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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분홍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서연(인천)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육년 여름호 2026년 6월 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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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스텔로 짐을 옮긴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 문 안쪽에 붙여 두었던 메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생백, 랩…. 며칠째 계속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까먹었던 것들이었다. 한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왜 그렇게 많은지. 기현은 잠시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했지만 부서 회식에서 먹은 기름진 음식도 소화시킬 겸 그대로 발길을 돌려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로 향했다.
금요일 밤 열 시가 가까워진 마트는 한산했다. 바구니를 들고 주방용품 코너를 찾았다. 그곳에서 낯익은 여자가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금모래?”
기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기현아! 여기 웬일이야?”
“얼마 전에 이쪽으로 이사했어.”
“가족이랑?”
“아니, 혼자. 근처 오피스텔로.”
그가 자신의 오피스텔 방향을 가리켰다.
“난 여기 뒤쪽에 있는 아파트에 살아.”
모래가 이 동네에 살았던가?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모래가 공항 근처에 산다는 말을 들었던 것도 같았다. 모래의 카트에 바구니를 싣고 나란히 걸으며 근황을 묻고 각자 필요한 물건을 샀다. 연락할게.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질 때 모래가 말했다.
목요일쯤 모래로부터 주말에 저녁 함께하자는 메시지가 왔다. 그러자고 했더니 얼마 후 시간과 장소를 보냈다. 그들의 집에서 멀지 않은 해물 전문점이었다.

 

모래는 크고 북적북적한 식당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어서 와. 해물찜 미리 시켰어.”
모래가 머리칼을 쓸어 올려 하나로 묶으며 말했다.
“이런 거 너무 먹고 싶었는데, 혼자 먹기는 힘들단 말이지.”
곧 커다란 타원형 접시에 수북이 담긴 해물찜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겁고 매콤한 해물찜을 듬뿍 덜어서 모래는 잘도 먹었다. 기현도 덩달아 맛있게 먹었다.
“참, 나 이혼한 거 알고 있어?”
식사를 다 해갈 무렵 모래가 물었다.
“대충, 그랬다는 것만.”
한동네에 살았던 그들은 일대의 집을 모두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동안 각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게다가 회사에 입사한 후 얼마 되지 않아 기현은 지역 전문가로 해외에 나가 2년 정도 파견근무를 했다. 그 사이 모래가 결혼했고, 그 후에 자세한 이유나 시기는 모르지만 이혼했다는 것을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전해 들었다.
“너는? 나랑 편하게 밥친구 해도 돼?”
“당연하지.”
“잘 됐다. 또 동네 친구가 됐네.”
7월의 밤은 느리게 찾아와서 식사를 마친 후에도 밖이 훤했다. 모래는 여전히 커피나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 둘은 산책 삼아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건물이 한참 이어지는가 싶으면 어김없이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바로 옆이 도로인데도 나무가 한 겹 둘러싸인 길은 공기가 달랐다. 연한 어둠이 내린 길을 별말 없이 걷다가 기현이 고개를 돌려 모래를 보았다. 세상 편한 얼굴이었다. 풋. 웃음이 나왔다. 왜? 하는 물음 대신 모래가 입을 조금 내밀고 그를 마주 봤다. 과거의 비슷했던 순간과 이어 붙인 듯 그사이에 지나온 가마득한 시간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모래의 아파트가 바라보이는 횡단보도에서 둘은 헤어졌다.

 

모래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말 초겨울,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였다. 어머니 다음으로 많이 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다른 사람들은 처음에만 잠시 침통한 표정을 짓거나 눈시울을 붉혔을 뿐 거의 울지 않았다. 기현은 누구보다 슬펐고 막막한 데다 두렵기까지 했지만 장례를 치르는 동안 정작 눈물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이었다. 건장한 체격이었고 지병이 좀 있었으나 관리를 잘 해서 별 문제가 없었다. 사인은 뇌동맥류 파열이라고 했다. 몇 년째 고3 담임을 연임하고 있었다. 그날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다가 쓰러진 후 발견되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유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매사에 철저해서 든든했던 아버지였다.
기현과 함께 병원에 도착한 어머니는 의사의 말을 들으며 바닥에 주저앉았고, 그대로 실신했다. 링거를 맞고 깨어난 후에는 그를 부여잡고 울다가 쓰러지고, 다시 링거와 안정제를 투여하고의 연속이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장례식장 한쪽에서 계속 술을 마셨다. 대체로 비통한 분위기였지만 장례식장이 의례 그렇듯 해후로 인한 반가움도 자주 섞여 들었다. 이모를 제외한 친척들은 반나절 정도 머물다가 돌아갔다. 교사와 학생들은 대부분 단체로 와서 문상을 하고 갔다.
모래는 둘째 날, 문상객이 거의 끊긴 밤에 아버지 학교의 학생들과 다른 교복을 입고 혼자 나타났다. 그 애는 기현이 홀로 지키고 있던 빈소에 들어와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헌화를 했다. 그러고는 상주인 기현과 묵례를 한 후 밖으로 나가는 대신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울기 시작했다. 울음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한동안 서 있다가 티슈가 든 박스를 찾아 근처에 가져다 놓았다.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벽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얼마 후 ‘쁘앵쁘앵’ 하고 코 푸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눈을 뜨고 쳐다봤다. 빨개진 눈두덩을 살짝 치뜨고 부은 입을 쑥 내민 여자애가 뭐가 잘못됐냐는 듯한 얼굴로 기현을 마주 보았다. 와중에도 그 모습이 조금 웃긴다는 생각을 했다가 곧 사그라들었다.
새벽에 눈을 떴다.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곁에 작은 삼각형 모양의 비닐 포장에 담긴 m&m 초콜릿이 하나 놓여 있었다. 기현은 그 초콜릿을 한동안 지니고 다녔다.

 

모래를 다시 본 건 그로부터 몇 개월 후였다. 장례를 치르고 어머니는 살던 집을 내놓고 매일 이사 갈 집을 보러 다녔다. 딱히 어디로 가겠다는 방향성도 없이 날이면 날마다 집을 나가 버스정류장에서 제일 먼저 도착하는 버스를 탔고, 망연히 앉아 있다가 마음 내키는 곳에 내려 부동산을 찾는 식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늦은 저녁을 먹던 기현이 물었다.
“엄마. 우리, 마당에 분홍색 타일이 깔린 집에 산 적 있어요?”
“응? 분홍색 뭐?”
“분홍색 타일.”
“없는데, 왜?”
“요즘에 꿈을 꾸면 여기가 아니라 그 집이 우리 집이라서.”
“그럴 때 있지. …가만! 그런 집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다음 날 어머니는 들고 다니던 가방을 쏟아 그동안 받은 공인중개사 명함을 모두 꺼내놓고 일일이 전화를 했다. 마침내 마당에 분홍색 타일이 깔린 집을 찾아낸 어머니는 곧바로 달려가 둘러보았다. 소탈한 모습의 주인이 타준 뜨겁고 단 커피를 받아 들고 마루에 걸터앉자 귤빛 햇살이 어머니의 다리를 담요처럼 감싸주었단다.
모 대학 근처에 있던 그 집은 가운데 ‘ㅁ’자 형태의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이었다. 방이 다섯 개나 됐는데, 자취하는 남학생 두 명과 은행에 다니는 여자가 세입자로 살고 있었다. 온통 분홍색이었던 기현의 꿈과 달리 그 집의 중정은 분홍색과 흰색 타일이 격자 모양으로 깔려 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을 제외하고 줄곧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기현은 주택이 낯설었고 낯선 사람들과 함께 살게 된 것이 영 달갑지 않았다. 걸어서 10분이면 가던 학교도 버스를 타고 30분을 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한마디도 불평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예지몽을 꾼 게 바로 기현 자신이었으니까.
처음으로 아버지 없이 이사를 하면서 어머니는 무엇이든 결정하기 전에 그의 의견을 물었다. 나중에 기현은 자신의 어린 시절이 그 집으로 이사하면서 끝났다고, 아니 그보다 이전인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 끝났지만 자각한 건 그때였다고 생각했다.
이사한 날 저녁, 기현은 전구 살 곳을 찾아 시장 근처를 헤매다가 길 양쪽에 철물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중 한 곳이 ‘시인철물점’이었다. 범상치 않은 이름에 이끌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게 안은 밖에서 보던 것보다 길고 넓었다. 자잘한 물건이 벽뿐 아니라 천장까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서 형광등이 켜져 있는데도 실내는 어둑했다.
“계세요?”
기현은 두리번거리며 작은 소리로 주인을 불렀다. 별다른 인기척도 없이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모래였다. 한눈에 그때 그 여학생이라는 걸 알았지만 아는 척하기가 애매했다.
“전구를 사려고 하는데요.”
“어디에 쓰실 거예요?”
물건을 받고 계산하는 동안 모래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세 번째는 시장이었다. 어머니가 잔뜩 산 식료품과 과일을 들고 마지막으로 호떡과 붕어빵을 파는 곳으로 갔다. 비닐 포장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서던 어머니가 성당 교우라는 중년 여자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모래의 어머니였다. 기현은 어머니를 따라 인사했다. 한쪽에 서 있던 모래는 뚱한 얼굴로, 기현과 기현의 팔짱을 끼고 매달리다시피 꼭 붙어 서 있는 어머니를 번갈아 본 후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그곳으로 이사한 후 기현도 어머니를 따라 성당에 다녔다. 하지만 학생 미사에는 참석하지 않아서 모래를 본 적이 없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청년부에 들어가서야 그는 동갑이며 자기처럼 외둥이인 모래와 친구가 되었다.
그 후에 알게 된 ‘시인철물점’과 그녀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이랬다.
모래의 아버지는 군대에서 병영문학상을 받고 시인이 되었다. 그전까지 그는 시와 조금도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다. 뭔가 오밀조밀 고치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고, 책이라고는 친구들끼리 돌려봤던 만화책이나 무협지가 고작이었다. 어느 날 산꼭대기 관제기지에서 안개로 덮인 산과 그 속에 무수히 돋아나는 취나물을 접목해서 쓴 시가 채택되어 등단한 후 그는 마치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처럼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았다. 문단에 소속하거나(방법을 몰랐다), 다른 시인과 교류(역시 방법을 몰랐고, 누구도 그를 찾지 않았다)한 적은 없지만 철물점 계산대 위에는 늘 손때 묻은 시집이 한두 권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붙은 화이트보드엔 주문해야 할 물건 목록 옆에 그즈음에 지은 시가 적혀 있었다. 그가 홀로 즐겼던 시는 다른 시가 생겨나는 순간 지우면 그만이어서 남아 있는 건 없었다.
재야의 시인으로서 모래의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건 그녀의 이름이었다. 금씨인 그가 고심 끝에 딸의 이름을 모래라고 지었을 때, 그녀의 엄마는 당연히 반대했다. 여자애 이름이 한문도 없이 모래가 뭐냐고 하자, 그럼 한문을 쓰게 사(沙)라고 하겠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모래를 택했다고 어머니는 두고두고 얘기했다. 아버지에게선 반듯하고 넓은 어깨와 호리호리한 체형을, 어머니에게선 흰 피부와 콧잔등을 가로지르는 주근깨를 골고루 물려받은 모래는 자기 이름이 단단하고 호젓해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모든 모래가 아니라 아주 자세히 보아야 하는 단 하나의 모래로서.
모래와는 약속이 없이도 동네나 성당에서 자주 마주쳤다. 집에 있는 날, 기현은 저녁 무렵 종종 시인철물점에 놀러 가곤 했다. 그 시간에는 대개 저녁식사를 하러 집에 간 아버지 대신 모래가 철물점을 지키고 있었다. 식사를 마친 시인이 나오면 기현은 모래와 함께 아이스크림이나 붕어빵 따위를 사 들고 이야기를 하며 동네를 산책했다. 그러다 보니 성당 친구들과 함께 영화나 연극을 보러 가면 고민 없이 서로의 옆자리에 앉을 만큼 편한 사이가 됐다. 이따금 기현은 학교도 다른 모래가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왔던 일이 궁금했지만 왠지 말을 꺼내게 되진 않았다.
모래에게 이성적인 끌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내향적인 기현과 달리 모래는 자기 감정에 솔직한 편이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지만 때로는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했고 그 나이로서는 드물게 자기만의 취향이 있었다. 모래는 웃을 때 옆사람을 어깨로 가볍게 치는 버릇이 있었다. 기현에게만 그런 건 아니었는데도 그럴 때마다 그는 몸과 마음이 함께 흔들렸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농도가 짙어지기 전에 그들 각자의 간헐적인 연애로 자주 엇갈렸다.
키가 컸던 아버지와 이목구비가 깔끔하고 또렷한 어머니를 골고루 닮은 기현은 주로 여자 쪽에서 다가와 연애가 시작됐다. 제법 오래간 연애도 있었다. 결혼에 이르지 못한 이유는 제각기 달랐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어머니 쪽으로 기우는 그의 태도가 간간이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시절의 어머니는 기현을 많이 의지했고, 자주 찾았다. 기현 또한 아버지가 할 수 있었다면 그에게 했을 부탁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나이와 가까워질수록 그는 노력하면 어머니의 인생을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오만은 아니었을까, 또는 마땅히 그렇게 부탁했을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 것조차 착각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럼으로써 결과적으론 서로의 삶이 다채로워지는 걸 방해하고 말이다.
처음 오피스텔 이야기를 꺼내고 분양받기를 권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분양 책임자가 성당에서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의 남편이었다. 현장에 여럿이 몰려가 구경을 하고 식사를 대접받은 후 상담 예약까지 하고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믿을 만한 사람이 특별히 좋은 기회를 준 것이니 한 번만 가보라고 싫다는 그의 등을 떠밀었다. 살면서 그렇게 큰돈을 투자해 본 적 없었던 기현은 상담 도중 즉흥적으로 그 빌딩에서 가장 큰 평수인 11평을 덜컥 계약했다. 그의 평소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얼떨떨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그는 오피스텔이 완공되면 나가 살 거라고 어머니에게 말했다. 그냥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때 어머니는 그렇게 대답했다. 기현의 농담에 어머니 역시 농담으로 받아친 말이겠거니 했지만 어딘가 맥이 풀리는 것 같았다.
건물이 완공되고 처음엔 월세로 세입자를 들였다. 이십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커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계약한 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집을 비웠다. 공항이 가깝고 그 사이 대기업이 줄줄이 들어서서 오피스텔은 곧바로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많았다. 기현은 결정을 미루고 오피스텔에 드나들었다. 어떤 생각이나 고민을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멍하니 있다가 가는 게 전부였다. 그러다 어느 날 집 베란다 창고에서 트렁크 두 개를 찾아 자기 방으로 들어가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저 주말에 오피스텔로 나가려고요.”
“거기? 세 줬잖아.”
“나갔어요.”
“괜찮을까?”
혼잣말처럼 어머니가 말했다.
“누구, 나? 엄마?”
기현이 물었다.
“당연히 너지. 결혼하고 나갔으면 했다만, 너 좋을 대로 해.”
이번엔 어머니가 반대하더라도 그는 뜻을 굽히지 않을 생각이었다. 마흔네 살이 돼서야 그런 올곧은 생각을 한 것이 무색하게 어머니의 태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기현은 주말 오전에 조금 쑥스러운 마음으로 집을 나섰고, 어머니는 가볍게 여행 보내듯 그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했다.

 

초반엔 주로 모래가 연락을 했다. 오래를 불러일으키지 않으려는 듯 메시지는 간결하고 건조했다. 이모티콘 하나 없이 시간과 장소만 달랑 적혀 있는 식이었다. 기현 역시 ‘ㅇㅇ’ ‘ㅇㅋ’ 같이 가볍게 답했지만 연락이 올 즈음엔 다른 때보다 자주 휴대전화를 열어 보았다. 그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먹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기현도 열심히 후보지를 검색해서 모래보다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식사 후에는 언제나 산책을 했다. 그러다가 편의점에서 둘 다 좋아하는 거북바를 사 먹거나 봉지 과자 하나를 뜯어 놓고 캔맥주를 마시기도 했다.
여름은 진한 색의 꽃을 연달아 피워냈고 무성한 나뭇잎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쯤 그들은 식사 후에 걷기를 포기했고 서로의 집을 드나들었으며 종내에는 더 넓은 모래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장마와 태풍이 연이어 올라올 무렵엔 아예 집에서 만나 배달 음식을 주문했다. 둘은 느긋하게 식사를 하며 자기들이 태어났던 해에 나온 <스타워즈>나 <매드 맥스> 시리즈, <13일의 금요일>(둘 다 호러를 싫어했지만 고전적이어서 볼 만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같은 영화를 찾아보았다.

 

9월이 다가오는 주말에 기현은 오랜만에 본가를 찾았다. 집에는 이모도 있었다. 이모는 손자를 돌보며 딸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기현이 오피스텔로 나간 후 어머니 집으로 짐을 옮기고 왔다 갔다 하며 지냈다.
보라색과 초록색으로 색만 다르고 디자인은 같은 인견 원피스를 입은 어머니와 이모는 몸집도 비슷하고 헤어스타일도 똑같아서 마치 쌍둥이 같았다. 둘은 기현이 사 온 수박을 네모나게 잘라 통에 넣고, 당장 먹을 것을 접시에 담아 거실로 가져왔다.
“엄마한테 할 말 없냐?”
어머니가 물었다.
“…없는데, 왜요?”
“너 들어오는데 뭐랄까…, 얼굴이 평소보다 더 생기 있고 다정해 보여서.”
“글쎄, 오랜만에 엄마랑 이모를 봐서 그런가 보죠.”
기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참, 기현아. 지난번에 준 상품권으로 우리 카디건 샀다.”
이모가 말하며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꺼내 온 카디건을 어머니와 이모가 입어 보였다. 둘 다 연한 분홍색 크로셰 니트 카디건이었다.
“왜 똑같은 걸 샀어요?”
기현이 물었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분홍색 사면서 니 이모는 미색 사랬더니, 똑같이 따라 샀지 뭐니.”
“아이고, 그게 무슨 미색이야. 연노랑이지. 그거 입으니까 얼굴도 더 노릿노릿해 보이고 영 별로던데 뭘. 그리고 언니만 분홍색 좋아해? 나도 좋아해.”
“엄마 분홍색 좋아해요? 나는 보라색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얘 좀 봐. 니 엄마 분홍색 좋아해. 옛날에 형부 가고 처음으로 혼자 이사 간 집 고른 것도 마당에 분홍색 타일이 깔린 집이었잖니. 보자마자 이 집이다, 싶더란다. 언니, 근데 그거 알아? 분홍이 한문이래. 영어론 핑크고. 우리말엔 없다네, 분홍이란 말이.”
이모의 말을 듣자 기현은 과거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명 그 집은 그가 꾼 꿈을 근거로 찾은 집이었다. 그 집에서 어머니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면 그의 탓인 것 같아 신경이 쓰였고,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것도 불평하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기현은 원래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색을 싫어했지만 그중에서도 분홍이라면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이모가 카디건을 곱게 접으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다음 가사는 모르는지 콧노래로 대신하자 나머지 부분을 어머니가 이어 불렀다.
어머니는 저녁으로 쫀득하게 삶은 보쌈 고기를 대패삼겹살만큼이나 얇게 썰어 내고 부추무침을 수북이 덜었다. 깻잎장아찌를 꺼내고 조밥을 공기에 소복이 담아 그의 앞에 놓았다. 이모가 냉장고에서 유리병을 가져와 열어 달라고 했다. 유리병 속에는 양파와 적양배추 초절임이 들어 있었다.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수박을 조금 더 먹은 다음 기현은 집을 나섰다. 그는 평소처럼 별생각 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빨간불이 보이면 속도를 줄이다 금을 밟기 전에 섰고, 파란불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유영하던 생각 중의 하나가 공기방울처럼 불쑥 솟아올랐다.
그는 오래도록 습관적으로 아버지가 살았던 시간을 참고서 뒤편에 있는 정답처럼 자주 들춰보며 자기의 답과 비교했었다. 꼭 그대로 따른 건 아니지만 대체로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르려고 노력했다. 덕분에 안온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헛헛한 느낌이 드는 걸 왜일까? 아무도 잡지 않았는데 잡혀 있는 것 같은 삶을 살았다면 그건 다 그의 탓인가?
기현은 이제야말로 아버지의 궤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궤적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즉에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의 성격상 여기에 이르기 위해 지난 시간을 그렇게 거쳐 와야 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에게도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세상은 언제나 그때는 옳았지만 지금은 틀리고, 지금 틀린 것도 더 지나고 나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삶이 바뀔 땐 어떤 바람이 분다. 자꾸만 돌아보느라 멈춰 서는 그에게 아주 미세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오래전 맡아본 적 있는 향기를 품고, 어서 가라고 훠이훠이 손짓하는 것처럼 그의 등 뒤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기현은 조용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모래를 만났다. 홀 가운데에 지름이 1미터가 넘을 것 같은 볼록렌즈 모양의 달 조명이 놓여 있었다. 파스타와 와인을 주문했다. 기현은 어머니 집에 갔던 이야기를 하며 모래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다 문득 기현이 물었다.
“이정우 수학선생님 알아?”
“이정우? 쓰읍, 게다가 수학선생님? 몰라.”
기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이정우 선생님이 네 아버지?”
모래가 물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모르겠는데. 특히 수학샘이라면 더더욱. 근데 왜?”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널 본 거 같아서.”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교복이 달랐기 때문에 아버지 학교에 다니다가 전학 간 학생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너무 진심으로 울어서 아버지를 짝사랑한 여학생은 아닐까 추측했단 것과 잠든 그의 곁에 작은 삼각형 m&m 초콜릿을 놓고 간 것도.
“고등학교 때고 언제고 난 전학한 적이 없어. 근데 신기하다. 나 그 무렵, 그런 m&m 초콜릿 진짜 좋아했거든. 물론 나만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무구한 얼굴로 기현을 마주 보며 모래가 말했다.
“정말?”
기현이 물었다.
“응.”
“그 여자애 꼭 너 같았지만 왠지 네 말, 다 믿어주고 싶다.”
“나랑 그렇게 닮았어? 혹시 도플갱어 아니었을까? 부모님이 잃어버리고 말 안 한 쌍둥이였을지도 모르고.”
“다른 차원에서 건너왔을 수도 있겠네.”
“아냐. 사실 나였는데 지금은 기억상실증이어서 생각이 안 나는 거야.”
“또는 뒤늦게 고백하기 쑥스럽거나.”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면?”
포크로 스파게티를 말아 올리며 모래가 물었다.
“상관없어. 내가 좋아하는 건 너, …라기보다 적극적으로 그때 그 애를 찾아 나서야지.”
기현의 농담에 모래가 프, 하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떠오른 건데. 우리 아빠 시 중에 비슷한 게 있었어. 이유 없이 슬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엔 발길 닿는 데로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장에 간다는. 한 번쯤 우산 없이 비를 맞아보겠다는 것처럼 언젠가 그렇게 해봐야지 했었는데….”
“그랬구나.”
기현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배어 나왔다.
“그러고 보니 나는 지금까지 일부러 비를 맞아 본 적도 없네.”
기현은 생각에 잠겼다. 그때 그 여학생은 모래와 모습뿐 아니라 하는 행동까지 모두 닮아 있었다. 모래가 아니라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은 정말 있었던 일일까? 그런 생각을 해서인지 한순간 어두운 조명 아래서 와인을 마시는 모래의 모습이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흐릿하게 일렁였다. 기현은 실체를 확인하듯 손을 뻗어 그녀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살짝 쓰다듬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플라타너스 가로수와 주황빛 가로등이 줄지어 선 길을 걸었다. 기현이 조금 앞서 가다가 뒤로 돌아 모래와 마주 본 채로 뒷걸음질하며 물었다.
“우리 결혼할래?”
“뜬금없이, 이렇게?”
“응. 다시 제대로 프러포즈할까?”
“아니, 방점이 프로포즈에 있었던 건 아니야. …그냥 동거부터 해보는 건 어때?”
모래가 선선하게 제안했다.

 

함께 살기 위해 준비할 건 많지 않았다. 오피스텔은 내놓은 날 바로 나갔다.
어느 저녁, 기현은 모래로부터 마트에서 재회한 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래는 그날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필요한 게 생각났고, 잠시 망설이다 좀 걸을 겸 마트로 갔단다.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라지만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같은 곳으로 향했던 건 기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기현이 자신도 그날 똑같은 경로를 통해, 심지어 필요한 품목까지 일치해서 마트에 갔다고 하자, 모래가 말했다.
“갖다 붙이지 마. 의미를 두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그랬는데 퇴색할 일이 생기면? 운명의 장난이라면 어쩔 건데?”
“어쩌긴 그 의미의 유효기간이 다 됐나 보다 생각하면 되지.”
기현이 대답했다.
“생각은 그런데,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아. 그렇더라도 뭐, 나는 어쨌든 해보는 쪽이니까.”
모래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창밖이 온통 핑크빛이었다. 기현은 베란다로 나가 밖을 내다보았다. 왼쪽 하늘이 진홍빛으로 물드는 중이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가끔 볼 수 있는 마젠타색 노을이었다. 기현은 창문을 열고 밖으로 손을 내밀어 확실히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분홍과 손을 잡았다. 어중간한 모든 순간과 화해하는 마음으로 어차피 임시적이고 불완전한 삶에서 유예는 할 만큼 한 것 같았다. 차분히 돌아보면 그 시간 역시 모두 나빴던 것만은 아니었다.
한 매미가 조심스럽게 째에에에 울었다. 곧이어 모든 매미가 따라 울었다. 무성한 여름이 아직은 얼마간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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