌지를 일절 사절하는 곳이었다. 이제 와 직장을 옮기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컸지만, 무엇보다 충현은 이미 촌지의 단맛에 중독되어 있었다. 돈 봉투가 아닌 지갑을 통째 꺼내 건네는 노회한 정치인의 손길이 결코 싫지만은 않았다. 특별 취재라도 나가면 봉투의 두께부터 가늠해보는 자신의 천민근성이 끔찍하면서도 떨쳐내지 못했다.
노골적인 여당지보다 더 교묘하게 우파의 입맛에 맞춘 기사를 써 내려가며 보낸 십수 년. 이제 와서 서슬 퍼런 야당 성향의 기사를 쓸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기자와 거지는 사흘만 맛들이면 그만두지 못한다’는 외국의 속담처럼, 이 짓을 천직이라 믿으며 버텨왔지만, 이제는 촌지도, 특종도 지긋지긋했다. 너무 지쳐 기진해 있었다. 모든 걸 뒤로하고 이름 모를 시골에 들어가 아무 생각 없는 촌부로 늙어가고 싶다는 갈망이 불쑥불쑥 목덜미를 낚아챘다. 하회 양반탈처럼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남은 생만큼은 평온하게 흘려보내고 싶었다.

 

이럴 때면 시골에 계셨던 어머니 생각에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충현아, 너는 커서도 늘 네 분수에 맞게 살아야 한다. 매사에 앞장설 생각은 말고.”
그것은 어머니의 좌우명이자 평생의 당부였다. 아버지는 병명조차 모른 채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듯 그 말을 충현의 귀에 매일같이 쏟아부었다. 그 주술 같은 말이 자신의 행동반경을 주박으로 옥죄어 왔음을 충현은 어른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렇게 움츠러들며 자란 충현은 P일보 선배의 귀띔이 없었다면 입사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했을 것이다. P일보 필기시험 합격 후, 면접을 앞두고 막막한 마음에 선배에게 조언을 부탁했었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선배는 망설이지도 않고 즉시 한마디 건넸다.
“야, 너 면접관이 데모했냐고 물으면 무조건 앞장섰다고 해. 알았지.”
선배는 다짐까지 했다. 실제 면접장에 들어서자 면접관의 첫 질문은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대뜸 데모 경험을 물었다. 충현은 선배의 조언대로 데모대에 앞장섰노라고 당당하게 거짓을 고했다. 만약 그 조언이 없었다면, 그는 아마 성실히 공부만 했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그랬으면 보나 마나 고배를 마셨을 터였다. 합격 후의 삶은 전쟁이었다. 기자라는 직업은 입사 전 동경했던 모습과는 판판이 달랐다. 소위 ‘사스마와리’ 시절을 어떻게 버텼는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사생활을 저당 잡힌 채 몇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퇴근길이면 입사 동기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옥 뒷골목의 허름한 싸구려 선술집으로 향했다.
“어이, 술이나 한잔 하지. 에이, 더럽고 치사한 세상….”
술집에 앉으면 늘 곤죽이 되도록 마셨다. 가슴에 맺힌 울분을 토사물처럼 쏟아내고 나서야 잠시나마 자신을 잊을 수 있었다. 사주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회사를 떠난 동료들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남겨진 이들을 재벌의 하수인 취급하는 그들의 시선은 견디기 힘든 모멸감으로 다가왔다.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느껴지는 섬뜩한 눈빛과 냉소적인 웃음은 인내의 한계를 시험케 했다. 초기에는 마주치면 별로 친하지 않았던 이에게도 억지로 말을 붙여 보려 했다. 그러나 번번이 돌아오는 사갈시하는 시선 앞에 더 이상 미소를 지어 보일 수만도 없었다. 이제는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도 건너편에 옛 동료가 보이면 슬그머니 발길을 돌려 버렸다.
충현은 그때 떠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우유부단한 성격을 끊어낼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동료들과 발을 맞추려 할 때면, 가장 먼저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음은 아내와 눈이 새까만 남매의 얼굴이 그의 발목을 무겁게 짓눌렀다.

 

충현은 불현듯 백민식 교수가 보고 싶어졌다. 망설임 끝에 시골 농장으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아마 휴대폰을 가지고 농장에 나가 있는 모양이었다.
“백 교수, 나야. 충현이.”
백민식은 너무 오랜만이라 의아해하는 듯했다.
“아니, 박 차장! 어쩐 일인가. 자네 잘 지낸다는 소식은 건너 건너 듣고 있었네. 여전히 바쁘게 살고 있지?”
반가움이 섞인 목소리에 충현은 도리어 미안해졌다.
“정말 미안하네, 먼저 소식도 못 전하고. 자네가 지방대학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모임에 발길을 끊으니 나도 모르게 격조해졌나 봐. 오늘 H신문에 최 기자가 쓴 특집 기사, 아주 잘 봤네.”
그동안의 소원했음을 진지하게 사과했다.
“나 역시 할 말이 없네. 그런데 특집 기사라니, 난 아직 못 봤는데….”
시골이라 아직 신문이 도착했을 리가 없었다.
“오늘 생각난 김에 자네 얼굴이라도 좀 보고 싶은데, 어때? 집에 있을 거지?”
충현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 차라도 한잔하고 싶어졌다.
“이 사람아, 요즘은 한창 바쁠 때라네. 좀 한가해지면 그때 내려오지 그러나?”
여전히 친절한 말투였으나 완곡한 거절이었다. 백 교수는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지방 국립대로 자리를 옮긴 후부터 좀처럼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이런저런 모임들이 있었는데, 그는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다.
충현은 지끈거리는 편두통을 느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이었지만, 방금 읽은 최 기자의 기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충현은 조기 퇴근하고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곧장 집으로 들어갈 기분이 아니었다.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리며 머릿속을 비워내고 싶었다. 시내의 정체를 간신히 벗어나자 차머리는 무의식적으로 서해안고속도로로 향했다. 당초 아산만방조제에서 바닷바람이나 쐬고 돌아올 생각이었으나, 어스름이 깔릴 무렵 충현이 도착한 곳은 그가 살고 있는 곳이었다. 짧은 연륙교를 지나면 곧바로 백 교수 농장이 있는 섬이었다.
차창을 내리자 맑고 상큼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아릿한 풀 향기가 갯비린내에 섞여 코끝을 스쳤다. 포구 쪽의 모감주나무 군락지를 뒤로 하고, 소나무 향이 청정한 숲길을 따라 백 교수의 농장으로 들어섰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마자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실로 얼마 만에 들어보는 생생한 자연의 소리인가!
농장 마당에는 백 교수 대신 목부로 보이는 백발노인이 마당을 쓸고 있었다.
“혹시, 최 기자님이신가요?”
노인은 충현을 최 기자로 오인한 모양이었다.
“아닙니다. 최 기자가 오기로 했나요?”
노인은 대답 대신 다시 물었다.
“그럼 우리 백 교수님이랑 약속은 하고 오신 게요?”
그는 청력이 좋지 않은지 충현이 묻는 말에는 답을 하지 않았다.
“전화는 드렸습니다만, 확답은 못 들었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백 교수의 행방을 알려 주었다.
“조금 전 이장님을 만나러 가셨으니 한참 있어야 오실 거요.”
좀 퉁명스럽게 말했으나, 방 안으로 들라는 친절을 베풀었다. 충현은 노인의 권유를 사양하고 마당 구석에 놓인 평상에 걸터앉았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에야 백 교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박 차장….”
그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충현의 표정을 멀거니 살폈다. 내려오지 말라는데 왜 굳이 왔느냐고 묻고 싶은 눈치였다.
“머리가 좀 아파서 잠시 바람 쐬러 나왔다가, 나온 김에 자네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서….”
충현이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은 참으로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최 기자 내려온다던가?”
충현은 묻고 싶지 않았으나 궁금증이 앞섰다.
“응, 원고 청탁한 게 있어서. 앞으론 팩스나 메일을 좀 써야겠어. 나도 시대에 발맞춰야 주변 사람들 고생시키지 않을 것 같아.”
백 교수는 여전히 원고지에 펜을 애용하는 고집스러운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깊도록 두 사람의 대화는 이어졌다.
“이제 나도 물러날 때가 된 것 같아.”
충현이 무겁게 입을 뗐다.
“어쩌다 직장을 구하고, 본의 아니게 먹고사는 일에 급급해서 내가 원하던 길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헤맨 기분이야. 이제라도 다 정리하고 나를 찾고 싶네. 그만두면 잠시라도 자네 농장에 내려와 지내도 되겠나?”
충현의 목소리는 약간 처연했으나, 백 교수 얼굴에는 부처님 같은 잔잔한 미소가 흘러갔다.
“안 될 거야 없지. 하지만 이 사람아, 모두가 시골로만 내려오면 세상은 어찌 돌아가겠나. 자네가 몸담아 온 곳이 있으니 정년까진 일단 자리를 지키게. 퇴직한 후 와도 늦지 않아. 우리에겐 각자 가야 할 길이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사는 게 사회 아니겠나. 은퇴하고 내려오게나. 그때는 내가 두 손 들어 환영함세. 여기 청소년들 가르쳐야 할 일도 생길 테니까.”
저녁식사를 곁들인 가양주 잔이 오고 가는 사이 이야기가 길어졌다. 밤이 이슥하도록 이야기는 끝날 줄 몰랐다. 밤이 너무 깊어지자 자기로 했다. 이윽고 전등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백 교수는 피곤했는지 금세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다. 그와 달리 충현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밤이 깊어갈수록 감각은 예민해졌다. 적막을 깨고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와 멀리서 가냘프게 들리는 소쩍새 소리도 잠을 밀어냈다. 이따금 고양이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신경을 건드렸다. 충현은 어떻게든 잠의 끄나풀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정신은 오히려 투명해질 정도로 맑아졌고 머릿속은 퀭하니 비어 가는 듯하면서 두통이 밀려왔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그는 간신히 잠의 늪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꿈속에서 하회탈이 떠올랐다. 이내 서재에 걸려 있는 온갖 탈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허공을 메웠다. 밖으로 나가니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촛불 하나씩 들고 움직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광장 한쪽의 대로를 향해 꾸역꾸역 밀려 나갔다. 충현 역시 그 대열에 합류했다. 아니, 스스로 걷는다기보다 거대한 흐름에 휩쓸려 떠밀려가고 있었다. 충현이 지나가던 사람의 소매를 붙잡고 물었다.
“여기가 대체 무슨 광장입니까?”
그 사람은 충현의 손을 뿌리치며 귀찮다는 듯 한마디 툭 던지고 지나갔다.
“여기는 패배의 광장입니다.”
한참을 더 걸어가다 다른 이에게 다시 물었다.
“여기가 정말 패배의 광장이 맞나요?”
그 사람은 충현을 의아하게 멀거니 쳐다봤다.
“아니오, 여기는 성공의 광장입니다.”
혼란에 빠진 충현이 다급히 물었다.
“그럼 혹시 백민식 교수를 보셨습니까?”
그는 대답 대신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하지만 인파의 물결 속에서 백 교수의 실루엣마저도 찾기란 불가능했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혹시, 박 선배님 아니십니까?”
최강일이었다. 충현이 고개를 돌리자, 험상궂은 탈을 쓴 그가 서 있었다. 방상시 탈이었다.
“언제 내려온 거야? 그리고 얼굴은 왜 그래?”
충현이 힐난하듯 물었지만, 최강일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저 가식을 벗겨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달려들어 그의 탈을 낚아챘다. 하지만 탈은 살갗에 완전히 붙어 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어요. 우린 죽는 날까지 이렇게 쓰고 갈 운명이에요. 박 선배님도 얼굴 좀 보세요.”
충현은 소름이 돋아 뒤로 물러났다. 문득 불길한 예감에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딱딱한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경악한 충현이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로 얼굴을 비추었다. 화면 속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옴중탈을 쓴 자신의 모습이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제 얼굴의 탈을 떼어내려 했으나, 그것은 이미 피부가 된 듯 떨어지지 않았다. 몸부림을 칠수록 절망감에 휩싸였고, 온몸은 비 오듯 쏟아지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헝클어진 생각의 타래는 끝을 찾지 못하고 꼬여만 갔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안개 속처럼 모호해지던 찰나, 머리맡에서 요란한 괘종시계 소리가 고요를 깼다.
새벽 일터로 나가기 위해 백 교수가 맞춰둔 괘종시계의 알람이었다. 백 교수는 소리 없이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새벽을 알리는 첫닭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충현은 이몽가몽하다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왔다. 자욱한 새벽안개 속으로 삼켜진 백 교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식사 때까지 기다려볼까 했으나, 충현은 곧장 서울로 올라가기로 마음을 굳혔다. 더 이상의 체류는 그저 민폐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던 충현의 눈에 낯익은 빨간색 사륜구동 지프차가 보였다. 최강일의 차였다. 그가 밤늦게 이곳에 도착했음을 증명하듯 차체에는 차가운 이슬이 맺혀 있었다.
충현은 서둘러 자신의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엔진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깨뜨렸다. 앞을 가로막은 짙은 안개 때문에 속도를 낼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안개의 바다를 헤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충현의 머릿속에는 꿈속에서 봤던 탈이 다시 떠올랐다.
탈. 사람들은 왜 탈을 써야만 하는가? 충현은 문득 인간이 왜 탈을 쓰게 되었는지에 대해 깊은 의문을 품곤 했었다. 문헌에는 사냥을 위해 시작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왜 황제부터 하층민까지 저마다의 탈이 필요했을까. 진심을 은폐하기 위한 방패인가, 혹은 타인에게 보이고 싶은 허상인가. 우리 탈판의 진수는 단연 봉산탈춤이었다. 말뚝이의 재담을 빌려 양반을 날카롭게 조롱하던 그 해학과 풍자. 기회가 된다면 탈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지만, 현실에 발 묶인 처지는 늘 한심한 고정관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제 퇴직을 하면 탈에 대한 연구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속에 다짐을 했다.
아참, 친구 백민식은 무슨 탈을 썼을까? 그는 유일하게 탈을 쓰지 않은 유일한 종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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